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8 - 도시샤대학에서 야나기와 다쿠미에... 윤동주를 회상하다!
4월 9일 아침 지하철 히가시야마역 북쪽 오카자키 수로 에 핀 벚꽃 을 보고는
헤이안진구 平安神宮 (평안신궁) 에 도착해 후원인 신엔 神苑
4개의 정원을 구경하고는 지하철을 타고 이마데가와 今出川 역에서 내립니다.
경도어소 (京都御所) 일왕의 옛 궁궐 맞은편에 있는 도시샤대학교 同志社大學 에 들러
尹東柱 詩碑 (윤동주시비) 와 鄭芝溶 詩碑 (정지용시비) 를 찾아서 참배 합니다.
간도 용정 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국내 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보통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지라, 9월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윤동주는
결국 3학년에 편입하니 큰 좌절이었지만... 10월에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에 ‘공상’을 발표 합니다.
이어년 12월에는 최초의 동시‘조개껍질’을 썼으니 이 시 끝에는 평양의 ‘봉수리 에서’
썼다고 쓰여 있는데... 큰 좌절이 닥치니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자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하교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를 취소하고 파면하니... 학생들은 동맹휴학 을 시작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 등과 숭실중학교를 떠나는데 이 무렵 3월 24일에 ‘모란봉에서’란 시를 씁니다.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 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 일까.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으니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이국말(일본말)로 노래 부르며‘재질대며’뜀뛰며 일본 놀이를 하고 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니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을 생각하게 하는데...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한 나라의 언어와 생활 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동시 ‘창구멍’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됩니다.
도시샤 대학을 구경하다가 이 대학의 교수였던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유종열) 가
떠오르니 그는 일본의 민예연구가 로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짓기위해 광화문
철거 가 논의되었을 때 적극 반대했으며, 1924년 조선 미술관 을 설립했고
이조 도자기전람회 와 이조 미술전람회를 열었으며 저서로‘조선과 예술’을 썼습니다.
야나기 는 조선 도자기를 수집하는중 우리 美 의 특징을 '비애의 미' 라고 했으며 조선의
공예를 조선사람 보다 더 사랑 했다는 일본인으로 조선예술의 위대함 을 극찬 했습니다.
석굴암 보수공사 때는 섣부른 공사가 비극 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아사카와 다쿠미 를 통해 “조선의 백자와 미(美)”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에서는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 유의 그림을 俗畵(속화) 라고 했는데 이는
유학자 인 조선 사대부와 지배층 의 천시하는 마음이 담긴 비하된 표현 입니다!
야네기 무네요시 는 오랫동안 조선의 선비, 사대부들이 조선 풍속화 를
일컬었던 俗畵(속화) 라는 기존의 이름 대신에 "民畵(민화)" 라
최초로 불렀으니..... 오늘날에도 이 용어가 그대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민예품의 아름다움 을 인식하고 보급하여 새로운 생활 공예의 발전을 꾀하는
민예운동 의 창시자인 야나기 는 1936년 도쿄에“민예관” 을 세웠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 민예품 1만 5천점 중에 3천점 정도가 조선 민예품 이니.....
서울 역사박물관 에서 조선 민예전 을 할때 이곳 도쿄민예관에서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야나기에게 조선백자와 미 를 알게 해준 다쿠미 는 조선의 공예 를 좋아해 형 노리타카
에게 조선의 도자기 파편 을 구해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 을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 을 주장했는데... 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 ( 道〜白磁の人)” 가 개봉됐습니다.
에미야 다카유키 의 소설 “백자의 사람”이 원작인데...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 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 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라고 적혀있으니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 을
했으며 한국의 산을 푸르게하는데 헌신했고 한국 백자와 공예품을 사랑하고 수집 했습니다.
유명한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 가 한국의 공예에 눈 뜬 것도 아사카와 형제 덕분
이었으니 1916년 형 아사카와가 야나기에게 조선의 청화백자를 선물 했고
이를 계기로 야나기는 한국 공예에 빠져들었다는데,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는
조선의 도자기와 목공예품, 금속공예품 등을 모아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 을 세웠습니다.
영화에서 아사카와 다쿠미 는 “백자 같은 사람”이라 불린건 백자를 수집 연구
했기 때문인데, 하지만 백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 이 또 있으니.....
바로 소반(小盤) 으로... 그는 소반을 수집 조사 연구했고 그 결과를 담아 1929년
‘조선의 소반(朝鮮の膳)’이라는 책을 냈으니 국내 최초의 소반 연구서 입니다.
"지금 하지않으면 더 많은 소반이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한국의
소반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했던 그였으니 "조선의 소반 은 순박한 아름다움에 단정한
모습을 지니면서도 일상 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아취를 더해가니...."
그때까지 소반 은 그저 평범한 일상용품 이었는데 아사카와 다쿠미는 거기서 아름다움
을 발견해냈으니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소반을 감상하며 미적으로 감동하기
시작했다는데... 일상용품이 미술품으로 바뀐 것으로 요즘 우리가 오늘날
소반을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아사카와 다쿠미 덕분 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31년 그는 서울에서 식목행사 를 준비하다 급성폐렴 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국식
으로 장례 를 치렀고, 한국 사람들이 앞다퉈 그의 상여를 멨는데.....
서울 망우 역사문화공원 (옛 망우묘지공원) 에 가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무덤이 있고 무덤 앞엔 항아리 모양의 돌 조각 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그의 형이 "조선백자를 모티브로 삼아 조각한"
것이라는데 묘비엔 이렇게 써 있습니다. ‘한국의 산과 민예
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야나기 무네요시 와 아사카와 다쿠미 를 생각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목화와 소금
의 아버지인 와카마쓰 우사부로 인데... 목화는 고려말에 문익점 이 중국 원나라에서
씨앗을 붓통에 숨겨 들여온걸 재래면 이라 하는데 섬유가 짧아 방직원료로는 부적합 합니다.
반면에 미국에서 개량된 육지면 은 섬유가 가늘고 길며 강하고 질겨 광택 이 있으니...
육지면 은 1904년 목포 일본 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 가 정유재란때 이순신장군이
머물며 병선을 건조해 노량해전을 준비했던 섬인 고하도 에 407년 후에 들어와
목화를 시험재배 한 것이 효시니 고하도는 국내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된 발상지 입니다.
목포 영사 와카마쓰 는 1903년 1년간 목포 고하도 기후조건 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맑음 264일, 구름 60일, 비 36일, 눈 6일 로 육지면의 파종 부터 수확 까지
기간인 5월 ∼10월 까지 목포 지방의 정오 평균 기온이 21.7℃ 로 조사 되었습니다.
면화 성장기 7월은 27.8℃, 8월은 30.6℃, 9월은 29.4℃ 로 높아 최적의 조건을 갖춘지라
와카마쓰 는 기후· 토질 등 생육 환경 면에서 고하도가 목화 재배의 적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 농무성으로 부터 미국종 면 종자 13종을 교부 받아 목포에
살던 266세대 1045명의 일본인 중에서 야마자키 도사부로 에게 위탁해 시험 재배를 합니다.
또 와카마쓰 는 솥에다 바닷물을 부어넣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끓여서 만드는 조선
재래의 소금인 자염(煮鹽) 이 너무 비싼걸 보고는 고하도 등 목포 인근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서 만든 천일염 을 대량으로 보급하니.... 목포는“삼백
(목화, 소금, 쌀) 의 도시”가 되어 일제시대 3대항 6대도시 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도시샤 대학 을 나와 북쪽으로 올라가니 강변인데 하나미 花見 를 나온 사람들을 구경
하노라니 우지시 강변에서 친구들과 송별회 를 했다는 윤동주 시인 이 떠오르는데
“시인은 내 인생의 보물이고, 나침반 같은 존재입니다.”일본 도쿄에서 장원재
기자 를 만난 다고 기치로 (多胡吉郞) 씨는 30년 넘게 윤동주에 빠져온 삶 을 요약합니다.
다고 씨 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생명의 시인· 윤동주’
라는 책 을 냈는데 그는 “군국주의가 판치던 암흑기 에
인간의 가장 순수한 영혼 을 유지하려 했던 이가 바로 윤동주”라고 말합니다.
“평이한 언어 로 인생의 본질 을 파고드는 윤동주의 시 가 시대, 언어,
국경을 넘어 일본인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고 씨는 1984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일본어판이 출판되면서 윤동주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는데... NHK 프로듀서 였던 그는 윤동주 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몇번이나 제안했지만 회사는‘누가 안다고 그러느냐’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광복 50주년인 1995년 KBS 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 를 제작해
방영했으니 다고 씨는 “그전에는 공동제작이라고 해도 민감해하던 근현대사가 아닌
미술 등을 주제로 했으며 또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따로 만드는 것이 관행 이었다”며...
“근현대사를 정면 으로 다루면서 버전도 하나로 통일해 양국에서 방영한건 큰 성과”라고
말했는데 3월 방영된 NHK 스페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일본 통치하의
청춘과 죽음’은 이후 일본에서 윤동주 추모 움직임 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윤동주의 흔적 을 찾아 일본 전역을 돌아
다녔다는데... 윤동주의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 대학
유학 시절을 추적해서는 그를 기억하는 동창생 3명 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중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을 발견했으니...
다고 씨는 서울에 있는 윤동주의 유족들 에게 사진을 보냈고, 윤동주와 친분이 있는
걸로 알려진 일본 시인 우에모토 마사오 (上本正夫)씨를 찾아 증언을 듣고 검증 했으니
이 사진 한장으로 일본인 시민단체‘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가 만들어 집니다.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씨는 윤 시인을 만난후 인생이 바뀌었으니 2002년 부터 매년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 행사 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해 각계의 모금을 받아 2007년 기념비 를 만들고 2009년 6,358명의
서명을 받아 용지를 확보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인 2017년 우지강변에 기념비 를 세웁니다.
2002년 영국에서 NHK 주재원 으로 있을 때 사표를 내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윤동주 서시의 한 구절 이 그를 지탱해
줬다는데, 다고 씨는“혼자서 영국의 옥탑방에서 살면서 공부를 계속했는데 그때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썼던 윤동주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다고씨는 최근까지 자료 분석하고 증언을 모으며 윤동주 발자취 를 지속적으로 추적했으니
이번에 낸 책에서 윤동주가 읽고 남긴 책의 밑줄과 메모를 분석 했고, 어떤 원고지를
썼는지, 연호 를 서양식으로 썼는지 일본식으로 썼는지 등을 세밀하게 되짚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마지막 행적을 찾아 후쿠오카 형무소 의 당시 간수와 수감자 등을 인터뷰했는데
다고씨는“생체실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증언을 모았지만 결정적 단서는
얻지 못했다”며 “다만 형무소는 식사가 부실하고 위생상태가 엉망 이어서
‘사망대기소’라 할 정도로 연이어 사람이 죽어나갔다. 병사 가능성도 있다”고 말합니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시신을 수습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사촌 송몽규를 면회 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 라고 말하고는 한달뒤 숨을 거두었으니 생체 실험의 대상 이 된 것일까요?
윤동주는 1942년 3월 유학 을 떠나면서 창씨개명 을 했으니 히라누마(平沼) 군(君) 이
됐는데 개명을 앞두고‘참회록’이라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 이후 유학 시절을
관통한 감정은‘부끄러움’이었으니... 사진을 찾아낸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 였던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 됐을 때
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묘는 만주 연변의 용정 에 있는데 1945년 동산의 교회공동묘지 에 장례를 치른후
동생 윤일주가 월남해 잊혀졌는데... 1984년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간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일주씨 부탁을 받고 연변대 권철, 이해산 씨와 함께 찾아냈는데, 당시 연변의
조선족들은 윤동주가 시인인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미국의 현봉학씨가
현장을 찾기도 했고 그후 용정시 인민 정부에서 봉분을 돋우고 묘비 를 세웠다고 합니다.
다고씨는 윤동주의 인생 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1941년 11월 5∼ 20일의 2주 동안이라고
했는데“시집 출간이 좌절된 윤동주 가 시집 제목 을 ‘병원’이라고 지었다가 이후
서시 를 쓰고는 제목 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고쳤는데... 이 기간에 시인은
정신적 고뇌 를 거친 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비상했다”고 풀이했습니다. 그러고는
59번 버스를 타고 리츠메이칸 대학과 킨카쿠지를 지나 료안지 龍安寺(용안사)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