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름, 가쾌(家僧), 복덕방, 공인중개사
요즘 “천당 다음에 분당!”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판교신도시 아파트 분양을 앞두고 분당-강남-용인-평촌-수원-과천의 아파트 값이 순식간에 몇 억씩 폭등하는 사회현상과 관련이 있는 유행어다.
땅과 집은 음식-옷과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요소들이다. 땅과 집을 통틀어 부동산이라고 하고, 그것을 거래하는 장소를 예전에는 복덕방이라고 부르다가 요즘은 공인중개소라고 일컫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부동산 거래를 중개하는 사람을 뜻하는 '집주름, 가쾌(家僧), 공인중개사'와 부동산을 거래하는 곳인 '복덕방, 보신사, 공인중개소' 같은 언어의 발생을 역사고고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부동산 투기’가 '식민지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혀보려고 한다.
복덕방의 어원은 ‘복과 덕을 가져다 주는 곳’이라는 뜻인 생기복덕(生起福德)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나 홍만선의『산림경제(山林經濟)』등에는 ‘생기복덕(生起福德)’이라는 표현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사례 1] 유희춘, 眉巖先生集卷之十四
日記刪節○上經筵日記別編
丙子
二十五日。朝。裁空冊。手書家門詩及先夫人手掌生氣福德圖。以貽妹氏。卽先君子詠項羽詩, 先伯氏及第出都城, 第二姑氏和姪希春詩, 裂瓦奴傳, 吳娣幽憤詩及希春山堂讀書自期文等作也
[사례 2] 홍만선(洪萬選), 山林經濟卷之三[甲乙本作四]
選擇
生氣福德生氣福德天醫吉。遊魂絶軆平。絶命禍害凶。本官卽歸魂。亦平。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념 속에는 생기일(生氣日)ㆍ복덕일(福德日)ㆍ천의일(天醫日)은 대길일(大吉日)로 가택(家宅)·혼가(婚嫁)·장매(葬埋)·제방(堤防)에 있어 그 건조(建造)·가례(嘉禮)·수리(修理)하기에 적당한 연(年)·월(月)·일(日)·시(時)의 길성(吉星)으로 가려서 썼던 날이었던 것이다.
생기복덕(生氣福德)이란 바로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그날그날의 길흉을 따져보는 법을 말한다. 즉 그 당일(當日)의 일진(日辰)과 그 당년(當年)의 자기 연령[本命]에 맞추어 그날이 자기에게 생기가 닿는 날일지 화해(禍害)가 닿는 날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을 말한다. 길흉에 관계되는 조목이 생기를 위시하여 8가지가 있으나 이를 생기복덕이라고 줄여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러한 ‘생기복덕’에서 유래한 ‘복덕방’이 언제부터 부동산을 거래하는 장소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 조선시대 말이나 대한제국 말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20일자 1면의 ‘잡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가쾌조직 / 한성 오부안 가쾌가 단합하야 한성보신샤를 조직하고 작일 한성부에 인허를 청하야 각방곡 복덕방은 보신분샤라하고 토지가옥에 매매할 때에난 쇼개하기를 담임하야 영업한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20일자 1면 ‘잡보’)
그림 1 : 『대한매일신보』1909년 8월 20일자 ‘잡보’
가쾌(家僧)는 ‘집주름’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유식하게(?) 적은 말이다. 집주름이란 집 흥정을 붙이는 일로 업을 삼는 사람을 말한다. 요즘의 용어로는 ‘공인중개사’를 말한다. 이들이 단합하여서 ‘한성보신사(漢城普信社)’를 조직해서 한성부(서울시)에 인허가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덕방’을 ‘보신분사’로 부르고 토지와 가옥을 매매할 때 소개하는 일을 맡아서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복덕방 집주름 단체인 한성보신사(漢城普信社)의 회장은 친일파들이 맡았으며, 1919년에는 3.1 운동 거부 운동을 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오늘날 정부의 부동산 안정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하며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일부 ‘공인중개사’들의 선구적인 행태가 바로 구한말~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복덕방과 집주름은 이태준이 1937년 3월호『조광(朝光)』에 발표한 단편 소설「복덕방(福德房)」을 통하여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우선 이 소설의 몇 대목을 함께 읽어보자.
그림 2 : 복덕방 (출처 : 매일신문사)
그림 3 : 길거리의 ‘복덕방’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대한매일신보 기사와 이태준의 소설을 통하여 ‘복덕방’, ‘보신사’, ‘토지가옥중개소’라는 말이 함께 쓰였으며, 거래를 하는 사람을 ‘가쾌’ 또는 ‘집주름’ 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공인중개사’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강남지역에 부동산 투기 광풍이 불기 시작한 계기는 1960년대 말의 경부고속도로 착공과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 사업이었다. 1966년 초만 하더라도 평당 2백~4백원 수준이던 양재동 땅값이 1968년말에 평당 6천원으로 뛰어 올랐다. 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세법’을 통하여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고 공언했지만 허사였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였으며, 부동산 투기를 통하여 가장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실장 박종규와 그의 수하 윤진우, 서울시장 김현옥, 공화당 재정부장 김성곤 등은 부동산 투기수법으로 엄청난 정치자금을 마련해서 박정희에게 가져다 바쳤다고 한다.‘부동산 불패신화’는 바야흐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후 광주대단지 조성사업과 잠실 뉴타운 개발, 고속터미날 이전, 지하철 건설, 경기고-휘문고-서울고 등 강북 유명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 중동 건설 특수 등으로 강남의 집값과 땅값은 10년 사이에 1,000배 가까이 올랐다. 정부는 또 다시「부동산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1978.8.8)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잠시 가라앉는 듯하던 부동산 투기열풍은 곧 되살아났다.
박정희 정부는 부동산투기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1978년 8월 26일에 “부동산 거래질서가 안정과 미신고전배달세 방지책(未申告轉賣脫稅 防止策)으로 1979년 1월부터 공인중개사(公認仲介士) 및 공개법인제도(仲介法人制度)를 신설키로 결정”했다. 누구나 ‘집주름’을 할 수 있었던 시대에서 국가에서 시행하는 자격시험에 합결을 하여 ‘공인’을 받은 ‘중개사’만이 부동산 거래의 중개를 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박정희 사망, 12.12쿠테타, 광주민중항생, 선거 등의 국내 사정으로 보류되었다가 1983년에 부동산중개업법을 제정-공포하고, 1984년 4월에 부동산중개업법시행령이 제정·공포됨으로써 비로소 공인중개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2005년 4월 25일 재정경제부와 공인중개사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2004년)말 현재 공인중개사 자격증 소지자 17만5천6백30명이고, 활동중인 공인중개사는 5만7천3백62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2004년 11월말 현재 전국에서 영업하는 부동산 중개업소 수는 총 7만 3479 곳이라고 한다.
부동산 중개 수수료는 매매-교환은 거래가액이 5천만원 미만인 경우 0.6% 이내의 수수료율, 5천만원이상 2억원 미만인 경우 0.5% 이내의 수수료율, 거래가액이 2억원이상 6억원 미만인 경우 0.4% 이내의 수수료율을 적용하여 수수료를 받고 있다.
지난 2004년 11월 14일에 실시된 제15회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는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응시를 했는데, 시험 난이도 조절 실패와 문제유출 의혹으로 '시험무효와 재시험'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건설교통부는 공인중개사 시험과 관련하여 사과문을 발표하고, 2005년에는 두 번의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서 공인중개사는 한편으로는 부동산 투기의 주범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고용환경에 대한 대안으로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상으로 '집주름, 가쾌(家僧), 공인중개사, 복덕방, 보신사, 공인중개소'라는 용어의 발생을 역사고고학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 사회의 집 없는 서민들이 집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날이 하루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2005년 6월 23일, 민들레처럼)
*** 다음에는 '부동산'과 '아파트'라는 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역사고고학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