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언 군수 전봉훈씨의 부인 이씨는 그 고을에 부인회를 조직하고 옂자 교육을 열심히 권면하는데 여성계에 큰 모범이 되리라 하더라”
1910년 5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 학계란에 실린 ‘부인 열심’이란 쩨목의 기사이다. 지방 군수의 부인이 앞장서서 부인회를 조직하고 여성 교육 운동을 권면한다는 내용이다. 집안에서 목소리를 죽인 채 살아온 여성들이 바깥 사회로 눈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문 보도이다.
이 시기에 비슷한 여성운동에 관한 소식이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한다. ‘함경남도 갑산군 동광(銅鑛)에 고용되어 있는 여성들이 부인회를 조직하고 여자 교육을 권장하기로 했다’ (신보. 1910. 5. 3)는 기사도 나오고, ‘김해군 녹산면 사암리에서 여성들이 부인회를 설립하고 가정 화순, 인리화목을 목적으로 규칙을 정하였는데 회원이 40여명에 달하였고 또 여학생을 다수히 모집하여 열심히 교육한다’ (1910. 1. 13)는 보도도 눈에 띈다.
이해조 자유종 표지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1908년 8월 상류층 고관의 부인들이 자혜부인회를 결성하고 경성고아원을 후원하는 각종 자선사업을 벌였고, 1909년 12월에는 서울 재동 관립보통학교에서 학도의 어머니들을 회동하여 학교부인회를 개회하였다.
이 무렵 동양애국부인회, 대한부인회, 진명부인회와 같ㅌ은 여성단체도 등장하여 사교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다방면의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변화된 당대 여성계의 실상은 1910년 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자유종’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여러 부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문명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여성교육과 계몽, 여성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등을 놓고 밤늦도록 토론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들의 토론은 남성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아무리 정치가 밝다 하나 여자에게는 대단히 적악(積惡)하였고, 법률이 밝다 하나 여자에게는 대단히 득죄(得罪)하였습니다. 우리는 기왕이라 말할 것 없거니와 후생이나 불가불 교육을 잘하여야 할 터인데 권리 있는 남자들은 꿈도 깨지 못하니 답답하오. 남자들 마음에는 아들만 귀하고 딸은 귀치 아니한지 조금이라도 귀한 생각이 있으면 자식을 어찌 차마 금수와 같이 길러 이 같은 고해에 빠지게 하는고?“
토론은 교육을 통한 남녀평등 사회의 건설, 여성의 자유권 획득 등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부인들은 한국사회의 문명개화를 실현하기 위해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해야 하고, 여성 교육을 위한 잡지와 교과서를 발간해야 하며, 신지식의보급을 위해 한문을 폐지하고 국문을 정비하여 널리 교육시켜야 한다는 구체적 실천방안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참석한 부인들이 각자의 꿈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피력하는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데, 부인들은 한결같이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와 안녕 평화를 꿈꾸었다고 말한다. 유교사회에서 오랫동안 억눌려온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교육과 평등을 이ㅣ야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설 ‘자유종’은 도전적이고 진보적이었다.
[ 권영민 서울대 교수·한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