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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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 복된 휴식의 항구에 안전하게 닻을 내릴 때까지
멈추지 말고 서둘러 나아 갈 수 있도록 은총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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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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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당신이 주신 손과 발로 땀을 흘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과 함께 하시어,
그들의 노고와 활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하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고마운 마음으로 보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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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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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루카 21, 20 –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21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22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23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24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25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 야곱의 우물 묵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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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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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희 교구 차는 99년산 대우 라노스였습니다. 워낙 오래되다보니 차에 들어가는 돈이 매우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또 고장 나고 하면서 유학사제들의 주머니를 터는 주범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큰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차를 고치다보니 이번에는 엔진이 문제라 엔진을 통째로 갈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엔진을 중고로 바꾼다고 해도 그런 차를 다시 사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차를 폐차 시키자, 그러지 말자.”라는 소리가 나올 때, 저는 그러지 말자라는 쪽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엔진만 바꾸면 그동안 워낙 많은 것들을 고쳐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장 날 것이 없을 것만 같았고, 정든 친구를 잃는다는 마음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을 뻔 하였던 라노스는 다시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동안은 잘 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차가 길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레커차에 실려 정비소에 가보니 이번에는 기름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수 백유로가 수리비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다시 갈림길에 섰습니다. 지금까지 이 차를 위해 투자한 돈이 너무 아깝기는 하지만 교구 사제의 주머니를 계속 털어버리게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폐차를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차를 고쳐오던 정비소 아저씨도 매우 마음아파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계속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이기에 그 차는 지금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정비소 아저씨보고 엔진과 전에 새로 갈았던 부속들은 빼서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직까지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멸망시키려고 창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참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파괴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종말에 관한 독서와 복음을 읽고 있으면, 하느님이 세상을 꼭 멸망시켜야 하시는 분처럼 나오지만, 실상은 세상을 멸망시키게 하는 당사자들은 인간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오래오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시지만, 더 이상 쏟아 붓는 은총이 헛되게 낭비될 때 마음 아픈 결정을 내려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과 하느님의 진노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하느님께서 참고 참으시다가 그 참아왔던 당신의 진노를 세상에 풀어버리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폐차를 시키더라도 좋은 부속들은 빼 내는 것처럼, 그 안에 남아있는 몇 명의 의인들까지 파괴시키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파괴하시기 이전에, 그 안에 의인 다섯만 있어도 그들 때문에라도 파괴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차를 폐차시키기 이전에 새로 갈아놓은 그 좋은 부속들이 아까워서라도 최대한 사용해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이상 운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폐차를 시키는 것이고, 그 때 세상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빌론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또 로마에게 멸망할 때도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는 하느님이 사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곧 종말을 앞당기는 길입니다. 성전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돌덩이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그 분이 계시지 않으면 곧 진노와 멸망이 임박한 것입니다.
한 자매님은 우울증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기기 위해 성지순례, 성령세미나 등도 열심히 다니시고 하루에도 기도를 몇 시간씩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냉담을 하게 되었고 다른 이상한 종교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듯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자신이 먼저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하느님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종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다시 돌아올 기회를 또 주십니다. 그러나 정 안되겠다 싶으면 유다처럼 손을 놓으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참 죽음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참 좋으셨다고 하셨을 때의 그 모습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노의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누구는 더 죽음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또 누구는 영원한 생명에 더 가까워지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죽음을 부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때, 그 때가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전 삼용 신부님의 사이 미니홈피 (http://www.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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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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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함
저는 깊은 명상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불교인들이
언제나 비이분법적이고 비독선적 태도를 더 많이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기독교 신비가들과 불교의 선사들은 사변적이거나
주지주의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비가와 불교의 선사가 하는 대화를 듣는다면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변적 마음은 비유추적인 정신에 밀려난 것입니다.
그들은 개념이나 표상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들만이 진리를 독점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종교적 체험도 어쩔 수 없이 인간적 체험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인간의 의식과 관계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종교적 실천이 ‘마음 다함’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수행이 깊어지면 마음 다하는 일이 더욱 지속적이 되고,
이로 인해 수행자는 더욱 깊이 있게 접하고 느끼고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해심이 사랑과 자비를 가능하게 하고, 사랑과 자비가 있는 곳에 이해심이
깊어집니다. 수행자는 ‘마음 다함’을 유지하고 자라도록 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마음 다함’이 실천되면, 저절로 변화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틱낫한 | 한민사 |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서
[오요한 신부님의 '가톨릭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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