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장 길고 긴 한(恨) 또한 그러하더라
까닭 모를 불안감에 공손월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기필코 중대한 변고가 일어나리란 예감이 천근보다 무거운
중압감이 되어 그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바늘 같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신 뿜어대는
가쁜 숨, 그때마다 퍼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공손월은 지금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운표국의 북쪽엔 의정문과 광운보의 무사들이 마교의
무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공손월은 그들을 다그쳐 매천악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허물어진 폐찰을 지나 눈 위로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 반 시진을 달렸다. 그의 옆엔
무당사협이 굳은 표정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고, 뒤엔
매휘양과 진국충이 사력을 다해 따르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 신장(神將)처럼 서 있는 나무 사이로
나뭇가지들을 헤집으며 달려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조용하기만 하던 밤하늘에 한 여인의 절규가 들려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귀에 익었던
것이다.
등뒤에서 매휘양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약화...? 약화의 목소립니다, 사숙!"
붉게 상기되어 열을 발산하던 매휘양의 얼굴에 찬 기운이
벼락같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절규가 기다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질 무렵, 한
사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정추수의 것임을 공손월은 알 수 있었다.
일시 정지해 버린 공손월을 이봉이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공손 대협. 일이 심상치 않소."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던 일행은 멀지 않은 곳에서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발한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커다란 인영. 정추수였다.
공손월이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추수! 멈추어라!"
하나 정추수는 공손월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흐릿하게 움직이는 몇 개의 인영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정추수의 눈에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비켜라!"
광풍 노도와 같은 기세를 멈추지 않고, 정추수는
노호(怒虎)같이 일갈하며 그들에게 돌진해 갔다.
"추수!"
설마 정추수가 덤벼들 줄은 예상 못 한 공손월은 망연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정추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위험하오, 공손 대협!"
제양과 희견이 공손월을 밀치며 정추수의 저돌적인
육탄공세를 막아갔다.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그들은 검을
뽑지도 못한 채였다.
두 사람의 무당면장(武當綿掌)이 정추수를 덮쳐 가는 순간,
정추수의 소매가 펄럭였다. 그리고 천심장의 음유한 기운이
제양과 희견의 장력을 뚫고 장심(掌心)으로 파고들었다.
좌우로 갈라지며 떨어지는 제양과 희견의 신형이 땅위를
뒹굴었고,
"정 소협! 자네가..."
그 두 사람의 사이를 뚫고 튀어나온 정추수가 놀람 가득한
진국충에게 일장을 날리고 있었다. 손 한번 쓰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진국충을 뒤로하며, 정추수는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그의 앞길엔 동료의 죽음에 대로한 이봉과 혁승이 검을
뽑아 가로막고 있었다.
"죽어랏!"
이를 갈며 필살의 검을 떨치는 이봉과 혁승의 공세에
정추수는 다시 어깨에 일검을 맞고 비틀거렸다.
틈을 주지 않고 정추수의 사혈(死穴)을 노리는 두 자루의
검에 떠밀려 정추수는 나무에 등을 기대면서도 천심장 기운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이와 함께 광기 어린 살기도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한 순간, 이봉과 혁승의 검이 각각 정추수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수직으로 뛰어오르는 정추수의 발바닥을
스치며 혁승의 검이 나무에 박혔다. 동시에 정추수의 거대한
신형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두 사람 뒤로 떨어졌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두 사람이 나무에 등을 대고 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성을 잃은 정추수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흐흐흐!"
음침한 웃음과 함께 정추수의 쌍장이 교차되었다.
뒤이어 슬그머니 밀려드는 음유한 기운.
이봉과 혁승은 조금 전 제양과 희견을 죽인 이 기이한
무공을 직접 목격했다. 두 사람은 감히 맞받을 생각을 못
하고 좌우로 갈라져 피했다. 천심장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치며 나무에 격중되었다.
한데, 나무 뒤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한 사람이 쓰러지는
게 아닌가? 괴로움에 꿈틀거리는 그는 다름 아닌
매휘양이었다.
처음 이들에게 모습을 나타냈을 때, 정추수는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이는 매천악에게서 입은 세 군데의 상처에서
흐른 피 때문이었는데, 그 형상이 매휘양이 보기에 악마와도
같았다. 게다가 일장에 제양과 희견을 격살하자 두려움을
금할 길이 없어 그는 나무 뒤로 숨어 버렸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이봉과 혁승을 공격한 천심장이 나무를 뚫고 들어와
매휘양의 심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정추수에게 상처를 입힌 이는 매천악이었고, 그 상처의
피로 끔찍한 모습을 한 정추수 때문에 나무 뒤에 숨었다가
정추수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매휘양은 부친 때문에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저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하다고
할 수밖에.
한편, 정추수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제양과 희견,
진국충을 죽이자, 공손월은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사질이기에 그 분노는 더욱 큰 것이었다.
"추수! 넌 이미 악마가 되었구나!"
그는 노성(怒聲)을 터뜨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정추수의
천심장을 피해 흩어지는 이봉과 혁승, 그리고 등을 돌리고 선
정추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이를 악물며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그의 머리를 타고
넘는 인영이 있었다.
놀랍도록 날렵한 그 인영은 바닥에 착지하지도 않고 이
장을 더 날아가더니 이봉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 검에서
새파란 검기가 일었고, 억! 하는 비명과 함께 이봉의 신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 인영은 이봉을 죽인 즉시 혁승에게
다가가 일검을 날렸고, 혁승 또한 검기를 피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두 명의 고수를 죽여 버린, 일견해서 가냘프기
그지없는 인영은 정려군이었다. 혁승마저 죽자 정려군은
신형을 멈추고 공손월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일렁이는 눈동자는 별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눈빛은
비수보다도 날카롭게 공손월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 못 할 정려군의 신위에 공손월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졌고, 대신 두려움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거수지로(擧手之勞)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을 공손월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이내 싸늘한 시선을 거두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정추수를 뒤쫓아갔다.
아직도 정려군은 살기가 가시지 않아 적이라면 누구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궁조생에게 한 약속을
상기하여 공손월은 살려 준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공손월은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작 긴박한 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아하!"
공손월은 막힐 듯한 숨통이 터지자 일순 전신이 무기력해져
검을 떨구고 말았다.
이때, 이봉과 혁승이 쓰러져 있는 근처의 나무 뒤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휘양?"
그제야 매휘양의 존재를 깨달은 공손월이 화급히 다가갔다.
매휘양은 입에선 피를 흘렸고, 눈에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공손월이 부축하자 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사숙, 사숙, 난..."
쥐어짜듯 밀려나오는 목소리가 그의 얼굴 근육을 묘하게
비틀고 있었다.
매휘양은 죽고 싶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매천악은 아들인
그에게조차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깊은
내막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매천악이 왜 이곳에 왔으며,
자신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정추수는 왜
그토록 광분하여 살겁을 일으켰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공손월에게 하려던 말은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고 싶어하는 열망도 잠시, 매휘양은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고 말았다.
세상엔 끝없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있는 법.
누구든 성(盛)을 바라지 쇠(衰)함을 원하지는 않는다.
공손월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품속에서 매휘양이 죽었다.
매천악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걸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을 같이 살아 온 동문들과 제자들이 대부분 죽어
버린 지금, 그에게 운명으로 다가온 것은 사문의 몰락이었다.
공손월은 매휘양의 시신을 꼭 껴안으며 나직이 흐느꼈다.
* * *
"어찌 되었나?"
"공야직은 더 이상 쫓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홍희를 보며 위지광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바보 같으니!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망치고 말았어."
행장을 제대로 추스를 여유도 없이 위지광 일행은
도망쳐야만 했다.
공손월이 떠나기 전 남긴 말에 위지광은 긴급히 수하들을
정비하여 뒤를 따랐다.
하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공야직에게 제지를 당하자,
위지광은 중대한 위기를 맞았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위기라는 것엔 매천악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시세가 글렀음을 깨달은 위지광은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공야직과 자웅을 겨룰 마음이 나지 않았다. 적당히
겨루다가 기회를 틈타 외진 곳으로 숨어든 위지광은 수하들을
풀어 주변 정황을 탐색케 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매천악의 생존 여부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마교와 생사일전을 벌일
만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난 범의 아가리로 들어온 셈이 된다.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될 수도 있어.'
위지광은 초조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때 위지광이 하는 양을 말없이 바라보던 동철비가 다가와
따지듯 물었다.
"위지 형, 조금 전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망치고 말았다는
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오?"
속이 뜨끔해진 위지광이 정색하여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능청떨지 마시오! 이렇게 된 마당에도 날 속이려 하시오?"
따지듯 묻는 동철비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속이다니? 내가 동 형에게 무얼 속였단 말이오?"
동철비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옆에서 겪고 들은 바를
분석하여 전후를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자신은 매천악과
위지광의 상대가 되지 못하므로 마음속에 눌러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위지광이 발뺌하자 더욱 가증스럽게 여겨져 동철비는
건곤권을 치켜들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태세로 소리쳤다.
"그대는 정씨 가문의 진경을 얻기 위해 매천악과 짜고서
우리들을 이용하지 않았느냐! 이제껏 죽어 간 친우들의
죽음에 그대는 어떻게 사죄하려는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이에 녹야극이 다가와 동철비를 만류했다.
"왜 이러십니까, 동 대협? 합심하여 적을 상대해도 위급한
판에 내분을 일으키면 우리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고정하시오."
위지광의 농간 때문에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자 통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누이동생을 간살한 흉수가 위지광이나 매천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제껏 이용만 당한 자신이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장의 적을 상대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일단은
살아야 과거의 은원을 가릴 수 있지 않겠는가?
동철비는 분노로 숨을 씩씩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거두었다.
이치대로라면 위지광은 동철비에게 백배 사죄를 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부끄러움보다는 이를 숨기기 위한 분노가 앞서는 법이었다.
게다가 사문의 존망이 걸려 심란하기 짝이 없는 지금
동철비가 시비조로 따지자 위지광은 살기가 불끈 솟았다.
그의 눈에 핏발이 불거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동철비를 죽여 자신의 죄과를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강적을
눈앞에 둔 터라 한 명의 고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위지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살기를 억눌렀다.
'만약 우리가 살아남게 된다면 제일 먼저 네놈부터 죽여
주마.'
내심 살의(殺意)를 다지는 그에게 녹야극이 다가왔다.
"문주, 이렇게 물러나 있을 게 아니라 차라리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 섬멸함이 어떻겠습니까?"
"안 될 말! 만약 매천악이 이미 죽었다면, 우린 상대가 되지
않아."
"그렇다고 저들이 우리를 순순히 놓아 줄 리는 더욱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공야직과 처음 마주쳤을 때 끝장을 봤어야 했다고
녹야극은 생각했다. 다른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적어도
공야직과 겨룰 땐 신검문의 힘이 훨씬 우세했던 것이다.
'그때 있는 힘을 다해 공야직을 죽였더라면 이토록 상황이
어렵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을...'
녹야극은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손에 땀을 쥐며 정탐 나간 이들의 소식을 기다린
지 반 시진이 흘렀을 때, 신검삼호 중 제갈후와 모경이
다급히 외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매 장문은 어떻게 되었는가?"
초조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지만 위지광은 두 사람의
절망적인 표정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읽어 내고 있었다.
"매 장문뿐만 아니라 곽 대협, 무당사협이 모두
죽었습니다."
위지광과 녹야극이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무당사협까지?"
"그렇습니다, 문주. 태행검파에서 살아남은 자는 공손
대협과 궁조생뿐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군."
위지광은 다시 묻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결과를 되짚어 본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검문으로 돌아간다."
위지광은 서둘렀다.
'최소한 일가의 힘없는 아이와 아녀자들이라도 피신시켜야
한다.'
자신이 무사히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검문이
전력을 다해 대항해도 그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위지광을 따라 신검문으로 돌아가는 신검삼호와 홍희는
다가올 암담한 미래에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역으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그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이른 새벽 먼동이 틀 무렵, 일행은 교산(敎山) 기슭에
이르렀다.
잠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저마다 자리를 골라
퍼더버렸을 때, 위지광은 자신의 두 아들인 위지혁과
위지천을 몰래 불렀다. 기울어지기 시작한 사기는 두
아들에게도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위지광은 피로가 역력한 아들에게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혁아, 천아 이제 매천악이 죽었으니 우리는 화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들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면 결코 살려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난 신검문으로 돌아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할 것이니 너흰 지금부터 살길을 도모하여라."
위지혁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직 승세가 판가름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의 지주이신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어찌 아버님을 두고 저
혼자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아버님과 생사를
함께하겠습니다."
의기 분분한 위지혁과는 달리 위지천은 입도 벙긋 못 하고
그저 벌벌 떨기만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친이 승리를
포기한 이상 자신의 앞길엔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위지광이 화를 내며 위지혁을 꾸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너희가 가문의 대마저 끊어
버리려 하느냐? 내가 없으면 저들은 우리를 죽이려 중원
끝까지라도 쫓을 것이다. 내가 신검문에서 저들과 겨루어
이기면 다행이고, 지더라도 나의 죽음을 확인할 터이니
구태여 너희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 가문을 위한
마지막 대계(大計)이니 넌 나의 명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아버님!"
부친의 뜻이 완강한지라 위지혁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이때까지도 위지천은 몸을 벌벌 떨며 서 있을 뿐이었다.
이를 보며 위지광은 속으로 탄식했다.
'둘째는 겁이 많고 심계가 얕아 대사를 도모할 인재가 되지
못한다. 신검문으로 데리고 간들 적이 나타나면 지레 놀라
죽고 말 것이다. 믿을 것은 첫째밖에 없고, 둘째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니 첫째에게 딸려 보내야겠구나.'
위지광은 품속에서 양피두루마리 하나와 은빛이 반짝이는
작은 단검을 꺼내 들며 다시 탄식했다.
"이 신검령이야 너도 잘 알겠지만, 이 진경은 처음 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분에 넘치는 과욕이 오늘의 화를 부른
셈이야."
위지광은 두루마리와 신검령을 위지혁에게 건넸다.
위지혁이 눈물을 흘리며 받으려 하지 않자 위지광이 화를
버럭 냈다.
"아비의 뜻을 받들지 않으면 그게 바로 불효이니라. 네가
나의 희망을 저버리려 하느냐?"
이미 위지광의 의도가 확고하여 거역할 수 없음을 느낀
위지혁은 마지못해 신검령과 진경을 받아 들었다.
위지광의 말이 계속되었다.
"이 진경엔 도마의 광명도법이 적혀 있다. 이 아비가
산서제일의 고수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광명도법 덕분이었지. 이제 혁아, 너를 신검문의 사 대 문주로
봉한다. 내가 죽더라도 넌 반드시 살아남아 신검문을
재건해야 한다. 알겠느냐?"
위지혁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넌 이 길로 적의 손길이 닿지 않을 곳으로 피신하거라.
너의 어깨에 신검문과 가문의 영화가 걸려 있다. 넌 신검문
최후의 희망임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해야 한다."
이어 위지광은 측은한 눈빛으로 위지천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죽음을 보고 싶어하는 아비는 없다. 너도 형을
따라 살길을 도모하도록 해라."
"아버님, 흑흑!"
비록 죽음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위지천이었지만, 막상 부친이 자신을 걱정하자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서 가거라."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위지광은 짧고 냉담하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신검삼호에게 다가갔다.
신검삼호는 위지광이 두 아들에게 남겼을 말들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신검삼호는 위지광의 조치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만,
마음 저편에선 신검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려 오고
있었다.
그들은 묵묵히 일어나 다가오는 위지광을 맞이했다.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그 눈빛을 타고
흐르는 무언(無言)의 비감이 서로의 마음을 구슬프게 했다.
"다시 출발한다. 오늘 중으로 신검문에 도착할 수 있도록!"
위지광의 결의에 찬 명령과 함께 일행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터전인 신검문을 향해...
"위지광이 이곳을 지나간 지 한 시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등고의 말을 들으며 정려군은 비릿한 조소를 입가에 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파란 물이
금세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콧잔등을 상쾌하게 간질였다.
정려군은 눈을 지그시 감고 바람이 실어 오는 흙 냄새를
흠뻑 들이켰다.
'오늘밤이면 모든 은원이 매듭 지어질 것이다.'
지난 이십 년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한이었다. 그 한을
불러일으켰던 흉수는 모두 죽고 위지광과 동철비만이 남았다.
'오늘밤 그 둘의 목을 베어 아버님 영전에 바치리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 산서 땅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녀에게 산서 땅은 기억하기 싫은 악몽의 땅이었다.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저주의 땅이었다.
'나의 사랑스런 동생과 함께 이곳에서의 기억을 묻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가리라.'
정려군은 갑자기 애틋한 표정이 되어 정추수를 바라보았다.
정추수는 지난밤 참사가 일어났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 수염이 날리건만 정추수의
눈동자는 석상의 그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보구천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정 숙부님께서 상심이 큰 모양입니다. 저러다가 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보구천의 말은 아릿한 아픔이 되어 정려군의 가슴을
찔렀다.
정려군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천심장은 오행(五行) 중 화(火)의 기운을 바탕으로
수련하기 때문에 이를 수련한 이는 자칫 감정이 격해지기
쉬워. 따라서 심마(心魔)가 들면 인성(人性)을 잃게 되지. 나의
육 대 조부께서 잔인한 살수를 펼쳐 도마란 이름을 얻게 된
건 바로 천심장 내공을 익혔기 때문이야. 그분은 말년에
이르러 이를 후회하고 후손들에게 장한진경을 익히지 말도록
당부하신 거야. 지금 추수는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이성을 잃게 되니... 휴우!"
정려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추수의 마음이 불안정한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추수의 몸은 신검문을 향하고 있었지만, 매약화를 애타게
그리는 마음은 아직도 그 처절한 현장에 있었다.
눈물이 바람에 말라 버리는가 싶으면 이내 흘러내려 볼을
적셨다.
매천악의 음흉한 웃음과, 매약화의 그 처절했던 울부짖음,
그리고 정려군의 서슬 퍼런 음성이 그의 기억 속에서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피눈물을 흘리는 매약화의
모습이 자꾸만,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정추수는 지금 조용히 앉아 있는 가운데 그 사라져 가는
기억의 편린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천아! 이대로 우리만 갈 수는 없다. 아버님과 처자를 남겨
두고 나 혼자 도망갈 순 없어."
위지혁의 결연한 말에 위지천이 놀라 물었다.
"그럼 어찌하시렵니까?"
"신검문으로 돌아가야지."
"신검문으로?"
위지천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답이 위지혁의 입에서 나왔다.
위지천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정려군의 무시무시한
신위와 그녀의 검에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위지천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아버님께선 우리더러 훗날을 도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우린, 우린..."
"죽음이 두려우냐?"
"..."
위지천은 형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후줄근한
땀방울이 그의 등을 타고 흘렀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부모와 처자의 목숨보다도 자신의 죽음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위지천은 정녕 죽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떠는 위지천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위지혁은 동생을 나무랄 수 없었다. 그 역시도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자신에겐 가족을
저버리고 혼자 살아 갈 용기가 없다는 것이라고 위지혁은
생각했다.
"그래, 우리 모두가 죽을 필요는 없겠지. 아버님 말씀대로
우리들 중 하나가 살아남아 대를 잇는 것도 선조님들에 대한
중요한 효도라 할 수 있겠지."
위지천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은 죽음이 두려워 신검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형을 만류할 수도 없었다.
"형님!"
위지천은 눈물을 흘리며 형의 손을 잡았다.
위지혁이 싱긋 웃으며 동생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형으로서 너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겠다. 아버님과
나와 가족들에 대한 미련은 떨쳐 버리도록 해라. 넌 반드시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 우리 가문을..."
위지혁은 눈물을 감추려 등을 돌려 뛰며 소리쳤다.
"우리 가문을 재건해야 한다!"
"형님! 으흐흐흑..."
위지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용기없는 자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웠다. 죽도록 미웠다.
"짚단을 쌓아라! 정원과 전각 구석구석에 짚단을 쌓고
기름을 뿌려라!"
위지광은 잠시도 쉬지 않고 수하들을 독려했다. 신검문의
무사들은 마교의 내습에 불안해 하는 기색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두 시진 전에 해가 져 어둠이 사위에 가득했다. 그
어둠이 위지광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광명도법은
어둠 속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녹야극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문주, 신검문의 모든 건물을 태울 셈이오?"
그의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위지광이 쌍심지를 돋우며 소리쳤다.
"우리가 지고 나면 이따위 건물이 무슨 소용인가? 마녀만
이길 수 있다면 건물은 언제든지 다시 지을 수 있어. 지금은
불빛이 필요해. 태양 같은 밝은 빛이 필요해. 불빛이!"
"우리야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지만 나머지
처자권속(妻子眷屬)들은 어찌하려 하오? 그들은 적의 검이
다가오기도 전에 불에 타 죽고 말 것이오."
"그들은, 그들은..."
위지광의 얼굴에 괴로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위지 가문에 딸린 처자들은 스무 명이 넘었다. 뿐만 아니라
신검삼호를 비롯해 신검문에 몸담고 있는 주요 인물들의
식솔을 모두 합하면 백 명을 훨씬 웃돌았다.
애초에 신검문으로 돌아올 때 그들을 신검문 밖으로
피신시킬 계획이었으나, 마교의 인물들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느새 황산박룡 등고와 회선쌍검 구화성, 그리고
금응방주 용문원 등이 수하들을 이끌고 신검문을 포위해 버린
것이다.
"으으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위지광의 악 다문 이빨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그에겐 고민할 시간조차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위지광이 쓰라린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녹 사제, 그들을 모두 창덕전(昌德殿) 아래의 지하석실로
들여보내게. 나의 처와 가족들도 모두!"
녹야극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하석실로 말입니까?"
"그렇다, 지하석실이다. 그곳 외엔 대안이 없지 않느냐?"
"하지만..."
창덕전은 높이 오 장이 넘는 삼층의 대형 건물이었다.
그리고 지하석실은 창덕전 아래,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건물이 불타 버린다면 지하에 숨는다 해도 짓누르는
열기에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위지광의 말대로 대안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경과로
보아 마교의 일당은 아녀자라고 해서 자비를 베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녹야극은 어쩔 수 없이 수하들을 시켜 아녀자들을 창덕전의
지하석실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울부짖는 처자권속들을 보자
위지광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무사들에게 떠밀려
창덕전으로 가면서도 연신 남편과 가족들을 찾았다.
문득, 무리에 휩쓸려 가는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이 위지광의 눈에 띄었다. 위지광의 볼이 실룩이며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중 나이 어린 여아(女兒) 하나가 무리에서 빠져 나와
울면서 위지광에게 달려왔다. 이제 갓 열 살쯤 되어 보였는데,
그녀를 보는 위지광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그녀는 위지천의 딸, 즉 위지광의 손녀였던 것이다. 그녀가
위지광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초롱초롱하기만 한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흑흑! 할아버지, 아빠는 어디에 있어요? 사람들의 말이
우린 모두 죽을 거래요. 사실인가요? 묘아(妙兒)는 죽기
싫어요, 할아버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아의 가녀린 손이 위지광의 가슴을
울렸다.
위지광이 입술을 떨며 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묘아, 걱정 말아라.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할아버지가
항상 들어주지 않았니? 오늘밤만 지나면 예쁜 선물을 잔뜩
사다 주마. 착하지, 우리 묘아. 어머니를 따라가거라."
끝내 참지 못한 위지광의 눈물이 여아의 머리에 뚝뚝
떨어졌다.
위지광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근처의 무사에게 명했다.
"묘아를 석실로 데려가거라, 어서!"
여아는 무사에게 끌려가면서도 바동거리며 울부짖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 아빠가 보고 싶어요!"
위지광의 굳게 다문 이빨 사이로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흑!"
제자리에 선 채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떠는 위지광.
돌연 그는 허공을 움켜잡듯이 두 팔을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절규했다.
"빛! 빛이 필요해! 기름을 뿌려라! 짚단에도, 회랑에도...
이곳에 있는 기름은 모두 뿌려라-!"
동철비는 마치 딴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위지광이 하는
행동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동철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공포에 떨어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담담해졌다. 그 대신 이런 결과를 초래한
위지광에 대한 증오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다가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제법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신검문 무사들의 모습이 아녀자들의 울부짖음과 교차되면서,
그의 눈엔 난무하는 불꽃과 피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가는
신검문의 최후가 연상되었다.
문득 허탈한 웃음이 헝클어진 콧수염을 흔들며 터져
나왔다.
"허허허허..."
자신이 살아 온 생과 매천악의 죽음, 위지광의 위선이 모두
허허롭게 여겨져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아우성과 어지러이 땅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헤집고 피리 소리가 들려 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신검문의 웅장한 건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탕산(湯山)
중턱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정추수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심금을 울리는 피리
소리의 주인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나무조차 가리지 못한 높은 바위에 올라 피리를 부는
정려군의 하늘거리는 몸매가 달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피리 소리는 기이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힘은
심란하기만 하던 정추수에게 숨을 고르게 하고 기력을 되찾게
했다. 어느 순간 답답하던 숨통이 뚫리며 정추수는 길게 숨을
토해 내었다.
요요(夭夭)한 달빛 아래서 피리를 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와도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흉신악살처럼 피를
부르던 악귀의 모습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정추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비하기도 하구나. 저 피리엔 어떤 내력이 있기에 이토록
고아한 정취를 자아내는 걸까?"
"본 교의 호교무공(護敎武功)인 섭심대법(攝心大法)이지요."
정추수 곁엔 어느새 보구천이 다가와 있었다.
"섭심대법...?"
정추수가 중얼거리자 보구천은 정추수의 의식이 제대로
돌아온 것이라 여겨 즉시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상대의 심령(心靈)을
제압하는 내가공부(內家工夫)의 일종입니다. 목소리, 혹은
악기 소리에 내공을 실어 시전하는데, 듣기로 섭심대법을
극성까지 연마하면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심령을 제압하여
종복처럼 부릴 수 있다고 합니다."
정추수의 얼굴에 언뜻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굳이 상대와 싸울 필요도 없지 않겠소?
섭심대법을 이용하면 상대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인데."
"하하하! 섭심대법은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합니다. 본 교의
역대 교주님들 중에서도 섭심대법을 극성까지 연마한 분은
아직 없어요. 제 사부님께서도 소리를 이용해 상대의 심기를
흩뜨리는 게 고작이지요. 특히 상대가 내공이 고강한
고수일수록 섭심대법을 사용하는 데 더욱 많은 공력을
소모해야 합니다. 따라서 순식간에 상대의 심령을 제압하여
굴복시키는 경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결전을 앞에 두고서 적들의 사기를 흩뜨리는 데는
효과가 크지요."
보구천의 설명을 듣고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추수의
표정은 아직도 어색한 데가 있었다.
정추수의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피며 보구천은 내심
안도했다.
'아직 온전치는 않지만 숙부의 정신이 약간은 돌아온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문득, 두 사람과 십여 보 가량 떨어진 곳에서 시를 읊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눈비 맞은 옷자락 삭풍에 나부끼는데
방갓엔 반쪽 달 위태로이 걸려 있구나
공야직이 바위에 선 정려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봉무구가
손뼉을 치며 히히덕거렸다.
"때마침 반달이 사고의 머리에 걸려 있으니 장로님의 시가
정말 운치 있네요."
이를 보며 보구천이 씁쓸히 뇌까렸다.
"피를 부르는 결전이 임박한 이때에 시를 읊으시다니,
장로님의 취미는 참으로 묘하단 말이야."
정추수 일행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피리 소리는 신검문의
무사들에게는 피의 서막(序幕)을 알리는 전장의 북
소리보다도 더 섬뜩하게 들렸다. 피리 소리가 고저(高低)를
반복할 때마다 신검문 무사들의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요동치고 있었다.
겨우 마음의 평정을 찾던 동철비도 섬뜩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위지광에게 다가와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마녀가 부는 피리 소리외다. 이 피리 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힘이 담겨 있으니 수하들이 귀를 기울이게
해서는 아니 되오."
위지광은 결전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위지광은 커다란 애검(愛劍)을 불끈 쥐며 모든 수하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높여 호령했다.
"이제 적의 내습이 있을 것이다. 모두 피리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다지라!"
그의 일갈이 효험을 발휘해서인지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피리 소리가 끊어졌다.
그리고 뒤따르는 침묵.
이 침묵이 신검문 무사들의 마음을 다시 동요시키기
시작했다.
불안과 초조가 전염병처럼 무사들의 눈동자에 퍼져 나가기
시작할 무렵,
"으-악!"
"마교다!"
처참한 비명 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밖으로부터 들려 왔다.
동시에 위지광은 있는 힘을 다해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짚단에 불을 놓아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드넓은 신검문 곳곳에서 화광(火光)이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길과 불길이 연결되며 위지광이
서 있는 커다란 정원을 붉게 물들였다.
신검문에는 크고 작은 정원이 수십 개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정원이 위지광이 지금 서 있는 무량원(無量園)이었고,
신검삼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수들이 이곳에 운집해 있었다.
외곽 경비를 서던 수하들이 분분히 무량원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불꽃은 사람의 키를 넘어 무량원 구석구석을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 불꽃이 이글거리는 담을 비조처럼 넘어오는 신형들이
있었다.
"왔구나!"
동철비가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정려군과 공야직을 필두로 마교의 고수들이 속속들이
무량원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비록 수적으로는 신검문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들이라 무량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불과 서너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네 명의 무사들을 죽이는
정려군을 향해 위지광이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정려군은
화광에 붉게 반사되는 위지광의 검이 다가오자 지체 않고
마주쳐 갔다.
정려군의 조그마한 신형을 삼켜 버린 휘황찬란한 검광과
마치 공기를 영원히 갈라 놓을 것만 같은 위력의 검법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마교와 신검문의 고수들은 행여
위지광의 공격권에 들세라 분분히 물러나기에 바빴다.
하나, 그토록 강맹해 보이는 위지광의 공격에도 정려군은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듯 마음대로 공격권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정려군의 패검은 위지광의 검과 비교하면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패검에서 뻗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검기는 위지광의 검광을 여지없이 꿰뚫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위지광의 검법은 보운표국에서 정려군과 겨룰 때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순간, 두 신형이 엇갈리며 나직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위지광의 것이었다.
그의 옆구리에 가는 혈선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선혈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찌푸려지는 위지광의 얼굴을 보며 정려군이 조소했다.
"위지광, 신검문 전체를 태운들 태양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넌 정씨 가문의 무공을 훔쳐 명성을 얻었으니,
이제 정씨 가문의 무공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는 네가
저지른 죄과에 대한 인과응보이니 억울하게 생각하진
말아라."
평소의 위지광이라면 정려군의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당장에 찢어 죽이려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는
불리하고 자신이 지면 모든 일가의 생명들도 끝장이라
생각하자 노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검문의 고수들은
악전고투(惡戰苦鬪)를 거듭할 뿐 희망적인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위지광의 마음을 더욱 짓누르는 건 조금 전
손녀딸의 울먹이던 모습이었다. 사랑스런 손녀와 며느리들이
모두 죽게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위지광은 모진 결심을 하고 정려군에게 말을 건넸다.
"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할말이 있단 말이냐?"
정려군은 여전히 비웃음을 입에 문 채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내밀었다.
"만약 내가 순순히 목숨을 내어 준다면 나의 가족들을 살려
줄 수 있겠느냐?"
의외의 말에 정려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모두 살려 달라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철모르는
어린것들의 생명은 구태여 빼앗아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
위지광으로선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을 참으며 한 말이었다.
하나, 곧 이어 터져 나온 정려군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그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호호호호! 가증스럽구나, 위지광! 너흰 우리 정씨 가문의
사람들 중 남녀노소를 가리고서 살겁을 저질렀느냐? 흥! 이제
와서 내게 자비를 구하려 하다니..."
정려군은 검봉으로 위지광을 가리키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위지씨 성을 가진 자와 너를 위해 신검문에 몸담은 이는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정려군의 매정한 거절에 위지광은 정려군에게 부탁한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과연 마녀다운 대답이로군. 일말의 기대를 한 내가
어리석었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족들의
목숨을 걸고 정려군과 싸우는 것뿐이었다.
위지광은 수치심을 감추려 필요 이상으로 길게 고함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커다란 검봉이 흔들거리더니 낚싯바늘에
걸린 잉어처럼 요동치며 빛을 뿌렸다.
광명도법은 넓은 검신을 이용해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상대의 시각을 마비시켜 수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법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광명도법을 펼치면 상대는 눈으로 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어 방어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정려군은 이런 어려움을 훌륭하게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기의
흐름을 느끼면서 검의 변화를 파악하는
무상심법(無常心法)이었다. 정려군은 원수가 광명패월도법을
익히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지난 이십 년 동안 피나는 수련을
통해 무상심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무상심법의 이치는
무림에 알려졌으되, 그 수련의 험난함 때문에 이를 터득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이십
년간 참수하여 이 어려움을 이겨 냈고, 그 때문에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무림에 이름을 떨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위지광이 다시 광명도법을 펼치자 정려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위지광의 검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광명도법은 강력한 이점과 힘을 가지고 있는 대신 변화가
비교적 단순했다. 위지광의 검은 정려군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초식이 거듭될수록 위지광은 허점을
드러내며 물러서기에 급급했고,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위지광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듯
비틀거릴 때,
"아버님!"
다급하게 외치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드는 인영이 있었다.
정려군과 위지광의 대결이 지속되는 동안 정추수는
신검삼호의 모경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모경은 공손월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된 데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정추수의 거센 기세에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주위에서 들리는 건 신검문 무사들의 비명뿐이라
정신이 더욱 산만해졌다. 그는 검을 휘둘러 정추수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상태로 이십여 초가 지나자 가랑비에 옷 젖듯
천심장의 기운이 서서히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이십여 초가 지나자 마침내 천심장 기운이
혈맥을 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일단 천심장 기운이 체내에 일자 진원진기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수족(手足)이 마비되었다. 이 틈에 정추수의 일장이
모경의 가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결국 모경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즉사하고 말았다.
정추수는 모경을 죽인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야직은 신검삼호 중 녹야극과 제갈후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황산박룡 등고는 벌써 홍희를 죽인 후 나머지 신검문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었고, 보구천은 동철비를 여유있게
상대하고 있었다.
동철비가 심원에서 고죽검 유권을 죽였을 때, 보구천은
이후 기회가 오면 반드시 동철비를 사로잡아 유검학에게
넘겨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유검학은 검법 수련에 입문한 지 오래되지 않아 적과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만 살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정려군을 끈질기게 따라다닌 터라 동철비가 보구천의 손에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자그마한 손은 부친이 쓰던 검을 꼭 쥐고 있었다.
유검학은 그 검으로 동철비의 심장을 찌를 순간을 노리며 두
사람의 대결 현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신검문 무사들은 구화성과 용문원이 이끄는
고수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도살되고 있었다. 시세가 기울어
도망가려는 자들의 아우성과 마교 고수들에게 쓰러지며 터져
나오는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주위는 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
게다가 급속도로 번지는 불길에 시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따로 없었다.
무량원을 감싸고 있던 네 채의 전각에도 불이 붙어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비록 매천악이 죽은 후 이곳으로 오면서 살기가 치솟아
원수의 무리를 멸하리라 결심한 정추수였지만, 이와 같은
참사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한 인영이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불길이 오르기 시작한 담을
뛰어넘어 정려군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정추수가 본 건 바로
이때였다.
그 인영은 위지광이 신검령을 전했던 위지혁이었다.
그는 부친이 정려군의 검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괴성을
지르며 정려군에게 달려들었다.
후사를 위해 떠나 보냈던 위지혁이 갑자기 나타나자
위지광은 대경하여 소리쳤다.
"여긴 왜 왔단 말이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지혁은 정려군의 검에 심장을
찔리우고 말았다.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는 위지혁의
심장엔 아직도 정려군의 검이 꽂혀 있었다.
위지광의 안타까운 외침을 들으며 정려군이 웃었다.
"이 녀석이 네 아들놈이냐? 호호호! 잘되었다, 잘되었어.
이렇게 돌아와 몸소 찾는 수고를 덜어 주다니."
정려군은 보란 듯이 위지혁의 머리채를 잡고서 그의 시신을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
"혁아-!"
이미 기력이 다하여 쓰러진 채, 위지광은 시뻘건 화광
속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시신을 보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이런 그의 모습에 정려군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흐으으! 이 마녀!"
위지광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희망이 사라지자 위지광은 더 이상
삶을 도모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아아아-!"
그는 상심이 지나쳐 최후의 힘을 짜내 소리치더니 분수같이
피를 토하고 경련하다가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위지광은 당대를 울릴 만한 무공을 지니고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정려군은 위지광에게 다가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목을 베어
치켜 들었다.
"오호호호호-!"
위지광 부자를 죽인 후 미친 듯이 웃는 정려군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악귀를 연상케 했다.
정추수는 위지광 부자의 최후와 정려군의 지독한 수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가문의 복수라는 명분 아래
추호의 사정을 두지 않고 사람을 도살하는 정려군과 마교의
인물들을 보며 정추수는 비탄지감을 가눌 수 없었다.
문득,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 또한 저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갑자기 자신이 살인마가 되었음을 알게 되자 주위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동철비는 사력을 다해 보구천을 상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구천의 도에 십여 군데 상처를 입으면서도
악전고투하다가 결국 오른쪽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으며
건곤권을 떨어뜨렸다.
"아아!"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동철비는 탄식을 터뜨렸다.
"동철비! 네가 고죽검을 죽일 때에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지?"
보구천의 조소 어린 말에 동철비는 눈을 감아 버렸다.
동철비에겐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보구천이 유검학에게 손짓했다.
유검학이 다가오자 보구천은 한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검학, 이제 너의 손으로 원한을 갚을 때가 왔다."
유검학은 지체 않고 동철비에게 다가가 검으로 심장을
겨누었다.
"동철비! 결국은 오늘 같은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죽기를 각오한 동철비는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린놈이 어른을 능멸하려느냐? 어서 죽여 네 부친의
원한을 갚아라!"
"좋다! 이제 죽여 주마."
유검학의 검이 동철비의 가슴을 깊숙이 꿰뚫었고, 동철비는
입을 벌린 채 몇 번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유검학은 동철비의 심장을 찌른 검을 빼어 들었다.
뜨거운 피가 검신을 타고 흘렀다.
유검학은 혓바닥으로 검신을 핥은 후 검을 높이 치켜 들며
외쳤다.
"아버님! 소자 검학이 아버님의 검으로 원수를 찔러
죽였으니, 구천에서나마 원을 푸시옵소서!"
동철비를 끝으로 장내엔 반항하는 신검문의 고수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정려군 일행이 신검문을 공격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백
명이 훨씬 넘는 신검문의 고수들이 모두 죽어 간 것이다.
정려군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위지광의 식솔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등고가 다가와 대답했다.
"불길만이 거셀 뿐 어느 곳에서도 아녀자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정려군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위지광이 무슨 여유가 있어 그들을
빼돌렸겠느냐? 다시 한 번 찾아보아라."
이때, 공야직이 다가와 정려군을 만류했다.
"려군, 불길이 거세니 우리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
그들은 내버려두도록 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어찌 화근이 될 씨앗을 남겨
두겠습니까? 위지광의 식솔들은 분명 신검문 내에 숨어 있을
거예요. 그들을 반드시 찾아야 해요."
악착 같은 정려군의 말에 모두가 속으로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공야직이 눈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여 나무랐다.
"시간이 없다, 려군. 그리고 어찌 그리도 마음을 독하게
쓰느냐? 원한을 갚았으면 족하게 여길 것을!"
공야직의 꾸짖음이 아니라도 주위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정려군은 아쉬움에 발을 구르다가 문득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곳엔 아직 불타지 않은 전각이 한 채 있었다.
"위지광이 왜 저곳엔 불을 지르지 않았지?"
그녀가 검으로 가리킨 곳은 창덕전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숨어 있는 석실이 그 지하에 있어
신검문의 무사들은 차마 불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지만, 총명한 정려군은 이내 연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등고가 창덕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건물에도 이미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바람이 거세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소할 것입니다."
정려군은 창덕전을 잠시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철수한다. 등고! 넌 동철비의 목을 베어라."
마지막 명을 내리며 무량전을 벗어나는 정려군을 보면서
공야직은 나직이 혀를 찼다.
"너무 잔인해. 결국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이거늘,
어찌 자신의 원한만 생각한단 말인가...?"
정추수의 일행이 모두 물러간 뒤에도 화마는 지칠 줄을
모르고 신검문의 모든 자취들을 태워 버렸다. 바람이 불길을
재촉하고 불길이 다시 바람을 일으켜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밤새도록 타오르던 불은 먼동이 틀 때부터 내린
눈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시진이 지나 해가
중천을 향해 달려갈 무렵엔 몇 줄기 연기마저 눈에 눌려
버렸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이 황폐한 잿더미를
차곡차곡 덮어 가고 있었다.
신검문의 영화(榮華)는 그렇게 눈 속에 사라져 갔다.
신검문이 멸망한 지 사흘이 지났다.
언제 끔찍한 혈겁이 있었냐는 듯 대지를 하얗게 덮은 흰
눈이 달빛을 받아 은은한 정취를 풍기는 자정 무렵, 한
인영이 나타나 신검문의 자취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 흐느끼다가 울부짖고, 그러다가 웃기도
했는데, 밤새도록 맨손으로 눈을 헤집고 있었다.
그의 손에 타다 만 시신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목 없는 시신 한 구를 발견하고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던 그는 문득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교여! 반드시 이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
사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데...
인간사에 무심한 달빛은 교교(皎皎)한 멋을 한껏 뿌려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