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으로 영일정씨후손이 출세길이 막혔다는 이야기 |
世間에 영일정씨와 오천정씨의 계보문제가 자주 등장한다. 원래 정씨의 시조는 鄭襲明이고 중시조인 鄭夢周가 10대손으로 시조로 부터 선대가 모두 경북 영일군에 살아와서 본관을 迎日로 하였고, 옛이름을 따라 가끔 延日정씨로도 부르기도 하며, 오천은 마을의 이름을 따라 烏川정씨라고도 한다. 결국 세 이름은 모두가 같은 것이며, 원칙적으로는 영일정씨로 부름이 타당하다고 본다. 포은 정몽주(夢蘭---夢龍---夢周)에 대한 출생 이야기는 유명하다. 어머니 이씨가 몽주를 낳기 3일전에 꿈에 난초화분을 않는 꿈을 꾸어 초명을 몽란이라 했고, 9살 때 어머니가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가 꿈결에 집들의 배나무위에 검은 용이 웃고 있는 꿈을 얻었는데 나가보니 몽란이가 배나무위에서 꿈속의 용처럼 웃고 있어 몽룡으로 개명하였고, 18살 때 아버지의 꿈에 중국 周나라 周公이 나타나 '후세에 까지 명성을 빛나게 할 아이이니 잘 키워라' 는 부탁을 하는 꿈을 얻어 夢周라 다시 개명을 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타살되어 죽은지 9년만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 민심을 회유하였다. 포은의 손자 鄭保는 예안현감 때 단종의 비극을 만나자 벼슬을 버리고 비분강개하던 중 수양대군 앞에서 성삼문은 義人이니 죽이면 후세에 비난을 받을 것이라 하다가 결국 사형극형에 처했으나 포은의 손자라 하여 경남 단성으로 유배를 가서 거기서 결국 죽었다. 이후 영일정씨는 정감록의 정씨 800년 왕조도참설의 영향으로 조선조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되어 후손들의 출세길이 막혀 지내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관직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는 家風이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허나 영일정씨는 스스로 자존심이 상하여 이씨왕조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후학의 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쓰거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훈으로 관직을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 이를 거부한 후손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李氏왕조에서도 영일정씨가 중앙요직에 오르는 것을 경계한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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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afe.daum.net/ducjsans/IX1j/122 밀양박씨 도평의사공파 울산 여천문중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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