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관심뉴스는 훈훈한 이웃의 정을 느끼게 하는 기사입니다. 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미래설계 차원에서 절약하고 종자돈을 모아야 하는데 남을 돕는데 더 적극적일까요? 이는 본인의 심성 탓도 있지만 제도적으로 문제점이 있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과 삶에 대한 의욕을 갖게 하기 위해 부를 축적하게 하는데는 동의하지만, 느블리스오블리제가 활발해지도록 제도적인 장치 마련으로, 없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부를 축적하고, 있는 분들은 초과되는 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위화감이 없으며 자연스럽게 서로서로의 눈높이가 맞춰지게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부터 무거운이야기였다면 사과드립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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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산다고 공부 못하면 되나" 주민 쌈짓돈으로 일군 장학기금 [노컷뉴스 2007.03.16 08:21:58]
"동네가 못산다고 애들이 공부 제대로 못하면 되나? 모두들 형편이 어려우니깐, 조금씩 돕는 거지 뭐..."
북구 덕천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이 모 (72)할머니.
이 할머니가 하루종일 좌판을 지켜 벌 수 있는 돈은 고작 2만원 안팎이지만, 벌써 몇 년째 월 만 원씩의 기부금을 북구 장학회에 내고 있다.
어려운 살림살이 탓에 자식들을 끝까지 가르치지 못한 아쉬움도 있고, 자라는 아이들이 가난 탓으로 학업을 접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
가정주부 문 모 씨(38)도 동네 아주머니들과 매달 십만 원씩 북구 장학회에 기부하고 있다.
문 씨는 "주위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아이들의 소식을 접하면 꼭 내 자식들 같아서 주위 사람들과 마음을 합치게 됐다. 내 이웃을 위해 작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 봉사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어린아이들은 일 년 꼬박 모은 저금통을 기금으로 내는가 하면, 경로당 어르신들은 천원, 이천 원씩 용돈을 쪼개 1년 동안 모은 목돈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한다.
이렇게 10년동안 북구 구민들이 십시 일반으로 모은 끝에 1997년 2억원으로 시작한 기금이 올해는 무려 22억원에 달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 900여명이 북구 장학기금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3차례 장학금을 받고, 부산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김정한(24) 군은 이같은 이웃들의 사랑에 자신도 장학금 기부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김군은 “좋은 직장을 빨리 잡아서 받은 은혜를 꼭 갚고 싶다. 나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가난이 절대 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다”고 남다른 포부를 조심스레 밝혔다. 거액의 기부자 하나 없이 일군 북구 장학금...
어려운 이들이 십 년간 한푼 두푼씩 모아 일군 것이어서 더 값진 의미로 다가온다.
부산CBS 김혜경 기자 hkkim@cbs.co.kr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오-늘-의--소-사--------------------
1751년 화폐속의 인물 매디슨(미국:5,000달러) 태어남
매디슨(James Madison)1751. 3. 16∼1836. 6. 28
미국의 제4대 대통령재임기간:1809∼1817
미국 건국시조의 한 사람으로서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해 연방헌법의 입안과 비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와 함께 팜플렛 〈연방주의자 The Federalist Papers〉를 간행했으며, 제1∼10조 헌법수정안을 발의했다.
제퍼슨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루이지애나 매입'을 성사시켰고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1812년 전쟁(미·영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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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화폐속의 인물 카스텔루 브랑쿠(포루투갈) 태어남
카스텔루 브랑쿠(Camilo Castelo Branco) 1825. 3. 16 ∼1890. 6. 1.
포르투갈의 소설가.
그가 쓴 58편의 작품은 낭만주의적 통속소설에서 사실주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종종 포르투갈의 발자크라고 불린다. 유전성 정신질환을 가진 집안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카스텔루 브랑쿠는 어린시절에 고아가 되어 포르투갈 북부의 트라스오스 몬테스에 있는 친척 집에서 자랐다. 꾸밈없고 소박한 이 지역에서 자유분방하면서도 자부심을 갖도록 자라난 그는 포르투로 가서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신학을 공부했는데, 결국 작가가 되기 위해 의사와 성직자직을 모두 포기했다.
그는 한동안 〈리스본의 신비 Mysterios de Lisboa〉(1854)·〈디니스 신부의 검은 책 Livro Negro do Padre Diniz〉(1855) 같은 괴기소설을 쓰다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Onde Esta a Felicidade?〉(1856)·〈복수 Vinganca〉(1858)에서 원숙한 표현양식에 도달했다. 자신의 글만큼 격렬한 삶을 살았던 그는 잇따른 연애행각 끝에 결국 포르투갈의 실업가 아내인 아나 플라시두와 사랑의 도피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두 연인은 간통죄로 투옥되었고(1861),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파멸의 사랑 Amor de Perdicao〉(1862)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불과 2주 만에 완성한 소설이다.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주인공이 결국 범죄를 저지르고 추방당한다는 내용을 가진 이 작품에서 그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열정과 확고부동한 사회적 편견의 충돌은 종종 비극과 죄악을 낳고 고통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역설했으며 이것은 카스텔루 브랑쿠 자신의 인생관과 부합되고 있다.
감옥에서 석방된 카스텔루 브랑쿠는 아나 플라시두의 남편이 죽은 뒤인 1864년 아나와 함께 미뇨 지역에 있는 세이데라는 마을에 정착했다. 여기서 그는 평범한 수준의 시·희곡·논문·비평 등 끊임없이 글을 써 생계를 유지했으며 수준이 고르지 않은 소설들도 계속 출간했는데 많은 작품이 출판업자의 주문을 받아 쓴 것들이었다. 1885년 그는 문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코레이아 보테요 자작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아들이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자신도 건강이 나빠져 실명하기 직전에 이르자 낙심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통속적인 연애소설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파멸의 사랑 Amor de Perdicao〉· 〈부자의 사랑 이야기 O Romance d'um Homem Rico〉(1861)· 〈리카르디나의 초상 O Retrato de Ricardina〉(1868) 같은 작품은 비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간결하고 힘차게 서술되어 있다. 낭만주의 시대는 카스텔루 브랑쿠가 죽기 전에 이미 끝났지만 기질로 보나 신념으로 보나 그는 여전히 낭만주의 작가로 남아 있었다. 미뇨의 시골생활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미뇨 소설집 Novellas do Minho〉(1875~77)은 자연주의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갓 태동한 자연주의 유파와 문학논쟁을 벌였고, 〈에우세비우 마카리우 Eusebio Macario〉(1879)· 〈무질서한 패거리 A Corja〉(1880)에서는 그들의 문체와 주제를 풍자적으로 모방했다. 그는 자연주의에 대해 계속 반감을 표하면서도 자연주의의 특징인 객관적 묘사와 사실성을 점점 더 많이 수용하는 모순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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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화폐속의 인물 바예호 (페루:10,000) 태어남
페루의 시인. 페루 10,000(1988년 발행)
바예호(Cesar (Abraham) Vallejo) 1892. 3. 16 ~ 1938. 4. 15.
망명생활을 하면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통해 사회변혁을 주창한 주요인물이 되었다. 스페인인과 원주민 간의 혼혈 가문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굶주림과 가난, 원주민에게 가해지는 불의를 직접 목격했다. 1913~17년에 트루히요대학교에 다니면서 문학을 공부해 논문 〈카스티야 시에 나타난 낭만주의 El romanticismo en la poesia castellana〉(1954)를 썼고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첫 시집 〈검은 사자(使者) Los heraldos negros〉(1918)는 그의 어머니와 형이 죽었을 때의 상실감과 이에 따른 허무감, 인생 본연의 한계, 사회적 압력과 부정 때문에 인간이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는 무력함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문체상 고답주의와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1920년에는 원주민과 관련된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거의 3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이 경험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더욱 고조시켰고 그의 여생을 괴롭힌 우울증의 발단이 되었다. 단편집 〈음계 Escalas melografiadas〉(1922)와 좀더 복잡한 시들을 모은 〈트릴세 Trilce〉(1922)는 수감기간에 착상된 것이다. 대표작인 〈트릴세〉에서 그는 생물학적 삶과 사회조직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한계, 인간 본래의 열망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괴리감 등을 표현하기 위해 신조어(新造語)?구어체, 혁신적인 구조, 놀랄 만한 이미지들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전통과의 완전한 결별을 보여주었다. 정신적으로 혼란상태에 있는 한 원주민의 몰락을 그린 짧은 심리소설 〈미개인의 우화 Fabula salvaje〉(1923)를 발표한 뒤 파리로 가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파리 생활은 힘겨운 것이었고 번역, 언어 교습, 정치적 저술 활동 등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자신의 원주민 혈통으로 인해 사람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한 반면, 중요한 전위예술가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페루 공산당을 창설한 친구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가 창간한 〈아마우타 Amauta〉지에 기고함으로써 조국인 페루와 계속 관련을 맺었다. 그는 인간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 시어(詩語)는 어떤 전통적인 장치도 없어야 하며, 동시에 문학은 대중의 이상에 부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체험한 사회의 악습과 불의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1928, 1929년 2차례의 러시아 방문으로 정치적 사명감에 고취되어 1931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 정치투쟁가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추방된 후 마드리드로 갔다. 그곳에서 프롤레타리아 소설 〈텅스텐 El tungsteno〉(1931)을 썼는데, 이 작품은 페루 텅스텐 광산의 원주민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착취와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1932년 파리로 돌아간 뒤에 내란(1936~39)이 일어난 스페인에서 2년간 지냈다. 스페인 내란은 후기의 주요시집 〈인간적 시 Poemas humanos〉(1939)에 실린 대부분의 시에 영감을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집단적인 악?소외?절망 등에 봉착해 위기에 빠진 한 산업사회를 묵시적인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1930년대에 쓴 대부분의 시는 그가 죽은 뒤 출판되었다. 소설과 시 작품들은 〈소설 및 단편 전집 Novelas y cuentos completos〉(1970)?〈시 전집 Obra poetica completa〉(1974)에 각각 실려 있다. 바예호에 관한 책으로는 앙드레 코이네가 쓴 〈세사르 바예호 Cesar Vallejo〉(1968), 제임스 히긴스가 쓴 〈바예호의 후기 시 작품에 나타난 인생관과 인간관 Vision del hombre y de la vida en las ultimas obras poeticas de Vallejo〉(1968), 앙헬 플로레스가 편집한 〈세사르 바예호에의 접근 Aproximaciones a Cesar Vallejo〉(전2권, 1971), 장 프랑코의 〈세사르 바예호:시와 침묵의 변증법 Cear Vallejo:The Dialectics of Poetry and Silence〉(197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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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틱낫한 스님 방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틱낫한 스님은 "마치 고향에 온 것 같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2003년 3월 16일 모자를 벗어 왼손에 든 틱낫한 스님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 왔다”며 두 손을 모았다. 시인이자 평화운동가이며 불교계의 지도자인 틱낫한 스님은 한국에서의 500시간을 이렇게 시작했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리다 싶을 정도의 빡빡한 일정을 열과 성을 다해 치러냈고,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점가에는 ‘틱낫한 붐’이 일어 수많은 그의 저서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강연장은 그를 보려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특유의 ‘명상 완보(緩步)’로 전국을 돌며 고통받고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대구에서는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에 참석해 “마음속 자비를 끌어내 슬픔에 잠긴 이곳에 퍼뜨리자”며 두 손을 모았고, 광주에서는 민주화의 성지 5·18묘역을 참배한 데 이어 ‘내 안의 평화 그리고 화해’를 주제로 강연했다. 스님은 특히 한반도 분단과 반전·평화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방한 중 이라크전 발발 소식을 접한 그는 그날 밤 숙소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은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북한 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굶주린 상황에서도 핵개발에 많은 군비를 들이고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며 “남과 북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우리는 형제라는 씨앗이 깃들어 있으니 그 씨앗에 물을 주면 평화가 시작되고 꽃을 피울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자신의 저서를 읽고 감동받은 독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도 가졌다. 특히 조선일보가 주최한 서울 코엑스 강연에는 3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성황을 이뤘다. 지난 1995년 첫 방한 당시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는 이번에도 만사를 제치고 한국의 명찰과 고승들을 방문하고 싶어했다. 백양사와 송광사·범어사·실상사를 잇달아 방문한 그는 “한국 절에서 듣는 독경 소리가 참 아름답고 귀에 익숙하다”며 “여러 전생 가운데 한 번쯤은 한국에서 승려였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박20일의 긴 일정을 마치고 4월 4일 프랑스 ‘플럼 빌리지’로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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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 별세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82)이 2001년 3월 16일 서울 혜화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박 전 대행은 1980년 5월 21일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된 뒤, 그 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 전 전 대통령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8월 27일까지 12일 동안 재직했다.
5공이 출범한 이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5공의 `원로`로 예우를 받았다. 그는 제3공화국의 대표적인 경제관료 출신이었다.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등을 통해 수출 및 공업화의 기반을 닦았다.
1919년 제주에서 태어나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와 일본 교토 동지사 상고를 졸업하고, 1948년 상공부 무역국장을 거쳐 1953년 군에 들어가 국방부 경리국장 등을 지낸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상공부로 복귀,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돼 장관을 두 번 역임하고 1967년 10월부터 1년 8개월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계엄군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계엄군의 입장을 대변했고, 신군부 정권 장악 과정에서 권력 이양과 국정 관리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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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프랑스의 사상가 라 로쉬코프(1613-1680) 태어남
"연인 사이에 서로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The reason lovers are never weary of each other is
because they are always talking about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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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독일의 물리학자 옴 태어남
전류와 저항, 전압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여 "전류의 세기는
전압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한다"는 '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옴의 법칙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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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미국 로켓의 선구자 고더드, 세계 최초 액체 연료 로켓 발사
액체 산소와 가솔린을 원료로 한 이 로켓은 2.5초 동안 56m까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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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년 제2대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 사망
1406년 제생원서 동녀에게 의약 교육, 기생 명칭이 생김
1420년 조선 세종 2년, 집현전 설치.
1521년 마젤란, 필리핀 군도 발견.
1660년 제1차 예송논쟁으로 남인과 서인 대립
1751년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매디슨 출생
1787년 독일 물리학자 옴 출생.
1789년 `옴의 법칙`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그 옴 출생
1802년 미국의회, 뉴욕주 웨스트 인트에 육군사관학교 개설 허용.
1839년 프랑스 시인 쉴리 프리돔 출생
1871년 흥선대원군, 사액서원 47처만 남기고 전국 서원 철폐 재지시-조
1880년 1905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한말의 의병장 문태수 출생
1897년 국내 우체규칙 공포.시행.
1898년 영국의 화가 A.비어즐리 사망.
1906년 홍주서 제2차 의병운동 시작, 일본경찰과 충돌
1911년 소설가 겸 평론가 김남천 출생
1915년 아동문학가 강소천 출생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남.
1921년 레닌, 신경제정책 채택.
1921년 소설가 이병주 출생
1921년 영국-소련, 통상조약 조인.
1923년 방정환 윤극영, 동경에서 색동회 조직
1926년 로버트 고더드, 세계 최초 액체 연료사용 로켓 발사에 성공.
1931년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데쓰오 출생
1935년 독일, 베르사이유 강화조약 폐기하고 재군비 선언.
1937년 영국의 정치가 오스틴 체임벌린 사망. 1925년 노벨평화상 수상
1937년 지진/沙里院지역 진도 3
1940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톨루치 출생
1940년 스웨덴 여류작가 S.O. 라게를리프 사망
1947년 조선적십자사 창립.
1948년 북한-중공, 비밀군사협정 체결.
1950년 한국-미국 선박기술협정 조인.
1955년 미국, 얄타회담 비밀문서 공개
1956년 한국, 세계기상기구(WMO)가입
1957년 유엔군, 이집트 경찰에 가자지구 치안권 이양
1958년 북한내 중국군 제1진 철수
1962년 소련, 우주차량 발사
1962년 수퍼 콘스터레이션기 추락, 107명 사망
1962년 정치활동정화법 공포
1963년 박정희의장, 군정4년 연장 가부 국민투표실시 선언, 정치활동 금지
1966년 미국 제미니8호 발사, 궤도를 돌던 아지나 로케트와 최초 우주도킹 성공
1968년 미군, 남베트남 손미村 미라이마을에서 주민 500명 학살
1969년 베네수엘라 여객기 추락 155명 사망
1969년 주문진에 무장간첩 침투
1973년 외무부, 중공과 대륙붕 협의용의 표명
1977년 검인정교과서 부정사건
1978년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수상, 붉은여단에 납치-피살
1979년 중국군, 베트남에서 철군 완료
1979년 한일대륙붕운영권자 추첨
1981년 제3세계 연극제 서울서 개막
1981년 중국서 1억 6천만년전 공룡화석 발견 보도
1982년 중앙청 국립박물관으로 정부청사 이동 결의
1983년 최초의 한미합작은행인 한미은행 업무 개시
1994년 생수 시판 허용
1995년 한국-체코 투자보장협정 체결
2000년 日 원폭투하 조종사 윌슨 피어비 사망
2001년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 별세
2001년 오카와 세가회장 사망
2001년 이규혁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남자 1,500m에서 세계신기록 수립
2001년 중국, 네곳서 대형 폭발사고…108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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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첫댓글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집현전 설치가 보입니다... 어질고 학문에 정진하는 일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학을 배우다 보면 끝임없이 접하게 되는 `옴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게오르그 옴이 출생하였네요... 우리나라도 어느학문을 연구하다 보면 쉼없이 접할만한 큰 과학자가 나왔으면 합니다.
있는자 들만의 사고방식은 무엇일까? ....... 아직까지도 있는자의 권한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인것같습니다. 없는자는 무엇이 한스러워 이렇게 ...... 삶이 아직도 이것이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은 못하겠지만, 분명한것은 현사회는 모난 행동 성격의 소유자는 살아 남을 수없다는 것이는 분명한것 같다.
무릇 부자란 돈을 많이 쓰거나 아니면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가르키며 벌기만 하고 쓰지를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자개념은 버는 게 아니고 쓰는 게 기준이나 유독 우리나라에만 버는 데만 신경쓰는 사람들이 많네요. 빌딩이 있으면서도 저 할머니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