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장신대 안교성 교수님의 글입니다.
--------------------------------------------------------------------------------------
교회의 목회자에서 세상의 목회자로: 디트리히 본회퍼와 교회의 재발견
본회퍼는 한마디로 역설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20세기 전반에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 신학자인 동시에, 전통적 신학자 상(像)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가였다. 그는 수준 높은 연구물을 내놓아 신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교회의 어용화에 맞서 교회 개혁을 추진하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재에 맞서 정치 변혁을 추구하다가 사형당했다. 그의 신학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면이 있지만, 그의 삶은 사족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명하다. 이런 존재인 만큼 20세기 후반에 ‘본회퍼 신드롬’ 현상이 일어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서 본회퍼 열풍이 다시 일었다. 그의 전집 중 잘 알려진 작품을 중심으로 한글 번역본 선집이 나왔다.1 이 선집 중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 『저항과 복종』은 과거에 대중적 관심을 받았고, 최근에는 영성의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또한 베트게(Eberhard Bethge)의 획기적 전기가 출간되어 본회퍼의 인물됨을 들여다볼 수 있다.2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본회퍼 연구는 신학과 윤리 중심이다. 그 결과 그의 사상의 핵심인 교회라는 주제에서도 신학적 측면인 교회론은 각광을 받았으나, 실천적 측면인 목회는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최근 국내외 연구도 예외가 아니다. ‘캠브리지대학교 출판부 간행 디트리히 본회퍼 입문서’를 번역한 『본회퍼의 신학개론』이나 한국본회퍼학회의 ‘디트리히 본회퍼 연구 총서 제1집’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사상 연구』도 목회론은 포함하지 않았다.3 다행히 관련 연구로 침멀링(Peter Zimmerling)의 『실천신학자로서의 본회퍼』(Bonhoeffer alsPraktischer Theologe)가 있고, 묄러(Christian Moeller)의 『개인별 초상화로 본 목회적 돌봄의 역사』(Geschichte derSeelsorge inEinzelportraets) 제3권이 본회퍼를 포함했다.4 또한 본회퍼 전집에 실린 ‘목회적 돌봄 강의’(Vorlesung ueber Seelsorge, Lecture onPastoral Care)의 한글 번역본 『디트리히 본회퍼의 목회학 총론』(이하 『목회학 총론』)이 단행본으로 나와 갈증을 달래줬다.5
본회퍼에게 ‘교회’는 평생에 걸친 신학적 주제요, 사랑과 헌신의 대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교회의 신학자요, 마치 해바라기와도 같은 ‘교회-바라기’ 목회자였다. 그는 어떤 목회를 했을까? 그의 목회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교회의 중요성을 부각하려고 했던 ‘교회의 목회자’(제1기), 교회의 진정성을 위한 대안 마련에 힘썼던 ‘공동체의 목회자’(제2기), 하나님의 ‘세상(kosmos) 사랑’(요 3:16)을 실천하고자 세상을 향한 책임을 감당하려고 했던 ‘세상의 목회자’(제3기)이다. 이제 이 세 가지 범주에 따라 그의 목회의 실제와 사상을 살펴보자.
교회의 목회자(혹은 신학자로서의 목회자): 1923-1933년6
본회퍼는 『목회학 총론』의 “그리스도교에 무관심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한 목회”라는 장(章)에서 이들을 세 부류로 나눴다. 특성별 교인 분류는 목회론의 역사에 나타난 전통 중 하나이다.7 가령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St. Gregorius the Great)의 『사목규범』은 설교를 듣는 청중을 36쌍(72종류)으로, 부처(Martin Bucer)의 『참된 목회학』은 영적 돌봄의 기준에 따라 교인을 5종류로, 박스터(Richard Baxter)의 『참목자상』은 목회 대상 중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경우에 따라 교인을 6종류로 분류했다. 본회퍼의 분류는 기독교에 무관심한 이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그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에 길지만 인용한다.
여기서 ‘무관심한 사람들’(the indifferent)이라고 지칭할 때에,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지도 않으며, 교회나 사회에서 헌신적인 삶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시 말하면 세상 주변을 맴돌며 머뭇거리면서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the undecided)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유형(three different modes of indecision)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 첫 번째 유형: 그들의 직업이나 가정을 통해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전혀 부족할 것이 없다고 자만하며, 엄청난 성취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만족스러워하고, 불평이 없으며, 행복하다. 그들은 스스로 맘에 내킬 때나, 혹은 어떤 축제에 참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따금씩 교회에 참석한다. 그들은 ‘교회와 그럭저럭 함께’(alongside the church) 살아간다.
• 두 번째 유형: 이 사람들은 교양인들(the educated)이요, 문화생활을 누리는 문화인(cultured folk)으로서, 자신들의 삶이나 목표가 ‘교회와 연관된 사항들보다는 한 수 위에’(above ecclesiastical things)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이다.… 교양인들은 한편으로는 교회에 일정한 거리감을 두거나(stands on one hand next to the church),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지배하려고 한다(stands over the church). 아마도 1935년부터 1938년까지의 상황에서 이 사람들은 어쩌면 다시는 ‘진정한 교회로’(into a real church)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 세 번째 유형: 이 사람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교회와 목회자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냉담하고(callous), 불평을 쏟아내며(discontented), 실망하는(disappointed) 자들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 적대하는(against the church) 자들이다.8
본회퍼는 두 번째 유형의 가정에서 자랐다. 특히 외가보다 친가가 그런 성격이 강하여, 그는 어려서 정기적인 교회 생활을 하지 않고 자랐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회퍼에게 큰 영향을 미친 바르트(Karl Barth)와 비교해보자. 바르트와 본회퍼는 둘 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지만, 바르트가 목회자 전통이 깊은 가문 출신으로 ‘교회와 목회’ 문화가 몸에 밴 교회 내적인 인물이라면, 본회퍼는 기독교에 무관심한 교양인 가문 출신으로 ‘교회와 목회’ 문화에 노출되었으나 동시에 거리를 둔 외부자적 시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즉, 바르트가 신자요 교인(evangelized and churched)으로 자랐다면, 본회퍼는 신자이지만 교인적 성격이 약하게(evangelized and unchurched) 자랐다. 따라서 본회퍼가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결심이 필요했고, 교회와 목회를 대하는 시각도 남달랐다.
실제로 본회퍼 전기의 “[그가] 신학을 하기로 결심하다”라는 장(章)을 보면, 그는 신학을 선택해가는 과정에서 주위로부터 격려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생뚱맞다는 반응을 받았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기성 교회에서 자란 기성 교인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교회에 익숙하기보다는 낯선 존재였는데, 그런 삶의 자리가 그의 신학과 목회에 독특성을 부여했다. 그는 사람들이 내적인 신앙심을 고양하기보다는 외적으로 틀에 박힌 종교인의 모습을 과시하는 태도를 비판했고, 종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되기를 촉구했다. 바르트의 관점을 빌려 설명한다면, 바르트가 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했듯이, 본회퍼는 개인을 종교인과 기독교인으로 구분했고, 단체는 종교공동체와 교회로 구분했다.
본회퍼가 신학도가 된 계기는 ‘교회 개혁’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는데, 이런 관심은 초기부터 나타났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열네 살짜리 소년에게 형들이 ‘소시민적이고 따분하고 허약한 기관이 바로 교회야’라고 비난하면서 ‘너는 가장 미미한 저항의 길을 걷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자, 그는 ‘내가 개혁하면 되지 뭐!’라고 당차게 대꾸했다.”9 그는 교회의 어용화에 맞선 ‘고백교회’ 시기에 재다짐했다. “나는 대단히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일했습니다.… 그때 성경이 특히 산상수훈이 나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의 삶은 교회에 속해야 한다는 게 분명한 사실로 다가왔고 차츰 뚜렷해졌습니다.… 나에게는 교회의 갱신과 목사직의 갱신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10
본회퍼의 신학은 평생에 걸쳐 교회 중심이었다. 그는 최초의 신학서 『성도의 교제』에서 교회의 양면성으로 본질적 교회와 경험적 교회를 언급하고 모두를 강조했다. 그는 전자만 고집한 이상주의자도, 후자만 용인한 현실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의 관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해, 공동체로 존재하며, 타자를 향한다.(‘타자’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후기에 나타난다.)
본회퍼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말해 루터의 재해석이다. 그는 루터를 수용하기도 하고 재구성하기도 했다. 그는 『성도의 교제』에서 루터의 ‘죄론’과 ‘만인제사장설’을 활용했다. 루터가 신자를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고 했듯이, 그는 교회를 ‘죄인의 공동체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인의 공동체]’라는 패러다임으로 접근했다. 또한 목회적 돌봄을 ‘만인제사장설’적으로 접근했다. 『성도의 교제』의 “경험적 교회의 사회학적 형태와 기능”을 다룬 부분에 그의 목회론의 뿌리가 나온다. 그는 예배 다음에 목회적 돌봄을 다뤘다. 그는 개신교의 목회적 돌봄이 ‘제사장적 요소’와 ‘조언자적 요소’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이 요소들은 목회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전자는 교회의 한 일원이 타인을 위해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능력을 지닌 제사장으로, 중보기도를 행하고 죄를 용서하는 공동체로 등장”하는 것과 관련된다. 후자는 목회자 개념에 질문을 제기한다. 즉, 목회자와 성도 간의 위계질서적 차이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에게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은 무슨 도움을 주며, 모범적 인물들, 교회의 역사, 전통은 무슨 도움을 주는가? 개신교적 관점에서 이 모든 질문은 궁극적으로 같은 질문이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선물(donum)임과 동시에 모범(exemplum)이 된다.… 한 사람이 중요한 결단 앞에 서 있을 때에 반드시 다른 삶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루터는 늘 반복해서 말했다. … 우리는 올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용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이웃의 조언’, 짧게 말하면, 사회성을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물론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의 목회 행위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첫 번째 유형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한 사람의 절대적 중요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교회론에 근거해 있다. 두 번째 유형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한 사람의 상대적 중요성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성에 근거해 있다.11
본회퍼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논리를 확장해보면 목회자의 역할은 개인적 차원에서 용서하고 조언하며, 지도자적 차원에서 다른 개인이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1923년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본회퍼는 1927년 말 베를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28년 초 1차 신학고시를 통과한 후 수련목회자 사역을 모교회(베를린의 그루네발트교회)가 아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독일인 교회에서 시작했다. 그는 수련목회자 시절을 주로 외국이나 국내의 소외 지역에서 보냈는데, 이런 곳의 교회는 본국의 일반적 교회와는 달라서 다양한 교인층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독일인 교회의 교인들은 소시민적 상인층으로, 낡은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생전 처음 둥지를 떠나 낯선 이들과 연대하는 법을 배우면서 교인 공동체와 어울리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각 교인의 처지를 이해하며 다양한 모임에 참여했다. 그는 사역에도 열심이었는데, 설교와 강연, 심방 등을 부지런히 했고, 특히 청소년 사역의 경우 눈높이 교육과 심방을 통해 부흥을 일으키기도 했다. 자칫 담임목사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비춰질까 봐 주말기도회를 열자는 교인의 요구를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1930년 스페인에서 귀국한 후 연구차 미국 유니온신학교에 가게 된다. 이 때문에 수련목회자 사역이 원활하게 이어지지 못했고, 목사안수도 연기되었다. 이 시기에 본회퍼는 뉴욕 할렘가의 흑인교회를 통해 흑백 문제를 접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2차 신학고시에 합격하였고, 1931년 귀국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베를린 베딩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견신례수업 사역을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1933년 런던으로 가 처음으로 정식 목회를 수행했는데, 런던에 있는 여섯 개 독일인 교회 중 두 곳을 맡았다. 그 교회들은 자유교회(국가교회가 아닌)적인 특징을 보였다. 한 교회는 선교사가 세운 교회로 상류층이 주축이고 통합교회적이었고, 다른 교회는 독일 개혁교회 소속으로 중산층이 중심이고 주로 영어를 사용할 정도로 이민의 역사가 오랜 교회였다. 두 교회 모두 독일 난민 활동 등에 협조적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1931-33년에 대학 강사를 하면서 교목을 맡던 중에, ‘베딩 지역에 있는 시온교회의 통제 불가능한 견신례수업을 인계받으라.’는 총회 지시에 따라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을 실제로 체험할 목회 기회를 얻었다. 그는 견신례수업에 집중하려고 다른 일을 줄였고, 아예 방까지 얻어 무산계급 출신의 아이들과 같은 구역에 살았다. 그는 “교리문답을 배우는 것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게 그들에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네. 나는 수업시간 내내 공동체 사상에 대해 가르쳤네.”라고 고백했다. 그는 고백교회 이전에 이미 공동생활을 시도했고, 열매를 맛봤다.
이제부터 자발적인 저녁모임은 견신례수업 학생들 차지였다. 그들은 예고 없이 그를 찾아가 체스를 두거나 영어를 배웠다. 성탄절에는 저마다 소포를 하나씩 받았다. 그는 주말이 되면 그들과 함께 유스호스텔로 소풍을 가곤 했다. 그러한 형태의 공동생활은 여느 교회 공동체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12
이 공동생활은 목회자가 아닌 빈민층 청소년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로서 파격적인 청소년 목회자였고, 획기적인 성공을 거뒀으며, 그런 경험이 고백교회 시절 공동생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본회퍼는 매우 유능한 청소년 사역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 문제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제는 논문 상태의 『성도의 교제』에서 간단히 언급된 바 있다.13 비록 이 주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못했지만, 빈민층 역시 타자를 위한 교회가 직면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본회퍼는 다양한 해외 목회 경험을 했지만, 결국 위기에 처한 고국 교회를 지키는 현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교회 투쟁 초기인 1933년에는 런던에 갔다가 1년 반 후에 돌아왔다. 당시 이 문제로 바르트와 서신을 교환했는데, 바르트는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로뎀나무 아래 있는 엘리야나 박 넝쿨 아래 있는 요나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 당신은 다음 배를 타고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라고 권고했다.14 그러나 교회 투쟁이 본격화된 1939년에는 미국행을 했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다.
공동체의 목회자: 1933-1940년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독재 상황에서 본회퍼의 신학과 목회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는 이 시기에 신학적이기보다 신앙적이거나 목회적인 책을 저술했다. 당시는 상황에 대해 직접 응답하는 전인적 신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대표적으로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이 있다.)
그는 히틀러의 독재에 호응하는 독일교회에 맞선 대립교회(혹은 대안교회)인 ‘고백교회’ 운동에 동참했고, 신학교육에 매진했다. 그는 이 상황을 ‘신앙고백이 필요한 상황’(status confessionis)으로 보았다. 그는 당시 독일교회에서 인종차별적 관점에서 비(非)아리안족을 제외시키려는, 즉 “교의를 아리아화(化)”하려는 교회의 민족주의적(혹은 국수주의적) 노예화를 거부했다.15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는 일본 군국주의 치하의 일본교회를 연상시킨다. 그는 신학교육의 일환으로 『목회학 총론』을 집필했다. 그는 이후에 고백교회가 충성 서약 앞에서 보신(保身)적 자세를 취하자, 주류 고백교회와 거리를 두었다.
이 시기에 본회퍼의 신학적 토대는 로마서가 아닌 산상수훈이었다. 그는 루터의 칭의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자론을 제시했다. 그는 은혜를 타락시키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은혜답게 만드는 ‘희생과 헌신’, 곧 ‘값비싼 은혜’를 요청했다. 『나를 따르라』의 독일어 원제목 Nachfolge(내 뒤를 따르라; 그리스어도 같은 의미이다, δευτε οπισω μου)를 영어 번역본이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도의 대가)으로 번역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우리가 제자도를 언급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제자도를 개인적인 ‘제자’ 차원에서만 보고 집단적인 ‘제자들’ 차원에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를 개인적으로 불렀지만 핵심 제자들을 제자단, 즉 ‘사도’(使徒, apostles)라는 집단으로 만들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보내심을 받은 무리’라는 뜻이다. 제자는 집단일 때 진정성을 지닐 수 있기에, 초대교회부터 ‘예수와 사도’라는 집단 구조를 반복했다. 가령 감독(주교)과 장로(사제), 교황과 추기경 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회퍼가 고백교회 신학교의 구조를 공동체적으로 만든 것은 제자도의 바른 이해가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나를 따르라』에 이어 『신도의 공동생활』이 나온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나아가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형제의 집’이란 실험도 감행했다.
교회사를 보면 목회자의 공동체성, 특히 공동생활을 강조한 또 다른 사례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 후 수도사가 되려다가 사제로 발탁되었다. 그의 고민은 당시 교회와 수도원이 별개로 존재하여, 수도사와 사제를 병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그의 주교이자 멘토였던 발레리우스(Valerius)가 그에게 교회에 수도원을 설치해서 두 가지를 동시에 하라는 파격적 제안을 했다. 바로 참사회(Canon) 제도의 출발이다. ‘참사회’란 주교가 있는 교회인 주교좌 교회(Cathedral)에 목회자들이 공동거주하는 집단을 말하는데, 수도회처럼 규칙을 채택한 경우(Canon regular)와 그렇지 않은 경우(Canon secular)가 있다. 이후에 수도회 성격을 강화한 탁발수도회인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수도회(후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로 명칭 변경)가 만들어졌다. 통상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은 참사회(참사회 중 Canon regular)와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수도회 두 가지를 포함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수도회 출신인 루터는 동료들과 더불어 종교개혁을 감당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중시한 칼뱅도 동료들과 더불어 종교개혁을 했고, 실제로 제네바에서 집단목회를 했다.
본회퍼의 공동생활에 대해서 가톨릭적이라거나 경건주의적이라고 왈가왈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말한다면 그는 교회의 다양한 유산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한 에큐메니컬적 특성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20세기 초반 에큐메니컬 운동의 발전에도 깊이 관여했다. 여하튼 그에게는 공동생활이 중요했지, 특정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가령 루터가 말씀과 성례전을 강조하면서도 죄의 고백을 강조했듯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죄의 고백(고해)을 공동생활과 목회의 중심으로 보았다.16
그가 이 시기에 『목회학 총론』을 저술한 것은 의미가 크다. 『목회학 총론』은 목회의 사명, 목회에 적용할 율법과 복음, 목회 심방, 기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한 목회, 시험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목회, 환자를 위한 목회, 임종 직전의 방문, 목회의 중심인 ‘죄의 고백’, 목회자를 향한 목회, 목회와 장례식, 목회와 결혼, 목회와 세례 등을 포함했다. 몇 가지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다. ‘목회자를 향한 목회’는 목회자의 공동체성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17 또한 그는 종교개혁이 일반적으로 반대하는 ‘고인을 위한 중보기도’에 대해 목회적 돌봄의 관점에서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즉 그는 루터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두 번 혹은 세 번 기도한 다음, 그 이후에는 중지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는데, 루터가 이런 제한을 둔 이유는 중보기도가 “비록 회중 전체가 고인(故人)의 죽음의 시간에 참여할 수 없지만, 그 대신에 ‘중보기도’를 통해서라도 고인의 죽음을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대용품’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톨릭교회의 “고인을 위한 지속적인 중보기도 행위는 사실상 불신”이라고 선을 그었다.18
세상의 목회자(혹은 세상과 함께하는 목회자): 1940-1945년
히틀러의 독재가 극성을 부리자, 본회퍼의 사역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외적으로 히틀러 제거를 목표로 삼았고, 내적으로는 극한 상황에서 기독교의 의미를 성찰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수감생활 중에도 다른 죄수나 심지어 간수까지 의지하는 등 영적 권위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가 기성 교회의 교인만이 아닌 다양한 사람과 접하면서 생긴 목회 역량 덕분이라고 하겠다. 그는 교회의 목회자이면서 교회 밖 세상의 목회자였다. ‘선한 목자’ 장이라 불리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 안의 양’을 돌보는 목자인 동시에 ‘우리 밖의 양’을 위한 목자라고 설명했다.
히틀러 제거라는 본회퍼의 정치적 목표와 행동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무력 사용이라는 해묵은 논쟁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 즉 이리에게 대신(혹은 함께) 먹히는 것인지 이리를 잡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서 전체에 나타난 목자의 이미지를 반영할 때, 이에 대해서 다양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삯꾼은 양을 버리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본회퍼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그 일을 감행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를 오늘날 새로운 순교자의 반열에 포함한다. 그는 루터교 전통에 속했지만, 루터의 ‘두 왕국설’을 뛰어넘은 삶을 산 목회자였다. 루터의 두 왕국설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교회는 영적 영역을 맡고 국가는 정치적 영역을 맡는 파트너로서 영역 분담을 인정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설은 교회의 건전한 정치 참여를 막고 오히려 교회가 어용교회가 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국가가 독일교회 내의 유대인을 추방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하는 등 도를 넘는 조치를 하자, 본격적인 저항에 나섰다. 유명한 비유대로, 수레가 사람을 친다면 다친 후에 싸맬 것이 아니라 수레바퀴를 걸어 멈춰 세워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감옥에서 쓴 “10년 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상 시민적 용기는 자유인의 자유로운 책임감에서 자라날 수 있다. 독일인은 이제서야 자유로운 책임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것[자유로운 책임감]은 신앙으로 대담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책임적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그런 모험을 감행하다가 죄인이 된 사람에게 용서와 위로를 약속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을 의존한다.19
본회퍼는 수감생활 중에서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반성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교회 사랑을 하나님의 세상 사랑으로 확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새롭게 정의했다. 세상을 교회와 반대되는 것(anit-church)이 아니라 교회와 다른 것(non-church)으로 보았다. 세상은 신앙적 차원에서는 교회와 다르나,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는 교회와 같다. 사실 세상은 서구의 경우 계몽주의 초기에 ‘자율성’을 주장했는데, 이제 그는 그것을 넘어 세상의 ‘성년됨’을 인정했다. 세상이 교회와 달라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세상의 성숙을 인정해주는 것이 바로 그가 주장한 ‘비종교성’, ‘성년’ 개념의 참뜻이 아닐까?
본회퍼가 보여준 ‘세상의 목회자’라는 측면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임하지 않는 한,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한, 교회는 좁은 의미의 선교가 아니라 선교를 넘어선 선교, 곧 하나님의 선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결론
본회퍼는 도전적인 신학자였고, 비전형적인 목회자였다. 그는 익숙함이 아닌 낯섦을, 길들임이 아닌 일깨움을, 복종이 아닌 저항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사랑하고, 나아가 교회와 세상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까지 사랑한 목회자였다. 그는 본질적 교회와 경험적 교회의 간극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양자를 결합하기 위하여 제자도를 부르짖었고 동료 공동체를 세웠다.
그동안 ‘제자도’를 개인적이고 교회 내적인 차원으로 이해한 나머지, 선교와 무관했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신학계에서 나왔다. 그 결과, 가톨릭에서는 ‘선교적 제자도’(missionary discipleship)를, 세계교회협의회는 ‘변혁적 제자도’(transforming discipleship)를 주창했다. 그의 사상과 삶은 오늘날 교회의 공공신학에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주(註)
1 디트리히 본회퍼, 손규태 외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대한기독교서회, 2010).
2 에버하르트 베트게, 김순현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복있는 사람, 2014). 요약본은 2006년 출간.
3 존 W. 드 그루시 편, 유석성·김성복 옮김, 『본회퍼의 신학개론』(종문화사, 2017). 이 책의 원제는 The Cambridge Companion to Dietrich Bonhoeffer로, 신학만이 아니라 전반을 다뤘는데, 한글 번역본은 ‘신학’이란 단어를 앞세웠다. 그만큼 본회퍼 연구는 신학이나 신학적 관점에 치중했다. 한국본회퍼학회 편,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사상 연구』(동연, 2017).
4 침멀링의 『실천신학자로서의 본회퍼』를 소개하는 등 이 글의 초고 단계에서 여러 가지 코멘트를 해준 고재길 박사에게 감사한다. Peter Zimmerling, Bonhoe-ffer als Praktischer Theologe (Göttingen: Vandenhoeck&Ruprecht, 2006). 한편 침멀링은 최근에 본회퍼를 개신교 신비가로 다뤘다. Peter Zimmerling, Bonhoeffer als Evangelische Mystik (Göttingen: Vandenhoeck&Ruprecht, 2015). Christian Möller, hrsg. Geschichte der Seelsorge in Einzelporträts, Band 3 (Göttingen: Vandenhoeck&Ruprecht, 1994), 233-247. 이 책은 총 3권인데, 12권으로 된 일본어 번역본이 있다.
5 제이 C. 로쉘 편, 김윤규 옮김, 『디트리히 본회퍼의 목회학 총론』(한신대학교 출판부, 2012). 본회퍼의 ‘목회적 돌봄 강의’는 독일어판 전집 14권에 나온다. Dietrich Bonhoeffer, hrsg. von Eberhard Bethge et als., Dietrich Bon-hoeffer Werke XIV Illegale Theologen-ausbildung: Finkenwalde 1935-1937 (Gütersloh: Chr. Kaiser/Gütersloher Verlagshaus, 1996), 554-591; H. G. Barker & M. S. Brocker, eds., Douglas W. Stott, tr., Theological Education at Finkenwalde: 1935-1937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3), 559-594. 『목회학 총론』은 1996년판이 아닌 1972년판(München: Kaiser Verlag, 1972)의 5권, 363-415에 수록된 것을 사용했다. 『목회학 총론』에서 ‘목회와 장례식’, ‘목회와 결혼’, ‘목회와 세례’는 독일어판 전집 14권에 나오지 않아, 출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6 고재길 박사는 ‘교회의 목회자, 공동체의 목회자, 세상의 목회자’ 대신 ‘신학자로서의 목회자, 공동체의 목회자, 세상과 함께하는 목회자’를 제안했고, 그것을 받아들여 해당 부분 괄호 안에 소개했다.
7 안교성, “목회와 신학에 있어서 회중론의 의의에 관한 연구: 교회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교회사학회지」 61(2022): 99-127.
8 『목회학 총론』, 141-143. 고딕체는 원래의 강조.
9 『디트리히 본회퍼』, 95.
10 Dietrich Bonhoeffer, Illegale Theologenausbildung: Finkenwalde(1935-1937), 112 이하; 고재길, 『한국교회 본회퍼에게 듣다』(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4), 131에서 [번역문] 재인용.
11 『성도의 교제』, 219, 219의 각주 117, 220-221. 고딕체는 원래의 강조.
12 『디트리히 본회퍼』, 362-363.
13 『성도의 교제』, 405.
14 『디트리히 본회퍼』, 493.
15 『디트리히 본회퍼』, 850.
16 『신자의 공동생활』, 115-126; 『목회학 총론』, 183-199.
17 다음 책을 참고할 것. 에밀 브리에르, 전달수 옮김,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분도출판사, 2001).
18 『목회학 총론』, 215, 216.
19 John W. de Gruchy, The Cambridge Companion to Dietrich Bonhoeff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20, 139. 필자 번역.
안교성|교회사를 전공하였다. 『한국교회와 최근의 신학적 도전』, 『아시아 신학 산책』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