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기지주변의 적정은? ㅇ
전투상보에 나와있는 그대로인데, 특히 우리중대 부근마을은 월남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완전한 적지였다. 그러니까 주민의 대부분이 베트콩 또는 그들의 동조자로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기지바로 남쪽의 짜빈동 마을은 우리가 그마을 우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민들과 접촉이 잦아
상당히 친밀 해졌다.
내가 중대장으로 오기전에는 "부비트랩" 폭발사고가 잦았는데, 내가부임하여 이것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주민들의 동태를 관찰한 결과 주민들의 소행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낮에 일하는체 하고 논밭에 엎드려 있는것은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 부비트랩을
매설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일하는 것을 은밀히 주시하였다가 돌아간 후 확인해 보면 틀림없이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중대원들이 주민들이 일하였던 곳을 피하니까 부비트랩 폭발사고는 줄어들었다.
전투당일인 14일 낮에는 2월 16일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던 거룡작전을 위한 첩보수집의 일환으로
" 월맹군 제2사단의 사단사령부를 찾아라!" 는 임무를 부여받고, 헬리곱터를 타고 기지 남서쪽일대를
정찰하였는데, 결국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들은 이미 기지 가까이 이동하여 매복하고 있었으니, 발견될 리가 없었다.
또한가지는 정찰후 기지에 복귀하니, 기지주변으로 수천명이나 될듯한 주민들이 서에서 동으로
피난민과 같은 차림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상히 여겨 그들에게 물어보니 "작전지역(17일부터 거룡작전 계획) 에서 물러나라고 하여 온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제는 정반대로 다시 동에서 서로 돌아가는것이었다.
다시물어보니 "피난갈 필요가 없다고 돌아가라 해서 간다" 는 것이었다.
나혼자만이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 이들이 이날밤 공격한 적이 아니었느냐? 이들이 피난민을
가장하고 이동하는체 하면서 기지주변의 지형을 익히고, 이동하는 연습이 아니었느냐?" 고 생각했다.
ㅇ 적의 기습공격 가능성에 대해 상급부대에서 접수한 첩보는? ㅇ
"크리스마스 및 신정휴전 기간에 많은 병력과 중장비를 증강시킨 적들이 침투해 올것이다" 는 정보를
여단으로 부터 입수하였다. 또한 며칠전 여단장께서 중대기지를 방문하여 " 제11중대 서쪽 산악지대에
월맹정규군 6개대대가 집결하고 잇으며, "제11중대를 공격하려는 징후가 있다" 는 말씀을 하셨으며,
"소대단위 정찰을 철저히 하며, 적의 동태를 철저히 파악하라" 고 지시하였다.
또한 1967년에 접어들어 중대전술기지 주변에서 월맹정규군 베트콩중위를 생포한바 있고, 정찰중에는
적과 조우하여 접전끝에 지금까지 보지못했던 체코식 저격용 소총을 노획했으며, 소대의 정찰대가 적
중대 이상의 매복대와 조우하는 사례가 발생함으로써, 적이 증강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이같이 심상치 않은 징후에 따라 대대에 나가있던 제1소대가 10여일 전에 복귀되었으며, 2월 13일에는
제1중대 제3소대(정정상 소위)가 증원되었다.
또한 참모장및 대대장이 중대기지를 방문하여 방어태세를 확인한바 있으며, 강기천 해병대 사령관 께서
내일(2월 15일) 여단을 방문한다는 무전연락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분위기는 증강되어 가는 적의 공격징후와 앞으로 3일후 (2월 17일) 에 있을 한, 미, 월
3국의 협조된 작전인 거룡작전 등 모든 상황이 초긴장감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ㅇ 기지 방어력 보강을 위한 조치는? ㅇ
중대는 1966년 11월 21일 여단본부 외각경계부대로 투입되는 제9중대와 교대하여 짜빈동 기지를
인수하였으며, 지속적으로 진지를 보강해 왔다.
특히 1967년 에 접어들어 적의 기습공격의 가능성이 증가되면서 부터 "1967년 1월말까지 외부의
지원없이 48시간 이상 지탱 가능하도록 진지를 보강하라!" 는 여단의 지시에 따라 기지 방어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때주요 화기호를 유개화하고, 기존에 구축되어있던 교통호와 취침호가 연결될수 있도록 보완
하였으며, 분대로 부터 소대를 경유하여 중대전체가 상호 연결되는 진지를 구축하였다.
특히 각조별 진지의 후방에 취침호를 만들어 상황발생시 즉각 비상배치가 가능하도록 조치하였다.
주둔지 외각의 철조망은 울타리형 2중과 윤형 5중으로했고, 전술철조망으로 보강했으며,
제일 외각에는 조명지뢰를 설치했다.
또한 여단으로 부터 상황발생 일주일전에 대인지뢰를 획득하여 매설했다.
그런대 최초 여단에서는 대인지뢰의 재고량이 부족하다며 , 보급에 난색을 표했으나, 필요성을
역설하여 겨우 수령할수 있었는데, 상황이 발생하였을때는 대인지뢰의 효과를 크게 보았다.
ㅇ 소대 배치 특히 제1중대 제3소대 배치는? ㅇ
당시기지내의 병력은 중대의 건재3개 소총소대와 화기소대 외에 배속부대로 제1중대 제1소대
4.2 인치 박격포 1개소대, 81mm 박격포 1개반, 106mm무반동총 1개분대,등으로 총병력 294명 이었다.
이 병력으로 북쪽에 제3소대, 남서쪽 제1소대, 남동쪽 제2소대를 배치하였으며, 주요 화기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지역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배치하였다.
그리고 증원된 제1중대 제3소대를 예비로 하여 최초 각 소대후방에 1개분대씩 배치했으나,
1차 공격후 배치를 조정하여, 적의 주 접근로이고 최초 공격방향인 제3소대 후방에 집중 배치하였다.
또한 화기소대의 기관총은 각소대에 배속하였고 106mm 는 중대에서 통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적의 주접근로에는 병력이 이중으로 배치되어 큰효과를 보았지만, 지금생각하면
제1중대 제3소대를 제2선에 배치하지않고, 제1선에 배치하여 좀더 조밀한 방어편성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ㅇ 주요 간부의 편성은? ㅇ
당시 중대장은 본인,
부중대장 양백수 대위,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
제2소대장 김성부 소위,
제3소대장 이수현 소위,
60mm 박격포 반장 김상열 중사 등이였다.
또한 배속부대장은 제1중대 제3소대장 정정상 소위,
105mm포병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
중포중대 제2소대 FDC 반장 김세기 대위,
중포중대 제2소대장 이정국 중위 등이었다.
ㅇ 교육훈련은? ㅇ
나는 특히 정신교육을 중요시 하였고, 비상배치훈련, 사격훈련, 역습훈련 등을 계획에 따라 꾸준히
반복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적의 공격이 주로 야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전을 고려하여 훈련은
주로 야간에 실시 하였다.
또한 매일 야간에는 비상배치 훈련을 실시 하였으며, 적의 기습당일에는 3일후에 실시될 거룡작전에
대비하여 중대전체가 사격 훈련을 실시하였다.
한편 사격군기는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중요하지만, 야간전투에서는 특히 중요하기 때문에 사격군기
를 특별히 강조 하였다.
ㅇ 전투 당일 (1967년 2월 14일) 의 기상과 조명은? ㅇ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마져 불어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안개가 많이 끼고
비가 좀 내렸는데, 조명효과는 감소되었지만 그래도 주변이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였다.
ㅇ 당일 야간에 조치한 사항은? ㅇ
해가 기울자 소대장을 집합시켜 적의 동향이 이상하니 방어태세에 완벽을 기하고 청음초를 잘운용하여
적을 조기에 발견할수 있도록 순찰 근무 강화를 지시했다.
또한 금일 저녁에 적이 공격하여 올지 모르며, 앞으로 있을 거룡작전에 지금까지 연마 하여온 전투력
응 유감없이 발휘하자는 다짐을 하면서 하나밖에 남지않은 한캔의 맥주를 여섯명이 한모금씩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이어서 나는 곧 하사관들을 집합시켜 순찰근무 강화요령을 지시하였는데, 이때 하늘에 새까맣게
몰렸던 먹구름은 어느듯 비가 내리기 시작 했으며,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같은 기상을 감안하여 관측이 불량하고 청음이 곤란하므로 재차 각소대에 청음초 근무를
강화 하도록 지시했다.
이날, 즉 1967년 2월 14일 23:20 경이었다.
제3소대 정면에 나가있던 청음초로 부터 "인기척이 있다. 전방 10m 거리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데
적 들인것 같다" 는 내용의 보고가 들어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철조망의 일부가
절단되었다.
이에따라 청음초를 철수시키도록 지시하면서 81mm 박격포 조명탄을 공중에 올렸다.
그때 제3소대 정면에서 적 1개소대 병력이 접근해 있는 것을 관측하고, 사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포병사격을 즉시 요청하여 적의 후방을 제압하였다. 이때 적은 소대병력 이상으로 판단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계속 응사하지 않았으며, 후속부대의 공격도 없었다.
그리고 적 시체가 철조망에 걸려 있음을 발견할수 있었다. 이것은 차후 공격을 위한 기만전술이거나
또는 공격준비를 하기위하여 접근하다가 우군의 청음초에 조기 발견된것으로 판단되었다.
날씨는 더욱 악화되어 5m 전방도 관측할수 없었다. 적의 재차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고,실탄을
재분배 한후 요란사격을 증가 시켰으며,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적은 조용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