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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10]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5,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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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 <독서 : 1열왕 18,41-46 / 복음 : 마태 5,20-26>
인간의 분노에 대하여 성 프란치스코는, 그것은 곧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 라고 권고한다. 성인의 이 권고는 본디 분노란 생의 주권자인 하느님의 권리이기에 인간의 분노는 이런 하느님의 권리를 빼앗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성인은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2장 19절의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라는 말씀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신적 분노의 정당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 바로 하느님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곧 하느님께서는 선 자체시기에 악과 공존하실 수 없고, 또한 사랑 자체시기에 사랑의 거부를 용인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분노는 악을 향한 대항이며, 사랑의 거부에 대한 표출이다. 이 때문에 성경에 예수님께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셨고 (마태 23, 1 이하; 요한 3, 36) 또 사랑을 거부한 이들에게 분노하는 하느님 (마태 25, 41 이하) 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편 인간의 분노는 무시당함 또는 자기주도권의 강한 표출이자 ‘자기애’ 의 발로다. 따라서 인간의 분노는 근본적으로 삶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부정함이며,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권고대로 분노는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 대한 판결 또한 삶의 원 주인인 하느님한테 받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형제를 보고 분노하는 사람은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은 분노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넘어 최후 심판 때 하느님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에 대한 신앙적 심판을 미리 그리게 하는 말씀이다.
과연 그분 앞에 서 있는 나는 분노에 대한 주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만큼 형제들에 대한 주님의 주도권을 온전히 긍정하는가 ? 각자는 진지하고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말씀자료 : 김기곤 신부(전주교구 나바위 천주교회)] |
[다해]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I 묵상기도방 |
시작기도 : ▷
주님, 분노와 위협을 거두시어 모든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세상에 구원과 평화를 주소서.
지진을 없애시고 불행한 소식을 거두어들이소서.
풍부한 결실을 내게 하시고 억눌린 이들에게 기쁨을 주소서. 즐거움이 넘치는 여름을 주시고 온화함이 감도는 겨울을 주소서.
분노를 그치시고 온 세상에 당신 자비가 감돌게 하소서.
- 당신을 찾나이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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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고국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들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어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 5,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적독서 : 삶의 방식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에 관해 써놓은 책들이 수백 권은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보며 깊은 감명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는가 하면 대답은 거의 <아니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이성보다는 감정이 훨씬 승한 존재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성과 감정이 생겨나는 뇌의 구조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바른 생활을 강도하는 이성적 생각은 우리의 대뇌피질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대뇌피질은 인간의 두뇌 중에서 가장 최근에 진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신피질이라고도 하죠. 반면에 무수한 상처와 분노, 피해의식, 충동과 욕망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감정은 훨씬 오래전부터 진화되어 온 구피질이 주관합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이 구피질 담당입니다. 그러니 감정이 이성보다 승할 수 밖에요. 감동적인 처세술로 가득한 책을 보면 화가 나는 사람이나 그런 책을 수십 권 읽고도 난 왜 늘 이 모양인가 한탄하는 사람이나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양창순 | '지푸라기가 되어주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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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10주간 목요일(2010-06-10) I 복음묵상방 |
열왕기 상·하권은 사울과 다윗으로 시작된 군주제가 이어진 기원전 971-561년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군주제에 기만당하여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고 나서야, 백성은 하느님의 정의로 되돌아온다. 특히 엘리야는 바알 신이라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극적으로 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결국 아합 임금과 백성은 하느님께 되돌아오고, 왕국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맞게 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다.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원인과 뿌리를 없애라고 하신다. 곧, 가까운 형제자매들에게 싫은 감정을 품거나 무관심하지 말고, 가장 하찮은 잘못, 특히 성까지도 내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화->바보->미친놈' : 점층적 가중처벌
사방이 어둑해지자 어느 랍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높은 담을 애써 넘어 들어온 도둑은 랍비의 정원에서 몰래 감자를 캐내어 포대에 담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감자를 가득 채운 포대를 매고 가려는데 글쎄 너무 많은 감자를 담았던지라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광경을 창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랍비, 급히 방을 나가 도둑이 자루를 매고 집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기척을 듣고 달려온 집사가 이 장면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며 주인의 행동에 불평을 쏟아내었다.
랍비는 집사에게 "그가 도둑이라 하여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긴 하지만 과연 랍비의 의로움은 칭찬 받을만하다.
예수께서도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을 시작하신다. 이 시작은 단순한 가르침의 시작이 아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구약의 중심율법에 참된 정의의 칼을 대기 시작하신 것이다.(마태 10,34 참조) 이 정의의 칼은 율법의 일점 일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정신과 그 참뜻을 드러내어 밝혀줄 것이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육화(肉化)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到來)했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에 요구되고 통용될 새로운 헌법(憲法)을 선포하신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의 헌법이라면(출애 19-24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을 위한 헌법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상설교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선포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내용으로는 진복선언(5,3-12)과 주님의 기도(6,9-13)를 손꼽을 수 있겠고, 후자(後者)의 내용은 산상설교의 그 나머지 부분에 속한다.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 주셨다. 그러나 그 나라 안에서 살게 될 백성의 자격은 백성 스스로가 취득해야 한다.
여기서 자격(資格)이란 상태(狀態)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상황(狀況)적 행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선택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얻는 것이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삶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20절)
마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우선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이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자는 재판에 회부된다.(출애 20,13; 신명 5,17)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에게 "성"(화)만 내어도 그를 재판에 부치신다. 뿐만 아니라 "바보"라는 욕하는 자는 중앙법정에, 나아가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자에게 "지옥불"을 선고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살인과 성냄이 같은 처벌인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들에 점층적으로 더 무거운 처벌이 선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심화하여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형제나 자매에게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렵다. 마태오는 자기 공동체에 분노와 욕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즉각적인 화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다보면 쉽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법이다. 욕설을 뱉는 자도 그렇겠지만 듣는 자의 기분은 더 나쁘다. 점잖은 욕설이나 기분 좋은 욕설은 없다. 화는 욕설을, 욕설은 주먹을, 주먹은 상처를 불러오고 급기야는 남의 생명을 상하게 한다. 살다보면 화낼 일도 많다. 그러나 화를 내면 거의 본능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이 문제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 화를 내기보다 침을 한번 삼켜보자.................◆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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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삶
주님은 율법과 예언서, 즉 성경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복음을 전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성경의 뜻에 벗어난 그릇된 가르침을 고쳐주고, 그리하여 성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구약성경을 권위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주님은 천지가 존재하는 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모두 다 그대로 남아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율법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잘 못 받아들이거나 또 그렇게 잘못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며, 율법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고 하느님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로 대접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려는 뜻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더 바르게 살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먼저 이 내용에 대해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I. 그리스도인과 율법
1. 율법의 역할들
우리는 어제복음 설명에서 율법에 예식법과 민법, 그리고 도덕법이 있으며, 이 중에서 계속적인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은 도덕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도덕법은 지금도 여전히 그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율법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함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줄 따름입니다."(로마 3,20)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율법을 모를 때에 우리는 자신이 올바르다, 의롭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연구하고 이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마땅히 가야 할 올바른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 아무도 이러한 올바른(의) 기준에 미칠 만큼 바르게(의롭게) 산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 행위의 기준을 재는 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가 없을 때에는 조금 구부러져도 그것이 구부러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똑바른 자로 재어보면 그것이 구부러졌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도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 할 올바른 기준을 제시함으로 우리 행위가 얼마나 하느님 앞에 잘 못했는 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후견인(감시자) 구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갈라 3,24)
사도 바오로는 (갈라 3,24)에서 이러한 율법의 역할을 "후견인(감시자)"의 역할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후견인이란 말(새번역성경에서는 '감시자'라고 함)은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란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자녀의 교육을 일시적으로 맡은 노예 교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당시에 부유한 로마 사람들은 대부분 노예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그 노예들 중에는 교육을 많이 받거나 재산관리 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경우 주인은 그 노예를 관리자(집사)로 삼아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때로 주인은 노예 중에서 똑똑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골라서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학교에 데리고 다니거나 그들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자녀들의 스승이 바로 "후견인(감시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들을 가르치고 교육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면 그들의 역할은 끝이 났습니다. 사도 바오르는 율법이 바로 이러한 후견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령 안에서 성숙한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3) 하느님의 뜻(의로움의 기준)을 보여줌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 119, 105)
율법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율법을 가리켜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이며, 내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1-4계명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경외하고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6-10계명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조사하면 613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이렇게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 248가지가 있고, 이런 일은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규들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의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는 자(rul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과 율법(2)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사람들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태도는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이것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 역시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율법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결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태도는 "신약 시대에는 은총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의 신자들에게는 사랑의 계명만이 있을 뿐, 율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율법 페지론자"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자들을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방탕한 삶을 살도록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은 결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 성경이 율법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율법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생각한 대로 주님은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가 스스로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사람의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율법을 행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약 성경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신자들이 자원해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약 성경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인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후에 율법을 행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에 율법은 여전히 하느님의 뜻을 제시하는 의로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II.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보다 더 의로운 삶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계명(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야고 2,10). 그러므로 주님은 신자들이 아무리 사소한 율법일지라도 그것을 하느님 말씀으로 인정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율법의 정신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보다 더 의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보다 나은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제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주님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같은 의로움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 생애를 율법을 위해 헌신한, 율법의 권위자였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율법을 기록했으며, 일생을 율법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은 의로운 삶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분리된다"는 말인데, 이는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분리시킨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기 위해서 율법보다 더 엄격한 예규(규례)들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2번씩 금식하였으며, 안식일에 1km이상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율법과 거룩함에 있어서 모든 백성들의 모델로 추앙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행위와 의로움이 성경의 뜻과는 다흐게 행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자들에게 그들보다도 더 의롭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뜻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보다 더 의로운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자처하는 올바른 행실이란 외적이며 형식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보다 손과 발을 깨끗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마태 23장)을 보면 어느 날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부정한 생각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정결케 되기 위해서 마음 안에 있는 부정한 생각을 정결케 하지 않고, 손과 발을 씻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7)"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를 칠한 무덤처럼 겉으로는 단정했지만, 그 안은 탐욕과 정욕의 냄새가 썩어 시체 썩는 냄새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마음과 행실은 도덕보다 의식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의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예식과 의식을 지키는 일에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건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과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강조했지만, 더 중요한 올바른 관계와 믿음과 신실함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말은 많이 하되 실천은 하지 않았으며,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셋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예규와 법규를 가지고 구약 성서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을 가지고 하느님이 명하신 부모 공경의 정신을 깨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쳐버리고 나는 이제 부모님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엄격한 예규를 만들어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안식일에 1km이상은 가면 안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0.9km씩 여러번 가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철저히 문자에 매여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안식일에 바늘을 옷에 꽂고 가도 안식일에 물건을 운반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예규를 수도 없이 만들어 하느님이 주신 안식일을 노예의 날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태 23,4)
넷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하며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보다 자신을 과시하고 높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에도 "세리와 다른 죄인들과 같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십일조를 드리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거룩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고 멸시했으며, 그들과 함께 교제하는 일도 금했습니다. 그들은 잔치에 가면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시장을 가면 인사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2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2)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믿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실과 영이 사라지고 형식과 위선만 남은 종교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종교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종교는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팔복에서 묵상한 것처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믿음은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의로움을 갈구하는 심령을 가진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시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겉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 중심이 되는 영혼과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사람 자체를 변화시켜 그들이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것에 순종하도록 요구합니다. 성령은 율법의 모양보다 정신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스스로 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원래 중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율법은 어떠한 것을 하지 말라는 명령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으며,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순결과 정절을 중시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킬 때에 바리새인들과 같이 문자에 매달리기 보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사이들처럼 여러 가지 규례로 자신을 노예로 만들지 말고, 하느님의 법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율법은 법 자체 안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법은 하느님을 나타내고 그 뜻을 따르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법 조항에만 매달리기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일에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은 우리 힘으로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하고 성령 안에서 말씀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외식, 위선하는 영이 아니라, 진실과 진리와 사랑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좆지 않고 성령을 좆아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율법의 정신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팔복은 이러한 진실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바로 하늘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III. 율법과 성령
산상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또한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산상설교에서 가장 앞에 나오는 8개의 축복은 하늘나라 백성에게 나타나는 특성이 무엇인지 개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나라 백성은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시작되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심령)을 가난하게 만들고, 죄에 대해 슬퍼 하며, 온유한 심령과 의에 대해 갈망하는 소원을 부어주십니다. 또한 성령은 사람들에게 자비한 심령과, 정결한 마음을 주시며, 평화를 만들고, 정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니다. 하늘나라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성령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하늘나라 백성들이 세상에서 썩어져 가는 세상을 부패로부터 막아주는 소금이며, 어두워진 세상을 비추어 주는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과 구약 성경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율법, 즉 구약 성경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반대한 것은 구약 성서가 아니라, 구약 성경을 벗어난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바로 잡고,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 5,21)부터 7장에 걸쳐서 하늘나라 백성의 올바른 삶이 어떻게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운(올바른) 삶보다도 더 나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5,21-7장)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마태 5,21-5장 끝)에는 바리사이들에 의해 왜곡된 6개의 사례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곳에서 율법이 어떻게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왜곡되어 왔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바로 잡고 있습니다. 2) 둘째로 (마태 6장)에서 주님은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경건 생활을 고발하고, 참된 경건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3)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의로움을 제시하고, 참된 의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러한 세 가지 내용 중에서 가장 앞에 나오는 (마태 5,21-5장 끝)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마태 5,21-5장 끝)에는 바리사이들에 의해 왜곡된 6개의 해석(21;살인, 27;간음, 31;이혼, 33;거짓맹세, 38;보복; 43;원수사랑)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주님의 참된 해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1)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3) 이러한 진술의 의미를 돕는 추가적인 설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 의해 왜곡되어진 율법들을 바로 잡고, 올바른 의미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1. ".........라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면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여기에서 언급된 "옛 사람"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옛 사람이 들은 것"은 곧 구약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주님께서 구약 성경과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는 주님의 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옛 사람에게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일부 학자 중에는 본문에 나오는 "옛 사람에게"(to)라고 번역한 말을 "옛 사람에 의해"(by)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옛 사람"을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율사와 바리사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낭독하고 가르치는 말을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회당에서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낭독하고 해설하는 말씀을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귀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회당에서 바리사이들이 읽어주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백성들이 "옛 사람에 의해 들은 말"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낭독과 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 성경 외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율법에 첨가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성경이 아닌 것을 성경처럼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해석에 여러 가지 그릇된 해석이 첨가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그러면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주님께서 진정한 권위자로서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설명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율법학자들(바리사이 포함)이 전통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율법학자들의 말을 인용해서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통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율법을 만드시고, 그것을 주신 하느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율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전통적인 교육 기관에서 전문적인 율법교육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을 근거로 해서 율법을 해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율법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느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율법을 해석하셨습니다.
책을 쓴 저자가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만드신 분이 그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만든 율법이 소위 전통적인 학자들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고 오용되는 것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러한 왜곡과 남용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율법학자들과 주님의 가르침의 차이
그러면 율법학자들의 해석과 주님의 가르침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6가지 사례를 비교해 보면 율법학자들과 주님의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율법학자들이 율법의 문자에 매달린 반면, 주님은 그 율법을 만든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2) 율법학자들이 겉으로 나타난 행동과 예식을 강조한 반면, 주님은 사람들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생각과 동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3) 율법학자들은 "....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일에 만족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4) 율법학자들은 율법으로 사람들을 구속한 반면, 주님은 자유로운 의사와 자원함으로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5) 율법학자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는 일에 매달린 반면, 주님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III. 살인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주님의 가르침
이제 주님은 구체적으로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율법관을 예시하면서 이를 교정하며 바로 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우리 주님께서 제시해 주신 6가지 실례 중에서 그 첫 번째 것으로서 제 6계명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제 1-5계명에 대해서는 이 곳에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사이들이 제 1-5계명을 잘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읽어보면 주님은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사랑과 부모 공경에 대해 왜곡하고 있는 점을 심하게 질책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제 1-5계명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채 제 6계명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바리사이들이 제 6계명의 정신을 어떻게 왜곡시켰으며,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제 6계명(살인)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마태 5,21)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율법 학자들이 성전(회당)에서 낭독해 주는 율법을 듣고, 이에 대한 그들의 해설을 들어왔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짐승을 음식으로 주시면서 사람의 생명은 해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누구든지 살인을 하면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그를 처형하라고 명하셨습니다(민수 35,30-31). 이 명령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 주신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 학자들은 이 계명에 대해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첫째로 율법학자들은 이 계명을 "고의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고의로 죽이지만 않으면 이 모든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이 계명 안에 포함된 하느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존귀성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법은 항상 그 선을 넘으면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 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만을 규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은 적극적인 선에 대해서 장려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처벌 규정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구호하라! 구호하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법이 이러한 명령을 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규정으로 인해 처벌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무너뜨릴 만한 최소한의 행위에 대해서만 규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의 기초에는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본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하는 제 6계명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기본 정신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학자들은 제 6계명을 가르치면서 생명의 존엄성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지만 않으면 제 6계명을 지킨 것"처럼 가르쳐 왔습니다. 어느 날 주님을 찾아 왔다가 돌아간 한 부자 청년 역시 자신이 모든 계명을 준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살인에 대한 심판을 "치안판사의 재판"에만 국한시켰습니다. 21절에서 언급된 "재판"이란 말은 지방 재판소의 재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살인에 대한 심판을 법적인 재판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 6계명에 대한 재판을 가르칠 때에 지방 재판소의 판결보다 먼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제 6계명은 사람을 지으신 하느님께서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의 생명을 학대하는 사람을 엄중하게 처벌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을 강조하지 않고, 재판소에서 시행하는 법적인 재판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재판소에 불려가서 재판을 받지 않는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리낌을 받지 않았습니다.
2. 제 6계명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22)
그러면 과연 제 6계명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기본 정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 6계명을 고의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지방 재판소의 재판에만 국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형제에 대한 분노나 모욕, 그리고 멸시감을 표현하는 모든 행위와 언어"까지도 살인 행위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제 6계명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형제에 대해 이유 없이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행위, 그리고 인격을 모독하는 모든 언어나 행위에 대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은 제 6계명을 "고의로 남의 생명을 죽이는 일"로 국한했던 바리사이들의 가르침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심판에 있어서 지방 재판소의 판결 뿐 아니라,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해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유 없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형제를 바보, 즉 쓸모 없는 놈이라고 멸시하는 사람은 공회, 즉 국가 재판소인 산헤드린 회의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고 저주하는 자는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 장소인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은 살인의 재판을 지방 재판소의 판결에만 국한시켰던 바리사이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1)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다.
"자식은 야훼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이다."(시편 127,3)
주님은 율법의 문자보다는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정신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살인을 금하는 명령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그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의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에, 그 누구도 그 생명을 멸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식은 야훼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따라서 그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거나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나, 권력을 많이 가지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나, 그 생명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서는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일을 크게 단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약한 자의 편이 되어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심판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은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의 자녀들과 아내를 고아와 과부로 만드시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생명이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은 존재이다.(창세 1,27. 9,1-6).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 9,6)
또한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의 모습(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9,1-6)을 보면 하느님께서 홍수 후에 노아에게 짐승들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다만 "짐승을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이 피에 있으며, 따라서 그 생명이 있는 피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짐승은 잡아먹을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절대로 해쳐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이유를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살인을 금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닮은 자녀들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듯이, 하느님도 자신의 모습을 가진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람들이 이웃의 생명을 대할 때에 하느님의 모습을 대하듯이 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존재로 알고 존귀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을 멸시하거나 해치는 일은 하느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못났으며, 따라서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자신을 지으신 하느님을 멸시하는 악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고,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멸시하거나 천대하지 말고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의 존엄성은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은 멸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 역시 하느님 앞에서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귀중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중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3)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는 살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22)
주님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나 언어를 살인 행위로 간주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고의로 해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유 없이 형제를 무안하게 하거나 멸시하고 저주하는 행위를 금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유 없이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은 그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가치한 존재로 만듭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에게 분노할 때에 무안함과 수치감을 느낍니다. 주님은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재판"은 지방 재판소에 끌려가서 판결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님은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바보"라는 말은 "쓸모 없는 놈"(worthless fellow)이란 말이며, "중앙법정에 넘겨진다"는 국가 최고 의결 기관(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형제의 존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언어나 행동을 살인 행위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위는 국회 청문회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을 만큼 엄중한 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형제에게 "미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미친 놈"(모레)이란 말은 욕설을 통해 형제의 인격을 모독하고 멸시하며 저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행위는 지옥 , 즉 게헨나의 불구덩이에 던져질 만한 중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바리사이들과 같이 율법의 문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율법을 주신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서 그 계명을 이해하고 준수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고의로 사람을 해치지만 않으면 제 6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계명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어떠한 언어나 행위 자체도 살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것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대할 때에 그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대할 때에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해치는 어떠한 언어나 행위도 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하느님의 모습을 대하듯이 존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이 바로 제 6계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IV. 하느님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1. 미사(예배)보다 화해가 먼저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주님은 제 6계명의 정신을 설명하신 후에 그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그 곳에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일이나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해결하는 문제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던 중에라도 중단하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형제와 화해하는 일을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먼저해야 할 우선순위의 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손으로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지닌 형제의 인격을 멸시, 모독, 저주하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다음과 같은 시편 기자의 고백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 만일 나쁜 뜻을 품었더라면 주께서는 아니 들어주셨으리라."(시편 66,18) 하느님은 카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미운 마음을 품고 있을 때에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카인에게 그의 마음에 있는 죄를 다스리라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그는 미움을 키워서 살인하고 말았습니다. 카인과 같이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면서 드리는 예배는 하느님 앞에 가증하고 위선적인 예배가 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또 한 가지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 사람을 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하느님은 남녀노소와 짐승까지 모두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아말렉 족속의 왕과 가축 중에 살진 것을 살려두었습니다. 사무엘에 사울 왕에게 갔을 때에 사울 왕은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사울 왕은 "저는 야훼께서 시키신 대로 다 하였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당신이 하느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이오? 또 소 우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이오?" 그 때에 사울 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양떼, 소떼 중에서도 좋은 놈을 살려두었다가 선생께서 모시는 야훼 하느님께 잡아 바치려고 끌어온 것입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은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으로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배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형제에게 분노하거나, 멸시, 또는 저주하면서 태연하게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것을 불법으로 빼앗거나, 가난한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아나 과부, 장애인과 같은 연약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나 권력자에게 뇌물을 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때에 멸시와 착취를 당한 사람들은 상처 입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약한 자의 편이 되어 착취한 자들을 처벌하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사람이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를 억울하게 한 일이 생각나면, 제물을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에 다시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말과 같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리는 중에 예배를 드리는 일에 장애가 될만한 일이 생각나면, 즉시 가서 그 장애물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 때에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이렇게 하느님은 예배보다도 우리가 삶 속에서 자비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형제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이웃을 멸시하거나 저주하지 말아야 하며,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각나면 지체하지 말고 즉시 가서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2. 법정으로 가는 길 도중에라도 긴급히 화해하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주님은 원수, 또는 고소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그와 신속하게 화해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은 만일 그와 급히 화해하지 않으면, 고소하는 자가 그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그 재판관이 형리에게 넘겨주어 감옥에 가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가 고소한 자와 타협을 보지 못하게 되면, 그는 결국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 재판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 그가 고소한자를 억울하게 한 일이 밝혀지면 그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경찰에 넘겨지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일단 이렇게 해서 옥에 갇히게 되면 "마지막 한푼"까지 모두 갚기 전에는 그 곳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호리"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고드란트"라는 로마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로마 화폐의 경우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드란트는 1/64데나리온에 해당했습니다. 만일 하루 노동자 임금을 5만원으로 계산하는 경우, 한 고드란트는 약 781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일단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재판관이 부과한 모든 벌금과 형벌을 지불해야만 그 곳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 형벌을 지불하지 않고 감옥에서 나오면 그는 탈옥수가 되어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이러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말을 했다고 합시다. 이 경우 명예를 훼손당한 사람은 분노하여 명예를 훼손한 사람을 명예훼손죄로 법원에 고소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명예를 훼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책은, 즉시 그를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그와 타협을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명예를 훼손한 사람이 자존심을 세우거나 감정이 격해져서 타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결국 명예를 훼손당한 사람은 법원에 명예를 훼손한 사람을 고발할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되어 이 문제가 재판정에 넘겨지면, 피고인은 오랫동안 까다롭고 피 말리는 재판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러한 재판과정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리고 만일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면, 그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모든 재판 비용을 지불하고 판사가 부과한 모든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경우 피고인은 판사가 부과한 모든 벌금과 형을 지불하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재판을 받아 본 사람은 왜 미리 고소인과 화해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크게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는 재판 과정에서 미리 화해했을 때보다 몇 배나 더 큰 희생과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길을 법정으로 같이 걸어가는 도상에서도 긴급히 화해하고 타협을 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재판이나 재판관은 비단 세상의 재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재판은 세상 재판 뿐 아니라, 더 높은 하늘의 재판, 즉 하느님의 심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며, 또한 억울한 자를 변호해 주시는 변호입니다. 하느님은 형제를 억울하게 한 경우, 그가 하느님께 호소하면 하느님은 그 일을 공정하게 판결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일단 형제가 그 억울함을 호소하게 되면, 그를 억울하게 한 사람에게 마지막 고트란트까지 다 갚을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형제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멸시하며 저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에 대해 형제와 화해하는 일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또 그 일을 지체하거나 지연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신자들이나 형제나 친구들끼리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사로 용서하지 못하거나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도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주님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결코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형제와 화해하는 일이 미사(예배)드리는 일보다도 더 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일을 내일로 미루어 버리거나 지연시킵니다. 그러나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미루거나 지연할 일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해야만 할 긴급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우리는 형제와 이웃들에게 분노하거나 그들의 인격을 멸시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들이 분노하여 하느님께 호소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 자주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해결하고 형제와 화해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한 채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향해 경고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와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 기도하여 힘을 얻어 형제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지금 하지 않으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처 입힌 형제와 화해하지 않으면, 그 형제는 하느님께 억울함을 호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호소를 들으시고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 따라 남김 없이 그 대가를 지불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형제를 억울하게 한 일이 없는지 살펴보고,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성령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묵상의 마무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탈출기 20장 13절의 말씀과 신명기 5장 17절의 계명을 들어 당신의 뜻을 말씀하신다. 살인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분노나 조롱까지도 마음 속에 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신다. 참으로 천국에 이르는 길은 힘들다. 살다보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내키지 않는 이웃이 있을 터인데 겉으로 나쁜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음 속에도 나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어느 노승의 예화가 생각납니다. 한참 명상을 하고 있는 노승에게 한 가족이 찾아와서 노승이 자신의 딸을 겁탈했다고 말한다. 노승의 대답은 "그런가" 뿐이었다. 10개월 후 이 가족들이 갓난 아기를 안고 다시 찾아와서는 아기가 노승의 얼굴을 닮았으므로 분명 당신이 겁탈을 해서 나은 아기라고 따진다. 노승의 대답은 "그런가" 뿐이다. 며칠 후 젊은 남녀가 아기를 안고 와서는 자기들의 아기인데 서로 정을 통한 사실이 알려질까봐 노승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사죄를 한다. 노승의 대답은 "그런가" 뿐 이었다.
살아가면서 여러 다툼이 있을 때 마다 나는 노승의 이 대답을 묵상한다. "그.런.가."
아직까지도 남의 허물에 대해 용서하는 마음 보다는 얼굴 붉히고 겉으로 욕하지 않아도 마음 속에는 앙심을 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천국을 열망해야 하는 신앙인으로서 그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 반성해 본다. 사실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을 만드신 조물주를 욕하는 셈인 것인데 내 자신은 늘 하느님을 욕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하느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 이러한 행위의 근원들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소원이다.
남의 결점을 발견할 때 그것을 고쳐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상대방의 마음의 그릇 크기를 생각해야 하고 또 내 자신이 감정을 갖고 아랫사람 대하듯이 남의 결점을 고쳐주려 한다면 서로간에 상처를 받게 될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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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서로 화해하는 삶
오늘복음에는 화해라는 주제가 나옵니다. 화해의 의미는 상처와 용서의 치유라는 뜻입니다. 송봉모 신부의 '상처와 용서'라는 소책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용서라는 말 앞에서 종교적 콤플렉스를 느낀다. 용서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어진다, 마치 자신이 위선자 같고, 하느님 앞에서 죄송스러움을 느낀다. 사순절이나 대림시기에 판공성사를 받은 많은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시달린다. <나는 정말로 용서하였는가?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아프고 섭섭한 것일까?>
여기에 용서에 대한 종교적인 오해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면 더 이상 그 사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에 대한 오해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행위로서 용서한다는 것>과 <느낌의 차원에서 용서를 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선택이고 결심이지만 곧 종교적인 행위이지만 내가 느낌으로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와는 별개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삶 속에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가 되기 전 그 시간 동안 일어나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괴로울 때,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고 합니다. 곧 <이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바라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진정한 화해, 즉 상처와 용서라는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가들 만의 전통에 의한 율법적 울타리에 예속되어 단죄의식만 키워갔습니다. 네가티브적(부정적, 소극적) 사고방식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들어오지 않으면 적으로 몰고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오늘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자기들만의 올바름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대명제에는 못미치지만...말입니다.
I. 시작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들은 자기들 스스로 율법적인 올바른 삶을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적인 올바른(의) 삶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필경 율법으로 올바른 삶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분이시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않고서는 율법적인 올바름(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 옳게 산다(의로운 삶)는 뜻?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과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 옳게 산다는 뜻?
바리사이나 율사들은 율법 조문에 의한 철저한 율법적인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그 같은 율법적인 올바른 삶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하느님의 공의에 이를 수 없었습니까? 첫째로는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신 참 뜻을 알 수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고 했습니다(갈라 3,19). 우리 인간들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그 죄를 알게하려고 주석(설명서)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범한 죄를 깨닫게 하려고 더 상세히 해설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율법을 지키므로 올바름(의)에 이를 줄 알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열심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적인 행동들이 결국 외식으로 흘러 주님의 질책과 저주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히브리인에게 모세를 통해서 내려준 원래의 율법 속성은 올바른 기준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율법을 범한 죄인을 단죄하므로 그 죄를 보여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울법학자들은 그런 율법으로 올바름(의)를 얻으려고 하는 바람에, 하늘나라는 고사하고 단죄를 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관은 지나친 외식으로 치장하였기에, 그들의 행위로는 하늘나라는 커녕 하느님의 저주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2. 바리사이파 사라들보다 더 옳게 산다함은?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옳게 산다는 말은 율법을 바리사이나 율사들보다 더 잘 지킴으로 얻을 수 있는 올바른 삶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이 올바름이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올바른 삶이란 그리스도의 완전성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 안에는 다음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그 올바른 관계란 바리사이나 율사들이 자랑하는 의가 아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갈라 2,16).
하늘나라에는 완전한 올바른 삶의 소유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옮음을 얻으려는 바리사이나 울사들을 경계하고 믿음으로 올바른 관계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잘 못된 율법관과 생활 태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그리고 올바르게 믿음으로서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죄를 짓지 않겠다고 소극적으로 피신해서, 또는 단절된 삶을 사는 방법은 틀렸다는 것으로서,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속에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죄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갖지도 않고 행위도 하지 않는 광의적 개념의 율법준수 정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2)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순종의 생활을 하되 결코 바리사이나 율사들 처럼 외향적인,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하는 식으로 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 주시고 구원을 주신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올바른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뜻이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기를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열매야말로 바리사이나 율사들의 위선적인 올바름보다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올바른 열매인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인의 살인죄
우리는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처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범죄를 저질러도 상관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작 안되어 있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란 더 이상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와 함께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에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맺는 올바른 관계는 영원한 생명이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갖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이 올바른 관계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법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이며 이곳에서 부수적으로 이 사랑의 법을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로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우리의 생활에 이제 더 이상 올바른 관계(의)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로마 7,4). 이 열매가 그리스도의 생활에 나타내야 할 의인 것입니다.
2. 살인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율법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에서 살인죄에 대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만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신명 16,18-20). 이 율법 조문대로 그들은 살인하여 그들의 손에 사람을 죽인 피가 묻지 아니하면 살인죄를 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는 그 참 뜻이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살인에 대한 악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마음속에 살인의 악의를 품지 말아야 할 것을 아울러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살인의 동기가 되는 요소를 품고 있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그는 살인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실제적으로 살인죄에까지는 미치지 않았어도 살인의 악의를 품고 있는 이상, 그 마음의 근원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는 살인죄를 범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1) 형제에게 성(화)를 내는 사람은 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을 낸다는 말은 마음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말합니다. 이런 화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범죄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화를 띤 헤로데왕이 어떤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까? 헤로데는 매우 화를 내며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역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다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에페 4,25에서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 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 했습니다.
(2)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보란 말은 '형편없고 쓸모 없는 놈'이란 뜻을 가진 낱말입니다. 이런 욕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욕설입니다. 중앙법정에 념겨진다는 말은 종교적 최고 재판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말하며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대 앞을 상징한 표현입니다.
(3)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친 놈이란 말은 지금 우리가 우리 생활 중에 사용하는 단순한 욕설이 아닙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우둔하여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고 무시하는 자'란 뜻 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치욕적인 모욕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미친 놈이란 욕은 한 사람의 생명을 하느님과 단절시켜 그를 단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같은 자의 죄는 지옥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일. 판단하는 일, 단죄하는 일 등은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화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화해란 서로 평화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화해의 방법을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여도 야훼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신다"(잠언 21,2)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행위보다 그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마음은 성령이 함께한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사랑의 실천 방법으로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형제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풀고 사랑으로 피차에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율법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용서와 화해란 말은 곧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원래의 모습대로 놓은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이 용서하고, 화해할 것이 있다면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너무도 달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삶 가운데서 그렇게 쉽사리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먹기는 하되 시간이 지나면 또 꼬이기 시작하고 아픕니다. 그러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 회피하고, 포기하고, 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선택이고 결심이지만 곧 종교적인 행위이지만 내가 느낌으로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와는 별개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삶 속에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가 되기 전 그 시간 동안 일어나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괴로울 때,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고 합니다.
곧 <이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시기를 벌써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지요? 우리에게는 화해를 위해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끄집어 내십시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해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십시오. 여전히 아픔은 지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심이 곧 그 아픔을 치유하는 시작입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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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주님의 율법 해석 : 사후조치가 아닌 사전예방
오늘복음도 율법에 연관된 말씀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내용들은 율법에 대한 해설서, 또는 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기본전제를 깔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지키고 있던 율법 정신이나 그 실행의 의미는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외형적이었습니다. 오로지 문자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 뿐, 그 율법의 문자 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뜻을 살피지 못하는 그들의 삶 행태였습니다.
그들의 율법해석이나 재판 과정은 매우 근시안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조문대로만 해석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로 다스렸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이나 용서라는 것을 전혀 고려치 않았습니다. 그냥 무섭고 엄격할 뿐이었습니다. 울타리를 쳐놓고 그 속에서만 얽메이게 하는 금지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 해석과 판단은 범위가 좁고 관용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짓이 긴 기도를 하고 나서 과부의 집을 빼앗거나 간음하다가 들킨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율법 적용은 죄를 지은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보지 않고 외적인 상태만 보고 판결했습니다. 피상적이고 냉정할 뿐 한 치의 여유도 인정도 사정도 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 검경이나 법관들이 하는 짓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권위 있는 새로운 해석이었으며 율법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 것이고, 외면의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세계를 읽으신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단죄와 처벌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주시며, 죄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시는 방향으로 법을 해석하셨습니다. 죄악에 대한 근원적인 접근부터 막아내시려는(사전예방) 의지가 예수님의 참된 율법 완성의 목표였습니다.
오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해석을 하시고 계신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살인만을 철저히 막으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의 동기가 되고 말미가 되는 분노와 미움부터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움과 분노를 쌓게 되면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의 분노와 미움 없이 실수로 저질러진 살인은 하느님 앞에서 살인이 안 된다는 법 해석도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법 이론은 내적인 것이며 인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펼치려는 지향이 중요한 것이지 결코 하느님의 두려운 심판을 보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평화스럽게 지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첩경임을 분명히 하시고자 하는 것이 율법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 그리워 사랑 받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고 일치하는 가운데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법 해석입니다.
'형제를 가리켜 바보, 미친 놈'...하고 욕하는 것이 바로 살인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것은 결코 심한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만 잘 났고 남은 못 났다고 생각하는 데서 온갖 시비와 암투가 벌어지고 그것이 심하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남의 잘못을 꼬집어 내고 그것을 동네방네 퍼뜨리고 잘못한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망신을 주어서 매장시켜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생각은 바로 살인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하신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인가에게 바보, 멍청이, 미련한 놈, 못된 사람 등으로 매도하며 흉보고 비난함으로써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면 하느님 앞에 예물을 즉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욕을 주고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을 욕하고 비난하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그 사람과 화해 또는 용서를 청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율법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출발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아멘...........◆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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