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항복 李恒福 1556~1618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개요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오성대감(鰲城大監).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鰲 =鼇 자라오
초년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고,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그뒤 정자․ 저작․박사․봉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 (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에 특진했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조정에서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으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했고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게 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 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조사 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군대를 파견했다. 1593년 세자(뒤의 광해군)가 남쪽에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볼 때 대사마(大司馬)로 세자를 보필했다. 다음해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5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군을 정비했다. 그뒤 문홍도 (文弘道)가 유성룡(柳成龍)이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탄핵하자 자신도 휴전에 동조했다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되어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했다. 1600년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 ․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고 살해하려 했다고 하며 성혼을 공격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했다.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북인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산시키고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했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겼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 해 관작이 환급되고 포천에 예장되었다. 저서로는 〈사례훈몽 四禮訓蒙〉․〈주소계의 奏疏啓議〉․〈노사영언 魯史零言〉 ․〈백사집〉․〈북천일록 北遷日錄〉 등이 있다. 포천 화산서원(花山書院) , 북청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雪後 설후 눈 내린 뒤
李恒福 이항복 1556~1618
雪後山扉晩不開 설후산비만부개
눈 내린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溪橋日午少人來 계교일오소인래
시내 다리 한낮에도 오가는 사람 적다
구爐伏火騰騰煖 구로복화등등난
화로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기운
茅栗如拳手自외 모률여권수자외
알 굵은 산 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今朝借乘남의襄 이항복
今朝借乘남의襄 오늘 아침 남의 수레를 빌려 타다
忽然落地꼭뒤傷 홀연히 떨어져서 뒷꼭지가 깨졌네.
長安大道에에哭 장안 큰길에서 에고에고 울자니
世人皆稱미치狂 세상 사람 모두다 미치광이라 하더라.
철령 높은 봉에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어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양야잠 養夜箴 箴바늘잠
昆侖旁薄 昆侖旁薄 곤륜과 방박은
乃幽之理 내유지리 바로 그윽한 이치이고
黃純于潛 황순우잠 지하에 순수하게 숨어 있으면
宜礥之爾 의흔지이 의당 나오기 어려울 뿐이로다 (어려울흔)
前念已息 전념이식 지난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後念未暢 후념미창 뒤의 생각은 열리지 못했기에
忘則廢墜 망칙폐추 잊어버리면 폐추되고
助乃震盪 조내진탕 조장하면 요동되나니
涵而澄之 함이징지 함양하여 그것을 맑혀야만
妙契昭融 묘계소융 묘계가 환히 밝아져서
日出事生 일출사생 해가 뜨고 일들이 생기매
滿座光風 만좌광풍 온 좌중에 화창한 바람 일리라
* 곤륜방백(昆侖旁薄) : 《태현경(太玄經)》가운데 “곤륜과 방박은 그윽하다.[昆侖旁薄幽]”한 데서 온 말인데, 곤륜은 혼륜(渾淪)과 같은 말로 천상(天象)을 의미하고, 방박은 팽백(彭魄)과 같은 말로 지형을 의미한다.
* 황순우잠의흔지이(黃純于潛宜礥之爾) : 《태현경(太玄經)》현(礥)의 “지하에 순수히 숨어 있다.[黃純于潛]”한 데서 온 말인데, 현(礥)은 곧 물(物)이 생(生)하기 어려움을 뜻하고, ‘지하에 순수히 숨어 있다’는 것은 바로, 동짓달에 양기(陽氣)가 지하에 숨어 있으면서 만물(萬物)의 근해(根?)를 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계조잠 誡朝箴
早鴉飛鳴 조아비명 아침에 까마귀가 울면서 날고
紙窓生明 지창생명 창문엔 밝은 빛이 생기니
羣動已囂 군동이효 모든 동물이 이미 들레며 (무리군,들렐효)
各役於情 각역어정 각각 마음의 부림을 받는 도다
人所孜孜 인소자자 사람들의 힘쓰는 일에서 (孜 힘쓸자)
舜蹠相形 순척상형 순과 도척이 서로 드러나고
義理吉凶 의리길흉 의리와 길흉이
隨動以生 수동이생 움직임에 따라 생기나니
審察危微 심찰위미 위태로움과 은미함을 살펴서
涖事以誠 리사이성 성심을 다하여 일을 보고 (다다를리)
夕以告天 석이고천 저녁마다 하늘에 고한다면
庶無逕庭 서무경정 크게 어긋남은 거의 없으리
위태로움과 은미함 :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얻는다.[人心惟危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인심유위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한 데서 온 말이다.
경석잠 警夕箴
夕日入牖 석일입유 석양빛이 들창에 들어오네(창유, 창)
流光易沈 유광역침 유광은 흘러가기 쉬우니
年數不足 연수부족 남은 생이 넉넉지 못하여
怵然驚心 출연경심 마음에 깜짝 놀라게 되네.
開卷對越 개권대월 책을 펴고 성현을 대하면
赫若有臨 혁약유림 혁연히 곁에 임한 듯 하거늘
敢娛以嬉 감오이희 감히 즐겁게 놀기나 하여
虛此分陰 허차분음 이 세월을 헛되이 보내서 되랴
披榛覓路 피진멱로 덤불 헤치고 길을 찾으려 하나 (榛 개암나무진)
日暮難尋 일모난심 날 저물어 찾기도 어려워라
膏車秣馬 고차말마 수레에 기름 치고 말 먹이어
疾驅駸駸 질구침침 빨리 몰아서 급히 달려야겠네.
야기(夜氣)로써 수양하고 아침이면 경계(警戒)를 하더라도 종일토록 사물을 접하고 나면, 저녁에 이르러서는 혼기(昏氣)가 침범하기 쉬운 것이니, 또 다시 마음을 먹고 스스로 경계하면 거의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조정으로부터 쫓겨난 이후로 일없이 한가하게 지내면서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여, 옛날에 배운 학업을 찾아보니 아득히 벌써 다 잊어버렸고, 때로 다시 생각하여 캐내려 하여도 이미 매우 쇠하고 나태해졌으므로, 늙음으로 인하여 끝내 폐해질까 두려워서, 이 세 잠(箴)을 벽에 써 붙여 놓고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여 스스로 경계하려는 바이다.
치욕잠 恥辱箴
士之所欲遠者恥辱 사지소욕원자치욕
선비가 멀리하고자 하는 것은 치욕이지만
眞知恥辱者鮮矣 진지치욕자선의
참으로 치욕을 아는 자는 아주 드물다
居下流爲大辱 거하류위대욕
하류에 처한 것이 가장 큰 욕이 되고
不若人爲深恥 부약인위심치
남만 같지 못함이 깊은 수치가 되나니
置身高遠者 치신고원자
고원한 데에 몸을 둔 사람은
恥辱無自以至 치욕무자이지
치욕이 이르러 올 데가 없느니라.
行遠升高 행원승고
먼 데를 가고 높은 데를 오르려면
必自卑近 필자비근
반드시 낮고 가까운 데서 시작하나니
則盍先慥慥於幽隱 칙합선조조어유은 (덮을합,착실할조)
어찌 먼저 은미한 데에 독실하지 않아서 되랴
懷安則易以頹墮 회안칙역이퇴타
안락하길 생각하면 쇠퇴해지기 쉽고
同俗則流於鄙吝 동속칙류어비린(鄙 다라울비, 인색하다, 吝 아낄린)
세속과 동화하면 비린한 데에 빠지도다.
存心養性則德日尊 존심양성칙덕일존
심성을 존양하면 덕이 날로 높아지고
人十己百則學日進 인십기백칙학일진
남보다 열 배 노력하면 학문이 날로 진취되리니
惟困知而勉行 유곤지이면행
오직 노력하여 알고 힘써 행해야만이
或庶幾於斯訓 혹서기어사훈
혹 이 교훈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서상잠 書床箴
進取之難 진취지난 진취하기는 어렵고
退臧之易 퇴장지역 퇴장하기는 쉬운 법인데
白首無歸 백수무귀 백발은 돌아갈 데가 없고
黃卷有味 황권유미 서책에는 맛이 있기에
俛焉孶孶 면언자자 힘써 부지런히 읽어서 (힘쓸면, 부지런할자)
人棄我取 인기아취 남이 버린 걸 나는 취하네
往者難追 왕자난추 지난 일은 추급하기 어렵고
來或可冀 내혹가기 오는 일은 혹 기대할 만하니 (冀바랄기)
庶幾夙夜 서기숙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힘써야만
以免大恥 이면대치 큰 수치를 면할 수 있고
悠爾而安 유이이안 마음이 한가하여 편안해지면
別有天地 별유천지 하나의 천지가 따로 있으리
운악산 雲岳山
운악산 깊은 계곡에 현등사 처음으로 지었네
노는 사람들 성을 말하지 않았는데 괴이한 새는 스스로 이름을 부르네
용솟음치는 흰기운 폭포수 장대하고 푸른산 빗긴 섬에 지축이 기운듯
은근히 호계(虎溪)에서 이별하니 석양 속에 저문 산 밝아오네
처첩동방 妻妾同房
不熱不寒二月天 불열불한이월천
덥지도 춥지도 않은 2월 좋은 때에
一妻一妾最堪憐 일처일첩최감련
마누라와 첩이 정답게 누워있다
鴛鴦枕上三頭竝 원앙침상삼두병
원앙베게에는 머리 셋이 나란히 있고
翡翠衾中六臂連 비취금중육비연
비단이불 속에는 팔이 여섯이 연달아 있다.
開口笑時渾似品 개구소시혼사품
입을 벌려 웃으면 세 입이 품(品)자 같고
側身臥處恰如川 측신와처흡여천
몸을 돌려 누우면 천(川)자와 흡사하다
纔然忽破東邊事 재연홀파동변사 (겨우재,실사변)
동쪽에서 하던일 끝나기가 무섭게
又被西邊打一擧 우피서변타일거
서쪽으로 옮겨가 또 한판 하여야 하네.
□ 가장 아름다운소리
조선 선조때 내로라 하는 대신들인 정철과 유성룡 그리고 이항복이 한 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흥취가 오르자 누군가 시 한 구절씩 지어보자고 제안을 했고 제목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정했다.
먼저 송강 정철이 시를 읊었다.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모두들 마음으로만 느끼는 소리를 잘 표현했다고 칭찬했다.
다음 서애 유성룡이 나섰다.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을 거르는 소리”
이에 모두들 손뼉을 치며 술 한잔씩을 죽 돌렸다.
이제 오성 이항복 차례가 되자 모두들 좋지만 자기 것만은 못할 것이라며 말했다.
“깊숙한 골방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모두들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며 크게 웃는 것이었다.
( 정철의 시 원문: 淸宵朗月 褸頭 雲聲 청소랑월 루두알운성(맑을 청淸 밤 소宵 밝을 랑朗 달 월月 누각 루褸 머리 두頭 막을 알 구름 운雲 소리 성聲
유성룡의 시 원문: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새벽 효曉 창문 창窓 잘 수睡 남을 여餘 작을 소小 술통 조槽 술 주酒 물방울 떨어질 적滴 소리 성聲)
이항복의 시 원문::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동방량소 가인해군성(깊을 동洞 방 방房 좋을 량良 밤 소宵 아름다울 가佳 사람 인人 벗을 해解 치마 군裙 소리 성聲))
□시름이 실이 되어
옛날에도 이랬다면 이몸어찌 견뎠으랴
시름이 실이 되어 굽이굽이 맺혔으니
풀고자 풀고자 하나 실마리를 몰라라!
□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여 역사적 지위를 올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것인가. 조선 중기 명종 11년인 1556년에 태어나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63세로 서거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백척간두에 서있던 나라를 구하고 학문과 문장 및 탁월한 경륜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위인이다. 평가해준 후학이나 후배들이 있었기에 실행했던 일에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 후세에 길이 큰 이름을 전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이른바 조선 4대 문장가 중의 한 분인 계곡 장유(張維․1587~1638)는 대제학에 우의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분으로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의 서문을 썼는데, 그 글에서 하늘이 백사공을 태어나게 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어려운 국난을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을 내어서 책임을 맡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고 그의 위대함을 설명해주었다. 장유는 또 다른 글 ‘오성부원군이공행장(鰲城府院君李公行狀)’이라는 장문의 이항복 일대기에서 “공은 나라를 유지케 하였고 은혜와 혜택은 백성들에게 미쳤으며 맑고 깨끗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높은 산악처럼 무거웠으니 국가의 주석(柱石)이자 사류(士流)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었다”라는 높은 찬사를 바쳤다.
4대 문장가의 또 다른 한 분으로 대제학에 영의정이라는 고관을 역임한 상촌 신흠(申欽․1566~1628)은 이항복과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인품과 능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유보다는 훨씬 선배이면서 이항복에게는 10년 후배인 그는 ‘오성부원군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는 글에서, 백사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낼 때에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위대한 위인의 죽음에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그의 높은 인품을 방증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백사 이항복의 일생
경주이씨로 참찬(參贊)이라는 고관에 오른 이몽량(李夢亮)과 전주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백사는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더구나 20세 전후하여 5세 연하의 당대의 위인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의 친교를 통해서 ‘오성과 한음’의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오성과 한음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같은 조정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승장구로 벼슬이 올랐지만, 두 사람의 넉넉한 아량과 국량 때문에 서로 간에 경쟁관계임을 잊고 세상을 뜨는 날까지 한치의 어긋남 없이 대제학에 이조판서와 영의정에 오르는 고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국가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 동심협력하여 지혜를 짜내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폭정을 극복해내는 경륜을 발휘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역사에 전해주고 있다.
백사는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잃는 불행을 당한다. 갑자기 고아가 된 백사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큰 뜻을 이루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백사는 태어날 때부터 일반적인 출생과는 달랐다고 한다. 태어나 며칠 동안을 젖도 빨지 않고 울지도 않았는데 점쟁이가 듣고는 반드시 정승이 될 사람이라고 미리 점을 쳤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지낸 고관인 권철(權轍)은 이항복의 이웃집 노인이었다. 앞으로 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임을 알아차린 권정승은 아들 권율(權慄)에게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백사는 19세에 권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권율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룩한 충장공 권율 장군이 아닌가. 백사와 권장군이 살던 곳은 당시 서울의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의 필운대(弼雲臺) 아래에 있던 곳이다. 지금은 종로구 필운동 88번지로 배화여고의 교정으로 포함된 지역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
골목대장이던 백사는 도원수이자 문무에 능한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더욱 공부에 힘쓰고 노력하여 선조 13년인 1580년에 25세로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로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28세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고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
# 율곡의 뛰어난 안목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그 잘남과 똑똑함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발신(發身)할 길이 없다. 백사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율곡은 백사보다 20세 위의 대선배로 그때 대제학의 자리에 있었다. 율곡은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7인의 당대 인물들을 추천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영광을 안게 하였으니 7인 모두가 뒷날 고관대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큰 역할을 하는 위인들이 되었다. 뒷날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沈喜壽),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 좌의정에 오른 정창연(鄭昌衍), 이항복, 이덕형, 병조참판에 오른 이정립(李廷立), 참찬(參贊)에 이른 오억령(吳億齡)이 그들이다. 이항복․이덕형․이정립은 동방급제로 이른바 경진(庚辰)년의 동방이어서 ‘경진3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요즘 말로는 ‘삼총사’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율곡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백사나 한음은 발탁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벼슬을 지내며 경륜을 쌓던 백사는 35세인 선조 23년에 마침내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 37세인 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도승지로서 임금을 모시고 임진강을 무사히 건넌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에 오르고 오성군의 군봉을 받았다. 바로 이어서 평양에 도착하자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봉을 쥐게 되었다. 40세에는 이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전란 동안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권(軍權)을 잡고 적군을 물리치는 최대의 지혜를 발휘하였고 다정한 친구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군대의 원병을 요구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병조판서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지원병이 들어오는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망한 나라가 중흥의 길이 열린 것은 바로 백사의 이런 경륜과 지혜에서 나왔다.
임진왜란 중에 이보다 더 어려운 난국은 중국의 정응태(丁應泰)라는 사람이 조선을 무고하여 조선이 명을 침범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여긴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조 31년 마침내 우의정이라는 정승에 오른 이항복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필마단기로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설득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내 끝내 명과 조선이 틈을 메우고 친한 이웃이 되어 왜군을 물리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의정에 오르고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낸 공로가 인정되어 호성일등공신이 되어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래서 백사 이항복은 ‘오성대감’이라는 명칭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다
나라를 중흥시킨 뛰어난 호성공신은 세월이 변하자 역적을 추천했다는 누명을 쓰고 낯설고 물선 먼 북청땅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파란만장의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적 역량은 우수했으나 내치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광해군은 이복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왕비를 폐비하는 큰 난리를 일으킨다. 이에 격분한 노대신 이항복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나섰다. 이항복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나오고, 끝내는 탈관삭직되어 망우리로 옮겨 은거했으나 유배명령을 받고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63세의 노정승이던 백사, 북청으로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리며 읊었던 시조는 지금의 우리 가슴도 슬프게 해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원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의롭고 바른 말 한다고 늙은 재상을 귀양보내던 그 악인들, 63세의 노인 백사는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피눈물이 솟아나는 시조를 읊었다. 그 해 2월6일 유배지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뛰어난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답답한 심정이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군산정욕수호걸 羣山定欲囚豪傑)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회망천봉쇄거정 回望千峯鎖去程)’라고 읊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막혔으면 그런 시를 지었으랴.
유배지에 도착한 후 3개월 째인 1618년 5월13일 새벽닭이 울어 동이 틀 무렵에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평생 동안 그의 은혜를 입었고, 금남군(錦南君)이자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던 유명한 장군 정충신(鄭忠信)이 백사를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하여 7월12일 도착했다. 8월4일 소식을 들은 남녀노소가 달려와 울음으로 장사를 지냈다. 일세의 영웅 백사 이항복은 그 때 이래 지금까지 포천에 고이 잠들고 계신다.
□백사(白沙) 이항복에 관한 이야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임진왜란 중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맡으며 피난 다니는 조정을 이끌고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자리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물러서거라."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궐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임금 다음으로 지체가 높은 영의정 대감의 행차인지라 앞서가는 하인의 외침만큼이나 위세가 당당했다. 백성들이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이날은 운이 나빴던지 조그만 사고가 생겼다. 얼굴에는 꽤 주름살이 잡혀 있으나 꼬장꼬장해 보이는 한 여인이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다가 미처 길을 피하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성미 급한 하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곧 한 하인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여인이 이고 있던 광주리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팔다 남은 것인 듯 참외 몇 개가 우르르 나뒹굴었다. 하인이 다시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런 무엄한, 어서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
대감은 끼어들기 싫어서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이윽고 어서 가자고 그냥 피해 갈 것을 조용히 지시했다. 집에 돌아온 대감은 하인들을 불러 모아 눈물이 쑥 빠지도록 야단을 쳤다.
"너희가 한 가지라도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은 곧 내 잘못이 된다. 내가 정승이니 백성 누구라도 억울함을 당하면 그 원망이 누구에게 돌아오겠느냐? 바로 내가 아니겠느냐?"
하인들을 집합시켜 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마빼기가 하얀 늙은 놈아!"
고개를 들어 보니 담 너머에서 아까의 그 여인이 악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대감은 서둘러 하인들을 해산시켰다. 구석에 틀어박혀 꼼짝 말라는 분부도 함께 내렸다.
여인의 악쓰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종놈들을 시켜서 여인네 머리에 인 광주리를 내려치는 법이 있다더냐? 어찌 힘없는 백성들의 참외 쪽을 깨뜨리느냐? 그러고도 네가 이 나라 정승이냐? 백성 살릴 궁리나 더 하지 않고 백성을 깔아뭉개고 위세를 부리는 것이 정승이냐?"
구석에 꼼짝 말고 틀어박혀 있으라는 엄명은 받았으나 하인들은 여차하면 뛰어나갈 자세로 발을 굴렀다. 마침 손이 하나 와 있다가 더는 그 소리를 듣고 있기가 민망했던지 조용히 항의를 했다.
"어찌 저런 패악을 내버려 두십니까?"
"내 잘못으로 저리 하는데 어찌 내가 나서서 그만두라고 할 수 있겠소."
여인의 악다구니는 지칠 줄 모르게 이어져서 그쳤나 싶으면 또 들려오고, 이제쯤 물러갔나 싶으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모양이군."
여인의 악다구니가 끝도 없이 이어지자 오히려 이항복이 포기하고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가 역시 복 하나는 타고 태어난 모양이지, 아직도 욕 얻어먹을 복이 남아 있으니, 당대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참으로 그는 도량이 넓은 재상이다."
그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법이 없었다. 마땅히 백성의 소리를 들어 살필 줄 아는 인물이었다.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시대에 언론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 직접 행동으로 보여 준 인물이었다.
(이야기 채근담, 손풍삼 엮음)
□퇴계와 이항복
조선 왕조 14대 임금인 선조 때의 일이다.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선조의 부름으로 다시 입궐을 하게 되었는데 퇴계를 맞이한 백관들은 입궐하기 전에 퇴계를
남문 밖의 한가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퇴계에게 성리학에 대한 온갖 현학적인 질문을 하였다.
그들이 좌정하고 있을 때, 어린 소년 하나가
성큼 들어와 퇴계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소생은 이항복이라 하옵니다.
듣자하니 선생께서는 독서를 많이 하여 모르시는 것이
없다고 하기에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말에 여자의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陽莖)은 '자지'라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는 이항복의 질문을 받자 얼굴빛을 고치고
자세를 바로 한 후, 찬찬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소문(小門)은 걸어다닐때 감추어진다고
해서 걸음 '보(步)' 감출 '장(藏)' 갈 '지(之)'
세 자로 보장지라 한 것인데 말하기 쉽도록
감출 장(藏)은 빼고 '보지'라 하는 것이고
남자의 양경은 앉아 있을 때에 감추어진다고
해서 앉을 '좌(座)' 감출 '장(藏)' 갈 '지(之)'
세 자로 좌장지라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말하기
쉽도록 감출 장을 빼고 좌지라 한 것인데 잘 못
전해져 발음이 변해 '자지'라 하는 것이다.
이항복이 다시 물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보지를 '씹'이라 하고, 남자의
자지를 '좆 또는 좇'이라고 하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퇴계가 다시 대답했다. '여자는
음기(陰氣)를 지녀 축축할 '습(濕)'자의 발음을
따라 습이라 한 것인데 우리말에는 되게 소리를
내는 말이 많아 '씁'자로 된소리가 되었고,
이것이 발음하기 편하게 변해 '씹'이 된 것이요,
남자는 양기를 지녀 마를 '조(燥)'자의 음으로
조라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된소리로 '좇(좆)'으로
변한 것이다.' '말씀을 듣고나니 이치를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항복은 이게 말하고
천연덕스럽게 나갔다. 이항복의 거동을 지켜보던
백관들은 어이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뉘집 자식인지는 모르나 어린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발랑 까져서 그런 싸가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필경 버린 자식일 거요.' 퇴계가
이 말을 듣고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나무랐다
' 당신들은 어찌 그 아이를 함부로 '싸가지 없다.
까졌다' 하시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이미 '자지'와 '보지'를이 자연의 이치요,
또 말과 글을 빌어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 말이요?
다만 음과 양이 서로 추잡하게 합하여 사람
마음이 천박해지는 것을 꺼리는 까닭에 그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말할 적에야 백 번을 부르기로서니
무엇을 꺼릴 게 있겠소. 그 소년이 나를 처음
보고 음양의 이치부터 물은 것을 보면,
그 소년이 장차 이 나라의 큰 인물이 되어
음양의 조화와 변화에 맞게 세상을 편안히
이끌어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되오,
' 다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다. .
'自知는 慢知고`, `輔知는 早知라`
글자 읽기가 쑥쓰러워도 오해하지 마시기를.......
김삿갓(김병연)은 과거시험에 할아버지를 욕하는 글을 써서
장원을 하였는데, 집에 와서 모친으로부터
시제에 나온 인물이 조부임을 알고 평생 하늘을 보지 않기로 하여 삿갓을 쓰고 방랑한 시인으로 평생을 떠돌면서
해학시도 많고 기행도 많지만....
그 중 하나
`自知는 慢知고`, `輔知는 早知라`
``자신이 혼자 알려며는 늦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면 빨리 알게 된다.`` 는
스승의 필요성을 알려 주는 시임
즉 혼자서 날 밤새고 고집부리지 말고.
남에게 물어 빨리 깨달으란 시임.
□ 척신의 손에서 삼대독자를 구해낸 이항복
*세상의 모든 참사가 척신(隻神)이 행하는 바이니라. 삼가 척을 짓지 말라. 만일 척을 지은 것이 있으면 낱낱이 풀고
화해를 구하라. (道典3:188:10~11)
*이제 모든 선령신들이 발동(發動)하여 그 선자선손(善子善孫)을 척신(隻神)의 손에서 건져 내어 새 운수의 길로 인
도하려고 분주히 서두르나니, 너희는 선령신의 음덕(蔭德)을 중히 여기라. (道典7:19:1~6)
생사를 오고가는 삼대독자
때는 선조 초년. 한양 사직동에 사는 김 진사의 집에는 80여세의 늙은 부인을 위시하여 60여세 가량의 부인과 40여세로 보이는 부인 등 삼대고부(三代姑婦)들이 사랑에 나와 그 집주인인 김 진사의 병상에 앉아 있다. 또 젊은 부인이 노부인들 이상으로 속을 태우며 남편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20세의 김 진사는 명문가의 후예이자 삼대독자로서 어른들로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랐을 뿐만 아니라, 용모가 수려하고 재능과 기예가 출중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김 진사가 며칠 전 우연히 급병에 걸렸다. 정성을 다한 간호와 명의들의 약이 아무런 효험이 없어, 그의 조부와 부친같이 일찍이 저승길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조부와 부친은 유복아일망정 일점의 혈육은 남겨 대를 이었으며 제사 또한 끊기지 않았는데, 김 진사는 결혼한지 육칠 년에, 그 부인이 한번의 태몽조차 없이, 조부와 부친의 뒤를 따르려 하고 있다.
결국 김 진사의 어머니 되는 중년 부인은 시조모와 시모의 눈치를 살피며 낮으나 비통한 음성으로 말을 꺼낸다.
“헛일이온줄 압니다마는 점쟁이라도 한번 불러들여 물어보시면 어떠하올는지요. 이 애가 죽으면 김씨 댁은 멸망하는 것이니 저의 간곡한 청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라도 하고 싶거든 네 마음대로 하여라. 저 애만 살아난다면 우리가 대신 죽어도 여한이 없을 터인데 그만한 청을 아니 듣겠느냐?”
이렇게 하여 평동에 사는 이름난 점쟁이 홍판수라는 장님을 청했다. 산통(算筒)을 흔들던 홍 장님은 한참 후 이를 거두고 무엇을 중얼거리면서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연다.
“이 댁 주인의 증조부 되시는 분이 형조당상의 벼슬을 할 때, 술에 만취하여 부질없는 노여움과 객기를 부리다가 서리(書吏)와 사령(司令)의 중장을 때려 원통히 죽인 일이 있습니다. 서리도 불쌍하게 죽었거니와 사령은 오늘날 이 댁 형편처럼 삼대독자의 몸으로 자식도 없이 젊은 몸으로 한 집안에 사대과부를 남겨놓고 술 주정에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그 원혼들이 명부에 호소하여 이 댁의 삼대독자를 잡아가도록 판결을 얻었으니,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 인력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리다.”
홍 장님은 매우 딱한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뜨려한다. 이때 제일 늙은 부인이 장님의 소매를 붙잡으며 애걸한다.
“부부일체이니 남편의 죄를 내가 넘겨받아 죽어서 원혼에게 사죄할 터이니, 그러면 우리 증손이 혹시 살길이 있을는지 다시 한번 점을 쳐 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모와 모친 그리고 진사의 부인까지 뜻을 같이 하며 매달린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을 꺼낸다.
“정성이 하도 딱하니 단 한가지의 좋은 방법을 가르쳐 드리리다. 그러면 주인양반은 혹시 살아날지 모르나, 원귀의 노염을 사서 내가 화를 당할 것이 명백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저의 명수(命數)로 생각하고 분수 모르는 적선을 하려 하니, 후일 댁에서 잘 되시는 때에 저의 후손이나 잘 붙들어 주시오.”
말을 마친 그는 한참동안 다시 점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마님들과 아씨의 정성은 비록 지극하시나, 아무리 몸을 희생하셔도 원귀를 없애기에는 너무나 무력하십니다. 여기에는 덕을 쌓고 어진 일을 많이 한 명문가의 자제로서, 그 기개와 복록이 한 시대의 영웅대인으로 장래 국가의 큰 동량이 될 재목으로서, 사람들이 존경하고 귀신도 보호할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주인양반의 생사를 위임하여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요 며칠을 무사히 넘긴다면 살길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장래에 주인양반도 큰 이름을 남기며 자손이 창성하고 부귀와 영화가 대를 끊기지 않을 것임을 소인이 보증합니다. 훈수하는 김에 좋은 인물까지 추천하오리다.”
원혼과의 하룻밤 싸움
홍판수가 추천한 인물은 사직동에 인접한 필운대에 사는 전(前) 판서 이몽량의 아들 이항복(李恒福)이라는 20세의 청년이었다. 이 판서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작고하고 이항복은 홀어머니 최씨의 자애와 엄격한 교훈 아래 호방 활달한 천품을 학문과 수양으로 도야하던 청년이다.
홍 장님은 이 판서 때부터 그 집에 출입해서 이항복의 인물 식견과 그의 앞날의 부귀공명이 혁혁할 것을 미리 통관했기 때문에 그의 복록을 빌어 김 진사의 화를 구하려고 했다.
김 진사의 증조모와 조모는 손자를 살리려는 일심으로 장님의 가르침대로 몸소 그 집을 찾아 이항복의 모친과 대면하고 전후사정을 말하고 나서 손자를 살려주기를 백 배 사정했다.
이항복은 본래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최씨 부인 역시 적선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라 어려울 줄 알았던 소청이 용하게 용납되어, 이항복은 그 날 저녁으로 김 진사의 집에 와서 죽어 가는 중병인을 껴안고 있게 되었다.
몇 시각이 지난 후, 돌연 창을 차는 음풍이 촛불을 명멸케 하더니 모골을 송연케 하는 귀기(鬼氣)가 바람과 함께 침입했다. 그러자 갑자기 김 진사가 몸부림을 치며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게거품을 뿜고서 헐떡이기 시작했다.
옳다! 아마 이제부터가 내 활동할 시기인가 보다. 하여튼 기다려 보자.’
이항복은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환자를 꼭 붙들고 눈을 크게 뜬 채 촛불 건너 검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어느 듯 칼을 든 시커먼 원귀가 나타나 김 진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김 진사는 몸부림을 치며 고통스러워했다. 이항복은 더욱 힘차게 환자를 끌어안고 몸으로 가려주었다. 무서운 형상을 하고 달려들던 원귀는 김 진사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이항복 앞에 와서는 발을 멈추고, 다시 물러서기를 십여 차례 했다. 드디어 원귀는 이항복을 향하여 큰 소리를 질렀다.
“이항복아, 부질없는 일을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속히 내게 내어다오. 만일 내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네게도 화가 미치리라.”
이항복은 이에 끄떡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나는 부탁을 받아 이 사람을 살리려고 하니, 나까지 죽이든 말든 내 목숨이 있는 한, 이 사람을 네게 내주지 못하겠으니 마음대로 하라!”
원귀는 험상을 드러내고 이번에는 칼을 항복에게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태연히 부동한 채 늠름하게 버텼다.
원귀가 감히 이항복에게는 손을 대지 못했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닭이 울었다. 원귀는 칼을 던지고 이항복 앞에 엎드려 애통히 말했다.
“저 사람은 소인에게 속세의 원한이 있는 자이옵니다. 오늘을 지내면 영구히 보복할 날이 없거늘 장차 대감이 되실 분께서 돌연히 출현하여 소인의 일을 저지하시니 어찌 원통치 않으리요! 제발, 저 사람을 내어 주옵소서.”
그러자 항복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너와는 하등의 은혜나 원한이 없는 동시에 이 사람과도 교분조차 없던 처지로다. 그러나 삼대요사(三代夭死)로 제사가 끊어지려는 이 집 내력과 주인 잃은 삼대 과부와 부인이 대신 속죄하려는 비참한 광경에 깊이 감동된 바 있어, 의(義)로써 이 사람의 보호를 승낙하고 그 책임을 인수했다. 그러니 내 목숨이 있는 한 이 사람의 신상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라. 그런데, 그대가 원한을 갚으려면 어찌 나를 죽이지 않느냐? 이제 와서는 너의 미운 대상이 이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될 터인데….”
원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르신이 이토록 소신의 일을 방해하시니 어찌하오리까. 소인이 아무리 원수 갚기에 급급할지라도 일국의 큰 주석이 될 분을 향해 칼날을 겨눌 수 없사오니 이제 소인은 물러가옵니다. 허나 어르신께서도 차후에는 극히 자중하셔서, 장래에 나라와 세상을 위해 몸을 아끼실 것이요, 경솔히 이런 일에 참견하지 마시기를 비옵니다.”
원귀는 하직을 고하고 방에서 나가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달려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오늘을 넘겼으니 다시는 원(寃)을 갚을 날이 없도다. 이것이 모두 평동 홍판수 놈의 부질없는 방해에서 생긴 일이니, 이놈을 대신 잡아다 분을 풀리라!”
이 때 김 진사는 전신이 굳어지고 사지가 얼음처럼 싸늘하게 되었으나, 오직 명문 근방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하여 김 진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평동 홍판수는 그만 희생되고 말았다.
이후 선조 13년에 이항복과 김 진사는 알성별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다. 이항복․이덕형․김여물․오덕령․한준겸 등이 선발되었고, 당시 대재학이며 이조판서를 겸하던 율곡 이이 선생은 이들을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라며 임금께 적극 천거한다.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과 더불어 급제자의 명단에 오른 김여물이란 사람이 바로 김 진사였다.
□백사 이항복 해학
선조 경자년에 백사 이항복이 호남지방을 체찰(體察)하였는데, 선조께서 그에게 반역의 정상(情狀)을 기찰하라고 하시니 백사가 계(啓)를 올렸다.
“역적은 조수(鳥獸), 어별(魚鱉)처럼 곳곳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아닌지라 기찰하기 어렵나이다.” 鱉 금계별
사람들은 모두 기담(奇談)이라고 일컬었다.
국법에 관직을 삭탈당한 자는, 비록 대신이라 할지라도, 급제(及第)라고 호칭하였다. 한음(漢陰)이 영의정으로 있다가 삭직되어 급제라고 칭해지고, 백사 또한 그 때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역적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게되자 말하였다.
“나의 동접(同接)은 이미 급제하였는데 나는 어느 때나 급제하려나!”
동쪽 교외에 나가 살고 있을 때 어떤 백성이 찾아와 알현한 뒤 말하였다.
“소인이 호역(戶役)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입니다요!”
공이 말하였다.
“나 역시 호역 때문에 살 수 없을 지경이네!”
그 때 백사가 호역(護逆)했다는 탄핵을 받고 있었는데, 호역(戶役)과 더불어 동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으니 그가 해학을 잘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 때 국가에 일이 많았는데 해당 관사가 매사를 대신과 의논하여 입계(入啓)하였기 때문에 그 번잡하고 혼란스러움을 이기기 힘들 정도였다. 하루는 예조(禮曺) 낭관(郎官)이 수의(收議)하는 일로 그 좌석에 있었고 백사는 바야흐로 생각을 짜내어 대답하고 있는데, 그 때 마침 어린 계집종이 안에서 나와 아뢰었다.
“말에게 먹일 콩이 이미 다 떨어졌는데 무엇으로 먹이를 주지요?”
백사가 질책하였다.
“말 먹일 콩을 계속 쓰는 일도 대신과 의논하여야 하느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자산(慈山) 사람 이춘복(李春福)을 어떤 사람이 고인(告引)하였으므로 금오랑(金吾郞)이 자산에 이르러 종적을 살펴보니 경내에 이춘복은 없고 이원복(李元福)만 있었다. 금오랑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니 국청(鞫廳)에서 이원복을 잡아 심문하려 하였다.
鞫 국문할 국
그 때 공이 위관(委官)으로 그 자리에 있다가 중론을 보니, 이미 굳게 정해져 깨트릴 수가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자 하여도 무고한 사람이 횡액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으므로 이내 말하였다.
“내 이름 또한 저 자와 더불어 서로 비슷하니, 모름지기 글월을 올려 내 자신을 변호해야지만 무사할 수 있겠구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웃었고, 그 옥사는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그 당시역적을 다스리는 옥사가 크게 일어나 수사(收司)의 형률이 매우 엄하였는데도 공은 동요하지 않고 한마디 말로 옥사를 해결해버렸으니 그를 위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반역한 형적이 분명치 않은데도 거짓으로 자복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공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 일찍이 소나무 껍질을 찧어 떡을 만든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사람을 찧어 역적도 만드는구나!”
그의 기상은 넓고 컸으며 해학을 섞었으니, 옥사가 그에 힘입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무척 많았다.
□소년 이항복과 감나무
아홉 살 된 소년 이항복이 서당에서 돌아와 마루에 걸터앉아서 탐스럽게 매달린 감을 바라보다 하인을 불렀다.
“이봐! 돌쇠야.”
“예.”
“저 감 좀 따오너라.”
하인 돌쇠가 소년 이항복 쪽으로 잘 뻗은 감나무 가지의 감을 따려 했다.
“돌쇠야! 그 것 말고, 저 담 너머에 굵은 것 있잖아.”
“그것은 안 되는 되요.”
“왜?”
“담 너머의 것을 따면 권율 대감댁 하인들한테 곤장 맞아요.”
돌쇠의 말은 이웃집 권율 대감댁 하인들이 자신들의 집안으로 들어온 가지의 감은 자신들의 소유이므로 소년 이항복 집의 하인들이 따면 곤장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 내가 권율 대감을 만나 담판을 져야겠군.”
소년 이항복이 권율 대감 집으로 가서 청지기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예. 도련님이 어쩐 일이세요?”
“응. 글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있어 대감 님께 여쭈러 왔다. 대감 님께서는 계시지?”
소년 이항복은 권율 대감 하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권율 대감의 방 앞에와 앉은 뒤 주먹을 불끈 쥔 다음 문지방 안으로 들이밀었다.
“어느 놈이 이처럼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
“대감 님! 저도 무례한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대감 님께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대감 님! 문지방을 뚫고 들어가 있는 주먹은 누구의 주먹입니까?”
“항복이 네 주먹이 아니냐.”
“분명 저의 주먹이 맞습니까?”
“분명 네 주먹이지.”
“그럼 대감 님! 저 감나무의 가지는 누구네 것입니까?
“항복이 네 것이지.”
“저 감나무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네 것입니까?
“그것도 항복이네 것이지.”
소년 이항복은 이처럼 논리 정연하게 권율 대감에게 감나무가 자신의 것임을 분명하게 주지시켰다.
“대감 님! 그런데 저의 집 하인들이 저의 집 감을 따려 하는데 대감 님댁 하인들이 따지 못하게 하며 심지어 곤장까지 때리게 하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럼 대감 님께서는 모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하인들이 하는 일이라서 모르고 있었지.”
“그럼 대감 님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시다가 실수를 하시면 그 책임을 손에게만 미루시겠습니까?”
“그럴 수야 있나. 손은 어디까지나 내 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 책임은 당연히 내가 져야하지.”
“대감 님! 대감 님 댁 안에 있는 하인들은 누구의 하인들입니까?”
“내 집에 있으니 내 하인이지.”
“그렇다면 본디 집안의 하인들이란 대감 님의 손과 발인데, 대감 님께서는 손과 발에게 책임을 묻고 계신 것 인지요?”
권율 대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 속으로 ‘정말 큰 인물이 될 녀석이군!’하며 감탄을 했다.
“대감 님!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이 없자, 소년 이항복은 큰 소리로 답을 요구했다.
“네 말이 모두 옳다. 내가 하인들 관리를 소홀히 하여 그리 된 것 같으니 나의 잘못이다. 이 시간 이후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마.”
권율 대감은 아홉 살 소년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고,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을 했다. 이 사건 후부터 권율 대감의 하인이 손수 감을 따 소쿠리에 담아서 이항복에게 가져왔다.
또한 권율 대감은 무례한(?) 소년 이항복을 후에 둘째 사위로 삼았다.
□ 이항복의 해학
이항복은 어릴 때부터 해학을 잘 했다. 일찍이 비국(備局) 회의가 열려 모든 재상들이 다 모였는데, 이항복이 늦게 나타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늦었느냐고 물으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회의에 참가하려고, 집에서 일찍 나왔는데, 오다가 보니 사람들이 모여 싸우고 있었다. 곧 대로상에서 환관은 스님의 머리털을 쥐고, 스님은 환관의 음경을 잡고, 서로 놓지 않고 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구경하느라고 좀 늦었네."
모든 재상들이 이 얘기를 듣고 우스워 어쩔 줄을 몰랐다.(머리털 없는 스님, 음경 잘라낸 환관이 그것들을 잡고 싸운다 했으니) 이 공의 이 말은 비록 골계에서 나온 얘기지만, 당시 사실이 아닌 얘기를 꾸며 남을 모함하는 일이 허다했으니, 이를 비기어 규풍(規諷; 풍자해 충고함)하는 뜻이 담겨 있다.
조선 중기 오성 이항복은 해학과 풍자로 이름이 났다. 위의 이야기는 당시 세태를 비판하는 뜻이 담긴 풍자 이야기이다. 머리 깎은 스님의 머리털과 잘라 내고 없는 환관의 신(腎)을 잡고 있다는 이 비유는, 뜬소문과 모함에 대한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이 소재를 가지고 창작한 "중놈은 승년의 머리털 잡고..." 하는 사설시조도 등장했다.
□선조 36년(1603)년에 한양에서 4회에 걸쳐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인들의 시신들이 발견되어 큰 혼란을 주었습니다..
여성들의 온몸은 상처 투성이었고 성기 부분은 불에 지져 있는 등
그야말로 끔찍하게 죽어 있었습니다..
당시 포도대장 변양걸(邊良傑, 1546~1610)이 사건 해결에 착수했으나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죽은 여성들은 몇 달 전에 실종된 평민층 부녀자와 기생들로 목격자를
탐문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후 한달후 다시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되는데 애생이라는 당시 최고의 기생 이였습니다..
애생의 변사체가 발견되자 그녀를 사모하던 많은 유생들과 관리들이
범인을 잡으라는 독촉을 해서 사건이 엄청 커집니다..
이후 일주일 후 나라를 혼란하게 할 사건이 발생합니다..
포천 부근에서 도승지 유희서(柳熙緖1559(명종 14)~1603(선조 36)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 때문에 선조가 직접 범인을 잡으라는 명령을 합니다..
처음엔 앞의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과 유희서 사건은 별개의 사건으로 보였으나 유희서의 아들 유일이 유희서와 애생은 서로 사모하는 관계였고 애생이 비참하게 살해당하자 분개한 유희서가 범인을 찾고 있었다는 증언을 했기 때문에 변양걸은 이 사건 역시 부녀자 연쇄 살인의 범인이 저지른 것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조사 결과 유희서를 죽인 용의자 4명이 채포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사건을 해결될 듯 보였으나 다음 날 포도청 안에서 용의자중 김덕윤, 설수가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죽은 체로 발견됩니다..
이일로 인해 포도청의 관리들이 줄줄이 잡혀와 신문을 당하고 파직되었지만 수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변양걸의 파직은 미뤄졌습니다.
변양걸은 초조해 졌으나 유일한 증거인 용의자중 2명은 죽고 나자 이들의 배후자인 진범을 찾는 건 어려워 졌습니다..
변양걸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영의정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덕형은 한가지 방법을 말하는데 바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찾아가 보라는 거였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항복은 선척적으로 귀신과 얘기하고 다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 능력을 타고난 인물 이였습니다..
이항복은 이 능력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을 쫓는 왜군의 추적을 방해하거나 명나라 사신들을 위협하는 등 놀라운 이적을 발휘했으나 본인 스스로는 사대부인 자신이 귀신을 보는걸 엄청 꺼려했기 때문에 이항복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변양걸과 유희서의 아들 유일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항복을 찾아가 자초지정을 얘기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항복은 말없이 있더니 손가락에 명주실을 묶고 그 실을 붓에 묶어 놓고는 종이를 펴고는 의식을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붓은 움직이더니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변양걸은 놀라면서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지금 오신 분은 누구 십니까?]
그러자 붓은 한번 떨리더니 글을 적기 시작 했습니다..
[경승(敬承-유희성의 호)..]
[그럼 대감을 죽인 범인은 누구이니까?]
이 말을 듣자 붓은 세차게 흔들리더니 거칠게 글을 적었습니다..
[임해군..]
이 글을 본 변양걸은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임해군(臨海君, 1574~1609)은 선조의 큰아들이었습니다.
선조는 슬하에 적자는 없고 모두 후궁을 통해 손을 보았는데 그중 임해군은 광해군과 더불어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습니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때문인지 울폭증(鬱暴症)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조가 남달리 애정을 쏟았으나 학문은 하지 않고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하인들을 죽이는 등 숱한 비행을 저질러, 장자이면서도 세자에 책봉되지 못한 인물이였습니다..
게다가 임해군은 가학을 즐기는 변태적인 성욕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하녀에게 상처를 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하고,
죄인들의 고문을 자신이 직접 할 정도로 남의 고통을 즐기는 인물 이였습니다..
변양걸과 유일은 임해군의 주위를 탐문 수색했고 그 결과 임해군의 하인들이 한 여인의 시신을 매장하는 현장을 잡게 됩니다..
하녀는 온몸이 찢기거나 불로 지져진 체 죽어 있었고 변양걸은 이들을 몰래 심문해 임해군이 하녀를 고문해 죽였고 그의 사주로 시신을 파묻으려 했다는 진술을 받았습니다..
변양걸은 공식적으로 사건의 결과를 발표했고 많은 대신들 역시 임해군을 죽이고 민심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선조는 오히려 거짓을 얘기한다며 상소한 대신 들을 귀향 보내거나 파직 시켰습니다..
또 선조는 포도청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 결과 포도대장 변양걸이 심문을 당하게 되고, 유희서의 아들 유일도 무고죄로 붙잡혀 의금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유일은 임해군을 모함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습니다.
선조는 유일에게 임해군을 모함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신하들의 반발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선조는 가뭄에 대한 구언(求言)을 신하들에게 청했습니다.
구언이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임금이 신하의 바른 말을 구하는 것으로 이때 신하가 어떤 직언을 해도 처벌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덕형과 이항복은 구언을 기회로 삼아 유희서 살인사건 결말에 대한 부당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변양걸에 대한 사면을 주청하고, 임해군의 잔인한 살육에 인해 억울하게 죽은 백성들의 원한이 나라에 가뭄을 불러들였다고 설토했습니다.
이덕형과 이항복의 구언이 나오자 대신들은 자신들도 입을 다문 죄가 있다며 줄줄이 파직을 청했습니다..
선조는 부들부들 떨었으나 신하들이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을 탓할 수 없었습니다..
이덕형의 구언으로 인해 변양걸은 몇 년 후 다시 복귀되어 수원 유수 등을 지내게 되고 유일 역시 풀려납니다..
하지만 사건의 범인 임해군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나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을 받게 됩니다.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역모를 일으키려다 귀향을 가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게 되죠..
사실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평민층이 부녀자를 윤간하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 드문게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벌건 대낮에 하인들을 죽이는 일도 있었죠..
이 사건이 커진건 임해군이 공신인 유희서를 죽인 일 때문 이였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임해군은 계속 엽기적인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철령(鐵嶺) 노픈 봉
철령(鐵嶺) 노픈 봉(峰)을 쉬여 넘 져 구룸아
고신원루(孤臣寃淚) 비 사마 ᄯᅴ여다가
님 계신 구중신처(九重深處)에 ᄲᅮ려 본들 엇리
우중우음(雨中偶吟) 빗속에 우연히 읊다
急雨鳴山攪客眠 급우명산교객면
소낙비 산을 울려 나그네 잠 깨워
檻前屛壁忽蒼然 함전병벽홀창연
난간 앞에 두른 절벽 갑자기 푸르구나
雀因鬪粟翻階散 작인투속번계산
참새는 다투어 곡식 좇아 뜨락에 흩어지고
蛛爲遮蜂結網懸 주위차봉결망현
거미는 벌을 잡으려 그물을 치고 매달렸도다
等把勝輸推物理 등파승수추물리
승부로 사물의 이치 추구함과 같이하여
不將癡黠較機權 불장치힐교기권
어리석음과 교활함으로 기회를 겨루지도 않으리
年來自斷吾生久 년래자단오생구
최근에 스스로 나의 생명 판단한 지 오래거니
行止非人況問天 행지비인황문천
떠나고 머묾은 사람이 일 아닌데 하물며 하늘에 물을까
□ 칼과 거문고
검유장부기 劍有丈夫氣 칼은 장부의 기운을 지녔고
금장천고음 琴藏千古音 거문고는 먼 옛날 소리를 지녔네
이 시는 이항복이 7세에 지은 시라고 합니다.
□ 처갓집 여종을 사랑한 이항복
이항복이 권율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신혼 초에 처가의
한 여종을 보고 너무 예뻐 결코 놓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인에게 혼자 조용히 독서하면서 지낼 수 있는 방을
하나 마련해 달라고 하니, 곧 장인은 한적한 곳에 방을 하나 마
련해 주었다.
이항복은 곧 그 여종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정을 통하고는,
이후로 종종 밤에 그 여종과 살을 맞대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장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어떻게 하면 한번 무안을 줄 수
있을까 고심한 끝에 한 꾀를 생각해 냈다.
장인은 사위 몰래 몇 명의 친구들과 이 계획을 상의하고, 매
일 밤 여러 명의 친구들을 자기 집 가까이에 있는 한 친구 집의
사랑방에 모여 놀게 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이항복의 방을 살피다가, 어느 날 밤에
여종이 사위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급히 친구들을
불러 그 방문 앞에 모이게 했다.
권율의 친구 여러 사람이 이항복의 방문 앞에 서서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바야흐로 한창 운우(雲雨)를 즐기는 것
같았다.
이 때 장인 권율이 헛기침 소리를 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사위
를 불렀다.
"이 사람아, 잠들었는가? 미안하네 그려, 내 친구들이 자네를
보겠다고 몰려왔으니 늦었지만 잠시 일어나야 하겠네."
이 때 사위 이항복은 여종을 알몸으로 만들어 한창 끌어안고
즐기고 있었는데, 뜻밖에 장인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곧 이항복은 여종에게 옷을 입힐 시간이 없어 벗은 채로 이불
에 싸서 방구석에 밀쳐 놓고, 불을 켜고는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
서 문을 열고 나갔다. 이에 밖에 서 있던 장인의 친구들이 방안
으로 들어와 앉았고, 이항복은 장인 친구들에게 절을 해 인사를
올렸다.
이 때, 장인의 친구 한 사람이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렇게
말하면서 일어섰다.
"좁은 방에 이불마저 방구석에 있어서 더욱 좁군, 내가 이불
을 걷어 시렁 위에 올려놓겠네."
이러고는 여유를 주지 않고 곧장 이불이 있는 구석으로 가더
니 주섬주섬 이불을 싸서 번쩍 드는 것이었다. 이 순간 옷을 벗
은 탐스런운 알몸의 여종은 땅에 떨어지고 이불만 들리었다.
장인 친구들이 이 아름다운 여채를 보고 손뼉을 치면서 웃으
니, 이항복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빙
그레 웃으면서 여유 있게 말했다.
"옷벗은 여종을 숨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먼요."
이렇게 말하면서 여종을 구석으로 밀치고 옷을 챙겨 주어 입
게 하니, 보고 있던 장인 친구들은 배를 쥐고 웃었고 여종은 부
끄러워 얼굴을 가린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조선 중기>
고우 苦雨
苦雨連旬夜徹明 고우련순야철명
장마비 열흘 동안 주야로 계속 되어
曉庭雲物太縱橫 효정운물태종횡
새벽 뜰의 구름 안개 너무나 자욱하다.
牀牀避漏人何限 상상피루인하한
침상마다 새는 비 피하는 사람을 어찌 원망하며
種種緣愁髮幾莖 종종연수발기경
종종 시름으로 백발은 몇 줄기나 더했는가.
沙捲洑流穿竈入 사권보류천조입
모래는 봇물에 밀려서 부엌까지 들고
蛙隨驚犬上墻鳴 와수경견상장명
개구리는 놀란 개를 따라 담장에 올라 울고 있다.
鍾城戰血今如海 종성전혈금여해
종성의 전쟁의 피가 지금 바다와 같아
天厭頑胡爲洗兵 천염완호위세병
하늘이 싫어하여 오랑캐 군대를 비에 젖게 하는구나
□ 청백리 백사 이항복
오성은 40여 간의 관직 생활을 임진왜란과
극심한 당파싸움에는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재치와 익살로 늘 웃음을 뿌린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있었던 일이다.
김상궁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제사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
임금과 대신들에게 잘 차린 제사 음식을 한상씩 가져왔다.
대신들은 시장한데다 피난길에 만나는 기름진 음식이라
침을 삼키면서 대들었다. 그러나 가장 나이가 많은
재상 윤두수가 들어오지 않아서 다들 기다렸다.
" 그렇다면 나 혼자서라도 먼저 먹겠소이다. "
다들 말렸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항복은 우적우적 배불리 먹었다.
그 윤두수는 임금을 만나고 있었다.
" 전쟁으로 백성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도 배를 곯는 판인데
일개 상궁이 아비의 제사 음식을 이처럼 차리다니 말이 됩니까 ? "
선조가 이렇게 제사 음식을 물리치자
윤두수는 대신들에게 돌아와 호통을 쳤다.
" 그래, 여러 대신들이 이런 음식을 전쟁통에 먹겠다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 임금께서도 음식을 물리치셨소 !
제발 정신들 차리시오. "
대신들은 아까운듯이 음식을 힐끔거리면서
물러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오성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 그러게 진작 먹자고 안합디까 ? 배가 불러야 난리도 치르지요. "
그는 이렇게 재치와 익살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그의 우스갯말에는 임금도 껄껄 웃으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 정조 시절의 정치가 목만중(睦萬中)의 글을 읽다가
“예전 세상의 어진 사대부와 이름난 벼슬아치들 가운데 시(詩)를 잘하지 못한 자들이 있던가? 세상에서 시를 말하지 않은 이후로 덕망과 업적이 옛사람을 훌쩍 능가한 자가 사라졌다”
라는 대목을 접했다. 비록 전문적인 시인이라고 자처하지는 않을지라도 정치에 참여하거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즐겨 시를 감상하고 창작했다는 엄연한 소식을 그의 글은 전한다. 그 시절에 벌써 이런 탄식이 나올 정도로 문학으로부터 지성인이 멀어졌다는 것이 의아하기만 하다. 현대의 정치인이나 학자들에 비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그야말로 문학도라고 할 만한데도 목만중은 그들의 무관심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문집을 읽고서 목만중의 탄식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허균(許筠)의 시집에 붙인 백사의 서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어서, 그에 버금가는 시나 글이 적지 않으리란 기대를 걸어 보았다. 백사는 시인을 광대와 풀벌레로 비유하며, 시를 짓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신을 억제하느라
“손가락을 깨물며 시를 말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시를 만나기만 하면 즐거워 마치 술병이 나서 술을 절제하는 사람이 이내 해장술을 마시려 드는 꼴이다”
라고 했다. 백사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백사는 선조․광해군 무렵의 명재상이자, 임진왜란과 같은 난국을 해결한 공신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백사의 이름이 유명한 것은 역사에 혁혁한 그의 공적 때문만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것은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그의 어린 시절 일화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그가 연출한 이야기는 ‘오성과 한음’이라는 책명으로 엮어져 잘 알려져 있다. 아이 적에 여러 번 그 책을 읽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백사는 문장을 잘해서 입신양명한 문인이었다. 수십 편의 묘지명과 시집을 보면 그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쓴 시는 다른 시인과 달리 재치와 기지가 넘친다. 아들의 생일에 백사는 장난삼아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부잣집은 딸을 낳아 온갖 시름 모여들지만 가난뱅이는 아들 낳아 만사가 넉넉하네./
날마다 천 전(錢)을 들여 사위 대접하기 고생이지만 책 한 권 아들에게 읽히면 그만이지./
나는 지금 아들뿐 딸이 없는데, 큰애는 글을 알고 작은애는 인사할 줄을 아네./
뉘 집에서 딸 길러 효부(孝婦)를 만들어 놓을는지? 내 아들 보내서 천 년 손님 만들어야지./
집 지키고 취한 몸 부축할 일 걱정 없으니 장가를 보내고 늘그막에 낙이나 누리련다.’
장난삼아 지은 희작이므로 이 시를 심각하게 해석하여 그의 진심이 담긴 시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 해도 부잣집 딸에 장가보내 덕을 보겠다니 익살이 지나치다. 그는 또 ‘무제(無題)’란 제목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읊은 시를 적잖이 썼다. 그의 호방하고 익살스러운 성정대로 거침없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문집에는 이런 작품이 많지 않다. 백사가 돌아간 뒤 그의 문집을 엮을 때, 그 문하생들과 자제들이 백사의 위엄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시문은 모두 빼서 싣지 않았다는 야사의 기록이 있다. 백사가 지닌 인간미나 활달한 문인의 모습은 현재 전하는 문집에서 찾기가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 보면, 백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의심하게 된다. 사실 오성과 한음이 어릴 적에 벌인 그 재미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허구다. 백사는 한음과 23세 때 비로소 교제를 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일화는 있을 수 없다.
백사는 화급할 때도 기지 넘치는 말을 구사했고, 그런 때일수록 시를 통해 생각을 표현했다. 정치가가 시를 말하지 않는 시대에 백사를 거론하는 것은 난센스이기는 하지만, 그에게서 거인의 멋과 풍모를 느끼는 것은 피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