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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1. 장희빈이 살던 시대상과 환국, 그리고 두 여인의 운명
장희빈, 다시 말해 장옥정이 살던 시대는 인조반정 이후, 청의 침략으로 인하여 국가적으로 유교적 가부장 사회가 위기에 처한 상황과 그러한 여파로 인하여 명분론, 예법을 중시한 사회라 단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권력의 주도권을 잡고 있기는 하였으나 남인 역시 정치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지는 않았고 따라서 서인과 남인은 정치의 주도권을 두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권력의 다툼으로 말미암아 1, 2차의 예송논쟁이 발발하였고, 나아가 여러 차례의 환국이 발발하며 서인과 남인은 정치의 주도권을 향한 극심한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한 시대의 중심에 서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인과 남인, 그리고 조선의 국왕 숙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때로는 권력의 동반자로 때로는 어느 한 쪽을 배재시키는 중심에서 그 나름대로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모든 권력 다툼에는 명분이 존재하고 있듯이 서인과 남인 역시 유교적 이념을 명분 삼아 그들의 우위를 선점하려 하였으며 그러한 명분과 함께 정치에 이용되었던 내지는 그들과 긴밀히 협조하였던 몇 몇의 인물을 이용하며 그들의 다툼에 개입시켰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서 그들에게 이용되었던 내지는 그들과 긴밀히 주체적으로 협조하였던 대표적 두 인물은 인현왕후와 훗날 우리가 장희빈으로 잘 알고 있는 장옥정이라 말할 수 있다. 당시 집권층의 격렬한 다툼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역사적 연표와 장옥경과 인현왕후의 대립 구도를 알 수 있는 역사적 연표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1674 현종 15 갑인 8월 왕세자(숙종)즉위. 제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쥠
1680 숙종 6 경신 5월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함.<경신환국>
1681 숙종 7 신유 5월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왕비로 삼음.
1683 숙종 9 계해 3월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이 갈라짐.
1686 숙종 12 병인 9월 궁중에다 궁인 장씨를 위하여 별당을 지음.
12월 장씨를 숙원 내명부 종사품)으로 봉함.
1688 숙종 14 무진 2월 장씨 왕자 균(후의 경종)을 낳음, 얼마 후 장씨 품계가 소의로 올라감.
1689 숙종 15 기사 1월 균을 원자로 책봉함. 장씨를 빈(내명부 정일품)으로 봉함.
2월 서인이 밀려나고 남인이 집권함.<기사환국>
5월 왕비 민비를 폐하여 서인으로 함.
1690 숙종 16 경오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함.
10월 장씨를 왕비로 책봉함.
1694 숙종 20 갑술 3월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 가운데 주로 소론이 집권함.<갑술환국> 폐비 민씨를 복위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림.
1696 숙종 22 병자 4월 장씨의 부 장형의 묘에 흉악한 물건을 묻은 사건이 드러남.
1701 숙종 27 신사 8월 민비 죽음(35세)
10월 무고사로 장씨를 자진케 함.
12월 인현왕후 민씨 장례
1702 숙종 28 임오 1월 장씨를 장사지냄.
연표에서 알 수 있듯이 숙종의 시대는 전반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한 사회라 규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내세운 명분 혹은 그 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던 인물이 장희빈 그리고 인현왕후란 것을 알 수 있다.
2. 인간 장옥정과 인현왕후.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
1) 장옥정의 입궁과 경신환국 그리고 출궁의 과정까지
현재 대다수의 사극, 영화 그리고 소설 속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옥정, 즉 장희빈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중인 집안 출신이었지만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종 출신으로 천자수모법에 의하여 장옥정 역시 마찬가지로 여종이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장옥정의 아버지 장형은 집안이 부유했기에 장옥경은 속환을 받아 여종의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천인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중국 사신의 역관으로 국중거부라 불리며 남인과 왕실의 종실과 친분이 있었던 5촌 아저씨 장현의 주선과 남인의 발탁으로 그녀는 자의대비전(인조의 계비)의 나인이 될 수 있었다. 나인이 된 그녀는 자의대비의 주선으로 숙종을 만나게 되었고 숙종의 총애를 점차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경신환국이 일어난 이듬해 장옥경은 명성왕후, 즉 숙종의 어머니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사가로 내쫓기게 되었다.
사실 명성왕후는 서인가 여성 출신으로 남인계열 인사들과는 무척이나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남인에 대한 적대감은 이른바 ‘홍수의 변’ 이후 더 강해지게 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무척이나 몸이 병약했던
숙종의 왕위를 인평대군의 아들인 삼복, 즉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믿었던 그녀는 그녀의 친정아버지 김우명에게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들과 불륜관계라고 고발하게 된다. 그러나 복창군과 복평군의 무고가 밝혀지자 당 시대의 형률인 반좌율(무고자에게 상대를 무고한 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따라 김우명이 처벌될 위기에 처하자 명성왕후는 금기를 깨며 정청에 나타나 소동을 벌여 복창군과 복평군이 귀양을 가는 것으로 반전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남인들과 명성왕후의 불화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남인의 주선에 의해 나인이 된 장옥정은 출궁 조치를 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효종과 효종비의 사망으로 촉발된 예송 논쟁에서 상복을 입는 당사자 자의대비의 경우 서인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때문에 자의대비는 자연스럽게 남인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그녀 휘하에 있던 장옥정을 후원하였다. 명성왕후의 장옥정 출궁 조치로 장옥정이 위기에 처해있을 당시에도 그녀는 인조의 다섯째아들 승선군에게 장옥정의 거처를 부탁하며 장옥정과 남인 세력을 후원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신환국을 통하여 예송논쟁으로 집권하게 된 남인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남인이 내세운 정치적 카드라 할 수 있는 장옥정 역시 출궁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2) 장옥정의 재입궁과 기사환국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옥정은 자의대비의 후원 아래 재차 입궁할 수 있었다. 서인과 갈등관계를 가지고 있던 자의대비와 남인의 추천 속에 처음 나인이 될 수 있던 장옥정의 입궁은 경신환국 이후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서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대다수의 서인들은 장옥정의 입궁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이러한 위기의식은 숙종에게 상소를 올리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사실 국왕의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었으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인이 숙종의 여성 문제에 대하여 상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인들이 장옥정의 입궁에 큰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결국 장옥정을 재위 12년 12월에 내명부의 종4품 숙원으로 봉하게 되었고, 옥정은 인현왕후와 본격적인 경쟁을 하게 된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장옥정의 경우 중인집안 출신이지만 남인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인현왕후의 경우 명문 서인가 출신으로 명성왕후 김씨의 후원 속에 숙종의 비가 된 인물이었다. 그들 나름대로의 숙종을 가운데 두고 정치권력을 둔 경쟁자적 관계에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각각 남인과 서인의 후원을 받으며 남인과 서인을 대표해서 숙종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중심에 위치한 것 역시 사실이다. 서인과 남인의 다툼처럼 그녀들의 다툼 역시 치열했다. 【숙종실록】에서 당시 그녀들의 경쟁관계에 대하여 서술한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 김창국은 서인 영수 김수항의 아들로써 후궁 김씨의 입궁은 서인의 남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이자 인현왕후가 장옥정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파악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후궁 김씨는 입궁이후 장옥정보다 높은 종1품 귀인의 자리에 올랐지만 숙종의 마음을 빼앗는 데는 실패하였고, 이는 다시 말해 서인과 인현왕후의 장옥정과 남인 세력의 견제 의도가 실패로 귀결되었음을 말해주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인현왕후와 서인세력은 지속적으로 장옥정을 견제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고 마침내 후궁 장씨는 숙종 14년 10월 숙종의 아들을 출산하게 된다. 그녀의 출산은 집권 서인에게는 큰 위협적 요소가 됨은 물론 인현왕후의 입지를 크게 흔들기에 충분한 사실이었다. 반면 장씨의 출산으로 남인은 재기의 기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왕자를 둘러싼 그들의 갈등은 서인의 사주를 받은 사헌부의 금리들이 후궁 장씨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하여 궁중으로 들어오는 장씨의 모친 윤씨의 가마를 빼앗고 꾸짖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장씨는 물론 숙종을 크게 분개하게 만들었으며 숙종은 훗날 왕자의 지위를 위협할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후궁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나아가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을 천명하면서 종묘에 고묘하는 일까지 마친다. 종묘 고묘를 마친 뒤에는 감히 임금도 그 결정을 쉽게 바꿀 없는 사실로 판단할 수 있으며 장씨의 아들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세자로 책봉되고 훗날 조선의 국왕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서인의 반발이 집요하고 강하게 일어난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하지만 숙종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고, 서인의 우두머리격인 송시열을 처벌하고 결국 기사환국을 일으켜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을 집권케 하였다. 이 여파로 민비는 서인이 되어 사가로 쫓겨나게 되고 숙종 16년 10월 장희빈은 민비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이후 줄곧 정치에 밀려나있던 남인이 재차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 순간이었으며 여종의 딸인 장옥정이 그녀의 신분을 극복하고 조선의 국모로 즉위하는 순간이었다.
3)갑술환국, 그리고 두 여인의 죽음.
새롭게 집권 세력을 형성한 남인과 여종 출신으로 국모의 지위까지 오른 장옥정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등 서인의 대표적 인물들이 목숨을 잃기는 하였지만 인조반정이후 국정 전반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때마침 숙종이 새롭게 궁녀들에게 물을 수발하는 무수리 출신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하였고 그녀는 마침내 숙종 19년 숙원으로 봉해지게 된다. 이듬해 최씨는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출산하게 되었고, 이 사실은 서인에게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남인의 지지를 받으며 국모의 자리까지 차지한 장옥정의 아들 세자가 남인들의 차기 임금의 후보라면 서인들의 임금 후보는 폐비 민비를 대신하여 숙원의 자리를 차지한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었다. 서인들은 점차 남인을 압박하여 나가기 시작하였고, 결국 남인은 역모사건을 꾸며 서인을 축출하려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서인들 역시 남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역모사건을 숙종에게 알리게 되었고, 숙종 20년 결국 남인들은 정계에서 축출 당하게 된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하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서인과 긴밀히 연계하고 있던 폐비 민씨가 복위하게 되었다.
이후 장옥정은 그녀의 왕후 새수를 빼앗기고 재차 희빈으로 강등되었으며 인현왕후가 죽은 뒤 다시 기회가 찾아온듯하였으나 숙종은 장씨가 중전을 한 번도 문병하지 않고, 오히려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결국 여종의 딸로 신분제의 굴레에 맞섰던 장희비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서 국모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나 결국은 그 대립의 풍파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3. 사극과 영화 속에서 그리는 장희빈과 인현왕후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서 희생이 되었다고 평가할만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운명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운명과 길을 함께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고 있는 대표적 사료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인현왕후전』 그리고 『연려실기술』이 대표적이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미지는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만들어진 드라마, 영화 혹은 소설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을 비롯하여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일대기, 그리고 그들의 경쟁관계를 그리며 우리들의 역사적 인물에 많은 기여를 한 사극을 통하여 그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그들의 인물상을 알아보도록 하자.
1)도덕적 잣대로 평가된 장희빈과 인현왕후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처음으로 제작된 것은 1961년 김지미 주연의 《장희빈》이었다. 이후 1968년 남정임이 주연한 《요화 장희빈》이 재차 제작되었는데, 초기 제작된 영화에서 다루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미지는 선과 악의 대립, 다시 말해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하여 두 여인의 삶을 비추었다.
초기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장희빈을 사악함과 요염함으로 표현함으로 그녀가 궁궐의 나인이 된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움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품이 사악했다고 묘사하며 개인의 선천적 품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그 시대상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상감의 사랑을 받은 뒤에는 오만방자한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인현왕후를 저주, 최무수리에게는 모진 형벌을 가하는 등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배운 것이 없으며 덕이 부족한 악녀의 이미지만을 부각시켰다. 그러한 이미지 때문인지 초기 영화와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장희빈의 역할에는 아름다우며 날카롭고 표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배우 김지미, 남정임 그리고 윤여정이 낙점되었다.
반면 인현왕후의 경우는 어질고 후덕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전통적인 인고의 여성상으로 나타났다. 궁궐에서 쫓겨난 장희빈을 다시 입궐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하였으며 폐비된 이후로는 그 누구를 탓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후덕한 여인으로, 국모의 자리를 찾은 뒤에도 장희빈에 대한 복수를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남아있는 동궁을 생각해서라도 처벌하지 말라며 장희빈을 감싸주기까지 하였다.
초기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성품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극과 극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사료에 충실했는지 그러한 사실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 단언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당시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는 쫓겨난 장씨가 다시 입궁할 수 있는 이유는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권유하였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 영화와 드라마에서 인현왕후의 덕을 높이 평가하는 대표적인 이유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던 인현왕후를 두고 후덕을 말할 수 있었는지, 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장희빈을 스스로 끌어 들였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설정이다. 이는 아마도 승자 중심으로 쓰여 진 『인현왕후전』 내지는 실록의 무비판적 수용의 결과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술적 영역에서 사료를 인용하고 그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장희빈을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서가 존재할 경우 드라마와 사극에서 평가된 두 여인의 운명은 충분히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인고와 후덕함으로 표현된 인현왕후의 이미지는 ‘창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아무튼 초기 영화와 드라마에서 선보인 장희빈은 요염한 자태를 갖추고 있으나 사악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인현왕후의 경우 후덕함과 인고의 대명사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갔다. 이는 60~70년대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조하며 여성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요구한 시대의 표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 권력 다툼의 가운데에 위치한 장희빈, 그리고 인현왕후
초기 영화와 드라마에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모습은 1980년대 ‘여인열전 제 1화’《장희빈》과 ‘조선왕조 오백년 제8화’《인현왕후》가 제작됨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섰다. 이미숙과 전인화가 장희빈 역할을 맡은 80년대 드라마에서는 초기 영화와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미모가 출중하며 당대 최고의 배우라 말할 수 있는 연기자들이 캐스팅되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외형적 이미지는 대체로 초기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시작된 당시의 드라마에서는 개인적 성품보다 실록의 기록을 기본으로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 속에서 매몰되어진, 또 서인과 남인의 대변인으로서의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나타냈다. 실록에 중심을 두고 제작된 80년대 사극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당시 상황과 맞물려 평가되어야 할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의 권위를 빌어 사극 속에서 역사성과 객관성을 강조하려한 80년대의 드라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초점을 맞춤과 동시에 그들의 후원세력인 남인과 서인의 인물에 대한 묘사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초기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희빈을 악녀로 인현왕후를 후덕한 국모로 표현한 것을 어느 정도 계승함과 동시에 그녀들 주변에 있는 서인과 남인에 대한 평가 역시 그녀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서인의 대표적 인물인 김춘택의 경우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불철주야 힘쓰는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한 반면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경우는 경망스럽게, 매사에 즉흥적이어서 생각보다 주먹이 앞서며, 또 비도덕적이며 탐욕적인 인간상으로 묘사되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둘 중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사극을 평가하고 두 인물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드라마에 등장하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강력하게 투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그린 사극을 제작하려 했던 작가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단지 실록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려 했고 때문에 단지 실록에 그의 생각이 매몰되어 오히려 그 시대의 시대상을 정확히 대변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위에 언급한 『인현왕후전』이 인현왕후의 덕과 인고를 묘사하며 그 반대편에 자리 잡은 장희빈을 비하하는 의도로 편찬된 것과 같이 조선왕조실록 역시 역사적 승자에 위치한 서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사료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실록은 서인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유리한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으며 『인현왕후전』보다는 공정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실록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인용하여 사극에 반영하는 것으로 진정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였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3)우리 시대 여성상의 변화와 장희빈
90년대 이후 제작된 장희빈을 소재로 한 사극은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맡는 배역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보인다.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사극에서 정선경과 김혜수는 섹시한 이미지의 장희빈을 연기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사악한 이미지를 그리고 있던 사극을 어느 정도 계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능동적 여성상을 열연하였다.
한편 인현왕후 역에는 김원희와 박선영이 낙점되었는데, 기존에 강조되었던 인고와 후덕한 미를 어느 정도 배제하면서 새로운 인현왕후를 만들어갔다. 종전처럼 무조건적으로 천사표의 상징인 인현왕후가 아니었으며 비록 단정한 모습으로 중궁전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으나 장희빈에게 예전 사극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관용을 베풀지는 않았다.
종전까지의 사극이 장희빈이 꿈꾸던 삶에 대한 제시가 전혀 없었다고 평가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등장한 사극의 경우 장희빈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며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신분제적 테두리 안에서 그녀의 신분 상승을 추구한 그런 인물이었다. 중인 출신으로 신분적 제약 속에서 갖은 멸시를 받은 그녀의 숙부의 한을 덜기 위하여, 또 그녀 스스로 그런 신분적 제약을 이겨내기 위하여 궁녀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동시에 임금의 승은을 입으려 끊임없는 노력을 전개해 나갔고 후궁이 되더라도 첩으로 남아있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등 90년대 이후 등장한 장희빈은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여성상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90년대 등장한 인현왕후의 경우 쫓겨난 장희빈을 다시 불러들인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장면을 제시하며 장희빈을 공공연히 견제하는 모습을 나타냄으로 기존의 인현왕후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즉 90년대 이후 등장한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더 이상 서인과 남인의 대변자도 아니며, 선과 악의 대명사도 아닌 그들 나름의 꿈과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는 여성으로 묘사된 것이다. 하지만 30여 년 동안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끊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던 장희빈을 주제로 한 사극의 이미지는 깨어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기존 장희빈을 다룬 드라마와는 다르게 시청률에 있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이유는 표덕함, 악함을 강조하지 않은 장희빈의 이미지의 실추에 있었다. 결국 드라마는 장희빈의 악독함과 사악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그 끝을 마무리하게 되었고 기존 장희빈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변화는 없던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악덕하지만 비운의 운명을 가져야만 했던 장희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녀가 왜 악녀로 그려졌는지, 그녀가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장희빈 그녀가 사극과 영화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처럼 후덕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그녀의 권력욕에만 눈이 멀었던 사람이었던 것일까? 역사적 사료 속에서 존재하는 장희빈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승자 위주로 서술된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록을 포함하여 당시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모든 사료가 인현왕후를 선인과 인고의 상징으로 그린 반면 그녀의 걸림돌이었던 장희빈은 표독스러우며 요화로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장희빈에 대한 이미지는 300여 년 동안 변하지 않고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가 쓰여 지게 된 이유와 역사적 사실은 재조명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극 속에서 존재하는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제시하는 시대적 여성상 역시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대중매체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폭발적이며 현대인의 삶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대중매체 속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그 정보를 통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대중매체란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대중매체가 전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이며 대중매체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장르의 영상물은 우리들에게 그 시대가 원하는 또 그 시대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소설과 더불어 영상물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예술 행위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예술적 행위 속에 표현되는 사극에 일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요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로, 역사 연구는 역사 연구로 정립되어야 그들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대중매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적절한 고증 없이 표현되는 사극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겨냥하여 만들어지는 사극이 다수 우리들의 안방을 찾아온다.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며 우리들의 만족을 충족시켜 줄 의도로 만들어진 역사극이 단순히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내지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방향으로 끝이 난다면 그것은 드라마의 장점을 극대화한 모범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진정한 사실로 받아들이며 잘못된 역사관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면 드라마가 주는 즐거움은 시청자들에게 해로움으로 변화될 것이다.
적어도 현재와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정보의 중요성이 날로 중요해지는 요즘에 있어서는 사극과 역사적 사실의 올바른 고증이 적절히 조화 내지는 타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제작된 《장희빈》만 하더라도 인현왕후를 구해야 한다며 길거리에서 장희빈의 역을 맡은 윤여정이 몰매를 맞는 일이 발생하였었다. 드라마를 드라마로 끝내지 못한 사람들의 의식이 잘못된 것이기도 하지만 적절한 고증 없이 무조건적으로 장희빈을 악녀로 그린 대중매체의 탓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희빈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많은 주목을 받으며 사극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또 사극 속에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말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였다. 아름답지만 사악하고 표덕한 이미지의 장희빈만을 생각한다면, 나아가 그것에 기초한 사극만을 강조한다면 역사 속에서 묻혀버린 패배자의 아주 작은 배려조차 하지 않는 행위가 될 것이다. 올바른 역사 탐구를 위해서 패배자의 사소한 변명을 위해서라도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대한 고찰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그러한 적절한 역사적 고증이 사극과 만날 때 우리 사회의 시대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깨닫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울 님들~역사공부가 좀 되었지요? ㅎㅎ
장희빈 - 난희
구중 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 고이 든 그 날 밤이
차마 그려 치마폭에 목메는가
대전 마마 뫼시든 날에
칠보 단장 화사하든 장희빈아
버림받은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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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굽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4/texticon_8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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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뒤늦게...힘들게 찾아오신다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