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내린 눈으로 오랜만에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 문득 피라칸사스 붉은 열매가 보고 싶어진다. 시청 옆 중앙공원 주변에는 겨울 동안 피라칸사스의 붉은 열매가 꽃잎처럼 열린다. 흰 눈을 덮고 있는 붉은 열매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겨울 정취에 잘 어울린다.
피라칸사스 열매는 '알알이 영근 사랑'이라는 꽃말에 딱 어울리는 열매다. 그러고 보니 겨울마다 사랑의 모금 운동으로 주목 받는 '사랑의 열매'를 꼭 닮았다. 꽃이 피었던 자리에 열매를 맺듯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품었던 사랑도 저리 샛붉은 사랑으로 물들 수 있다면 좋겠다.
동글동글한 아기 볼처럼 귀여운 열매들이 자갈자갈 아침을 깨운다. 평소 같으면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일 터인데 새벽에 내린 눈 소식으로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고즈넉한 공원을 홀로 산책하니, 나만이 선택 받은 기쁨을 느낀다. 맨 먼저 밟아보는 하얀 눈길에 발자국을 남겨보는 짜릿함이라니 실로 오랜만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해 준 하늘의 선물, 아니 내가 나에게 주는 오늘의 선물이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공원을 독차지하여 흐린 하늘에서 살포시 내리는 눈송이들을 맞는다. 잿빛 직박구리가 포르르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돌감 하나 먹고 기운이 나는지, 삐삐삐 노래하며 짝을 찾아 날아간다. 이제야 아침때꺼리를 찾아 나선 비둘기는 눈 속에 주둥이를 파묻고 쪼아 댄다. 뭐라도 있는 걸까. 다가가니 쌀가루처럼 하얀 눈뿐이다. 어린 날 눈을 뭉쳐 먹으면 시원하게 목 줄기를 적시던 청량한 느낌이라도 아는 걸까. 비둘기의 아침 산책을 방해하지 않고 살며시 자리를 뜬다.
발아래 흰 눈이 뽀득뽀득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밟아보는 눈이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이 무뎌진 감성을 깨운다. 날마다 집과 사무실을 똑 같은 템포로 살아가는 날들이 지루했는데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이 나의 잠든 의식 속을 뚫고 들어온다. 의식 저편에서 가물가물 사라지려던 어린 날의 겨울 풍경이 다가온다.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했던 어린 시절, 그 학교에 입학해서 그 학교를 졸업한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는 무려 네 번의 전학을 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강원도 화천에서 인천으로 잠시 전학을 왔다가 다시 경기도 파평면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4학년 때 탄현면으로 이사를 했다. 이후에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전학을 하게 되서 실로 어린 날은 이별의 연속이었다. 익숙해질 만하면 낯선 곳으로 전학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정말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겨울을 좋아했던 나는 즐거웠던 겨울 풍경만은 사무치게 그려진다. 파평국민학교 다닐 때였다. 같은 학년인 여자 아이가 우리 동네에 다섯 명이 있었다. 동네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겨울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서 만든 썰매를 탔었다. 그 당시 오빠는 학생 스케이트 대회 같은 데 나가서 상을 탈 정도로 스케이트를 잘 탔다.
3학년 무렵 오빠가 타던 스케이트를 내가 물려받았다. 방 안에 담요를 깔고, 서는 것과 걷는 것을 오빠에게서 배우고 얼음판으로 나갔다. 운동 신경이 없는 편이었는데도 균형감은 있었는지 곧잘 스피드를 낼 수 있었다. 신발이 내게 컸지만 스케이트가 있는 친구들이 없었기에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이들은 내가 타는 걸 구경하다가 지친 것 같으면 한 번 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아이들에게 스케이트를 벗어주고 나면 나는 그 아이들의 썰매를 탔다.
겨울의 막바지였던 어느 일요일, 우리들은 스케이트와 썰매를 타기 위하여 얼음판으로 나갔다. 그런데 보기에도 그새 얼음이 녹고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스케이트를 못 타겠다는 아쉬움 속에 다들 실망에 빠졌다. 그러자 그중 누군가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자기네 논 가운데에 웅덩이가 있는데 아마도 거기는 아직 녹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우리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은 얼굴로 모두가 그 아이를 따라나섰다. 웅덩이는 산자락에 있어서인지 아직 물이 꽝꽝 얼어 있었다. 그래도 걱정이 된 우리는 제법 큰 돌을 던져보았다. 역시나 얼음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돌은 웅덩이의 한가운데까지 무사히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는 스케이트를 신고, 아이들은 썰매를 가지고 얼음판으로 내려갔다.
아, 그런데 갑자기 저 깊은 곳에서 부터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얼음판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스케이트를 신은 데다,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얼음판이 갈라지면서 물속으로 빠져버렸다.
물이 어는 속도에 따라 가장자리는 두꺼운 얼음 층이었지만, 한 가운데는 두께가 얇고 햇빛이 오래 들어서 해빙이 시작된 거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아이들에 의해 구출이 되어 친구네 집으로 갔다. 혼비백산이 되었던 순간도 잠시 화롯불에 둘러 앉아 친구가 구워준 고구마를 먹었던가. 옷을 말리면서 몇 군데 구멍이 난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던가. 이후로 한동안 스케이트는커녕 얼음판에 내려가지도 못했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아이들과 겨울 들판을 누비는 내 모습이 아른거린다. 군부대가 있었던 동네 교회에는 학생부 성가대를 군인아저씨가 지휘했다. 아저씨의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여자 아이들은 모두 군인아저씨를 좋아했던 것 같다. 주일마다 예배가 끝나면 간식을 먹으며 찬송을 배우는 게 즐거움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군인들이 타는 트럭을 타고 새벽 송을 돌았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고, 마지막에는 군부대 내무반에 들어가 찬송을 했다. 잠든 군인아저씨들의 머리맡에서 건강과 평화를 기도한 후, 찬송을 하고 나오면 건빵이나 초코파이를 한 아름 받았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그때 불렀던 찬송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입 안에서 저절로 나온다.
정월 대보름 풍경도 아름다웠다. 보름달이 뜨고 어른들이 달집을 태우면 커다란 불기둥이 하늘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옆에서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고, 밤새 불은 꺼지지 않았다. 마을 아이들이 모두 모여 노래자랑을 하고, 배가 고프면 동네 부엌을 순례하며 나물밥을 훔쳐 먹었다.
인터넷에서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를 검색하고, '길 찾기'를 가끔 해본다. 그러고 나면 슬픈 생각이 든다. 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찾아간들 무엇 하겠는가. 어린 날의 추억을 함께 나눌 친구들이 없는데. 어디에도 없는 내 어린 날의 사라진 흔적들이 아파 온다.
파평에서 탄현까지 30km도 안 되는 거리인데, 전학을 하고 한 번도 가지를 못했다. 단짝이었던 옥경이란 아이와는 몇 년간 편지가 오갔을 텐데... 기억에 없다. 어린 내게 그 거리가 얼마나 멀게 느껴졌을까. 지금처럼 교통이 좋았다면 겨울 방학에 버스를 타고 스케이트를 타러 갔을 텐데...
추운 고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겨울이 오면 어린 시절 친구가 보고 싶고, 어린 날 놀던 동네도 그립다.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친구들. 마치 동화 속에 갇혀 있는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나의 동심은 그 어딘가에 갇혀서 구출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살았던 집과 뛰어놀던 들판도 어렴풋하다. 마을 입구에 늘어선 느티나무와 커다란 바위들과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스레이트 지붕들, 마을 한가운데 자리했던 커다란 호수, 큰 길을 따라가면 한길 가에 점방이 있고, 술집들이 있고, 군부대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그 마을을 찾아간다고 해도 내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알아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상념에 빠진다. 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멀리서 달려왔으면 좋겠다. 내 손을 잡으며 보고 싶었다고 눈물을 글썽여줄 동무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추운 들판으로 날아가는 겨울 애상의 날개를 접을 수 있겠다. 먼 길을 걸어온 다리를 아랫목에 묻고 안온한 겨울의 품속으로 어린 나를 불러오겠다.
첫댓글 내 어린시절 함께했던 친구들도 떠오르고
동네 가운데 둠벙에서
썰매타던 추억도 고스란히 기억나네요
추위와 함께 찾아온 겨울추억
잘 감상했습니다
두 볼이 트고 손등도 트도록..
긴긴 겨울을 함께 했던 친구들, 보고싶네요.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학창시절의 친구가 가장 그리워지는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동창생 한 명도 만날 수 없는 제겐 강시인님의 그리움이 절실히 공감됩니다. 그래도 그런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안작가님도 전학을 많이 하셨나요?
유년시절과의 단절된 느낌을 아는 사람만이 공감하겠죠?
6.25 때 피난 온 사람처럼, 타향을 떠돕니다.
스케이트를 탈 줄 알면서도 얼음판에 내려가지 못했다는 심정 알겠어요.
바닷가가 고향이면서도 수영을 못하는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죠 ^^
그런 일들은 하나씩 있을테죠? 딱히 할 것도 없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개구쟁이 시절이었으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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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에서 군생활 하셨나요? 자유로 지나 금촌, 봉일천, 율곡...
尹씨들 史씨들 많이 살던 곳이었는데...
여러군데 이사를 다녔으면 딱히 어디가 고향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겠네요.
그래도 가장 추억이 많은 곳 그래서 그리움이 묻어나는 곳 거기가 고향?
어린시절의 기억이 몽땅 살아 있다니 대단합니다.
난 가물가물한데.
저야 학교만 다녔지, 울 엄마는 일년에 몇번씩 이삿짐을 쌌다가 풀었다...
주소이력만으로도 소설 한권 나올 거여요.ㅎㅎ
웅덩이에 빠져 큰일날 뻔했군요..
파평국민학교 그 동네에 가면 그때 웅덩이에서 구해준 순이, 숙이, 명자, 윤아 등 친구들이 아직 기다리고 있을 거 같은 예감~~
잘 읽었습니다.
언제쯤 가게 되겠지만 그친구들은 볼 수 없겠죠?
그리움으로만 남겨 둡니다
그 옛날 그 얼음 구덩에서 나온 것은 오늘 시인을 위한 하늘의 뜻이었군요.
ㅎㅎㅎ
하늘의 뜻을 아는 글을 써야할텐데
마음이 무겁네요
어린 시절 겨울 추억은 나이들어서도 생생한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고국과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 오클랜드에는 눈이 안와요 흑흑~
오클랜드 12월 여름엔 산타가 눈 썰매대신 수상 스키를 타고 온답니다.^^
어제는 벌써 세번째 눈이 내렸네요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눈이 오면 왠지 설레게 되죠ㅎ
뉴질랜드의 산타는
반바지 입고 수상스키타고
선물은 택배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