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46)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25) – 히브리서 강론(5)
히브리서 강론 (5) - 5장 12절 ~ 6장 6절
젖을 먹는 자들(어린 아이)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들(어른)의 비교(5:12-14)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인 나사렛 지파의 히브리인들이 이미 가르치는 포지션에 와 있어야 되는데 기초부터 가르침을 다시 받아야 하니 안타까워하고 있다.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쳐서 사람들을 세뇌시켰기 때문에 나사렛 지파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세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유대주의 신학자들의 교묘한 논리의 왜곡이 보이지 않아서 여전히 유대교 교리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신자들은 마치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들이 된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젖을 먹는 자는 의의 말씀의 시련을 겪지 못함으로써 마치 어린 아기와 같은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의의 말씀의 시련을 겪지 못했다는 것은 테스트를 통과하는 과정을 아직 충분히 겪지 못해서 시련의 체험과 표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의와 충돌해서 우리의 의가 공격을 받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는 종교 놀이에서의 옳음이 있고 현실 놀이에서의 옳음이 있다. 그런데 각자의 옳음이 다 다르다.) 그것은 내 삶의 기준이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게 되고 저항하게 되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의 시련이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 신학자들이 그런 시련을 겪지 않도록 우회로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계명이다.
사람의 옳음은 삶의 기준으로서 법과 윤리 도덕이 있다. 그러나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 다른 것이 법과 윤리 도덕이다. 법과 윤리 도덕은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파고 들어가면 개인마다 다 달라진다. 단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세뇌되었을 뿐이다. 법과 윤리 도덕을 지켜야 그 사회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나에게 유리한 것이 옳은 것이다.
이런 틀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도덕과 종교와 법률 체계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온 것이다. 그러면 각자의 의 체계가 파괴될 조짐이 생기면서 옛 사람의 죽음 앞에서 몸부림을 치게 되고 발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선택된 자들에게만 온다. 선택을 받은 자들은 결국 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어라고 저항하다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비수처럼 꽂히면서 내가 가진 의 체계는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시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에 그 사람은 꼭두각시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래서 시련을 겪게 하시는 것이다. 시련을 겪는 과정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수신자들은 이 시련이 덜 채워졌고, 이론적으로도 유대교 교리 때문에 계속 방해를 받아서 이방인들보다 진도가 더 느린 것이다.
반면에 단단한 음식물을 먹는 것은 어른이 된 자들이니, 그들은 많은 시련과 경험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겪은 자들이기 때문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자들이 어른이라는 것이다.(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악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악을 알 수가 없다. 단지 나에게 무엇이 호불호 인지, 나에게 무엇이 유불리 인지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선한지), 무엇이 그른지(악한지)를 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서 번역된 선(헬칼로스 = 아름다운 의 의미, 히토브)과 악(헬카코스=병든, 연약한, 고통스러운, 불행한 의 의미 or 포네로스, 히라)은 실제로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즉 좋고 싫음, 또는 좋고 나쁨이다. 선과 악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 즉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네가 내 알몸을 보는 게 나는 싫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좋고 싫음을 알 수가 없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창3:22) 저들도 좋고 싫음을 구분하는(따지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들이 좋고 싫음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좋고 싫음은 하나님만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열매를 먹고 각자 좋고 싫음을 구분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초를 떠나 어른스러움을 감당하게 되어야 한다 (6:1~6)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초를 떠나 어른스러움을 감당하게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또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기초는, 죽음의 행실로부터의 돌아섬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세례의 가르침과 손을 얻는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련을 통해서 이런 이론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죽는 체험의 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성숙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드시면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돌아섬이 아니라 반성이다. 부도덕한 불한당과 도덕적인 삶을 사는 자, 또는 방탕한 자와 절제하는 자는 인간들의 선악 개념이 만들어 낸 두 가지 개념인데, 둘 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영역의 종류들이다. 그것은 그쪽이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다 악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행복주의 윤리학이 망상인 이유이다. 행복주의 윤리학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도구로 쓰이게 된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 됨이라는 하나님의 의가 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경악을 하면서 살기가 올라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는 비수가 되어 날라오는 하나님의 의를 차단하고 좋으신 하나님으로 왜곡시켜서 개인 구원 교리를 만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왜곡된 교리로 세뇌된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선입견을 깨트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빛을 받고 천상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고, 하나님의 좋은 말씀과 다가올 세대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변절하여 떨어져 나간 자들을 다시 돌아서도록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든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하신 자들에게는 계속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이 선택하시지 않은 자들은 기회를 주지 않으신다. 우리는 누가 택함을 받고 택함을 받지 않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끝없이 그 사람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서 좋은 진주의 모습이 나타나는지를 보고 계속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태도이다.
인간의 의 개념을 부숴버리면서 하나님의 의가 오는 것이다. 그때 시련은 귀한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이소영 자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