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미가 7:18-20
제목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힘차게 구속역사를 계속 진행하신다.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7장에서 우리는 미가의 예언의 마지막 구절, 즉 7장의 결론 구절에 도달했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들은 7장 시작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미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강력한 불평으로 7장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앙이로다! 나여… 경건한 사람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한 자가 인간에 없도다.”(1, 2절) 그러나 미가는 적극적인 기대와 “주와 같은 이가 누구니이까?”(18절)라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관점은 통일성을 형성합니다. 이스라엘의 개악된 상태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깊은 회의주의에 영원히 머물 수 없고, 오히려 여호와께로 방향을 틀어 그 날에 충만한 영광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개혁 사역을 선포해야 합니다.
불평에서 찬양으로, 비참에서 기쁨으로, 끝도 없는 수렁에서 밝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것이 미가 선지자가 자기 자신과 자기 백성에게서 눈을 떼서 하나님을 주목해야 할 이유입니다! 당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미가는 전 역사의 유일한 확실성을 붙잡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말입니다. 한 때 어둠은 밝은 빛으로 나가는 복도와 같습니다. "내가 어두운데 앉아 있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요,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라." (8, 9절)
수치심에서 안도감까지: 미가가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에, 그는 단지 자신의 죄 때문에 수치심을 가지고 그리고 여호와의 분노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가가 자기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바라볼 때에, 안도감을 얻고 또 구원과 장래의 회복의 과정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미가는 자기 예언을 사람의 온갖 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완벽하게 통치하시는 비할 데 없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미가의 기도는 양 무리의 목자이신 여호와께 드린 것입니다.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리이다…”(14절) 이 기도는 여호와께서 포로된 백성들을 향해 친히 선언하신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을 것이라.”(겔 34:11)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한 목자이신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겔 34:23; 요 10:11).
이 기도는 미가가 성령 안에서 지고한 위치에 이르러 예언하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또 이와 같으신 하나님 안에서만 모든 구원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비할 데 없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끝이 없는 자비하심과 언약의 신실하심을 크게 찬송하고 또 열광적으로 송영을 하도록 하는 “선한 목자" 안에서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나가시는 여호와를 향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힘차게 구속역사를 계속 진행하신다.
하나님께서 구속역사를 계속 진행하심은
I. 위로가 된다.
Ⅱ. 철저하다.
III. 명확하다.
I. 위로가 된다.
인내: 다음과 같은 사실은 중요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임박한 여호와의 심판을 주시하면서, 여호와를 대항하지도 격노하지도 않았고, 언짢아하거나 질책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종종 여호와를 거스를 경우가 있으나, 그러나 여기에서 미가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임하는 한, 미가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인내하면서 기다립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7절)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백성들의 죄 때문에 촉발되는 한, 미가는 이 사실을 부인하거나 전혀 숨기지도 않고, 이 심판을 전적으로 공의롭고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할 것이라.”(9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인정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부패와, 죄와 비참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와 죄와 비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벌하시는 손길을 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본질적인 특징이지 않습니까? 교회가 “잘못 가고 있을 때에 인내하십니까, 특별히 여러분 자신의 삶 속에 엉뚱한 일이 있어날 때에, 겸손하게 받아드립니까? 모든 시련과 징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도 미가에게도 교회와 교회의 모든 회원들의 삶에도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에 도전할 때에, 우리 역시 하나님의 계속되는 자비하심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미가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의 멋진 회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시각: "주와 같으신 이가 어디에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18절) “이와 같으신 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은 아름다운 수사학적인 질문이며, 또 미가 자신의 이름 즉 “누가 여호와와 같으신 이인가?"를 시적으로 연상하게 만듭니다. 이 또한 모세가 사용한 시적인 표현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살벌한 위험에서 새로운 삶에로 나와서 “오 여호와여, 다른 신들 가운데 주와 같으신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라고 했습니다.
주와 같은 이가 누구니이까? 저는 여기 이 본문에 있는 미가의 송영이 "모세의 노래”보다 훨씬 더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애굽의 원수들로부터, 지상의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심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나, 그러나 미가는 그 대적 즉 죄와 삶을 계속해서 황폐화하는 것에서 구속하심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유일한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은 비견할 데 없습니다! 시편 40편은 이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5절) 하나님은 참으로 비할 데 없으시고 모든 것에서 탁월하십니다. 지상의 원수들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사역이나, 심지어 당신의 교회의 계속되는 회복에서 훨씬 더 그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속과 충만한 새롭게 하심에서 훨씬 더 그렇습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언약의 하나님과 비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위로이며, 미가가 이스라엘에게 결론적으로 선포하는 예언의 전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머리에서 상상해낸 어떤 우상도 언약의 하나님과 견줄 수 없고, 사람 그 자신들과도 다릅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순수 빚으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특별히 위로가 죄를 용서하시고, 허물을 덮으시는, 일관된 사랑을 즐겨하시며, 긍휼에 풍성하신 여호와의 항상 존재하는 자원성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즐거움: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을 황폐화하는 심판에서 건져내실 것이고 또 건져 내십니다. 그리고 이 말은 미가가 백성들에게 선포해야만 했던 참으로 무시무시한 실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든 심판 저 너머 또 그 이상을 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여호와의 목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항존하는 사랑과 당신 백성을 향한 끝없는 긍휼을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종종 역사를 관통하면서 우리의 지속적이고 회귀하는 개악으로 인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진노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혹은 당신의 쾌락을 구하지 아니하시고 또 심판 그 자체도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심판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죄인들의 죽음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심판은 단지 이런 회개를 일으키고 또 바라는 회복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참된 언약적인 섬김으로 되돌리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부주의하게 하거나 태만하게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혹은 분노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막대한 결말을 낳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어깨를 으쓱할 정도의 사소한 일이 결코 아닌데, 왜냐하면 그 결과가 몹시 혹독하고 지속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전 예언의 결과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미가의 의도가 아닙니다.
더욱이 미가는 성경적인 균형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즉 이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의와 긍휼을 제시하시면서 당신의 사역을 계속해 나가시고 당신의 선결된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에 비할 데 없습니다. 이런 독특한 조화가 휘황찬란한 구속역사 내내 유일한 참 위로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Ⅱ. 철저하다.
신실하심 : 이렇듯 부탁드리건데, 미가 선지자가 “파멸을 설교한 선지자"로 역사에 전해져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이런 냉혹한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당신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끝없는 자비와 긍휼을 선포한 설교자로 공인받아야만 합니다. 미가는 원수들이 운집하고 있고 또 파멸이 임박한 가운데서도 위로를 전한 설교자입니다.
더욱이 이 위로는 오직 신실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리고 참으로 신실한 사람은 자신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7절과 비교). 여호와의 긍휼하심은 "그분을 두려워하는"(시 103:17)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하게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가는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베풀거나 죄를 간과하거나 혹은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분명히 비성경적입니다.
우리는 18절에서 "그 기업의 남은 자"에게 여호와께서 죄를 용서하실 것이고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이런 결과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지는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뽑아내는” 혹은 가려내는 과정을 그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사람들에게서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분리시키시고, 또 오직 남은 자들, 일부만을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애달픈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잃어버린바 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인데,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산이듯이 말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당신에게로 부르셔서 데려오시고, 압제자와 착취자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습니다. "기업(inheritance)”이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나 혹은 결속을 가리킵니다. 누구든 항상 자기 유업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자기유업에 대해서 적극적입니다. 유업은 자기 재산으로 남아 있으며, “가정에서”, 소위 말해서 자자손손 그의 계속되는 돌보심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면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친 백성과 영구적인 소유가 되도록 지명하셨습니다. 기업 혹은 유업,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에게로 데려오셔서 당신의 돌보심 아래 두셨을 때에 전적으로 영원토록 이렇게 하실 것임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바 될 것이고, 거듭 여호와께서는 나머지 남은 자를 당신에게로 보전하기 위해서 힘차게 행하십니다. 애굽을 떠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죄와 불신 때문에 거절당했습니다(고전 10:5). 또한 쇠사슬에 매여 유다를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머물러, 다시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확실히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모든 사람이 아니라 단지 남은 자에게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림 바 됨: 이 모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개악에 대해서든 각별히 경계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개악한 교회 안에서 조차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상당히 가능하고, 심지어 그럴법하나, 그러나 분명히 적절한 말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바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되돌아 올 것이며, 또 이 말은 미가와 이스라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모든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한 동전의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악과 죄 가운데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회개와 개혁을 설교하실 때에, 그분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예언 혹은 설교는 결코 가볍게 받아드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남은 자를 귀환시키실 것이라는 위로는 모두에게 안도감을 주지는 않습니다. 위로는 여호와의 참된 언약적인 섬김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미가와 같이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상태에 의해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바라볼 것을 소망하면서,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내다보고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요 8:56).
이스라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마음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회개하지도 않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이라는 범위 밖으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름을 받았으나, 단지 소수만이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 가나, 그러나 오직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결코 위로가 메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이 항상 거기에 있고 또 실제적으로 현존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완전한 절망이란 없습니다. 심지어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예언의 전망은 결코 흐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준엄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길가로 나가떨어집니다. 우리는 항상 경고 받아야 하고 또 우리 자신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회개만이 큰 긍휼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하심에 있어서 비견할 수 없는 분이시나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있어서도 다른 누구와 달리 비견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도 하지만 소멸하는 불이시기도 합니다. 불의와 죄와 허물이 철저하게 제거될 때에만이 불의와 죄와 허물이 용서받고 간과됩니다.
전적인 갱신: 이와 같이 미가는 남은 자가 하나님에게 보전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위로를 받았고, 또 위로를 전달합니다. 교회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이고 또 구속역사는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이 계속성은 심지어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워 그 결과가 광범위하게 미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다시 당신의 백성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광의 범위가 넓혀져서 이스라엘에게도 임하게 될 것입니다(11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은 이전 상황으로 되돌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갱신은 범위에 있어서 훨씬 더 넓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전적으로 깨끗하게, 심지어 철저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죄를 발본색원하실 것"이고, 또 이렇게 하셔서 당신 백성에게 장엄한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긍휼과 한결같은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의 종결은 단지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죄들을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사실상 죄 용서란 이스라엘에게서 죄를 철저하게,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다시 말해서 죄책과 수치와 죄의 권세를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전적인 개혁,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당신의 영광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원하시고 또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란 제거를 뜻합니다.
미가는 구속역사가 계속된 것은 죄 용서와 죄의 철저한 제거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죄들이 존속된다면,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바 될 것입니다. 미가는 자기 백성들에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도 포함시켰습니다(19절). 선지자는 자기 백성과 하나입니다. 설교자는 회중 위에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나 백성이나 목자나 양 무리나 모두 여호와 앞에 같이 서 있는데, 다시 말해서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 죄들은 제거되어야 하는데, 만일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계속해서 계셔야 한다면 말입니다. 여호와는 마치 죄가 존재하지 않듯이 행세하시어, 죄를 간과하시지도 않고 또 간과하실 수도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비할 데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더불어, 죄는 쉽게 “현상(status quo)" 혹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죄들은 현존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는 죄를 쉽게 방치하거나, 아니면 간과하거나 아니면 죄들이 없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악한 본성, 반항성과 파괴성 안에서 분명하게 죄들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죄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들은 철저하게 사라져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두운 과거가 마치 화려한 장래가 있을 것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직 긍휼이 충만하지 않습니다. 오직 남은 자들이 귀환하게 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적인 삶의 갱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두 가지 본보기 : 구속역사의 연속성이란 정확히 제거와 갱신이라는 이 사역을 행하시려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 존재할 것이고 구속역사도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미가는 두 가지 본보기를 사용하여 자기 메시지를 진지하게 납득시킵니다. 예언의 단순성이 종종 놀랄만한 명료함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실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짓밟으실 것인데, 마치 누군가가 잡초를 밟아 뭉개듯이 혹은 벌레를 압사시키시듯이 말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압사시키다, 분쇄하다, 분말 가루로 만들다 는 강한 개념입니다. 이 말은 죄의 모든 성장을 중단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우리의 죄가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에 대한 여호와의 큰 권능이지 않습니까? 발로 짓밟는다는 것은 종종 열방들에 대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또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정복하다(subduing)입니다. 죄를 제거하는데, 악한 자의 힘을 철저하게 박살내는데, 사단을 항복시키는데 권세와 영광을 가진 이는 바로 여호와이십니다. 이것이 구속역사의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흑암의 권세를 완전하게 항복시키는데 하나님의 충만한 권세와 영광을 계시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이것이 두 번째 본보기입니다. 두번째 본보기는 죄를 “파내는 것(picking up)”과도 같은데, 이제 모든 죄가 무기력하고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고, 또 이 모든 죄들이 완전히 싹 쓸어 내던져졌습니다. 심해(深海)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심해에 가라앉자마자,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완전히 상실됐다(total loss)”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의 죄는 영원히 제거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면전에서 치우실 때에, 죄들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영원히 사라지는데, 아무도 심지어 사단조차도 그 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본보기, 그러나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죄가 자라는 것을 막으실 것이고, 모든 악한 세력을 정복하실 것이고, 죄의 권능과 죄상에 이르기까지 죄를 도말하실 것입니다. 이 죄들이 우리에게서 아주 멀리 제거되어 결코 “우리를 괴롭히거나(to haunt us)” 혹은 “빠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 103편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늘이 땅에서 높음과 같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멀리 옮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쉽게 회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면서!). 우리는 달리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쉽게 용서하지 않고 또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에,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처리가] 종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모두가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전적인 갱신과 철저한 우리 죄와 허물의 제거 배후에 이유가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사 53:6b)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발아래에서 짓밟히셨고 또 우리를 위해서 지옥의 깊은 수렁에 내던져졌습니다.
구속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구속역사가 전적으로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원과 완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는 당신의 공의와 자비를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기까지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공의가 성취된 것입니다(사 53:10). 그러나 여호와께서 당신의 공의를 화해케 하시는 역사 안에서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에 자비가 성취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미가의 마지막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계획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합니다. 그때에 죄가 철저하게 제거될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한 구세주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역에서도 비견할 데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고전 2:9; 또한 사64:4을 비교하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한 복음을 발견합니다.
III. 명확하다.
명확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구속사역에 대해서 분명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구속사역은 가정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역사는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이 황폐해 가는 것을 보는 의기소침해진 선지자들에 의해서 표현된 흐릿한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이 구속역사는 분명히 사람이 만든 이상주의나 거짓 낙관주의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의 강력함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구속역사의 연속성은 구속사가 하나님 당신의 말씀에 신적인 존재에 정박해 있기 때문에 명확합니다.
남은 자들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죄가 제거될 것인데,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죄가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분명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에 대한 토대가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미가가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의 한 기초로 되돌아가며,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이른 국면에로 돌아갑니다. 즉 옛 열조 즉 야곱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에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을 경유해서, 골고다를 경유해서 새 예루살렘까지 구속역사를 계속 진행시키실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 그 자체나 사람 안에 기뻐하시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속역사가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악과 반역으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받기로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귀한 것을 받기에 자신들이 행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속할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존재 안에서, 에덴동산에서 주신 당신의 약속 안에서, 족장들에게 하셨던 맹세 안에서, 또 당신을 두고 맹세하신 서약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이 맹세는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완전한 개혁과 갱신이 있을 것입니다(창 17:7; KJV;갈 3:16). 여호와께서 이 첫 언약 때문에 구속역사를 계속 진행하시며, 이 언약은 당신의 기쁨과 당신의 궁극적인 자기 영광을 위해서 친히 생각해내시고 실행하셨던 언약입니다.
세 가지 사실들: 미가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분명한 계속성이 보장되었던 서로 관련된 세 가지 사실들을 언급합니다. 그 세 가지 일이란 야곱에게 신실하심, 아브라함에게 일관되게 사랑하심, 열조들에게 서약하신 맹세입니다. 야곱, 아브라함과 열조는 이스라엘 요람부터 있었던 사람들로써, 이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자랐습니다. 역사의 분명한 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던 견고한 시작 안에 놓여있습니다.
"야곱에게 신실하심."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기본적으로 요동치 않는 견고한 기초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진실" (Amen)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소들을 야곱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견고한 기초를 놓으셨습니다(창 35:9ff).
"아브라함을 일관되게 사랑하심." 이번에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필시 이 단어를 에워싸고 있는 원래적인 의미는 “충성(royalty)” 즉 분명한 친근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원하시어 당신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사랑 안에서 결속시키셨습니다.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 구원이 실현될 노선을 결정하여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역사의 경로를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가셔서,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묶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탁월하셔서 역사의 기원이자 중심이자 목적이 되셨습니다(골 1장). 이 관계(히브리어로 "헤세드")는 아브라함과 세워서 야곱과 다시 확증하셨습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 거룩하고 명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후손이자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맹세로 서약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우리는 “오 주와 같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그분은 영원한 맹세로 친히 서약하셨습니다.”(히 6:13-20; 7:20-22)
확실성: 여기에 우리의 삶의 확실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언약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지나가고 또 이 세상에 일어나는 것이 공허한데, 심지어 이 세상 그 자체로도 공허합니다.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든지, 역사의 점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우리의 죄 때문에, 참으로 발생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 기초는 결코 허물어지지 않고, 또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 당신 안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는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확장되었습니다.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조차도,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지게 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 약속은 결코 파기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미가 당대의 사람들이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언약 약속을 전혀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이 언약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인쳐진 언약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이렇게 구원을 일으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뜻이며, 이렇게 하셔서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계속하셨다는 사실을 경탄할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일하시는 이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나는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언약을 맺었고 또 내 말과 내 이름이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나의 영광을 구하였기에 중단할 수 없다." 이렇게 일하셔서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알게 되어, 오직 하나님을 창조주, 구속주, 성화주로서 예배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이기에 계속될 것입니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또 이 사실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라는 명제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언약의 역사이며, 은혜로써 우리에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써 영원토록 확증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같으신 이는 아무도 없다. 이 구원은 비견할 데 없습니다. 이 여호와는 모든 방식에서 독특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와 같으시고 또 이와같이 일하시어 그분이 영원토록 모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미가는 개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위에 내릴 임박한 심판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부패한 세상 위에 임할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막다른 골목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힘찬 전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목적을 향해 일하시고, 크신 권능으로, 철저한 구속으로,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심으로 진력하십니다. 십자가 뒤에는 영광이 따릅니다. 심판 뒤에 영화가 따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선하시고 비견할 데 없으시다는 사실을 이미 맛본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와 묶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견고하리, 이삭에게 약속하신 서약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결코 파기하지 않으리." (시편 105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