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의 "임꺽정"
얼마 전의 일이다. 전화가 왔다. 요지인즉슨, '당신은 무엇 때문에 민족 문학의 걸작 "임꺽정"이라는 표현을 썼느냐'라는 식의 사뭇 시비조였다. 하잘것없는 도적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서 "임꺽정"에다가 그마마한 찬사를 했느냐는 것이다. 당황했다. 어조로 보아 정보를 수집하려거나 법적인 시비를 하자는 것은 아님을 알겠으되 덜컥 걱정이 앞섰다. 명색이 대학 교수요 현대 문학 전공학자가 감정적인 시비의 여지를 남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필화는 이렇게 시작했다.
순간 즉흥적인 답을 할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정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혹 시간이 있거든 아무아무 날쯤이 좋겠으니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식의 사교적인 답변으로 말을 물렸던 것이다,
전화의 저 쪽은 선드러지게 그러겠노라며 전화를 거두었다. 끊고 나니 다시 걱정이 들었다. 대체 누구일까, "임꺽정"을 읽어 보기나 한 사람일까.'민족 문학의 걸작"임꺽정"이란 표현 어디가 거슬렸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찾아오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와서 이야기라도 한다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어떤 문학사적 의미가 있고 어째서 민족 문학의 걸작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말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오지 않는다면 기껏 한 말이 허사로 돌아간다. 차라리 전화로라도 대강을 이야기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원망도 일었다. 연구자의 학술적 용어를 시비하고 나서는 것은 대체 무슨 어깃장이란 말인가!
나는 지난해 11월2일,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홍명희 문학제'의 책자를 펴들었다. 대머리가 조금 벗겨진 벽초 홍명희(1888∼1968)의 사진이며, 그가 괴산 삼일 만세 시위의 주동자로 잡혀가서 재판받던 기록이며, 상해로 싱가포르로 유랑하던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 연보이며를 다시 훑어보고는 내가 이야기한 '민족 문학의 걸작 "임꺽정"과 홍명희'를 재차 되삭여 보았다.
생전에 쓴 딱 한 편의 소설이 이토록 많은 문제를 남길 줄이야 당자인들 알았으랴! 사실 "임꺽정"은 소설이라기보다 우리 고전 문학의 '전'양식에다가 시중에 떠돌던 야담을 보탠 것이라서 소설이라고 규정하기도 어렵지만 여하간 한 편이 남긴 파장은 다른 작가의 수십 권 소설보다도 큰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임꺽정"에 대해서 '민족어의 보고'라든가 '조선어와 생명을 같이하여 영구히 전할 문자'라는 등의 평가가 있지만 오랫동안 "임꺽정"을 연구한 성균관 대학의 임형택 교수께서 하신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진정한 민족 문학은 "임꺽정"으로부터다"라는 표현에서 "임꺽정" 의 문학사적 의미는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임형택 교수의 이러한 규정이 없더라도 나는 '민족 문학의 걸작 "임꺽정"이라고 있을 것이므로 그 전화에 대한 답은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무 날이 왔다. 때아닌 긴장으로 오전을 보내고 오후가 되었는데 거짓말같이 전화 속의 사람이 등장했던 것이니······. 돌이켜보면 이것은 서부 활극 영화의 한 장면인 듯싶기만 했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옷 매무새며 행동거지가 매우 단정한 사람이었다. 전혀 시비를 걸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서울에서 사는데 '강남 제비 친구 따라''홍명희 문학제'에 참가했다는 것 , 청주에는 회사일로 자주 들르기 때문에 오마고 약속을 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며 몇 년 전에 사계절판 "임꺽정"을 읽었노라고 부드레하게 덧붙였다. 전혀 시비조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당황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나도 할 말이 있겠지만 그의 어투는 전혀 시비조가 아니었고 그냥 한번 문학 이야기나 하고 싶어서 왔다는 식이어서 나는 당황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을 법하고 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 민족 문학 또는 소설가에서 그토록 중요한가를 설명했은즉······.
잘 알려진 대로 "임꺽정"은 조선조 명종 시대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이다.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해서 1941년 "조광"지에 미완의 연재를 마감할 때까지 약 14년여의 오랜 기간에 걸쳐 창작되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백정인데 우리는 이를 각별히 주목해야만 한다. 식민지 시대의 백정은 억눌린 조선 민중을 상징하는 것이고 백정을 통해서 민중적 울분을 담아 내려 한 홍명희의 창작 정신이야말로 민족주의적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민족의 처지를 그토록 애절하게 대변한 작품도 드물다. "임꺽정"은 "홍길동전"과 같은 '전'양식과 이야기로 떠돌던 야담을 차용해서 쓴, 그러니까 민족적 형식으로 민족적 내용을 담아 낸 민족 문학의 적자다. 충청도 괴산의 사대부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민중적 세계관을 가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니 그의 창작 의도는 아무리 칭송해도 잘못이 아니다. 민족의 언어를 살리기 위해 애쓴 그의 공로는 문학사에 영원한 빛날 것이다.
작가 홍명희는 좌파와 우파가 싸우지 말고 손을 잡고 민족 독립을 위해 매진해야 한다는 신간회의 주동자였다. 비록 월북을 했지만 그는 좌파와 우파가 싸워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으리라는 는 등 변호사가 변론을 하듯 천산지산으로 나는 내달았다.
한데 그의 표정이 영 엇나갔다. 말이 끝나자 그가 하는 말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 멀리 나를 찾아왔느냐는 눈길을 보내자 이번엔 그가 당황하는 것 같았다. 곧 이어 그는 그토록 중요하다는 "임꺽정"이 그렇다면 어째서 여지껏 잘 알려지지 않았냐는 그것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서 나는 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임꺽정"의 문학사적 의미를 말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임꺽정"이 금기시되었던가 또한 알고 있을 것이므로. 다만 한 마디, 학문적 양심과 민족적 관점을 가지고 지난 십년 간 "임꺽정"을 문학사에 복권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신 상명 대학의 강영주 교수와 성균관 대학의 임형택 교수의 노력이 없었던들 그 문학적 가치가 올바로 알려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나서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임꺽정"에 등장하는 선머슴 김원희나 기골이 장대한 사내 정흥채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차나 마시자고 말을 흐트렸다.
그는 그대로 바쁘고 나는 나대로 바쁜 그 날 오후, 우리는 만사를 내박치고 민족 문학, 친일 문학, 신간회의 좌우 합작, 통일 이후의 문학사 기술에서 장정일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즐거운 말을 달리고 또 달렸다. 필화가 아니라 필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