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인>>
<<박연준 시인의 양력>>
* 1980년 서울 출생.
*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 시집 :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부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 산문집 : 『소란』,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인사 대신 읽어보오』,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모월 모일』.
* 동화 : 『정말인데 모른대요』.
<<박연준 시인의 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박연준
내 나쁜 몸이 당신을 기억해
온몸이 그릇이 되어 찰랑대는 시간을 담고
껍데기로 앉아서 당신을 그리다가
조그만 부리로 껍질을 깨다가
나는 정오가 되면 노랗게 부화하지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눈을 감아
감은 눈 속으로 현란하게 흘러가는 당신을
낚아! 채서!
내 기다란 속눈썹 위에 당신을 올려놓고 싶어
내가 깜박이면, 깜박이는 순간 당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겠지?
내 이름을 길게 부르며 작아지겠지?
티끌만큼 당신이 작게 보이는 순간에도
내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기며
싱싱하게 파닥일 거야
나는 라벤더를 입에 물고
내 눈은 깜빡깜빡 당신을 부르고
내 기다란 속눈썹 위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찍히고
껍질이 있는 생에게/박연준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진 어린 남동생은
흐르는 시간에 침을 뱉으며 놀았다
나는 이따금씩 벌에 쏘였지만, 개의치 않았고
빨래를 개다, 엄마의 양말이 너무 작은 것이
다만 마음에 걸렸다
내 주머니 속에는 아침이 되어도 잠들지 못한
고된 별들이 뿌리를 내렸고
분홍빛 알약이 병약한 그들을 돌봤다
나는 걸어다니는 비명,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에 들어가 몰래 웅크리고 있다가
사슴이나 먼지, 혹은 껍질이 있는 생에게
시집가고 싶다
동트기 전 길디긴 진통을 겪고
등에 혹 달린 낙타 한 마리 낳고 싶다
가엾은 당신, 내 멍으로, 푸른 멍으로
기르고 싶다
눈을 감고, 기억을 흔들면/박연준
그게 언제였는지
당신 입술을 손가락으로 걷던 날
촘촘히 누운 붉은 계곡 길을 걷던 날들
이미 공기는 퍼렇게 죽어버렸고
별들의 비밀통로도 들통나버렸지만
열두 마리 송아지를 낳고 싶었어, 그때
나는 금방이라도 어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
젖이 돌고, 배는 자꾸 부풀어 올랐으니까
감은 눈으로만 걷고 싶었지
한낮에는 커튼 사이로 숨어들어가
누군가 혹시 숨겨놓았을까, 빨간 리본 따위를 찾기도 했어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는, 꼬리가 긴 내 아기
하지만 커튼은 이유도 없이 쉽게 펄럭였고
수시로 내 허연 허벅지가 아무렇게나 드러났어
수치심에 두 볼에선 발톱이 자라났고
조금씩 딱딱해지는 당신 입술, 만발하는 악취
내 머리칼 끝에선 유리조각이 돋아났어
바람이 내 머리칼을 엎지르면
결이 고운 베개들의 순결한 잠에선
후드득 핏방울도 떨어졌지, 아마
발과 자궁/박연준
자궁이 보랏빛 노동을 시작했다
나는 갈라터진 한 덩이 마른 밭이 되었다
질 속에서 막 달아난 새끼 낙타의 등이
싱싱하게 흐느끼며 밤을 깨울 때
이 밤을 지나가는 발은 외롭다
꽃이 아름다운 건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일까?
자궁을 떠받든 채 웅크리고 있는
발은 몸의 바닥이다
몸이 누울 때는 저 혼자 수직을 고집하고
몸이 설 때는 저 혼자 수평을 고집하는
발이, 눈부시게 피어난 발이
자꾸만 딱딱해지고
나는, 보랏빛으로 밑을 씻고 잠든다.
시를 쓴다/박연준
고요 속에는
개줄에 목이 묶여 기어가는 아버지와
365일 하혈하는 병든 밤과
부지런히 늪을 짓는 거미가 산다
내 눈 속에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시들,
그 꾸물꾸물, 징그럽게 살아 있는 푸른 독으로 거품이 일고
늙은 어둠은 언제나 나를 방관한다
나는 눈멀고 입술이 봉해진 캄캄한 뱀이다
시간은 내 가랑이 사이로 줄곧 빠져나가고
착한 가난이 내 치맛자락을 흔들어대도
나는 멍든 심장을 쥐고 시를 쓴다
시퍼런 독을 짜내 멍을 키운다
생일/박연준
파란 장미를 먹고 얼어버렸으면,
생선가시처럼 희미하고 싶다
나뒹구는 밤을 넘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고 싶다
가서 귀 없는 고흐와 몸 섞고 싶다
진하게, 굵게, 뭉개지도록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발가락이 하나 없었으면ㅡ
생리하는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
울렁이는 푸른 죽음들에게 발목 잡히고 싶다
내 깊은 병(病)을 유리병에 꾹꾹 눌러담아
늙은 아버지에게 선물하고 싶다
수수깡처럼 싱겁게 부러지고 싶다
병아리 다리를 붙잡고 울고 싶다
온몸이 흔들리는 촉수가 되어
하늘에
박히고 싶다
얼음을 주세요/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몸에 흘러와 머물 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나는 이제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돌아보면 뒤가 파란/박연준
노란 꽃 속을 돌아다녔다
거친 계단을 만났다
갑자기 가슴이 볼록해졌다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았다
꿈속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솜털처럼 복슬복슬, 부드러운 칼이
이봐, 여긴 내 침대야!
곤두서서 외쳤다
거미줄에서 만난 남자와 두 손을 잡고
몸을 비비 꼬며 기도를 했다
냄새가 났다
땅속으로 들어가
여왕개미가 알을 낳는 풍경을
오래, 구경했다
내 실크로드에는 개미들만 오갔고
나는 그들의 검은 발자국을 베고 누워
오줌을 쌌다
아주 따뜻한 강이
흐르는 듯했다
한밤중엔 무릎을 꿇고 앉아
지난 계절의 이름을 불러보거나
빙그르르 돌면서 춤을 췄다
가끔 눈 속으로 별이 떨어졌고
아침이면 눈을 떠
별들의 시체를 꺼냈다
빈센트/박연준
미쳐 죽게 해주세요
날뛰다가 모가지가 뒤틀려
죽음이 꾸역꾸역 밀려오게 해주세요
온몸 구석구석에서 펌프처럼
피의 줄기가 터져나오게,
내 모든 시간과 기록이 소진되도록
하염없이 죄를 지으며,
죄에 깔려 죽을지라도
뱀을, 보내주세요
시커멓고 차가운, 거대한 뱀
(미끄러운 발작!)
뱀의 입속에 난 두 갈래 길에
다리를 한 짝씩 올려놓게 해주세요
길이 달리면 다리가 찢어지고
내가 두 개가 되게 해주세요
하나의 나는 빨갛게
또하나의 나는 검게 해주세요
둘이 서로 침 뱉다가
영영 돌아서서 딴 길 가게 해주세요
죽도록,
붓을 들고 있고 싶어요
시앤, 뱃속이 텅 비어
벙어리가 된 시앤
네 썩은 입술 사이로
꽃잎이 진다
봄이 와서 급성으로 죽음에 이르는
하품/박연준
마음이라는 게 아주 작게 접으면
접힐 수도 있는 것인데
자꾸 활짝 피고 싶은 꿈을 어떻게 한다?
창문에서 맞은편 담벼락까지
허밍으로 날아가는 라일락 꽃잎
도착하지 않기로,
그저 날아가다 사라지기로
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박연준
탈탈 털어 죄다 갖다버린 그늘에는
무릎에서 떨어진 딱지도 있고
취한 아버지가 내 이름을 오래 부르다 고꾸라져 잠든 밤도 있고
걸음, 뒤틀린 다리를 끌고 사라지던 여름도 있다
뭉뚝한 연필, 가느다란 연필, 부러진 연필로
새벽의 어깨선을 열심히 그리던 시간들도 모두
모두 갖다버렸다
버렸더니 살겠다
내가 나를 연기하며
(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
그늘을 기억하는 일과
들어가 사는 일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리며
살 수는 있겠으나
이미 태어난 슬픔은 악다구니를 피해
여전히 질투 나게 말랑한 누군가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붉고 끈덕지게 새끼를 치고
나는 멀리에서 가벼워진 몸,
이라 생각하며
포기, 포기, 포기하겠다고 눈을 감지만
어느 새벽 방바닥에 앉아 발가락을 만져보니
열개의 잘린 술래들
벙어리가 되어 입을 벙긋거리는 술래들이 나를 본다
도망가봤자 소용없어,
아름다운 그늘!
이별에 관한 일곱 개의 리듬/박연준
1
사과에 내리는 붉은 빗방울들
둥그런 능선을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가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몇 번 했을까, 사과나무는
2
당신의 수염
얼굴에서 자라는 뿌리
내가 매일 잡아먹는
달빛들
3
코스모스는
가을에 핀 키스들
잠정적으로
잠정적으로
살아 날뛰는
이별들,
4
발 없이 걸어 다니다 들킨 지네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늙어도
막무가내로 걸어 나가는
생(生)을 잡을 순 없지
5
붉은 색연필로 당신의 테두리를 그리다
입술 주름에서 빨강을 부러뜨리겠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 그 기울기가 내 길이다
서툰 날짐승들이 배를 끌고 지나다니던
돌멩이들이 날아와 내 속눈썹을 빻는 밤
종이 위에 다섯 개의 무덤을 짓고
기억을 해독하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부숴 먹겠다
6
흰 장송곡들의 종착역
가난한 사람들의 뒤꿈치가 모여 자는 곳
목이 쉰 남자들이 목적을 잃어버리는 곳
무덤 위에 내리는 눈은
무덤의 무덤
7
가는 사람
이승에서의 마지막은
포도 박스를 손에 들고 가는 뒷모습이었지
흔들어볼 팔도 없이
눈과
등이
전부였던 사람
늘 반달만큼 모자랐던
공중의 포도 향에 팔려
먼 곳으로
아직도
가고 있는 사람
생각담요 아래 살다/박연준
바람이 덩어리로 지나다니는 겨울,
저녁입니다
무거워진 생각을 발끝으로 차며 걷는데
별안간 생각은 오래전,
아랫목에 펼쳐 놓은 밍크담요가 되어
펄럭이다 따뜻해집니다
안을 들춰보니
작고, 고요하고, 가느다란 옛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어깨가 굽은 순한 가장들과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는 식구들
골목과 마당과 연탄 속을 뛰어다니다 잠든 쥐들
같이 살던, 쥐들
점선으로 걸음을 그리며 다가오던 저녁도
여전히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담요를 덮고
꼭꼭 숨어라, 주문을 외우고
눈을 감으니
발을 길게 끌며 사라지던,
구불구불한 골목을 데리고 사라지던
두부장수 종소리도 들릴 것 같습니다
느리게 오는 기억은
오는 동안
귀퉁이를 잃지요
담요 아래서나 살지요
차가워진 턱 아래를 만져봅니다
지붕 아래 숨어 사는 고드름들이
한꺼번에 물이 되어 쏟아질 것처럼,
흔들립니다
발등에 내리는 눈/박연준
당신이 꽃을 주시는데
테이블에 던져놓고 잊어버린 밤
사라진 것은 밤이 아니라 빛의 다른 이름이다
일회용 컵 뚜껑을 깨물다
입술을 베였다
가벼운 것에 베이면 상처가 숨는다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허공을 더듬는 거미의 열기인지
허방, 이라는 계단인지
눈밭에서 참았던 오줌을 누며 생각했다
지금,
어딘가에서 젖니들은
여전히 지붕 위를 날고 있을 것이다
지붕이 하늘의 발등이라면
젖니는 발등에 내리는 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까놓은 엉덩이로 별이 떨어지면
별의 자식을 수태할 것 같다
정정당당하게 사라진 얼굴들
눈밭에 풀어놓으니
쉽게 녹는다
이제 어떤 키스가
내 입술을 벨 수 있을까?
화살과 저녁/박연준
모든 것에 실패하고 싶다
동그란 빛에 들어 자는 일
삼각형으로 생각을 세우고
그림자와 그늘의 이별에 관여하는 일
목소리로 빛의 무늬를 희석하는 일
발끝으로 세상을 걸으며
발가락이 가장 빨리 낡을까
민들레, 개암나무, 피자두는
내 이름을 모르겠지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안다, 고 생각하며
실패로 이루어진 화관을 만들어야겠다
나중에
죽은 사람들에게 씌워 줘야지
나중에
죽었던 사람들이 들고 있겠지
저녁에 오는 생각들은
풀린 실패에 엉기는,
실패(失敗)들일까
날개를 떼어놓고 잠든 할머니/박연준
세상에는 병원이 참 많다
하얀 상자 위에 십자가를 꽂은 모습이
꼭 준비된 무덤들 같다
누군가 창문 위에다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쓰고 있다
병상 위엔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꽃다발
때 아닌 소나기처럼 막막해지고
링거 병에 갇힌 투명한 액체는
낮은 음정으로, 중얼거리듯
똑- 똑- 하강한다
지나간 바람들이 멀리서 아우성대는 저녁
화단에 앉아 놀던 나비들은
날개를 떼고 잠이 든다
잠 든 나비는
누가 고이 접어놓은 편지처럼 비밀스럽고,
할머니의 오래된 자궁이 슬며시, 주저앉는다
서른/박연준
간장을 종지에 따르다
한 방울 톡, 튀었는데
고 까만 점 속에서
내 서른이 피어났다
창문을 닫고 돌아서는 등 뒤로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들
(너희들이 보았니?)
른, 른,
서른
고백하려다 끝내 잊혀진 말들이
딱딱한 씨앗으로 세 개
지난밤 내가 묻어둔 꽃씨들이 보고 싶어
한밤중 잠든 화분 속을 헤집어본다
다섯 개였나, 여섯 개였나
혹시 묻어두었다고 착각했었나?
어두운 과거를 핀셋으로 발라내며
이곳은 피 한 방울 없이도 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기다려야 한다
가만히 방바닥에 앉아
기차가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갈 때까지
무사히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요한 싸움/박연준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이
타는 그네
참새 무덤을 만든 사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새가 되려다 실패한 고양이의 눈 속엔
비밀이 싹 튼다
허방과 실패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소문이 무성해지는 힘으로
봄은 푸르고
변심을 위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버드나무를 무겁게 누르는 오후
여름은 승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죽은 참새와 그네 위
기다래지는,
생각
버티어야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
살기도 한다
눈을 감고, 기억을 흔들면/박연준
그게 언제였는지
당신 입술을 손가락으로 걷던 날
촘촘히 누운 붉은 계곡 길을 걷던 날들
이미 공기는 퍼렇게 죽어버렸고
별들의 비밀통로도 들통나버렸지만
열두 마리 송아지를 낳고 싶었어, 그때
나는 금방이라도 어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
젖이 돌고, 배는 자꾸 부풀어 올랐으니까
감은 눈으로만 걷고 싶었지
한낮에는 커튼 사이로 숨어들어가
누군가 혹시 숨겨놓았을까, 빨간 리본 따위를 찾기도 했어
리본을 풀면,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는 꼬리가 긴 내 아기
하지만 커튼은 이유도 없이 쉽게 펄럭였고
수시로 내 허연 허벅지가 아무렇게나 드러났어
수치심에 두 볼에선 발톱이 자라났고
조금씩 딱딱해지는 당신 입술, 만발하는 악취
내 머리칼 끝에선 유리조각이 돋아났어
바람이 내 머리칼을 엎지르면
결이 고운 베개들의 순결한 잠에선
후드득 핏방울도 떨어졌지, 아마
울음 안개/박연준
윗집 아이가 운다
울음에 손톱이 돋아 허공을 긁고
아랫집 천장을 긁고
한낮의 정적에 미세한 홈을 판다
아이가 운다
울다 5초간 악을 쓴다
악을,
악을,
악을,
악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리도
지루하고 어두울까
아이의 발끝에 숨은 살기가
다섯 해 동안 소량씩 모아온 악이
안개가 되어 우리 집 천장을 뚫고
바닥에 고인다
닦을 수도
건질 수도 없는
울음 안개
천장을 향해 고개를 처들고
기다린다
쏟아질지 모르는 어떤 저의(低意)
어떤 벼랑,
어쩌면 비밀과 비밀을 찔러죽일
뾰족함
꽃 필 때 같이 잤다/박연준
추락할 줄 알면서 날아가는
연(鳶)의 의지
봄은 난청이다
휘청대는 것은 잠이 아니다
잠을 나눠가진 연인들의 조약돌
욕실 바닥을 기어가는 하루살이는
더듬더듬 날개를 잊고,
날벌레는 죽을 때 되면 기어가나?
그 작은 등에 내 전부를 얹어볼까
가벼이, 다시
돌아가
날아볼까
거꾸로 보면
바다의 하늘은 바다
하늘의 바다는 하늘
네가 사라지기 전에/박연준
패배자들의 무릎을 닦아주고 싶다
눈가의 주름을 더 깊이 파고
아스팔트 같은 목덜미 위를 지나
마을이 사라진 지도 같은,
빈손 위에 눕고 싶다
그들의 걸음과 복사뼈와 낯빛에 대하여
무릎으로 생각하다
저녁이 되면
옛 광장을 서성이고 싶다
왜 나는 당신 얼굴을
쓰다듬으며 살지 못했을까
얼굴이 사라지기 전에
곱고 천진하게 패배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뒤척일 수 있을 때
가라앉고 싶다
녹/박연준
이파리로 가득한 숲속에서
나무는 얼굴이 어디일까 생각한다
바람의 힘으로 사랑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
이파리들은
나무가 쥐고 있는 작은 칼
한 시절 사랑하다 지는 연인
누군가 보자기가 되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
떨어지기 위해 물방울이 시작하는 일
두세해 전 얼었던 마음이
비로소 녹고
어디선가 '남쪽'이라는 꽃이 필 것도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