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화 과정에서 나온 과장이겠죠. 이순신은 아주 깐깐한 인물이었어요. 전투 기록을 보면 사소한 것까지 다 챙기고 재차 확인한 뒤에만 움직였어요. 아마 녹둔도에서의 패배 때문일 겁니다(이순신은 녹둔도에서 여진족에 대패한 뒤 백의종군한다). 형수와 조카들을 이끌고 부임지에 갔다가 남솔(濫率·가솔을 많이 거느림)로 탄핵됐고 30대를 상관과 다투며 보냅니다. 부딪치고 깨지며 성장해간 겁니다. 이걸 무시하고 7년의 성공으로 48년을 덮어씌우면 그건 위인전이죠. 제 해석을 불편해하는 ‘이순신 마니아’들이 수시로 항의 전화를 합니다(웃음).
이는 7월 22일자 국민일보 기사의 일부로 여기서의 김은 소설 <불멸의 이순신>의 저자 김탁환이다. 바로 전회에서 다룬 원균이 북방의 맹장이었다는 엉터리 주장에 대비되는 말이다. 물론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 이후 백의종군을 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녹둔도 전투는 정말 패전이었을까? 그리고 이순신 생애 첫 번째 백의종군은 어던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우선 녹둔도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녹둔도는 둘레 8km의 섬으로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1860년(철종 11) 청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고종 26)에야 비로소 알고 청나라측에 항의, 이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84년 11월 북한과 소련 당국자 간에 평양에서 국경문제에 관한 회담을 열어 관심을 끌었으나 미해결인 채로 끝났으며, 1990년에는 직접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583년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순찰사로 임명되어 현지에서 난의 평정을 지휘한 정언신은 상황종료 후에도 함경도에 머물면서 녹둔도에 둔전을 둘 것을 건의한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이듬해인 1584년 봄 부터는 녹둔도에 군사를 두고 땅을 개간하여 둔전을 운영하였다.
1586년에 조산만호로 천거되어 부임한 이순신은 이듬해부터 이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된다. 바로 이 해 풍년이 들면서 여진족이 녹둔도로 쳐들어온다. 적의 기습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지만 이순신은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군사들을 지휘하면서 분전하였지만 1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100여명의 백성과 말 등이 끌려가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어떤 책임을 져야 했을까?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원전】 21 집 438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사법-탄핵(彈劾)
<선조실록> 선조 20년(서기 1587년) 10일 10일자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원전】 21 집 43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6일
바로 이순신 생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의종군을 장교를 이등병으로 강등시키는 수준의 치욕적인 처벌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서 선조는 이순신에 대해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라며 이순신을 두둔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점은 녹둔도 전투와 관련해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첫째, 녹둔도 전투가 일반적인 의미의 패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비록 녹둔도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크지만 이순신으로서는 열심히 싸웠고 숫적으로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피해가 큰 상황은 조정에서도 받아들여졌다는 걸 의미한다.
둘째, 백의종군이 무거운 처벌인가 하는 점이다. 패전한 장수에게 내릴 수 있는 처벌의 단계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무거운 것은 역시 ‘처형’이며 그아래로는 귀양을 보내는 유배와 파면이 있다. 백의종군은 파면보다도 아래 단계의 처벌로 요즘으로 치면 보직해임으로 표현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백의종군 중에도 흰옷을 입고 근무를 하기도 하는 등의 사례도 있다. 즉 백의종군은 일종의 대기발령 상태이지 장교를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치욕이 아니다. 이순신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은 죽음 직전에서 간신히 구명된 것이었지만 첫 번째 백의종군은 더 강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배려를 받은 것이며 오히려 이순신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이 이때 백의종군한 것은 이일의 모함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그것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상태를 벗어나게 한 전투의 주장이 바로 이일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만일 이일이 정말 이순신을 모함했다면 이순신이 공을 세울 기회를 차단하거나 공적을 보고에서 누락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이일의 모함을 증명하는 믿을 만한 사료적 증거가 존재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아시는 분은 필자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이순신이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지 석달 만인 1588년 1월,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녹둔도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서 함경 북병사 이일로 하여금 함경도의 군사 뿐만 아니라 서울의 군사까지 포함된 도합 2천5백여 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근거지인 시전부락을 치게 했다. 이른바 시전부락 전투였다. 이 때의 토벌작전에서 아군은 1월 14일에 출진을 개시하여 캄캄한 이경에 행군하고 삼경에 두만강을 건너서 15일 날이 밝을 무렵에 시전부락을 들이치기 시작하여 궁려(窮廬:호인들이 치고 사는 장막) 2백여 좌를 태워버리고 여진족 380여 급, 말 9필, 소 20수를 참획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면서 여진족의 본거지를 초토화하고 승전했다. 실록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북병사(北兵使)의 계본(啓本)에, 경원(慶源)의 번호(藩胡) 중 녹둔도(鹿屯島)에서 작적(作賊)한 시전 부락(時錢部落)에 이달 14일에 본도(本道)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들여보내, 이경(二更)에 행군하고 삼경에 강을 건넜다가, 15일 평명(平明)에 그들이 궁려(穹慮) 2백여 좌(坐)를 분탕(焚蕩)하고 머리 3백 80급(級), 말 9필, 소 20수(首)를 참획(斬獲)하고 전군(全軍)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원전】 21 집 445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선조실록> 선조 22년(1588년) 1월 27일
이 전투를 계기로 이일은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태에서 벗어나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지난 회에 인용한 실록 내용 중 일부를 다시 살펴보자.
【원전】 21 집 456 면
【분류】 *인사(人事)
<선조실록> 선조 22년(서기 1589년) 1월 21일
위의 기록에 나타나 듯 이순신을 추천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두 명으로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와 녹둔도 둔전의 건의자인 정언신이다. 정언신은 북방에서 활동한 경험이 풍부하였으므로 그만큼 녹둔도 전투와 시전부락 전투를 통하여 이순신의 가치를 확실히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은 그를 추천한 이산해나 정언신, 이순신과 절친했던 유성룡 말고도 있었다. 바로 국왕 선조 역시 이순신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실록에 보인다.
좌부승지 황우한(黃佑漢)이 비변사의 밀계로써 아뢰기를,
“전번에 하삼도(下三道)의 병·수사(兵水使)를 잘 선택하라는 전교를 받고 신들이 상의한 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약간 명에 이르기에 즉시 계달(啓達)합니다. 그중에 조대곤(曺大坤)·장의현(張義賢) 등은 이미 논박을 받아 체직되었으며, 경상 우수사 윤사흠(尹思欽)도 재주가 용렬하니 아울러 체직하소서. 병·수사에 적합한 사람으로는 서득운(徐得運)·이옥(李沃)·이빈(李쉂)·이혼(李渾)·신할(申�)·이경(李景)·조경(趙儆) 등을 대강 서계(書啓)합니다. 조치(措置)와 주획(籌턛) 등의 사목(事目)은 천천히 헤아려 서계하였습니다.
요충(要衝)이 되는 고을에 호(濠)를 파는 일과 방어사(防禦使)나 조방장(助防將) 중에 가합한 사람을 골라서 큰 고을의 수령으로 차견(差遣)할 것을 전교하였는데, 남방 연해(沿海)에 적로(賊路)의 요충이 되는 열읍(列邑)이 매우 많고 염려되는 기미가 바로 조석(朝夕)에 있으니 성(城)을 쌓고 호(濠)를 파는 모든 방어 도구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조발(調發)한다는 것은 지극히 염려되는 일이니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요해처(要害處)가 되는 고을 중에 더욱 허술한 데를 자세히 심사 개록(開錄)하여 계문(啓聞)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소서. 또 큰 고을의 수령을 체차(遞差)하는 데는 방어사나 조방장 중에 가합한 사람을 골라 차견(差遣)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다만 낱낱이 적출(摘出)해내는데 매우 시끄러울 것이니, 나주 목사(羅州牧使) 윤우신(尹又新)부터 먼저 체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하였다.
【원전】 21 집 459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외교-왜(倭)
<선조실록> 선조 22년 7월 28일
앞서의 기록에서 비변사에서 우수무장을 추천하는 것은 시전 부락 전투 이후 북방은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역시 이와 같은 조치로 비변사에서 하삼도의 병사와 수사로 적당한 인물을 추천한 것에 선조 자신이 이순신 역시 등용할 뜻을 보인다.
살펴본 바로는 녹둔도 전투는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이순신에게 아픈 상처라기보다는 임금과 조정에게 그의 진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조는 이순신을 인정하는 강력한 후원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순신이 온 백성의 존경을 받는 영웅으로 떠오르기 이전의 일이었다. 이 뛰어난 인재를 보는 선조의 시각의 변화는 작게는 이순신, 크게는 조선의 불행을 부르는 일이지만 그것은 좀더 훗날의 일이다.
첫댓글 흐음.. 제가 알기로는 이순신 장군이 북병사 이일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를 거부해 이일이 자신에게 죄가 넘어올까봐 그랬다고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지 안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이야기는 저도 봤지만 그 이야기의 최초 출처가 되는 사료가 뭔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일의 모함여부에 대한 확신을 내릴테니까요.
초반쯤에 지금 녹둔도가 러시아 땅이라던데...녹둔도두 꼭 찾아와야 겠네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