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은퇴를 한달여간 남겨놓고 있는 J-POP의 영원한 전설이 될 아무로 나미에에 대한 이모저모 탐구를 해보려고 합니다. 딱히 무슨 내용을 써야할진 모르겠지만 그냥 아무로의 트리븃 기념이기도 하고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떤 여자길래 25년간 J-POP 씬에서 의미있는 행보를 걸어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답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가수 커리어를 중점적으로 읊어나가며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 탐구해보려 합니다.
J-POP의 전설 아무로 나미에.
92년 데뷔 95년 해체
아무로 나미에는 1992년 슈퍼 몽키즈의 일원으로 데뷔합니다. 5인조 여성 그룹이었던 슈퍼 몽키즈는 오키나와 출신의 소녀들로 구성된 그룹으로,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이라는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드물던 연예인 양성소 출신의 걸그룹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이 드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무로의 성공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하죠.
당시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원장은 혼혈이었던 아무로의 매력적인 마스크가 스타성이 있다고 판단해 어려웠던 아무로의 집안 사정을 듣고 특별 장학생으로 인정해 수업료를 모두 장학금으로 처리해 감면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몇년간의 트레이닝을 받게 된 아무로는 초반에는 당연히 나는 여배우지(...)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댄스 레슨에 매력을 느끼고 춤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학교까지 자퇴하며 연예계에 입문한 그녀는 타고난 실력과 스타성으로 본격적인 연예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초반 슈퍼몽키즈는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후 몇번의 멤버 교체와 팀명 교체를 거쳐, 아무로 나미에가 센터가 되는 형식의 그룹으로 팀을 재정비 합니다. 쉽게 말해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아무로 나미에 with 슈퍼몽키즈는 아무로 나미에를 모든 면에서 센터로 몰빵하고 나머지 4명이 백그라운드로 무대에 서게 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그 결과 1995년 발매한 유로 비트 넘버 'TRY ME~나를 믿고서~'가 대히트를 치면서 당시 은퇴를 생각하던 아무로에게 기적과도 같은 성공을 안겨줍니다. 이후 유로 댄스 음악을 차례대로 커버하면서 '태양의 계절' 'Stop the Music'등의 히트싱글을 연발하며 아무로 나미에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당시 아무로 나미에는 특별한 오리지널 악곡이 아닌 유로 팝을 그대로 커버하는 일명 유로 댄스 싱어였는데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겼던 코무로 테츠야와 일본의 대형 음악 레이블 avex의 매니저는 그녀를 정식으로 발탁하면서 유로 비트를 벗어난 코무로 테츠야의 곡을 받아 정식 솔로 데뷔를 완수합니다.
당시 슈퍼몽키즈의 나머지 일원이었던 4명의 멤버는 MAX라는 그룹으로 데뷔해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여성 그룹 자리에 올라 많은 인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아무로와는 절친한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여 현재까지도 자주 만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95년 12월 발매. 최고 순위 1위. 136만장 판매
이 시기 아무로 나미에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메이크업과 미니 스커트, 롱 부츠등을 신으며 그 전의 일본 연예계에는 전례 없던 자유롭고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줬고, 이것은 그대로 일본 여성들에게 동경심을 안기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사회 현상이 바로 일본의 경제학 용어에도 실리게 된 '아무라' 현상이었고, 아무라 현상이 일게 되자 일본 여성의 체중이 감소하거나, 아무로 나미에가 하고 나오는 메이크업,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유행하며 이 시기 일본 열도는 아무라 일색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일본 음악계를 접수하던 대표 작곡가 코무로 테츠야는 아무로 나미에에게 'Body Feels EXIT'와 'Chase the Chance' 'Don't Wanna Cry' 등의 히트곡을 안겨주었고 아무로 나미에는 유로 댄스 노선에서 벗어나 번듯한 일본 댄스 음악의 대표 주자로 일어서게 됩니다. 그전에도 댄스 음악을 하는 가수는 있었지만 아무로 나미에처럼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까지 작정해서 등장한 여가수는 최초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젊은 댄스 뮤지션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과 안좋은 시선도 있었습니다만, 퍽 괜찮은 음악 퀄리티와 선보이는 흔들림 없는 라이브와 동경의 대상이 된 이미지까지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 가요계예 정상에 오를 가치가 있는 스타였습니다. 당시 워낙 라이브 실력이 출중해서 립싱크 논란이 있었지만 가사를 틀려먹는 바람에 라이브인게 들통나서 립싱크 의혹이 사라지게 된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가 없던 시절 암암리에 아무로의 비디오와 음반을 사는 구입층들이 늘어났고 그 영향력이 거대하진 못했어도 국내에도 아무로 나미에를 동경했던 가수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쥬얼리의 박정아였고, 박정아는 아무로 나미에가 한국에서 그룹을 만든다는 소식에 오디션을 받았다가 우연히 쥬얼리에 합류하게 되어 활동 초반 아무로 나미에를 연상케하는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또 현재는 고인이 된 故 유채영 역시 90년대 후반 한국의 아무로를 포지셔닝 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아무로 나미에가 유행시킨 스타일을 그대로 무대에서 따라하는 여가수들도 종종 보였다고 하네요.
아무로 나미에는 95년에 브레이크에 성공해 96년까지 초절정의 인기를 누렸고 97년 발매한 싱글 'CAN YOU CELEBRATE'는 일본 역대 여성 아티스트 싱글 판매량 1위를 달성하며 그 인기의 정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연소 4대 돔 투어 성공, 셀 수 없는 여성지의 모델과 각종 CF 계약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립니다. 첫 정규 앨범 SWEET 19 BLUES는 300만장이 넘는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무로 나미에는 갸루 문화의 시초 인물로 뽑히기도 하죠.
그러나 몇개월 후, 아무로 나미에는 기자 회견을 열고 돌연 결혼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년간 휴업에 들어간다는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일본 열도를 뒤집어 놨는데 당시 호외가 뿌려질 정도로 아무로의 결혼 발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혼전 임신이라는 사실과 10살이 넘는 연상 남편과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쇼킹 그 자체.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일본 여성들에게는 아무로 나미에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아무런 거리 낌 없이 행복하게 웃으며 발표한 것 또한 많은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 결혼 보고 기자회견 당시 모습.
이 날 아무로의 착장 또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알려진다.
2017년 아무로가 은퇴를 선언하고 특집 방송으로 마련됐던 NHK '고백' 프로그램에서 당시 상황을 밝힌 아무로는 휴업을 발표하고 1년 동안이 많은 불안감을 주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에 어떤 불안감이 와도 대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 일본 고위층의 가장 큰 수익원이었던 아무로가 휴업을 발표하자, 여러가지 우와사들을 발포해댔고 아무로는 이것에 대한 반항심에 그녀의 마스코트였던 긴머리를 단발로 과감하게 잘라냈다는 얘기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헤어스타일 조차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화제가 되었죠.
아무로 나미에는 1년간의 공백기를 청산하고 1998년 복귀를 선언한 다음 일본의 유명 가수들만 나올 수 있다는 NHK 홍백가합전을 통해 복귀 합니다. 이 방송에서 아무로가 눈물을 흘리자 순간 시청률이 80퍼센트가 넘어가고 역대 홍백가합전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면서 대중들이 아무로의 복귀에 대해 기대한 심리가 엄청 났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무로의 눈물의 의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 섞인 감격스러운 눈물이 아니었을지.
1998년 NHK 홍백가합전 中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뒤 아무로 나미에의 모친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면서 아무로는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어린 시절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삼남매를 키우며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힘들게 자식을 길러온 어머니의 비극에 아무로는 충격에 빠졌고 모든 스케쥴을 취소한 채 어머니의 빈소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연일 보도되기에 이릅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당시 어머니를 잃고 상당히 방황하고 힘들어했지만 그때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방향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그 이후부터 아무로의 활동은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꿋꿋하게 살아가자는 모토를 심어주게 됩니다. 또 당시 이 사건을 자극적, 선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에 대한 악감정이 생겼는지 이때 이후로 두번 다시 언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결심했다는 후문도 있죠.
아무로는 99년 3월, 복귀 제 2탄 싱글 RESPECT the POWER OF LOVE을 발매한 직후에 생긴 사건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브라운관에 그녀를 볼수 없게 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습니다만, 몇주 후 다시 무대에 오르기로 결정하고 복귀 무대 HEY HEY HEY에서 걱정 시켜드려 죄송하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다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에 아무로는 당시 자신이 부르고 있던 곡이 사랑과 용기를 주제로 한 'RESPECT the POWER OF LOVE'였기에 천만 다행이었다고 말합니다.
RESPECT the POWER OF LOVE (Single)
99년 3월 발매. 최고 순위 2위. 49만장 판매
이후 아무로 나미에는 계속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갑니다. 자신의 사운드를 책임지던 코무로 테츠야와의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음악적인 변신을 갈구하던 그녀는 평소 동경하던 블랙 뮤직 뮤지션 달라스 오스틴(TLC등을 발굴한 뮤지션)과 함께 작업한 싱글을 내놓으면서 음악적인 변신을 시도했고 점차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의 음악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일본 가요계는 하마사키 아유미와 우타다 히카루 등 신예 여성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한껏 뽐내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했고 아무로 나미에는 점점 그들에게 밀려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00년 발매된 정규 4집 앨범 'GENIUS 2000'은 대중들의 복귀 심리 탓인지 초동 판매량은 좋았지만 100만장 돌파에 실패하면서 당시 여타 가수들이 싱글에서도 100만장을 훌쩍 넘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 이후 발매한 싱글들도 뜨듯 미지근한 성적표를 받게 되면서 결국 01년 아무로 나미에는 코무로 테츠야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합니다.
2001년 자신의 첫 셀프 프로듀싱 작품이 된 싱글 Say the word를 발표한 아무로 나미에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작사에 도전하며 셀프 프로듀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곡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한참 뒤인 2018년 인터뷰를 통해 밝혀지면서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라면 미래도 달려갈 수 있다는 내용의 이 노래는 2012년 도쿄돔 투어의 마지막 곡으로 선정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 노래가 왜 엔딩이었는지 영문을 모르던 팬들은 이제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하죠.
Say the word (Single)
01년 8월 발매. 최고 순위 3위. 18만장 판매
계속되는 활동에도 점점 더 떨어져가는 판매량과 투어 동원객수에 언론은 한때 아무로를 찬양하듯이 떠받들다가 점점 디바의 몰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하락세를 부추기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 아무로의 판매량은 과거 100만장을 넘나들던 시절과 비교해도 한없이 초라했는데 정규 앨범과 싱글 베스트의 판매량 역시 20-30만장대로 떨어지면서 완연한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락세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전성기 시절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찾아온 이미지 소비를 비롯해 음악 장르가 대중적이지 못해지면서 비슷한 시기 등장한 여성 솔로들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아무로 나미에가 점점 대세에서 물러나게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대세에 있으면 그로 인해 언젠가 퇴보한다는 이미지가 생기기 마련이고 아무로도 순리에 따라 점점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2002년 경에는 남편과 이혼을 선언하게 되면서 아무로에 대한 여론 악화는 접입가경이 됩니다. 그 이후 아무로 나미에가 패스트푸드 점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악의적으로 보도해 아들에게 패스트푸드를 먹인다며 육아에 소홀한 슈퍼스타라는 식의 편파 보도가 이어졌고 비슷한 시기 시상식에서 음악 스탭과의 커넥션 오류로 반주에 맞춰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방송사고 까지 이어져 아무로의 이미지가 상당히 실추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로는 아들의 양육권을 얻고 아들과의 시간을 꾸준히 가지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후 모든 오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이 시기 점점 아티스트로서의 방향성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그 전까지 여러 음악 프로듀서들과 윗선의 사람들이 만들어준 레일 위를 걷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댄스를 결합하면서 본인이 정말 즐거운 음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도전하게 된 것이 바로 프로젝트 그룹 SUITE CHIC입니다. 그전까지 아무로 나미에의 음악과는 완전히 달라진 힙합 음악이었는데 평소 블랙뮤직을 동경하던 그녀가 힙합 뮤지션과의 콜라보레이션을 도전하면서 다시 즐거움을 찾게 되고 이러한 행보는 자연스럽게 음악 팬들에게 다시금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본인이 행복한 음악을 하다보니 그 모습에 점점 자연스럽게 신규 팬들이 모이기 시작 한것이죠.
SUITE CHIC - Uh Uh ... (2003)
SUITE CHIC은 프로젝트 그룹였고 당시 일본에서 힙합 음악이 메이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반응을 얻었으며 한정으로 발매한 싱글 모두 완매가 되는 등 소소한 성공을 거둡니다. 당시 메인스트림이었던 그녀가 마이너한 장르였던 힙합을 대세에 선보이는 것은 힙합 팬들에게도 이목을 끌었고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한마디로 대중성 따위는 모두 걷어내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겠다는 배짱에서 나올 수 있던 앨범이었습니다. 그 이후 아무로 나미에는 아예 음악 스타일을 힙합으로 과감하게 꺾으면서 직접 앨범 제작에 참여하는 등 자신의 대한 전면적인 부분을 수정하고 컨트롤하는 아티스트의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이때 아무로 나미에는 처음으로 2-3개월 동안 음악 작업에만 몰두해 새로운 정규 앨범을 완성시켰고 그 전에 전성기 시절에는 몇 주만에 정규 앨범을 작업하던 시기도 있었던 터라, 앨범을 제작하는 것이 이렇게 즐거우면서도 긴 시간이 할애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앨범 STYLE은 2003년 발매되어 팬들의 복합적인 반응을 얻게 됩니다. 기존의 아무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다크한 힙합 스타일에 일부 대중들은 당황했지만 신규 팬들이 모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So Crazy (Single)
03년 발매. 최고 순위 8위. 5만장 판매
그러나 여전히 판매고는 저조했고 투어 규모 역시 아레나 규모에서 홀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인기가 생명인 아티스트에게 이러한 인기 하락으로 생겨나게 되는 작은 규모의 일들을 기회로 삼고 홀 투어를 하는 대신 공연 횟수를 늘리고 퍼포먼스에 더 신경을 쓰면서 일각에서는 더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합니다. 톱의 자리에 있던 그가 일부 언론에서 질타하고 있는 하락하는 인기에 대해서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본인의 자리에서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로의 뿌리 깊은 팬덤을 확고히 마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아무로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꾸준한 투어 활동과 계속되는 TV 프로모션으로 본인의 새로운 스타일을 꾸준히 어필했으며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2004년에 발매된 싱글 'ALL FOR YOU'가 다시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이후 발매한 싱글들 역시 모두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다시금 재기에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특이한 전개와 선정적인 가사로 화제가된 WANT ME, WANT ME는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아무로의 의견으로 싱글화 되었지만 1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해 더욱 더 재기에 탄력을 받기 시작 합니다.
WANT ME, WANT ME (Single)
05년 발매. 최고 순위 2위. 10만장 판매
2005년 발매된 정규 앨범 Queen Of Hip-Pop에서는 자신의 장르를 힙합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팝과 절묘하게 섞은 장르인것을 어필하기 위해 'Hip-Pop'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으며 그 단어에 걸맞게 팝과 힙합을 오가는 싱글과 앨범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차트 2위까지 올라 이 시기부터는 다시 대중들이 아무로 나미에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이 앨범은 꾸준한 롱런끝에 45만장을 판매했으며, 2000년대 초반 음반 판매량이 20만장대에 머물렀던 것에 크게 반등한 수치였습니다.
아무로는 2000년대 중반에 진입하면서 데뷔 10여년 차에 변하지 않는 외모와 실력으로 꾸준한 반응을 얻었으며 이 시기에는 안정적인 모습을 선보이게 되면서 음악 장르 역시 블랙 뮤직에서 자연스러운 팝으로 스며들게 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그리고 2007년 자신의 커리어에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싱글 Baby Don't Cry를 발매하는데 이 싱글이 15만장 가량의 판매고와 여러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다시금 메인스트림에 확실하게 복귀하기에 이릅니다. 이 곡은 일본 여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아 다시금 아무로가 일본 여성들의 트렌드세터로 올라서게 만듭니다.
Baby Don't Cry (Single)
07년 1월 발매. 최고 순위 3위. 15만장 판매
이후 아무로는 정규 앨범 PLAY를 발매하면서 본인의 무르 익은 음악 색깔과 고른 퀄리티로 다시 한번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것은 7년만의 오리콘 차트 1위라는 쾌거를 안깁니다. PLAY는 54만장을 돌파해 하프 밀리언을 달성했고 당시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동년배 가수들은 모두 판매량이 하락하는데 아무로 나미에만 유지하고 심지어 판매량이 더 오르고 있다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무로는 이 시기에도 꾸준한 투어 활동을 통해 음악 활동에 소홀해하지 않았고 새로운 라이트 층과 기존 팬들까지 다시 아무로를 찾으면서 이 시기 언론에서는 '시대가 아무로를 따라잡았다'라는 기사를 싣으면서 아무로의 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아무로가 재기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의 하락한 위치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 들여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활동했고 꾸준히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고수하고 어필한 것이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자기 관리 역시 많은 호감을 사기도 했습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2008년 60~80년대의 팝 명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3A 싱글 60s70s80s를 발매하는데 당시 비달사순과의 프로모션 계약으로 고예산의 뮤직비디오를 CF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별다른 음악 방송 활동 없이도 29만장이라는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이제 다시 음악씬의 톱에 자리합니다. 기세를 이어 발표한 베스트 앨범 BEST FICTION은 오리콘 기준 155만장 이상의 판매고와 6주 연속 1위를 달성하며 2008년 가장 많이 팔린 여성 아티스트의 앨범에 랭크되며 확실한 재기에 성공합니다.
BEST FICTION (Best Album)
08년 발매. 최고 순위 1위. 155만장 판매
직전까지 일본 여성 솔로계에서 톱을 유지하던 하마사키 아유미와 코다 쿠미는 소속사 에이벡스 특유의 공격적인 프로모션과 과도한 활동으로 인해 하락세를 겪었으며 이들에게 점차 지겨움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을 찾게끔 하는 요소를 불러냈고 적절한 타이밍에 아무로 나미에가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단숨에 톱의 자리에 복귀하게 됩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베스트 앨범 BEST FICTION은 그녀가 추구했던 블랙 뮤직 시절의 음악과 팝 음악을 한데 모은 작품이었는데 이 앨범이 대히트를 하면서 그녀의 음악 세계관 또한 다시금 재조명 받았으며 일본 메인스트림 여성 가수 중 블랙 뮤직을 메인스트림에 이끈 인물로 아무로 나미에가 뽑히면서 2000년대 초반 암울했던 시절까지 모두 음악적 경력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됩니다.
Past<Future (Album)
09년 발매. 최고순위 1위. 57만장 판매
이후 아무로는 또 다시 과감한 행보를 이어갑니다. 새 앨범 Past<Future는 싱글 한장을 끝으로 나머지 곡들을 모두 신곡으로 도배하는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선택했는데, 일본 음악계의 발매 패턴이 기본 3-4장의 싱글을 발매하고 그 중의 히트 싱글을 필두로 앨범을 발매하는 기존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형태였습니다. 그 결과 다시 한번 히트에 성공했고 지난 앨범에서 더 판매량이 상승한 57만장을 기록했고 앨범 평가 역시 호조였습니다.
이 시기 아무로는 점점 TV 활동에서 벗어나 투어와 음악 활동 위주로 팬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 것이 아무로 나미에의 제2의 전성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지속적인 현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행보가 됩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이후에도 꾸준한 싱글 발매와 투어 활동을 했고 이 시기 음악 스타일이 일렉트로닉 음악을 기반으로한 팝 댄스로 바뀌면서 조금 더 대중적인 노선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2010년 발매한 NAKED와 Get Myself Back등의 히트 싱글들을 발표하던 그녀는 이 시기 아예 TV 프로모션을 사실상 중단한 채, 완전한 투어형 가수로 변모합니다. 음악 활동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더 좋은 평가를 받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Love Story (Single)
11년 12월 발매. 최고 순위 3위. 16만장 판매
아무로 나미에가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 중에 하나가, 2010년대에도 굵직한 대히트곡을 발표했다는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Love Story입니다. 이 노래는 음원 대상을 수상하고 16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많은 인기를 누렸고 그전까지 CAN YOU CELEBRATE로 통칭되던 아무로의 대표곡 자리를 바꿔놓을 정도로 현 세대에게는 가장 익숙한 아무로의 대표곡이 됩니다.
같은 해 아무로는 콜라보레이션 앨범 Checkmate!를 발매해 다양한 음악 뮤지션과 장르를 선보인 콜라보레이션 베스트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어 50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고 꾸준한 세일즈와 안정적인 활동을 이어갑니다.
이 시기 아무로 나미에의 음악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심플하면서도 놓치지 않는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로 나미에만의 철학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마사키 아유미나 코다 쿠미가 하락세가 온 이유 또한 그녀들의 음악과 각종 활동에서 보여준 끊임 없는 화려함과 쉬지 않는 음악 활동등으로 인해 생긴 이미지 소비가 대중들에게 피로감을 느끼게 해준것에 반해, 아무로 나미에는 전략적으로 이 시기 모든 PV에서 화려함을 걷어내고 심플하면서도 아무로 나미에 자체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아티스틱한 면에 트렌디한 음악을 결합해 그녀만의 스타일을 고수합니다.
여러가지 아무로 나미에만의 철학이 있었지만 제 나름대로 연구한 것이 바로 그녀만의 심플함이었는데, 아무로 나미에 자체의 인간이 눈부셨기 때문에 부수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 자체를 믿고 움직였던 것이, 아마 아무로 나미에를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자 그녀만의 철학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인간 자체가 화려했으니 굳이 다른 것에 치장하지 않고 과하지 않게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에디튜드와 퀄리티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아무로 나미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2010년대에도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팬들과 함께 했으며 2012년 데뷔 20주년에 이릅니다. 그는 정규 앨범 Uncontrolled를 발매했고 이 앨범 또한 하프 밀리언을 기록해 변하지 않는 세일즈 파워를 보이며 화려한 20주년을 맞이합니다.
2012년 5대 돔 투어를 완수하며 화려한 20주년을 보낸 아무로 나미에.
2012년 아무로 나미에는 데뷔 20주년을 맞이해 자신의 고향인 오키나와에서 기념 라이브를 계획했지만 당시 태풍의 영향으로 모조리 중단되었고 5년뒤 다시 개최하는 것을 다짐하고 돔 투어를 통해 20주년 기념 라이브를 완수했습니다. 데뷔 20년차의 솔로 아티스트가 돔에서 20주년을 맞이하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습니다.
2017년 은퇴 직후 인터뷰에서 원래 이 시기에 은퇴를 고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결의했던 20주년 오키나와 라이브가 무산되자 5년간의 시간이 생긴 그녀는 5년간 가장 즐겁게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이때 발매한 정규 앨범이 사실상 베스트 앨범 격이기도 해 영문을 모르던 팬들은 20주년 앨범 볼륨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는데 원래 은퇴를 결의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이유가 어느정도 납득이 되는 부분입니다.
아무로 나미에는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5년을 자신이 좋아하는 라이브와 음악 활동에 치중합니다. 이 시기 아무로 나미에는 EDM 뮤지션과의 협연을 통해 더 트렌디한 음악을 선보였는데 그 음악의 집합체가 정규 앨범 FEEL입니다. 이 앨범은 2013년 발매되어 역시나 평단의 호응을 얻었고 30만장이 넘는 우수한 판매고를 올려 변하지 않는 인기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이 앨범의 Alive라는 트랙은 데뷔 20주년이 된 댄스 뮤지션이 선보였다고 믿기지 않는 세련됨과 감각적인 트랙이었기에 더더욱 아무로 나미에가 앞으로 계속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팬들은 예상했습니다.
FEEL (Album)
2013년 발매. 최고 순위 1위. 39만장 판매
이 시기 아무로 나미에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창법 변화가 두드러지는데, 90년대에 데뷔한 가수였기 때문에 2010년대, 최근처럼 발성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던 시절에 데뷔한 터라 창법 자체가 목에 많이 무리가 되는 창법이었는데 장기적인 라이브를 위해 창법을 바꾸고 꾸준한 목 관리를 하면서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변하지 않는 라이브 실력을 선보였습니다.
이후 아무로는 발라드 베스트 앨범 Ballada를 발매하는데 팬들의 투표에 의한 곡들을 뽑았고 전곡을 재녹음한 뒤 PV가 없는 곡들의 PV를 새롭게 촬영하는 등 팬서비스에도 심혈을 기울입니다. 이 앨범은 40만장이 넘는 판매고로 상업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댄스 뮤지션임에도 발라드 히트곡이 상당했던 그녀였기에 가능한 발라드 베스트 앨범이었습니다. 그녀가 댄스 뮤지션으로서 뿐만 아니라 발라드 아티스트로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로는 2015년 소속사를 자신의 1인 기획사로 옮겼고 에이벡스 내의 퍼스널 레이블로 이적합니다. 일본 가요계에서는 소속사 이적이 드문 경우라 더 화제가 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악의적인 소문도 있었지만 모두 근거없는 사실. 아무로는 새롭게 둥지를 툰 개인 레이블에서 새로운 정규 앨범 _genic를 공개합니다. 이 앨범에서 80~90년대 사운드를 현재 트렌드와 접목시켜 제작했으며 전곡을 신곡으로 도배하며 더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갑니다.
이 앨범은 24만장이 넘는 판매고로 준수한 성적표를 거두었고 전작 FEEL의 반응이 워낙 좋았던 터라, 우려하는 반응이 있었지만 우려를 모두 씻어내고 _genic 또한 좋은 반응을 얻는데에 성공합니다.
Hero (Single)
2016년 7월 발매. 최고 순위 6위. 8만장 판매
아무로는 2016년 NHK 리우 올림픽 주제가로 타이업된 싱글 Hero를 히트시키고 이후에도 여러장의 싱글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2016년부터 88회에 달하는 대형 홀 투어를 개최하였고 이후 추가공연을 통해 100회 공연을 완수합니다. 전국의 팬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아레나 공연이 아닌 홀 투어를 선택해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이 전무후무한 투어는 후에 영상화 되어 발매되기도 합니다.
2017년에 들어서도 싱글을 발매한 아무로는 같은해 여름 데뷔 25주년을 맞이해 20주년에 실패했던 오키나와 라이브를 성공적으로 개최 합니다. 아름다운 오키나와의 야외 공연장에서 이루어졌던 아무로의 25주년 기념 라이브에는 오키나와의 청년들의 일자리를 위해 스탭을 오키나와 현지 학생을 고용하기도 했고, 당시 관광객이 아무로의 공연 영향으로 더 많아 지는등 오키나와에서 치뤄진 25주년 공연은 그야말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렇게 25주년의 기쁨을 누리던 팬들은 이틀 뒤 많은 충격과 또 슬픔을 안게 됩니다.
2017년 9월 20일 충격의 은퇴를 발표한 아무로 나미에
바로 은퇴 선언이었습니다. 아무로의 은퇴 소식에 일본 언론을 일제히 1면에 그녀의 은퇴 소식을 보도했고 그녀를 지지하던 일본 대중들은 상실감에 헤어나오지 못해 아무로스(아무로에 loss를 더한 신조어) 현상을 일으키며 그녀의 은퇴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무로의 은퇴에는 많은 배경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아무로 자체가 더 이상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 미련이 없으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자신의 분명한 철학과 관념으로 인해 26년을 끝으로 자신의 음악 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은퇴를 선언한 아무로는 남은 1년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지막까지 활동을 이어나가겠다고 발표했고 이후 베스트 앨범 200만장 돌파와 각종 CM 활동, 그리고 마지막 돔 투어에서 75만명을 동원하며 그야말로 정상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된 셈입니다.
아무로는 은퇴에 대해 새로운 통과점이라고 밝혔습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두근두근 한 마음이라고 심경을 밝혔고, 슬픈 이별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며 은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또 한 상당히 희석하고 있는 행보를 보였습니다만 그녀를 지지한 팬들은 그녀의 은퇴가 다가오는 지금 시점에서도 많이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은퇴를 결의한 것은 20대 후반부터 였다고 말한 아무로는, 꼭 많은 사람들이 있는 라이브 회장에서 끝을 맺고 싶다는 일념하에 긴 암흑기를 견뎌내고 다시 정상에 올라 많은 팬들의 축하속에 음악 활동을 마무리합니다.
아무로 나미에의 음악 인생은 여성으로서 귀감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는 한 일본 시민의 말처럼 굳건한 철의 여인답게 두고 두고 회자가 될만한 파란만장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속에서 아무로를 지탱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그의 아들 그리고 어머니였고, 단 한순간에도 팬들과 노래하는 즐거움을 잃지 않은 아무로는 영원한 J-POP의 여신으로 남을거라 생각합니다.
CAN YOU CELEBRATE?
97년 발매. 최고 순위 1위. 230만장 판매.
아무로 나미에의 상징 곡.
2018년 9월 16일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 음악계를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많은 음악과 의미있는 행보들은 영원히 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Amuro Namie. You Are My Hero!
첫댓글 몇가지 덧 붙여보자면 슈퍼몽키즈시절 미스터 USA, 댄싱 정크, 아이시테 머스캇 등등을
발표하면서 레귤러 방송이나 이벤트성 프로에 나가는등,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여러가지 홍보를
하였으나 쉽지 않았죠. 미스터 몽키즈가 36000장 정도 팔렸는데 그 이후 싱글들은 더 처참하게 팔렸고..
당시 소속사 사장이 이번 싱글이 안되면 해체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기적적으로 TRY ME ~나를 믿어~ 싱글이 갑자기 초대박 나면서 초동 만장에서 73만장이나 팔아치우고
이때 부터 유로비트 3연작 싱글이 시작되고, 모두 50만장 이상팔리면서 호조를 보였죠.
Try Me 는 이탈리아 여성가수 로리타의 원곡곡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리메이크 였죠. 게다가 그간 모습들에 비해서
스테이지 퍼포먼스도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 정말 그 모습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었죠.
"이쁜데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라이브까지 잘해!"
태양의 시즌, Stop The Music 모두 리메이크곡으로 앨범이 초대박 나고
절친이었던 슈퍼몽키즈였던 멤버들이 향후 맥스로 데뷔하면서 역시나 대박을 터트리게 되서
서로 윈윈하게 되었죠.
아무로의 결혼생활은 매우 우울했다고 하네요. 집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아무로의 얼굴은
매우 어둡고 쓸쓸해 보였다고 하네요. (샘 이노무 새꺄)
아무로 모친의 사망으로 이 당시 우리나라의 공중파 뉴스에도 탈 정도로 화제가 되었었죠.
이때 아무로가 진심으로 은퇴를 결심할뻔 했다가, 팬들을 위해 힘을 냈다고.
GENIUS 2000은 팬들의 기대와 화제가 컸고 소속사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코무로식 음악이 아니었죠. 왜냐하면 미국의 유명프로듀서 오스틴 달라스와의 협작이었으니까요.
이때부터 음악적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 라이트 팬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다음 앨범인 BREAK THE RULES에서는 더더욱 서양음악 스타일로 나아가게 되고
판매량은 반토막 이상이 떨어져 나가죠. 제가보기엔 팬들도, 리스너들도 이때의 음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듯 합니다.
이 이후 코무로와의 음악적 이별은 정말 신의 한수.
적당할때 빠이빠이 해서 좋은 결과를 낸 그녀.
코무로가 프로듀서 했던 여성가수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아무로.
1996년 1997년 부터 아무로팬질을 해와서 인지
아직도 은퇴라는게 사실 믿어지진 않아요.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듯...
저도 한 줄 한 줄 다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ㅠㅠ 모르는 곡들 하나씩 다 찾아들어보고 있어요. 진짜 멋있는 사람 ㅠㅠ
저도 열심히 읽었네요...진짜 엄청 길게 잘 쓰셨네요ㅜㅜ
읽을때마다 계속 소름돋고 아무로뽕에 차오르고 막 그러네요
say the word가 막곡이었다는거 진짜 소름돋네요...
진짜 인생한번 엄청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네요
저 같으면 쉽게 낙담하고 금방 포기해버렸을텐데
진짜 역시 철의 여인, 멘탈 하나는 진짜 대단한듯...
와 진짜 한달도 안 남았구나...ㅜㅜ
아무로는 평생 간간히 음악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정말 매우 너무 아쉽지만...
지금까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ㅜㅜ
노리신건 아니겠지만 잡초닉네임과 아무로 너무 잘어울리네요ㅠㅠ 잊혀질만하면 타란 ㅠ 진짜 제이팝 레전드
진짜 인생 자체가 영화인 그녀ㅠㅠㅠ
우와 진짜 잘 읽었습니다! 잘 몰랐는데 알게 되었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초기전성기가 생각보다도 더 짧네요. 베스트앨범으로 화려한 재기했다는 기사 본게 엊그제같은데 그게 어언 10년 ㄷㄷ 시간 진짜 빠르다
그치만 그 전성기의 파워가 넘사벽이었죠.
정독했어요 이제 한달정도 남은거같은데...내한했을때 못간게 한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