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足跡(족적:발자취)ㅡ 京城경성에서 咸陽함양까지
車相瓚 차상찬
우리 開闢社개벽사에서 癸亥年계해년(1923년) 新事業신사업으로 계획하던 「朝鮮文化조선문화의 基本調査기본조사」는 이제 이것을 실현하게 되였다. 먼저 慶南경남에 着도착하야 그 實況실황을 조사할새 本社主幹본사주간 金起廛김기전씨와 나는 그 조사원으로 뽑히게되었다. 우리 일행은 2월 1일에 京城경성을 꼭 떠나 목적지로 향하려고 작정하였으나 多端고단한 浮世세상의 생활은 자연 분망하야 2일 오후에야 비로소 출발하게 되얏다. 나는 오후 6시에 行裝행장을 수습하고 京城驛경성역으로 갔다. 7시 20분이 되얏다. 사람을 催促재촉하는 기적소리에 전송하는사람들의 따뜻한 손을 놓고, 「평안이잘 잇거라. 陽春양춘 3월에나 돌아오마」 하고 離別詞이별가사를 부르면서 차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퍽퍽 소리를 지르며 연기를 토하더니 점차 속도를 가하야 껙 소리 한 마듸에 고만 京城驛을 떠낫다.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앉어있는 동안에 車는 벌서 龍山驛용산역을 지나 漢江鐵橋한강철교를 건너간다. 때는 正정히 음력 12월 17일이라 東동으로 솟아오는 明月밝은달이 漢江한강에 비치워 上下天光하늘빛이이 一色한색이 되고 冠岳山관악산에 쌓인 눈은 은세계를 이루워 車中으로(기차속에서) 내다보니 과연 「月白달도하얐고, 雪白눈도하얐고, 天地白천지가 하얀색」이다. 차가 水原수원에 다다르니 달빛은 점점 밝아 천지가 거울과 같고 西湖서호 의 얼음은 萬張만장의 유리를 펴인 듯 하다. 만일에 기차가 우리의 자유를 속박지 안이할 것같으면 杭眉亭항미정 과 訪花隨柳亭방화수류정 의 夜色야색도 구경하고 華虹門화홍문, 華山陵화산릉의 舊跡옛유적도 탐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정한 기차는 삼십육계에 走爲上策최상책인 줄행랑으로 머무르지 않고 자꾸 달아난다. 鳥山오산, 平澤평택, 成歡성환, 全義전의... 등 驛역을 얼른 지나 鳥致院조치원에 이르니 밤이 점점 깊고 몸도 자연 피곤하다. 몸을 침대에 의탁하야 잠을 이루니 芙江부강, 沃川옥천, 永同영동, 秋風嶺추풍령, 金泉김천, 倭館외관, 大邱대구, 慶山경산, 淸道청도, 楡川유천, 密陽밀양 등 驛역에 半千里반천리 도로는 片時春夢잠든 중에 다가고 말었다. 차는 三浪津삼랑진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새로 다섯 点(새벽5시)이 되얏다. 우리 두 사람은 여긔에서 馬山車마산차를 갈어타게 됨. 나의 가진 「파스(차표)」는 京城경성과 釜山부산간을 통행하는 것인 고로 驛長역장에게 특별교섭을 하야 馬山마산까지도 통행하게 되였다. 5시 20분에 차가 출발하야 洛東驛낙동역에 이르니 東方동방이 점점 밝아오는데 洛東江낙동강은 벌써 解氷해빙이 되야 洋洋양양이 흐른다. 어졔밤 京城경성을 떠날 때에 漢江한강은 어름(얼음)이 아직 튼튼하야 氷上빙상으로 人馬사람과말이 통행하는 것을 보았더니 洛東江낙동강은 벌써 解永해빙되였스니 (얼음이녹았으니) 기후의 차이는 말을 안해도 자연이 알겠다고 小春소춘과 말을 하면서 楡林유림, 進永진영, 舊馬山구 마산을 얼른 지나 馬山驛마산역에 當頭당도하니 이 정차장은 三馬線삼마선의 최종점이다
. 행장을 수습해 차에서 내리니 馬山마산에 있는 각 여관의 안내자들은 무슨 친절한 정이나 있는 듯이 쫒아와서 어느 여관이 좋습니다, 어느 하숙이 편리함니다 하고 목셩 높은 嶺南령남말로 왓작 떠들어 정차장이 떠나갈 듯 하다. 어떤 사람의 旅行詩여행시에 「看過山容疑舊土간과산용의구토 忽聞人語覺殊鄕홀문인어각수향」「[지나가다 산을보고 옛날엔어떤모습이었을까 의문이생긴다면 그지방사람의 말소리를 듣게되면 홀연히 깨닫게된다]」이란 句구절를 보았더니 참 과연 그러하다. 사람의 말만 듣고도 嶺南地方영남지방인 줄 알겠다. 우리는 京城경성에있는 사람이라도 지방사정을 대개 짐작하니까 별로 괴이하게 여길것이 없겠지만은 만일에 초행이고 볼 것 같으면 무슨 쌈(싸움)이나 하러 달겨드는 줄로 알기 쉽겠다. 나는 돈주고 먹는 밤에 아모 여관이라도 잘해주는 곳으로 가겠다고 웃으면서 생각나는대로 그 중 한 사람에게 행장을 위탁하얏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먼저 말했느니, 어쨌느니 하고서 서로 쌈을 하야 또 왓작 떠든다. 우리 두 사람은 정신이 먹먹하야 아모 말도 못하고 있었더니 자기네끼리 문제를 해결하고 도로 우리가 지정한 사람의 집으로 가게 되였다. 우리는 孤雲臺고운대로부터 살살 불어드는 새벽바람을 안고, 깜박깜박 꺼저가는 馬山市街마산시가의 전등을 바라보며 안내자를 따라서 여관으로 갔다. 晋州行진주행의 자동차시간을 마치랴고 허둥지둥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나니 차가 벌써 떠나려고 行客여행객을 재촉한다. 우리는 다시 행장을 가지고 자동차 우의 사람이 되였다. 나는 馬山마산이 초행이지만은 시간의 관계로 시가지도 잘 보지 못하고 꿈속같이 떠났다. 馬山灣마산만, 月影臺월영대, 斗尺山두척산, 近衛丘근위구의 遠景원경(먼경치)만 바라보고 晉州진주의 路길로 향하얏다. 天邊하늘가에 紅日붉은해가 점점 높아오니 南國남국의 風光풍광은 旅客여행객으로 하야금 상쾌한감정을느끼게 한다. 산 위에는 눈이 다 녹고 물가에는 풀이 벌써 파릇파릇하며 沿路연로(큰깉근처) 좌우에는 집집마다 綠竹녹죽(푸른대나무)이 猗猗의의하다 (아름답고 무성하다). 이것은 京城경성에서 보지 못하던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도로 沿邊연변의 빈민이 생활하는 왜소한 가옥을 보면 自然자연히 悲感비감한(슬푼) 눈물이 흐른다. 아아 다 같은 자유의 民민이오 평등의 人인이지만은 어찌이다지 사회의 제도가 불공평하고 불완전하야 어떤 사람은 高臺廣室고대광실을 잘 지어 놓고 안락한 생활을 하며 어떤 사람은 2, 3間칸 斗屋두옥(아주작은집)에 窓壁창벽(창문)이 파괴하야 風雨풍우(비바람)를 잘 가리지 못하고 朝夕조석(아침저녘)에 糊口之策호구지책이 없어 밤낮으로 근심을 하는가. 이것이 自來(본래) 資本主義자본주의와 班閥主義반벌주의(양반문벌제도)의 害毒해독(폐해)이 아닌가. 北鮮북선에도 물론 빈부의 차이가 있지만은 南鮮남선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이것을 본 나는 자연 불평이 심중에 충만하얏다 . 그럭저럭 하는 중에 차는 벌써 中里중리를 다달았다 路中로중에는 未久미구에(멀지않아) 개통될 馬木線鐵道마목선철도의 工夫(인부)들이 떼를 지여 간다. 길도 험하거니와 자동차가 날거서 매우 위태하다. 한참 가노라니 晉州진주로 향하는 牛車우차(소가끄는수레)수십 대가 路上노상에서 休憩휴게(휴식)한다. 우리의 차를 보고 피하려고 하던 차에 마침 晉州진주에서 馬山마산으로 가는 자동차 1대가 風雨가치(쏜살같이) 몰고오다가 어떤 牛車우차에 바퀴가 抵觸접촉된 모양이다. 운전수가 뛰어내려 다짜고짜 牛車軍우차꾼의 상투를 잡어끌고 발길로 차며 뺌을 때리다 못하야 길로 마치 개잡어 끌듯 한다. 그 牛車軍우차꾼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 하나 悖惡無道패악무도한 그 운전수 놈은 자꾸 때린다. 다른 牛車軍은 수십 명이나 있지만은 남의 일이라고 먹먹히 보고만있다. 우리 두 사람은 이것을 보다가 하도 기가 막혀서 저놈들 다 죽은 놈들이니 南鮮남선의 노동자는 심장이 없는 놈들이니, 京城경성이나 平安道평안도같으면 벌써 다른 牛車軍우차꾼들이 운전수 놈을 때려 죽엿느니 하고 분을 참다 못하야 말이라도 한 마듸 하려고 차에 뛰어내리니 그 자도 때릴만큼 때렸는지, 양심이 회복되였는지 그만 그치엿다. 떡메로 치는 놈은 떡메로 친다고 만일 우리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완력만 있고 보면 그 자야 그만 두었던지 계속하던지 간에 人道인간도리를 위하야서도 한번 잡어패고 싶지만은 완력이 능히 그 자를 굴복시키지 못할진댄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하고 抑制억지로 분을 참고 다시 차로 올라탔다. 참 南鮮남선의 노동자야말로 너무도 유순하고 무능하다. 이것은 前日전일(지난날)에 양반에게 절대복종하야 자기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뺏겨도 아무 말도 못하던 遺傳性유전성과 또한 근래에 헌병보조원과 순사에게 無常(무수)한 압박을 당하야 양복입은 사람만 봐도 무서워서 불불 떨고 머리깎은 보통학교 학생만 봐도 나리님하는 弊習폐습에서 생긴 것이다. 조선노동자 중에도 南鮮남선의 노동자는 참 비참하고 가련하다 엇지하면 이러한 동포를 광명의 길로 인도할고하며 두 사람이 무한의 개탄을 같이 되였다. 이로부터 車차를 다시 몰아 晋州地境진주지경에 이르니 길은 점점 평탄하나 解凍해동된 흙이 牛馬車우마차 등에 유린되야 마치 수렁논같이 되였다 . 다시 차를 재촉하야 晋州沃野진주옥야를 밟아보고 南江橋남강교를 건너 晋州城內진주성내로 들어갔다. 정류장에 이르니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여러 가지가 다 생소할 뿐이다. 부득이 운전수에게 여관을 하나 안내하라고 청한즉 운전수는 大安洞 中央旅館대안동중앙여관을 指示지시한다(제시한다). 우리는 行具행장꾸러미를 인부에게 맡기고 여관으로 가다가 途中도중에서 마침 우리를 영접하려고 오는 當地 당지天道敎 宗法師천도교종법사 를 만났다. 피차에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따뜻한 손을 잡고 그간 여러가지 情話정담를 하면서 여관으로 들어갔다. . 主客주객이 마주 앉어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시가지를 구경하려고 여관을 떠나 나섰다. 엇더한 음식집에 들어가서 晋州진주의 명물인 비빔밥 한 그릇씩을 잔뜩 먹고 다시 路길을나서 飛鳳山下비봉산하로 건너가서 飛鳳潭비봉담에 이르니 千尺천척의 潭水담수는 春波춘파(봄의물결)가 方生방생하야(살아움직여) 洋洋浩浩양양호호 흐르는데 春光춘광(봄빛)을 사랑하는 南國남국의 佳人가인들은 삼삼오오 隊대(무리)를 지여 한가히 빨래한다. 우리는 潭上담상에서 暫時間잠시간 莊叟장수(장자와혜자노인)의 濠上之樂호상지락(호상강에서의고사)을 취하다가 다시 步보를 變변하야(발길을돌려) 시가지로 향하였다. 晋州俗語진주속담에 「一匙見三蠅일시견삼승이오 三步逢一妓삼보봉일기」(한숟가락에세마리파리를보고 세걸음에한기생을본다)라는 말을 들었더니 기후관계로 파리는 볼 수 없으나 기생은 과연 많은 모양이다. 골목마다 紅粧羅裙홍장나삼이 오락가락하야 行客여행객의 眼안(눈)을 현란케 한다. 천천히 緩步완보하야 南江남강연안으로 향하니 論介娘논개낭자의 萬古芳名만고방명(길이남을이름)을 자랑하는 義娘岩의낭암은 江畔강반(강변)에 嵬然외연이(우뚝솟아) 홀로 섯고 3壯士장사 金千鎰김천익, 崔慶會최경회, 黃進황진 의 千載忠魂천대충혼을 吊喪조상(조문)하는 長江水장강수는 鳴咽명인이(목메이게울며/흐느끼며) 흐른다. 矗石樓촉석루에 올나가서 晋州城內진주성내를 바라보니 방방곡곡이 다 眼中(눈안)에 있다. 河崙矗石樓記하륜 총석루기에 「飛鳳山비봉산이 北북에 止지하고(지키고) 望晋망진이 南남에 拱공(공손이절)하며, 菁川청천이 西서에 繞요하고(둘러싸고) 長江장강이 其間기간에(그사이에) 流류하며(흐르며) 東西諸山동서제산이(동서쪽모든산이) 宛轉四環완전사환(뚜렷이사방을빙빙돌며선회하듯한다)」이라 한 것은 참 晋州城진주성의 지형을 畵회한(그린듯한) 것이라. 晋州진주는 慶南경남의 중심지오 도청소재지다. 우리 조선민족이 가장 恨한이 많고, 눈물이 많고 피 많이 흘린곳이다. 宣廟龍蛇亂陷城선묘용사난함성 할시에(선조때용사의난으로 성이함락될때) 에 우리 晋州 동포의 祖先선조 60,000여명이 일시에 순절한 곳이다. 아무리 剛腸鐵肝강장철간의(냉담한) 人인(사람)이라도 矗石樓척석루에 오르면 滿衿만금의(옷깃가득) 淚루(눈물)를 뿌리지 안이하지 못할 곳이다. 나는 난간에 의지하야 千古천고에 壯絶悲絶장절비절한(아주장하고많이비통한) 3壯士장사의 立節時입절시(한평생 절개를 굽히지 않을때) 노래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一盃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長江之水滔滔兮장강지수도도혜, 波不窮兮魂不死파불궁혜혼불사」「「촉석루의세장사 한잔술로웃으며 장강물을 가르키네 장강의물은 도도히 흐르는데 그물결 다하지않으면 그혼도죽지않으리라」」를 부르다가 우연히 申維翰신유한씨의 「晋陽城外水東流진양성외수동류, 叢竹芳蘭綠暎州총죽방란녹영주」 (진양성밖강물은동쪽으로흐르고 울창한대와향기좋은난초는강물가에비쳐 녹음을발한다)운운의 韻운을 次차하야 一首일수의 詩시를 作작하얏다. -- 중략
우리 일행은 다시 矗石樓촉석루를 내려와 陳列館진열관을 구경한 후 西서쪽으로 廻회하야(돌아) 西將臺서장대, 北將臺북장대, 忠烈祠충렬사, 護國寺호국사를 보고 도청 後(뒤)를 經경하야(지나) 여관으로 歸귀하얏다(돌아왔다).
4일, 晴(맑음)이날은 일요일 晋州의 人士인사들은 일의 분망함을 不顧불고하고 밤에 또다시 찾어와서 인정풍속과 역사, 전설에 관한 여러가지 유익한 이야기를 하야주고 심야에 歸귀하얏다.
5일(월요), 晴청. 오전 11시경에 나는 東亞日報支局 記者 동아일보기자尹炳殷윤병은씨의 안내로 道廳도청에 가서 각종의 기사자료를 얻어가지고 와서 점심을 먹고 民間有志민간유지를 방문하얏다.
6일(화요), 晴. 7일(수요), 晴맑음. 오날은 마침 晉州진주의 장날인 고로 우리는 장구경을 하려고 시장에 나갔다. 晉州진주의 시장은 참 번창하다. 장소도 넓거니와 출품된 물건도 많다. 농산, 수산, 공업품, 축산 기타 각종의 잡화, 과실, 식료품 등없는 것이 없다. 北鮮地方북선지방 장시에서는 보지도 못하던 小鼓소고, 腰鼓요고, 錚쟁(꽹과리), 팽쉬, 부시돌, 黃황찍은 가리셕약까지 다 있다. 더구나 음력 歲末세말(년말)이 임박한 고로 각지의 행상들도 다 들어오고 各日興成각일흥성(오늘값을흥정)을 하려는 村農民촌농민들도 모두 와서 무려 수만여명이 와글와글 물끓듯 한다. 西鮮地方서선지방의 인민이 農夫歌농부가를 하던지 소설을 봐도 愁心歌調수심가사로 하듯이 南鮮남선의 인민은 물건사라고 외치는 소리까지도 모두다 六字拍육자배기 調가사가 아니면 短歌調단가사이다. 참 壯觀장관이오 奇觀기이한관경이다. 우리 두 사람은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무슨 물건이나 살 듯이 가격도 물어보고 구경도 하얏다. 한 시간이나 돌아다니다가 敎區교구로 가니 떡국으로 점심을 준다. 먹고 晋州진주에서 제일 名區명소인 南江下流 남강하류赤壁 적벽구경을 하러갔다. 往路(가는길)에 또한 장시에 들어가 文魚문어, 乾柿건시(곳감), 白糖백당(흰설탕/흰엿) 등을 사가지고 桃花勝地도화승지(복숭아꽃으로이름난)로 유명한 玉峯里옥봉리를 지나 南江남강을 順流순류하야 赤壁적벽에 다다르니 과연 岩石암석도 기괴하고 景槪경개(경치)가 絶勝절승하다(빼어나다). 작년 秋추 7월 旣望기망(음력16일)에 假者 蘇東坡가짜소동파가 많이 생겨 일반의 비평까지 듣게 된 것도 無理무리의(이치안맞는) 事사가(일이) 아니다. 우리는 문장이 뛰어난게아니니까 蘇東坡소동파의 赤壁賦적벽부 같은 美文(아름다운문장)은 짓지 못하지만은 美文미문 대신에 文魚문어나 먹자하고 사가지고 간 文魚문어를 논아 먹으며 石逕斜路석경사로(경사진돌길)로 내려가니 岩壁上암석상에(위에) 李載現이재현의 題名제명 한 것이 두렷이 뵈인다. 이것은 前日(전에)에 觀察使관찰사로 別般별반 惡政악정을 다하고 인민의 재산을 橫奪횡탈하야 晋州진주의 흙을 세 치까지 먹엇다는 동요를읊던 皇族황족의 李載現이재현이다. 그가 觀察使관찰사로 한참 잘 호강할 따에는 晋州邑진주읍에서 東동으로 20여리 되는 靑谷寺청곡사를 날마다 가서 妓樂기락(기녀와즐김)으로 질탕이 놀다가 밤중에 돌아올 때면 沿路人民연로인민으로 炬火거화:횃불(밤바라기)를 들게 하야 20여리가 每夜매야(매일밤) 不夜城불야성을 이르렀고 南江남강에 船遊선유(뱃놀이)를 하면 수백의 船雙선쌍을 幾日式 執留기일식집류하야(몇일씩잡아놓고) 全江전강(모든강)을 連環연환함(계속해서돎)으로 江水(강물)가 흐르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各郡각 군의 名妓명기를 선택하야 觀察府관찰부에 직속케 하고 京鄕경향의 蕩子浪輩탕자낭배를 모두모와 晝夜遊逸주야유일함(매일일은 안 하고 제멋대로 놂)으로 수풀에 두꺼비 끌틋시 각지 기생들이 자꾸 모여들어 본래 20여명에 불과하던 妓기생이 1년내에 700여명에 달하였었다. 지금까지 晋州진주에 기생이 많은 것은 全전혀(모두)그 李이씨의 遺德유덕(덕택)이라 한다. 과연 그는 무죄한 농민의 고혈을 얼마나 짜먹었으며 국가에 죄악은 얼마나 지었는가. 惡악을 積적한(쌓은) 者자는 天(하늘)이 禍화로써 報보한다고(인과응보) 그가 지금에 衣食의식거리가 없어 아우의 집에서 신세를 지우며 다 해진 쇠똥벙거지에 맞지 안는 짝짝이 고무신짝을 끌고 風病풍병(중풍) 마진 입살(입술)을 실룩~하고 京城市街경성시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참 天意천의(하늘의뜻)가 무심하지 않다. 못된 일을 다하고도몇 백년이나 遺臭유취(오명/악명)를 전하럇던지 그의 題名제명[표제(標題)나 제목(題目)의 이름한 것]을 보면 참 가소롭고 가련하다. 우리는 이런 말 저런 말하는 중에 석양은 벌서 玉峯山옥봉산에 반사되고 집을 찾는 까마귀 무리는 飛鳳山下비봉산아래로 날어든다. 우리는 그만 걸음을을 돌려 삼삼오오로 흩어저가는 場軍장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성내로 돌아왔다.
多情多感다정다감한 晋陽城진양성을 떠나 水明山紫수명산자(경치가 아름다운)의 丹城古郡단성고성으로
예정이 있는 우리 일행은 하루라도 바삐 晋州진주의 일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랴 하였으나 多情多感다정다감한 晋陽城진주성은 자연 우리로 하야금 4, 5일을 소비케 하였다. 질풍같이 달려가는 차는 飛鳳山비봉산밑을 얼른 지나간다. 矗石樓촉석루는 구름 밖으로 점점 멀어졌다. 40리 가량이나 가서 吐峴토현에 당도하니 晋州郡界진주군계가 다 되고 여기서부터는 丹城단성이다. 丹城은 참 이름과 같이 산도 붉고 들도 붉다. 黃州土色황주토색이 누루러 黃州황주라 하듯이 丹城단성은 土色(흙색)이 붉어 丹城단성이다. 순식간에 차는 벌써 新安驛신안역 정류장에 이르럿다. 우리는 차에서 나려 잠시 休憩휴게하다가 인부를 얻어 行具행구(짐꾸러미)를 지우고 新安驛싱안역을 건너 丹城古邑內단성고읍 안으로 향하얏다. 新基坪신기평에 이르니 우리를 마지랴고 거긔까지 와서 고대하고 잇다. 城內里성내리에 入입하였다. 여관에서 점심을 먹고 먼저 城內全市街성내전시가를 시찰. 丹城단성은 원래 小邑소읍인 중 山淸산청의 屬郡속군이 된 후로(大正대정3년 1914년3월 1일) 더욱 凋殘조잔하야(망하여 쇠퇴하여).시찰하는 人사람으로 하야금 寂寞蕭條적막소조(고요하고 쓸쓸한)의 感느낌을일으킨다. 그러나 天然천연의 景槪경개과 인물의 산출과 산업의 발전은 다른 雄村巨郡웅촌고군(커다란 군)에 손색이 少無소무하다(없다). 이는 晉江진강의 상류 新安江신안강이 灣回만회하고(굽이져휘돌아감) 江上강상에 嚴惡山엄악산이 屹立흘립하였(우뚝솟았)스며 西서에는 來山래산이 있고 北북에는 景槪 경치이름 다 좋은 明月명월, 白馬백마 兩山양쪽산이 遙遙擁立요요옹립하고 東北동북으로 赤壁적벽이 錦屛금병(비단병풍)과 같이 나열하였으며 南山남산에는 尼丘山니구산이 聳翼용익(날개를솟구치듯)하였다. 黙谷묵곡, 明紬명주, 文臺문대의 礪石려석(숫돌같은바위), 淸溪磁器청계자기와 白雲陶器백운도기, 城內靑葱성내 청총벼은 本面본면(단성)의 특산물로 慶南경남에서 유명하고 江城강성(文益漸문익점)군의 出天출천의(하늘이낸) 孝효자와 大綿대면(목화)을 移種이종한(옮겨심은) 德덕은 세인이 다 추모하며 인민의 富力부력 3,000석 이상이 6인, 500석 내지 1,000석까지 하는 사람이 5, 6인이나 된다. 참 죽어도 실속이 많은 곳이다. 나는 李漢東리한동씨에게 丹城단성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도 듣고 또 郡誌군지를 얻어서 名勝명승, 古蹟고적, 人物인물, 風俗풍속 등을 瞭然요연이(확실하게) 알었다. 참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朝鮮棉花조선면화의 根源地근원지 培養洞배양동을 踏査답사하고 慶南경남의 第一 模範村제일모범촌인 黙谷里묵곡리를 訪問방문함.
9일(토요), 晴쾌청. 朝飯조반에 面所면소에 가서 面長 孫秉國면장손병국씨를 방문하였다. 丹城名所단성명소의 안내를 청한 즉 此이를 승낙한다. 즉시 출발하야 먼저 조선면화의 발원지 培養洞배양동(今지금 沙月里사월리)을 답사하얏다. 此培養洞이배양동은 江城강성(丹城古號단성의 고호)君군 文益漸문익점선생의 古基고기(옛터)라 尙今아직지금까지 그의 孝子碑효자비가 있고 其碑閣그비각의 南남에는 약 십오륙坪평되는 장방형의 田(밭)이 있는데(名曰 培養田명일배양전) 此차는 선생이 목화를 手植수식하고 시험배양하던 田밭이다. 그러나 今지금에는 其中間(그가운데로) 新作路신작로가 통하야 약 4분의 1은 도로가 되고 其田그밭은 東西동서로 양분되였다. 나는 선생의 碑閣비각과 그 밭을 볼 때에 감개가 무량하였다. 오날 우리 조선민족이 木棉衣목면의를 着착하야(입고) 육체는 완전 보호하게 된 것은 全전혀(모두) 선생의 덕이언만은 시대가 踈遠속원하고(빨리멀어지고) 인심이 杇朴오박(야박)하야 선생의 碑閣비각이 風雨풍우에 퇴락되고 선생의 遺田유전(남겨준밭)이 도로에 入입하였으되 此이를 보존 기념하랴는 人인이 一個일개인도 無무함은너무도 한심하고 可惜가석(애석)한 일이다. 況且항차 국산을 장려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족적으로 선생을 숭배하고 또는 선생의 遺跡유적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일행은 개탄을 不禁불금(금하지못)하면서 其地그땅를 떠나 慶南제일 模範村모범촌이란 黙谷里묵고리로 향하였다. 十里明沙십리명사에 蒼松綠竹창송녹죽이 간간이 叢生총생한(울창한) 琵琶島上비파도상에서 流入遷客유입천객(昔日流謫地지난날 류적지/유배지 )의 寂寞孤魂적막고혼을 吊조하고 新安江신안강을 渡도하야 약1町정을 迂回우회하니 山谷산곡이 平濶평활(평평)한데 인가가 즐비(170호)하고 洞동의 주위에는 竹林죽림(대숲)과 栗林율림(밤나무숲)이 鬱密울밀(울창)하며 鷄鳴犬吠계명견폐(닭이울고개가짖는)의 聲성(소리)이 四隣사린(사방가까운곳)에 달하야 완연이(뚜렷히) 陶淵明도연명의 柴桑村자상촌을 간 것 같다. 洞口동구에서 崔斗秀최두수씨를 만나 氏씨의 家(집)으로 入입하니 氏씨는 그 洞內동내의 유력한 人으로 家勢가세도 不貧불빈한(가난하지않은) 모양이다. 가옥도 淸楚청초하거니와 庭園정원도 상당히 치장하였는데 나의 눈에 선득 먼저 뵈이는 것은 連理樹연리수(일명 相思木상사목)이다. 나는 前日전일에 白樂天백낙천의 長恨歌장한가에「 在地願爲連理樹재지원이연리수」라는 글만 보고 실물은 보지 못하얏더니 이제 그 실물을 보매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여 주인에게 그 나무의 특징을 물었다. 주인은 말하기를 그 나무는 葉(잎)과 花(꽃)의 형태가 全혀(모두) 李(오얏나무)와 相似(서로비슷)한데 황색의 實(과실)이 있어 難産난산하는 부인의 靈藥영약이 되고 其枝그가지는 항상 相對直上상대직상하여 아무리 人工인공으로 분열케하여도 도로 相對상대하는(마주보는) 특성이 있는데 慶南경남에도 희귀한 식물이라 한다(其後그후 昌寧창녕에서 又 또此樹이나무를 見견함). 相思(서로생각하는) 情정이 많은 나는 이 相思樹邊상사나무주변에서 또 한참 相思상사하다가 주인집 사랑으로 드러갔다. 나는 주인에게 그 洞里동리의 풍속, 습관과 模範村모범된 이유를 물으니 주인은 또 대답하되 우리 洞里동리는 다른 것은 모범될 것이 없고 다만 주민이 근검하며 自來副業자래부업이 多(많다)하야 매년 明紬명주 약 80匹필 시가 6,000원, 栗밤 30여石석 시가 900여원, 竹物죽물이 약 1,500원 계 9,400여원 其中그중 明紬명주는(품질 견고) 인민이 貧寒빈한(가난)한 자가 없으며 세금도 인민이 자진납부함으로 官公吏관공리의 督促出張독촉출장하는 일이 없다 한다. 개인이나 단체나 세금만 잘 내면 유일한 모범으로 認인정하는 收入主義수입주의의 현 정치하에서는 참 모범될 만하다. 하여간 인민이 생산에 힘을 쓰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시간이 급급함으로 우리 일행은 주인에게 즉시 고별하고 그 洞里에서 제일 부호요 제일 인색하야 되야지(돼지)의 별호를 듣는다는 李進士리진사집을 또 찾었다(其名그이름 鎭動진훈). 본치(남의 눈에 띄는 겉모양)는 없을지라도 墻垣장원(담)의 崇高숭고한 것, 가옥의 宏大굉대한(어마어마하게큰) 것은 外面외면만 봐도 참 부호다. 우리는 사랑으로 들어가니 의심많고 陰徵음징많고 인색한 여러가지 특색을 가진 주인공은 우리의 온 것을 不吉불길이아는 모양이다. . 우리는 물을 말을 묻고 주는 茶果다과를 먹은 후에 다시 떠나 新安江신안강을 건너서 召南村소남촌 을방문하고 丹城단성의 양반, 학자, 부호의 집중지 南沙里남사리를 한번 보려고 夕陽山路석양이든산길로 兩兩둘이둘이이 짝을 지어가는 목동과 동반하야 南沙里남사리로 들어갔다.
10일(토요), 晴. 나는 오전 7시경에 기상하였다. 昨日전날에는 해가져서 洞里동리의 전경을 잘 보지 못하였음으로 갑갑한 생각이 절로 나서 食前식전에 혼자 洞內동내를 순시하였다. 南沙里는 참 듣던 말과 같이 부호의 집중지다. 수백여 호 大村큰마을에 5, 60間칸씩 되는 瓦家와가(기와집)가 즐비한데다 其中그중 崔璇鎬최선호라 하는 이의 집은 慶南경남의 甲第갑부라 한다. 京釜線鐵道 沿路경부선철도연로나 晉州城內진주성내에서 왜소한 가옥만 본 나는 항상 不備불비한(제대로 정리되거나 갖추어 있지 않은) 생각이 많이 있더니 南沙里남사리부자들의 거대한 가옥을 보고 도리어 놀랐다. 各色 각색道廳所在도청소재지인 晉州城 진주성내 중에는 이러한 가옥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복, 음식 등을 보면 어찌 이러한 가옥을 건축할 생각이 났나 하고 혼자말하면서 주인의 집으로 돌아왔다. 때는 벌써 10시나 되엿는데 무사태평한 주인집에서는 朝飯조반이 아직 안되었다. 시간이 바쁜 우리는 번민 중에 있다가 11시경에야 비로소 朝飯(아침)을 먹고 떠나게 되였다. 어젯날 黙谷묵곡서부터 우리를 미행하던 순사는 어듸서 자고 또 崔氏家최씨가로 왔다. 추후에 전하는 말을 들은즉 그들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하야 夜警야경하고 가는 길이라 한다. 참 그들의 신경은 너무도 예민하다. 우리로 인하야 밤잠도 잘 못자게 된 것은 도로혀 가엽다. 뿍바우를 지나 尼丘山下니구산아래 탄탄대로를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며 간다. 漆亭里칠정리에셔 잠시 휴게하고 다시 천연의 콤라스를 놀이게 되니 여긔서부터는 矢川面 시천면所在地소재지가 약 10리 가량이라 한다. 鱖魚궐어(쏘가리)産出산출로 유명한 德山江덕산강을 끼고 (德山江에 鱖魚가 多産다산하는데 其味그맛이 極佳(훌륭)하야 속설에 德山소작인이 지주에게 鱖魚鱠궐어회를 주지 아니하면 논을 땐다는 말까지 有유함) 白雪洞백설동을 지나 入德입덕에 이르니 이 入德門입덕문은 南冥남명선생 曹植조식선생이 德山덕산에 歸隱(돌아와은거)할 시에 친필로 岩石上(암석위)에 入德門 三字입덕문세자를 써서 새긴 곳이라. 그는 道學君子도학군자일뿐 아니라 我東아동의 유수한 명필이라. 그의 쓰신 入德門 3字는 劃획이 雄建웅건하여 龍蛇용과뱀이飛騰비등함과 如한(같은)고로 此地(이땅에)에 유람하는 人은 반듯이 이것을 模寫모사하여 갔었다. 그러나 年前년전에 新作路신작로를 鑿착할시(뚫을 때)에 그 바우를 파괴하였음으로 선생의 필적은 爆烟(폭연)과 같이 소실되고 但단히(만일) 이것을 模寫모사하야 다른 바위에 移刻이각한(옮겨새긴) 것만 남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慨歎不己개탄불기하다가 다시 步(걸음)를 移이하얏다. 入德門에 入하기까지는 비록 산중이나 俗臭(속세의냄새)가 많더니 入德門을 入한 이후로는 洞府동부가 점점 深邃심수(깊고그윽)하고 白石淸溪백석청계가 曲曲(구비구비)이 흘러 運然운연히(옮겨서)別有天地별유천지에入입함과같다. 峰回路轉 봉회로전(산봉우리를돌아길로접어들어)하여 系里洞계동리에 入하니(들어가니) 해발 6,600척 되는 智異山지리산은 白雪백설이 皚皚애애하야(희고흰모양이) 나를 반기는 듯하다. 戱言허언(농담) 잘하는 나는 智異山지리산을 보고 申鏞九신용구씨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다. 前日(예전)에 車京錫차경석씨가 智異山지리산에 와서 車天子차천자가 하강하였다고 인민을 많이 유혹케 하였으니 나도 姓성이 車哥차가라 역시 車天子차천자라 칭하고 키크고, 수염좋은 당신은 申將軍신장군이라 하여 智異山下지리산아래 주민을 또 한번 유혹케하자 하였다. 却說각설, 우리 일행은 系里洞계동리로 들어가니 山谷산곡은 平開평개하야(평탄하게전개되어) 壺中호중(병이나항아리속)과 如한데(같은데) 수백여 호의 인가가 즐비하고 松竹송죽(소나무와대나무)과 柿木시목(감나무)이 處處(곳곳)에 林立림립하얏다(림목처럼 즐비하다). 우리는 權권씨의 지도로 德山旅館덕산려관에 들어가니 主婆(주인할머니) 은 우리를 반가이 맞어사랑으로 안내한다. . 나는 그를 보고 天台山천태산 36峯봉에서 烟霞연하를 호흡하던 麻姑女마고녀가 方丈山中방장산중으로 移來하얏나(옮겨왔나) 의심하였다. 少焉소언(잠시후)에 午饌오찬(점심)을 내오니 요리의 범절도 참 산중에서는 희귀한 善手선수다(솜씨가좋은사람). 우리는 이것을 飽喫포끽한(포만감이들게 먹은) 후 智異山산으로 불어오는 모진 북풍을 무릅쓰고 德川橋덕천교를 건너 矢川面所시천면소로 가다. 사무의 시간이 지났지만 특별이 面長면장을 청하야 面면에 관한 일반상황과 大學演習林대학연습림의 상황을 조사하고 즉시 여관으로돌아왔다. 夕飯(저녘)을 먹은 후에 주인은 목욕물을 준비하고 우리에게 목욕하라 권한다. 우리는 더욱 감사하게 思(생각)하고 목욕을 하니 몸도 자연 피곤하야 一夜(밤)를 別有天地 별유천지속에서 留宿유숙하였다.
11일(일요), 晴맑음. 나는 早起조기하야(일찍일어나) 세수를 하고 大學演習林대학연습림 看守(지키는) 靑木군(일본인)을 방문하야 演習林연습림에 관한 말을 듣고 歸路귀로(돌아오는길)에 南溟남명선생의 독서하던 山天齋산천재(先生所築선생이지은집))와 선생의 묘소를 拜觀배관하고 [(묘소는 系洞동계 后山후산에 있는데 그 神道碑文신도비문은 許眉叟(미수 허목), 宋尤菴(우암 송시열)이 撰찬함(글을짓다)] 여관으로 歸귀하야 朝飯조반을 먹은 후 德山덕산에서 조사한 여러가지 서류를 종합하야 一覽일람하였다. 外面외면으로 德山을 볼 때에는 산수가 佳麗가려하고(아름답고) 삼림, 과수, 전답 등이 구비하야 거기 주민은 아무 걱정도 없이 극락(천국과같은)생활을 하는 줄로 알기 쉬우나 각 방면으로 그 내막을 조사하면 참 비참하고 가련하다. 智異山지리산은 鄭堪錄정감록(예언서)에 소위 十勝之地십승지지라 하였지마는 甲午民衆亂갑오민중난과 其後그후 義兵亂의병난에 酷禍(참혹한화)를 獨當독당(홀로감당)하고 且저 大學演習林대학연습림이 생겨 그의 생명인 智異山지리산을 被奪피탈한(빼았은) 후로는 생활의 路로가(살아갈길이) 全無전무하며 (전혀없고) 南溟남명선생의 썩은 뼈를 울게(울겨) 먹는 떼만은 曹조씨 등살과 조선인의 血(피)을 흡수하는 일본인의 고리대금업자 때문에 못살 지경이다. 이름은 좋아 德山덕산이라하지만 실상은 毒山독산이라. 나는 德山人民덕산인민의 참상을 생각하고 無限무한의(끝없는) 慨歎(개탄)을 하면서 떠나려 하는 중 權泰漢권태한씨는 또 와서 當地産物이곳특산물 竹杖죽장(대 지팡이) 두개를 우리 兩人양인에게 기념품으로 준다. 우리는 감사히 받고 氏씨와 주인에게 작별한 후 洞口동네입구로 다시 나갔다.
나는 삼삼오오 흩어져 나오는 숫쟝사(숫파는장사꾼)들과 作伴작반하야(길 동무삼아) 여러 이야기를 하는 중에 벌써 漆亭里칠정리를 지나 南沙里남사리에 당도하였다. 路邊노변에서 歇脚갈각하고(잠깐 다리를쉬고) 다시 떠나 십여 리를 行행하니 山下(산아래) 一村(한마을)에 竹林죽림(대숲)이 深邃심구한데 수십호의 茅崖모애(언덕의띠로지은집)이 隱暎은영한다(숨어있는듯이 비친다). 이곳은 최근 嶺南영남의 巨儒거유 郭鍾奭곽종석씨의 居기거하던 升坪里승평리이다. 우리는 路邊(길가) 槐樹下괴목하(느티나무아래)에서 잠시 村容촌용(마을모습)을 살피다가 또 떠나 吹笛峯頭취적봉두(서로협조해서 산봉우리)를 밟고 살고내에 이르니 이는 出天(하늘이낸)의 효자 江城君강성군 文益漸문익점씨가 奉親봉친하랴고(부모님을받을어모시려고) 살(화살)을 노와 고기잡던 곳이다. 여긔에서는 丹城古邑단성고읍이 다 보인이다. 琵琶島비파도를 지나 江城君孝子碑강성군효자비를 다시 한번 보고 城內里 성내리여관으로 들어가니 11일은 그럭저럭 丹城단성에서 또 보내게 되였다.
山水佳麗산수가려한 山陰縣산음현에 이르러 駕洛亡國主仇衡王陵가락망국주 구형왕릉을 吊조문함.
12일(월요), 晴청. 우리는 朝飯(아침)을 먹은 후에 즉시 출발하야 姜益秀강익수씨의 안내로 江樓里강루리에 往왕하야(가서) 新安江신안강을 渡도하야(건너서) 山晉自働車停留場산진자동카정류장에 至지하니(도착하니) 차는 마침 와서 行客여행객을 기다린다. 우리는 山淸行산청행의 차표를 사가지고 전송하러 온 丹城有志단성유지 諸氏모두에게 고별한 후 차에 올르니 때는 오전 11시경이다. 차는 院旨驛원지역을 떠나 景槪絶勝경개절승한 赤壁적벽, 白馬백마 兩山(두산)을 등지고 春風춘풍이 슬슬 부러드는 蝴蝶樓호접루(일명 新要樓신요루)의 舊址(옛터)를 번개같이 지나 明月山下명월산아래 탄탄대로를 달려간다. 新安신안, 外松외송을 지나 泛鶴里범학리에 다다르니 산은 次次차차(점차) 높고, 물은 점점 맑은데 兩峽양협(양쪽협곡)의 雪景설경은 더욱 좋아 중국 山陰산음의 雪後景설후경과 과연 방불하다(거의비슷하다)(山淸산청 古號고호가 山陰산음 故인고로 云운). 차는 전속력을 가하여 달려가는 바람에 正谷정곡, 井亭정정 두 洞里동리는 등뒤로 片時편시(잠시동안)에 물너가고 벌써 山淸郡內산청군내 정류장 앞에왔다. 郡內군내의 전경을 살펴보니 듣던 바와 같이 山淸산청은 참 山水산수의 鄕향(마을)이다. 南남에는 三峯山삼봉산, 西서에는 態石山태석산이 屹立흘립하고(우뚝솟아있고) 北북에는 銀魚産地은어산지로 유명한 鏡湖江경호강이 萬丈白練만장백련과 如여히 會稽山회계산(郡군 後山뒷산)을 포위하야 南남으로 向流향류하고 江南岸강남안에는 老樹노수(늙은나무)가 울창한 絶壁上절벽위에 換鵝亭환아정(今 금普通學校 標本室보통학교표본실)이 翼然익연이(새가 날개를 편 것처럼 좌우가 넓게)臨림하고 東동에는 登鷄등계, 黃梅황매(無烟産地무연산지) 兩山양산이 遙遙相對요요상대하였다. 그러나 산악이 重疊중첩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현상보다 더 발전할 희망이 없을 것 같다. 申鏞九신용구씨의 안내로 塞洞(새동/색동) 慶興旅館경흥려관에 들어가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다시 용기를 내서 磁器産地자기산지로 유망한 今西面금서면 特里특리를 답사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관을 나와 竹杖洋鞋(죽장양혜)로 會稽山회계산등을 넘어 鏡湖江경호강을 건너간다. 鏡湖春水碧於烟, 白鳥雙飛夕照邊, 晩踏換鵝亭下路, 竹林深處有孤船.
배를 나려 夕陽山路석양산로로 特里특리를 바라보고 가니 石逕석경(돌길)이 崎嶇기구(험한모양세)하야 험하기도 하거니와 반쯤 녹은 눈이 대단이 滑膩활니하야(미끄러워서) 세 걸음에 한 번씩은 넘어진다. 구두에는 진흙칠이오 모자에 땀투셩이다. 허위~하고 10여리 되는 고개를 넘어가니 特里특리의 뒷산인 王山왕산이 점점 가까워 온다. 이 王山왕산은 駕洛國가락국 十世王열번째왕 金仇衡김구형이 新羅신라 法興王법흥왕에게 항복하고 此山이산北북 花山洞화산동에 至지하야 餘年여년(남은 생)을 送송하다가 死後사후(죽은후)에 此山이산에 葬매장한 고로 세인이 仍내하야 名명한 것이다. 나는 遙遙요요히 此亡國王차망국왕의 古陵고릉을 吊조하고 特里로 入입. 磁器硏究자기연구에 多大다대한(많은) 노력과 金力금력을 희생에 供제공한 閔泳直민영식씨를 방문하였다. 氏씨는 병석에 在재하여서도 오히려 磁器자기제조연구에 관한 서적을 보고 있다. 나는 磁器자기에 대한 여러가지 말과 시험한 성적품을 상세히 본 후 시간이 총총함으로 즉시 떠났다(此이것에 관한 상세한 事일은 別錄별록에 在재함). . 오후 7시경에 歸城귀성하야夕飯저녘을 먹은 후에 몸이 困피곤하여 즉시 취침하였다.
韓日古戰場한일고전장인 沙斤驛사근역을 過과하야(지나) 名勝古蹟명승고적이 豊富풍부한 咸陽城함양성으로.
13일(수요), 晴맑음.오전 11시에 山淸산청을 출발하였다. 오후 3시경에 沙斤驛사근역에 至지하니(당도하니) 此沙斤驛사근역(咸陽郡함양군)은 麗朝辛禑고리조신우 10년에 三道元帥삼도원수 裵克廉배극렴이 대군을 率솔하고(인솔하고)尙州상주로부터 來襲내습하는 왜구를 拒거하다(막아지키다)가 敗績패적하야(자기나라의패배) 朴修敬박수경, 裵克彦배극언 兩將양장이 立節입절하고(절개를지켜굽히지않고) 500여의 장정이 비참히 순국한 곳이다(其그 時당시 溪水계수가 盡赤진적하야(피가다하지않아) 仍名내명 血溪혈계라). 나는 李詹리첨씨의 「血濺咸陽原上草」혈천함양원상초란 此地이땅 懷古詩회고시를 誦송함에 비장한 눈물이 절로 흘렀다. 아ㅡ 우리 咸陽함양의 동포냐 此恨이한을 知지하는가(아는가), 否하는가(모르는가)? 오륙백년전의 일이라도 이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뼈가 매치고 피가 끓는다. 나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 또다시 西서으로 愁智峯수지봉을 바라보다가 뭇득 이 月明塚월명총 생각이 나서 懷古詩 一首회고시한수를 지엿다.
月明塚上月惟明, 環珮無聲蜀魄鳴, 此是人間膓斷處, 街童莫唱望東京
(俗傳昔時東京(慶州) 商人與沙斤驛美人月明愛商人一去月明日夜相思成病遂死埋於愁智峰上 其後商人聞其死來哭, 于墓前亦死人葬之同穴, 佔畢齋, 兪濡溪諸賢皆題詠, 望東京其歌 名)
인용 다음,네이버사전 출전 한국사데이터베이
◆晋州진주에서는 陰음 6월 晦日회일(음력으로그달마지막날)에 오는 비를 특히 陷城水함성수라 칭하나니 이것은 宣廟 선조癸巳年계사년 1593년6월 말일에 晋州진주가 함락될 시에 大雨대우가 온 所以소이라. 지금에도 비록 大旱中대한중(큰가믐)이나 6월 晦日회일이면 반드시 비가 오고 또 人畜사람과가축이 반드시 南江남강에 溺死익사한다 云
◆.寧山녕산에서는 索戰색전을 하던지 角力각력을 하던지 승전할 시에는 승전한 편에서 「오왜승전아 오왜승전아」를 부르고 돌아다닌다. 이것은 壬辰亂임진난에 郭忘憂堂망우당 곽재우선생이 昌寧창년火旺山城화왕산성을 據거하야 日兵일병과 戰勝전승하고 歌노래하던 勝戰歌승전가인데 「오왜」라 함은 鏖倭오왜(오살할 왜)의 의미다
◆昌寧郡守창녕군수의 돌자랑이라더니 昌寧창년은 참 돌天地천지다. 시가나 川邊천변이나 정원이나 돌 빼놓고는 아무 것도 없다. 昌寧住民창년주민은 참 모다 萬石君만석꾼
첫댓글 고맙습니다
南鮮-남쪽조선 北鮮-북륙대륙조선 을 의미했나 봅니다.
남강은 현재 어디를 말함인가요?
현 지리산은 1,915m로 위의 6600척과 비슷한 모양인 것으로 보아 교열로 보이고, 역사상의 지리산이었던 대륙 대별산은 1,777m로 얼추 비슷한 높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별산의 위쪽 동백산은 바로 회수 즉 낙동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산으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1140m)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비록 낮은 산이나 험하기가 화산에 버금가고, 수려하기기 황산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의 그 험했다고 하는 조령이 위치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http://www.dadunet.com/106-112-view-112-201909-95145-1.html
반도 이주 초기 무렵에 반도에 기반을 둔 기행문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당시 언론이 상당히 앞장 서 부역했다는 증거 아닌가요?조선은 좌도우도 개념으로 나뉘는데 반도는 가로가 짧아 왜정 초기부터 남북으로 도가 나뉘는군요.
晋州진주에서 제일 名區명소인 南江下流 남강하류赤壁 적벽구경을 하러갔다.
적벽대전이 진주에서?
적벽은 일반명사이지요.. 많은 기록에 적벽이 나옵니다. 임진적벽도 그렇고....역사상의 삼국지 적벽대전은 사천성에서 일어난 전쟁이지요. 후세의 교열된 역사는 이를 지금의 호북성 장강가에 옮겨다 놓았지만, 이 지역은 1926년 이전 조선의 한려수도로 마산과 합포 쯤의 지역이 됩니다.
@송계 장강(양자강) 하류; 바다에 인접한 곳이 한려수도란 말씀이신가요?
@흑괭이 현 포양호가 조선의 한산도가 있었던 한려수도로 임진왜란 이순신장군의 전투 격전지고요..대륙의 모든 호수는 지금보다- 1926년 당시만 해도- 5배이상 컷다고 보시면 됩니다..
@송계 감사합니다.
조선이 땅덩어리가 커서 동서남북으로 구분해서 동선, 서선, 남선, 북선. 이렇게 불렀나 보네요.
이 니구산이 공자와 관련된 그 니구산인가요? 한자는 같은 거 같은데요.
"東北동북으로 赤壁적벽이 錦屛금병(비단병풍)과 같이 나열하였으며 南山남산에는 尼丘山니구산이 聳翼용익(날개를솟구치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