■들어가는 말
필자는 10월 29일 허리우드 극장에서 육사
동기들(20여명)과 탐라의 봄(제주 4.3사건)
을 관람하였다.
과거의 역사는 미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줌
으로 왜곡되지않은 역사의 진실을 아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 로마제국이 천년을 누릴 수 있었던것은
로마시민들이 시저를 살해한 부루터스의 모함
보다는 시저의 공을 사심없이 밝히는 안토니
우스의 진실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금번 탐라의 봄은 제작진들이 약 2년여간 제
주지역 현장을 삿삿이 뒤지어 준비하였으며
본 영화는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산 증인들에의
한 다큐멘트리식으로 진행되었다.
필자는 영화관람후 귀가하여 보다더 공정한 집필을 위해 추가로 4ᆞ3사건관련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 제주 4ᆞ3 사건
4ᆞ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
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그 날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무장대를 조직, 경찰서 기습을 감행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고, 이 일은 훗날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린다.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 제주 4.3사건이전 국내외 상황
⊙ 러시아 공산혁명 영향
제정 러시아는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붕
괴된후 소련은 코미테른(국제공산주의 기구)
을 구성하여 공산사회주의 사상을 국외로 확
산시키었다.
소련 사회주의 사상은 한반도에도 확산되어
남한내 군과 경찰에는 상당수는 공산주의
프락치들이 잠입하였다.
※ 참고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0월 여
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결국 국가보안법을 제
정하여 33만여 남로당을 소탕하였으며 군내
에 잠입된 5,000여명 남로당도 색출하였다.
⊙ 소련의 대일전 참전선포와 한반도 공산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폭으로 일본이 1945년 8월 6일 항복하자 소련은 동월 8월 8일 대일전 참전을 선포한후 대일전 참전대가로 한반도 38선 이북을 차지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에 진주한후 북한지역 공산
화와 병행하여 장차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위
해 남한내 공산세력인 남로당을 선동하며 각
종 지령을 내렸다.
남한은 좌우 심각한 이념갈등으로 인해 극심
한 혼란이 야기되었고, 드디어 1946년 10월
대구폭동을 시발로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
였다.
이에 미군정은 각종 폭동을 강력진압하자 남
로당 세력들은 상당한 타격을 입어 거의 궤멸
된 상태였다.
■ 제주 4. 3사건 조명
⊙ 제주지역은 남로당 아지트
당시 제주지역은 경찰서와 지서를 제외한 대
부분 지역은 남로당 세력들이 장악하였다.
그렇다고 제주도민 전체를 남로당원으로 보
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제주지역이 남로당 아지트가 될 수 있
었던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주지역은 외딴섬으로 미군정의 통제
가 약한곳이며 게다가 육지에서 미군정에의
해 남로당 세력이 궤멸되자 잔여 남로당은 제
주도로 도피하였다.
둘째, 당시 제주도 부유층과 노동자들은 일본
오사카로 유학 및 돈벌이를 갔는데 오사카지
역은 소련 사회주의 사상(만인 평등과 민족해
방등)이 만연되어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오
염되었고, 이들이 귀국후에는 상당수가 제주 남로당에 합류하였다.
⊙ 제주 4. 3사건 발생
제주 4. 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기념식 행
사(북 국민학교에서 25,000~30,000여명)
후 시민들은 가두시위에 들어간다.
이때 200여명 군중은 가두시위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결국 사건이 터졌다.
당시 기마경찰은 시위를 막기위해 군중을 헤
치고 들어가다가 어린애가 경찰이 탄 말굽에
치어 넘어졌는데 기마경찰은 이를 모르고 지
나가 버린 것이다.
이에 성난 군중은 경찰관에게 돌팔매질하자
주변은 난장판으로 시작되자 주변 경찰서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것으로 알고 주
변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남로당 세력들은 이를 빌미로 거의 동시에 제
주시내 경찰서와 지서등을 습격하였다.
남로당 요원들의 주요 만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로당 요원들은 경찰과 군인 그리고 납
치자들중 남로당에 비협조자들은 무조건 살해
하였다.
둘째, 납치자들중 남로당에 협조적인 좌익이
우익을 살해케 함으로서 좌익들을 살인자로
누명을 씌워 우익으로 변신하지 못하게하여 끝까지 남로당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셋째, 남로당은 양민들을 죽창으로 처참하게 죽이거나, 남근을 절단하여 입에 물리고, 생사
람을 생매장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집 전체
를 방화하였다.
⊙ 제주 4.3 사건 진압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는데는 1948년 4월
3일 사건발생부터 무려 9년이 소요되었다.
ᆞ진압 어려움
군과 경찰이 제주 4. 3사건을 진압하는데 어
려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군과 경찰에는 남로당 푸락치들이
잠입함으로서 군과 경찰에 의한 남로당을 소
탕하려는 작전계획은 작전개시전 남로당에
누설되었다.
심지어 일부 군인과 경찰들은 남로당에 합류
하는 사태가 발생되기도 하였다.
둘째, 군과 경찰은 제주도민들과 혼재된 남로
당 핵심요원들을 색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셋째, 남로당 요원들은 남로당에 살해된 국군
의 군복을 갈아입고, 제주도민을 살해함으로
서 마치 국군이 양민을 대량학살하는 모습을 연출하여 국군을 학살자로 매도하였다.
넷째, 남로당들은 제주도민들에게 흑색선전을
하여 남로당과 함께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하여
남로당에 세뇌된 제주도민을 남로당으로부터
이탈시키는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다섯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주
지역 남로당은 다시 제주 지역을 공격하였고,
심지어 "인민군 환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ᆞ어렵게 진압된 남로당
1945년 해방후 1950년 6.25직전까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는데 군경 8824명 희생되
었다.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는데는 북한을 탈출하
여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된 서북청년회
의 역할이 매우 컸다.
※ 일부에서는 서북청년회의 무자비한 강경진
압이 4ᆞ3사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도 하지
만 서북청년회는 당시 군ᆞ경의 사태진압능력
의 취약점을 대폭보완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 4.3 사건에 대한 오해와 진실
1.제주 4.3사건은 민중봉기인가? 폭동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주 4.3사건은 폭동"으
로 규정하였다.
제주지역 평정을 위해 1945년 해방후 6.25
직전까지 5년간 무려 8824명의 군과 경찰이
희생되었는데도 이를 제주도민의 봉기로 볼 수 있겠는가?
제주 남로당 요원들은 군경에 의해 사살되기
직전에도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었다.
2. 제주도내 군ᆞ경찰은 제주도민을 학살했
는가?
제주도내 군ᆞ경찰은 남로당 요원과 제주도민
을 분리하는 소개령을 내렸지 초토화 작전을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바와같이 남로당 요원과 제주도민
간 분리가 어렵다보니 진압과정에서 부득이
상당수 양민(4ᆞ3 사게 진상조사 보고서 14
028명) 희생이 발생하였다.
전술한 바와같이 남로당의 각종만행은 숨긴체 군과 경찰(8824명 전사/사망)을 학살로 모는
것은 반공을 국시로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
고의 가치로하는 대한민국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3. 제주 4.3 특별법은 정당하게 집행되는가?
제주 4.3폭동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자는
정부에서 명예를 회복시켜주거나 필요한 경제
적 보상을 충분히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에서 아무런 진상규명도 없이 각
지역별로 보상받을 인원수를 할당하게되면
당시 남로당원이나 양민 학살자들까지도 유
공자 혜택을 받게되며 이는 국가정체성을 훼
손시킬 수 있다.
양민 학살자인 남로당원은 어디까지나 범죄자
며 결코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4. 박진경 대령은 양민학살 주범인가?
박진경 대령은 부임후 만 43일만에 군내 푸락
치인 당번병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박진경 대령은 43일 재임중 주로 남로당원과
제주 도민간 분리작전을 하였다.
그리고 남로당 토벌작전은 단 2회 했지만 작
전은 기밀누설로 실패하였다.
그런데도 박진경 대령을 양민학살 원흉으로
몰아부치고 박진경을 살해한 병사를 민족영
웅으로 둔갑한다면 이는 분명 역사왜곡이 될 수 있다.
■ 제언
지식인이라면 역사적 사실을 평가할때는 단지
양민 학살자 수만 집착하는 단견보다는 당시
시대적 상황등 전반적인 것을 동시 고려해야
한다.
제주 4.3사건은 사심없이 공정하게 진상규명
하여 남로당 진압과정에서 군ᆞ경의 공과 과 그리고 남로당 만행등을 삿삿이 밝혀야 한다.
제주 4.3특별법은 공정히 집행되어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보상받아
야 할 것이다.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부원장. 김 명수 박사
2022년 10월 29일
PS : 본 글은 필자가 탐라의 봄을 관람한 개인
적 소감인바 각자의 소감은 당연히 다를 수 있
다. 탐라의 봄은 12월까지 상영한다니 많은
관람을 하여 필자의 잘못된 소감에 대해서는
한수 귀띰해 주길 바란다.
첫댓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제주도 4.3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4.3시건의 진상을 과거 우리가 배웠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소상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남로당 빨치산, 빨갱이들의 준동이 도사리고 있었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경찰의 발포로 사태가 전개되면서 적잖은 제주도민이 희생된 것도 사실이지요. 김대중대통령도 4.3사건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지요. 한편 문민정부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민의 희생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공론화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던 듯하구요. 하지만 노무현정부 때에 그런 점이 부각되고 그 희생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치가 공식화되었고, 이후 박근혜정부 때는 이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국가기념일 지정까지도 이루어졌지요. 하지만 문제는 역시 문재인, 그가 촛불대통령이 된 이후 4.3사건이 마치 국가가 고의적으로 행한 만행인 듯한 시각으로 이념 갈등의 한과 고통을 다시금 소환해 내서 이를 부채질하면서 '제주의 봄'이라는 말로 그 한을 부풀리고 제주 도민을 선동하는 듯한 작태를 벌렸지요.
문재인의 제주의 봄과도 같은 어감과 느낌의《탐라의 봄》이란 타이틀의 영화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군요. 형편상 엇그제 단체관람에 참여치 못했는데 한번 꼭 봐야겠네요~
능화의 4.3분석을 읽었습니다. 제주에서 지내 보니 4.3은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많이 다릅디다. 당시는 남로당의 준동을 막은 것으로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후 끊임없이 무고한 양민 학살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인데ㅡㅡㅡ 제주 일반 사람들은 4.3을 말하지 않습디다. 왜? 그간 맺어진 관계가 모두 흐트러져야 하거든요. 중국이 문화혁명을 말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명치료중이라 다른분들 글에 카멘 트는 당분간 못해서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