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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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40주년, 회고와 감사
* 이 글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식(2022. 12. 22,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 밝힌 ‘회고와 감사’를 보완한 것이다.
오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40주년 기념 및 『내한선교사사전』 출간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어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추운 날씨에도 이 모임에 참석하신 여러 선후배 동역자들과 순서를 맡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제가 ‘회고와 감사의 순서’를 맡도록 배려해 주신 데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1980년대, 첫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가 내한한 지 100주년이 되던 때, 그 100년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공유하던 때에 출발했습니다. 당시 이런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비교적 젊은 ‘신앙과 학문의 동지들’이 뜻을 모으게 된 데에는 ‘기독교문사’에서 1970년대부터 간행한 『기독교대백과사전』(총 21권)의 편찬이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백과사전에는 한국 기독교사 관련 항목이 많았고, 이를 집필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을 새롭게 발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한국 기독교사에 관심을 가진 신진 학도들이 백과사전 편찬에 참여하면서 동지적인 유대를 형성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1년 무렵부터는 몇 분이 ‘기독교사료편찬회’라는 이름으로 자료를 공유하고 연구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호인 모임으로 출발한 이 모임은 1982년 여름 무렵부터 한국 기독교 100주년이라는 역사의식에 기반하여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 모임을 학회나 연구회로 발전시키려고 논의를 진행하면서 ‘한국개신교사연구회’(가칭) 회칙을 마련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1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자기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고 뜻을 같이했고, 이런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광장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즈음 한국교회사 연구를 위한 인적 구조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때까지 한국교회사는 신학의 영역에서 연구·교수되어 왔는데, 이 무렵 국사학을 전공하는 학인들이 한국교회사 연구에 접근해 왔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역사학이 추구하는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역사학적 방법론을 강조했습니다. 『기독교대백과사전』 집필을 위해 수집됐던 자료들이 공유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자료 발굴에도 힘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연구의 방법론 또한 변화되어 갔습니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 혼자 움켜쥐지 않고 공유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뜻을 같이하고 있던 학인들은 서로를 ‘신앙과 학문의 동지’라고 여기며 아꼈습니다. 이점은 그 이전의 학자들과는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연구의 공공성이 점증되기 시작했고 발표와 토론의 장을 통해 학문적 성과를 공동의 자산으로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되고 있던 1980년대 초의 연구모임에는 YMCA의 산증인인 전택부 선생과 일본에서 한국교회사를 연구한 오윤태 목사님도 참여하여 발표도 하고 격려도 해주셨습니다.
그런 몇 차례의 회합과 준비모임을 거친 ‘신앙과 학문의 동지’들이 1982년 9월 27일 오후 3시에 새로나백화점 근처에 있는 중식당 연경궁에 모여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참석자는 김인수, 김수진, 박효생, 서굉일, 윤경로, 이덕주, 이만열, 조성기로 알려져 있습니다.[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0년(1982-2012)』(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13쪽 참조.]
그때 우리는 한국 기독교사 인식과 관련하여, 선교사가 제물포에 도착한 4월 5일과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가 탄생한 9월 27일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다가 9월 27일을 연구회 창립일로 정했습니다. 연구회의 설립 목적은 한국 기독교 사료의 발굴 및 연구, 연구 및 기타 학술 발표, 연구지와 도서의 간행, 국내외 학술단체와의 교류 등으로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감사한 것은 당시 해직 상태였던 제가 미국 자료수집 중 잠시 귀국했던 때를 맞춰 이 연구회가 조직되어 제게 회장직을 안긴 것입니다. 무직이었던 제게 그 직함은 3-4년 동안 해외 소재 한국교회사 자료수집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조직된 후 연구의 과제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매월 1회씩 공개연구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때 전택부, 이장식, 김용복, 최석우, 전성천, 전병호, 오윤태, 신복룡 등 앞선 연구자들을 초빙하여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모임은 처음에 후암동의 기독교문사에서 열렸고 그 뒤 원효로에 있던 심한보 선생의 한빛문고 사무실을 사용하다가 불광동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 그의 사무실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때 The Call of Korea나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 같은 선교사들의 저술과 The Korea Mission Field(1905-1941)와 「기독신보」(1915-1937) 등의 자료가 발굴되어 복간되었는데, 이 복간 사업은 주로 심한보 선생이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회보 「한국기독교사연구」를 30호까지 간행하여 중요한 연구 업적과 회의 소식을 수록했는데, 이 회보 간행을 위해서 정복희 간사의 수고가 컸습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시절부터 저희들을 많이 지도해 주신, 지금은 하늘나라로 가신 선배들이 계십니다. 구세군의 장형일 부령님, 아동문학가로도 이름이 높은 최영일 목사님, 지적(地籍) 기술로 뛰어난 리진호 장로님, 일본인 동지 사와 마사히코(澤正彦) 목사님과 구라다 마사히코(藏田雅彦) 교수님입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분은 『기독교대백과사전』을 간행한 기독교문사의 한영제(韓永濟) 장로님입니다. 한 장로님은 후학들에게 자료를 제공해 주시면서 여러 항목의 한국 기독교사를 집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설날이 되면 당신의 집으로 젊은 학인들을 초대해 떡국을 대접하시면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실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한영제 장로님의 지원과 격려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그 어른은 훗날 예장 통합(統合) 측의 총회장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1982년에 출발한 연구회는 정기발표회를 하고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는 등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지만, 연구회 시스템이 갖는 한계도 있었습니다. 자료와 연구의 축적이 어려웠고 월 1회 정도의 모임으로서는 연구 성과를 담아내고 교류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런 난제를 의식하고 고충과 반성을 거듭하면서, 연구회를 일정한 연구 공간이 확보되는 연구소로 발전시키기로 의견을 모아갔습니다. 이런 공감대가 1990년 9월 27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창립이라는, 더 진전된 성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연구회를 시작한 지 8년 후입니다.
연구회와는 달리 연구소는 연구 공간과 상임연구원이 필요하고, 거기에 따라 재정적 뒷받침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저희들의 이런 계획에 공감하고 재정적으로 도와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연구 공간의 전세금을 마련해 주신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님은 그 뒤 그 전세금을 연구소의 기본 재산으로 삼도록 조치해주셨고, 그 뒤에도 아시아미션의 정재철·이상준 두 분 대표를 통해 지금까지 연구소 운영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또 연구소 출발 때부터 여러모로 도와주셨던 홍정길, 옥한흠, 하용조 목사님이 계시며, 당시 영락교회를 담임하셨던 임영수 목사님과 그 교회 장년부 회원들, 할렐루야교회의 김경현, 이정수, 김복윤, 문일석 님, 서울중앙교회의 우창록 변호사,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함안 군북교회와 그 교회의 박태이 장로도 그때 연구소를 힘껏 도왔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연구소를 계속 도와주시는 20여 개 교회는 저희 연구소의 버팀목입니다. 연구소는 처음부터 일용할 양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저축 없이 시작했고 40년을 지나오면서 이 믿음이 연구소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연구소는 그 뒤 8년의 역사를 가진 연구회를 통합, 계승하여 지금까지 4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40년의 역사에서 우선 학술적인 성과에서 감사할 일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연구소는 출발 초기부터 국내외에 산재한 한국교회사 관련 사료수집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교 초기부터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국내 자료 못지않게 선교부 자료가 중요했습니다. 연구소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여러 교단, 특히 감리회 2개 교단(미 감리회, 미 남감리회), 장로회 4개 교단(미 북장로교, 미 남장로교,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의 공식적인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여기에는 선교부와 선교사 간의 내왕문서와 보고서, 선교사들이 자기를 파송한 혹은 고향 교회와 친척들에게 보낸 개인 자료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우리는 각 선교부를 찾아 그들이 보관하고 있는 왕복문서나 간행물에 실린 관련 자료들을 복사하거나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정리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자료뿐만 아니라 국내 각 교단의 공식·비공식 문서와 신문, 잡지, 개인 자료도 수집했습니다. 특히 1995년에는 『조선총독부 관보』 영인본을 구입하고 기독교문사 소장자료도 복사·제본하였습니다. 이렇게 연구에 필요한 1차 자료가 갖춰지게 되자 국내외 연구자들이 연구소를 방문하게 되었고, 자료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료수집과 함께 연구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연구회 시절부터 월례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여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연구활동을 격려했는데, 지금까지 409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또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1989년 3·1운동 70주년을 맞으면서는 ‘3·1운동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을 개최, 기독교의 3·1운동 참여의 실상을 알도록 했습니다. 또 연구회 시절부터 우리는 집단지성의 힘으로 한국 기독교 통사를 계획하여 3권을 간행했는데, 1권은 기독교의 동양 전래부터 1910년까지를, 2권은 일제강점하의 한국 기독교를, 3권은 해방 이후의 한국 기독교회를 각각 서술하여 간행한 바 있고, 최근에는 『한 권으로 읽는 한국기독교의 역사』가 류대영에 의해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개설서는 신학교의 교재로 가장 많이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연구소에서 1년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간행하는 「한국기독교와 역사」와 함께 한국 기독교의 역사연구와 역사의식을 고양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연구소는 기독교 역사 강좌도 여러 차례 계속하여 많은 분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연구소는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국내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 산재한 한국 기독교 사적지를 탐방하고 그곳에서 학술회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에는 구라다 마사히코(藏田雅彦) 교수의 안내로 고베(神戶),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도쿄(東京) 등의 한국 기독교사 관련 지역을 탐방하는 한편 ‘한일기독교역사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 고베에서 한석희(韓晳曦) 선생의 청구문고(靑丘文庫)를 방문한 것과 도쿄 ‘도미사카(富坂)그리스도교센터’에서 개최한 ‘사와 마사히코 목사 기념 한일기독교사 세미나-3·1운동과 한일기독교’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특히 도쿄의 학술회의에는 한국 측에서 김흥수, 이덕주, 이만열이 발표했고, 일본 측에서는 도시샤(同志社)대 교수 도히 아키오(土肥昭夫), 도쿄(東京)대 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이다 이즈미(井田泉) 씨가 참여하여 한일 기독교사 관련 세미나로서는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일 학자들이 모여 3·1운동이라는 주제로 행한 학술회의는 이게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1997년 9월 15-16일, 우리 연구소의 회원 이형근 목사가 창립한 ‘모스크바 삼일문화원’과 고려인협회가 공동으로, 스탈린의 극동지역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송 60주년을 기념하는 ‘극동지역 한인 강제이주 60주년 한·러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우리 연구소의 회원(윤경로, 이만열)을 초청, 발표토록 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 연구소의 영역을 넓힌 것입니다.
또 2017년 6월 26일-7월 1일에 가졌던 ‘예수성교전서 출판 130주년 기념 존 로스의 행적을 따라 동북 3성을 가다’라는 답사도 매우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이 답사에는 42명의 형제자매들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선교사로 온 존 로스가 1882년에 처음으로 한국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 출간한 이래 그 5년 후인 1887년에 신약성경 예수성교전서를 간행하게 되어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연구소 주최의 답사를 시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로스가 처음 중국에 도착한 영구(營口)·우장(牛庄), 심양(沈陽)으로 옮겨 설립한 동관(東關)교회와 그 경내에 자리잡은 문광서원(文光書院) 및 서탑(西塔)교회 등을 먼저 둘러보았습니다. 1882년 누가·요한복음이 간행되었을 때 3만여 명의 조선족이 압록강 북쪽 집안현(集安縣)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조선족에게 복음서가 전파되어 수세(受洗)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처음 세워졌던 이양자교회(裡楊子敎會)의 유적지도 답사했습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 답사는 매우 의미있는 기획이었습니다.
연구소를 회고하면서 연구의 활성화와 관련하여 한두 가지를 더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는 1997년 10월에 한국기독교역사학회를 설립하여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에 등록케 하고, 연구소의 연구활동을 맡긴 것입니다. 연구소 회원들이 그대로 학회 회원을 겸하게 하고, 월례 학술발표와 연례 학술심포지움, 연구논문집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 간행을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주관토록 하여 회원들의 연구업적을 공인받도록 했습니다. 초대 회장은 윤경로 교수가 맡았습니다.
이와 함께 연구소는 출발 때부터 기독교사 관련 신진 학자들을 지원·양성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사 관련 테마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고 하는 이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과 박사학위 논문을 연구소에서 출판해주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삼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기에 연구소의 자료 제공과 이 같은 지원체계는 신참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한국 기독교사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에 작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구소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기에 몇 가지를 언급했습니다만, 아울러 감사할 일은 연구공간이 확장된 것입니다. 처음 용산구 청파동 숙대(淑大) 앞에서 시작된 연구소가 수서(水西)로 옮기면서 독립된 건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 당시 윤경로 연구소장이 적극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한 바가 있습니다. 수서와 마포 성산동 현 4층 건물로 옮기는 일은 홍정길 목사님께서 이사장을 맡으셔서 이룬 성과입니다. 독립 건물을 마련하는 데도 여러 교회와 성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연구소를 도와주신 300여 명의 성도들과 180여 개의 교회에 감사드립니다. 그 도움에 힘입어 연구소는 세계 각국에 산재한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여 이제는 한국교회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료의 보고로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연구소는 한국교회사 통사류 6권을 포함하여 논문선집 7권, 인물총서 8권, 번역총서 12권, 연구총서 26권, 자료총서 57권 등을 간행했습니다. 연구소는 회원수 250여 명에 월례연구발표회 409회를 가졌는데, 이는 한국의 일반 역사학 관련 학회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연구모임입니다. 연 2회로 간행하는 학회지는 56호에 이르렀고 주목할 만한 많은 논문들이 수록되었습니다.
이렇게 자료를 축적하고 연구활동을 심화하게 되면서 한국의 일반 대학에서도 한국교회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학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연구소의 자료와 연구성과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그 연관 효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연구소는 한국교회의 당면 과제와 관련, 두 가지 특별한 계획으로 한국교회와 사회에 보답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는 그동안 받았던 선교의 은혜를 학문적인 차원에서 갚을 길을 찾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분단 상황에서 북한교회의 역사를 어떻게 보존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의 은혜를 갚는 ‘보은의 길’의 하나는 이 땅에 선교사로 오신 분들을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이번에 간행하는 『내한선교사사전』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전의 편찬을 위해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가 연구비를 지원해주셨습니다. 집필과 감수에는 90여 명의, 교파를 초월한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사전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데는 이덕주 교수와 이순자 박사, 박혜진 박사 세 분의 혼신의 힘을 기울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약속된 기일에 맞춰 출간해주신 신앙과지성사의 최병천 장로님과 편집진에도 감사드립니다.
앞서 언급한 북한동포와 북한교회를 위해 연구소가 계획한 것은 『북한기독교사전』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남북나눔운동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해 왔고 이른 시일 안에 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우리는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와 지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업적들이 쌓이고 진전되면서 한국 기독교는 역사의식에 기반한 성숙한 교회로 고양되어 갈 것입니다.
끝으로 요즘 제가 연구소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공유하면서 제 말을 맺겠습니다. 우리 연구소가 현재 풍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나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한국교회와 연구자들을 생각만큼 잘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옮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국내외에서 수집한 귀한 자료들을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튼튼한 건물과 시설을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와 지원으로 잘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출애굽의 광야길에서처럼 우리 연구소를 이끌어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이끌어주실 것으로 믿으면서, 회고와 감사의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