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만을 내세우는 교회 (고전1:10-18) 2014년 1월 26일 - 주현절 후 셋째 주일
바울은 글로에의 권속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분쟁의 내용은 그들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라는 분파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짐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간곡히 권고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바울 자신에게 형제이며, 서로들에게도 형제이고,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죄용서를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교회에 올 때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이고,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리웁니다. 그런데 교회에 분파가 발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하는 행위이고, 주님과의 연합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지금까지 사단의 종으로 살던 것을 예수를 주로 고백하므로 자신을 대속해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세례를 주었느냐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 준 사람에 따라서 죄 용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 것이지 결코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라는 사람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은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니고 게바도 아니며 오늘날 목사도 아닙니다(13절).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이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가 분쟁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쟁은 성도가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분쟁은 해결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고린도에 보내신 것은 세례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이 목적이라고 이햐기 합니다.
즉 종교 의식, 종교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는 것이 자신이 보냄 받은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17절). 이것은 복음은 말재주로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얘기입니다. 말의 지혜,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거나, 교인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재능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인간의 말재주로 그쳐버린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은 오늘날 환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고난을 짊어지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손해 보는 일이며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인간의 방법도 미련한 십자가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는 이 세상에서 이익을 챙기는데 소용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쟁을 극복하고 십자가로 돌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본문을 통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사람에게 소속되어 나뉘어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사람에 대한 소속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12절에서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개의 파당이 생겼고 그것이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저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불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게 된 네 분파를 살펴보면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옹립하고 리더쉽이 있고 확신에 찬 바울에게 남다른 호의와 사랑을 가지고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면서 다른 분파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이방인들이 여기에 속하였고 그들은 자유를 방종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며 새로 발견한 기독교를 발판 삼아 자기들의 행동를 정당화 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으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도 능하고 웅변적인 설교로 많은 은혜를 끼치는 지도자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의 특유한 설교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불로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성적인 사람들로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바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게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급 사도이며 주님의 수제자 였으므로 게바 파라는 파당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은혜를 경히 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파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이상의 세 파를 비난하고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주장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경히 여기고 예수만을 내세운 파였을 것입니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고린도에 있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완고한, 자기들만이 옳다는 소수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것은 바울과 아불로와 게바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없고 분쟁을 한 일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과 아불로와 게바 중 자기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린도에 있다고 하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은 바울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누구에게 속했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와 시키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도용한 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사람에게 속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인기에 야합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보다 목회자 자신을 더 나타내는 경우를 볼수가 있습니다. 그로인해 분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화술이나 인기, 학문적 실력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곳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합하여 온전하여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이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교회가 온전하여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 바울은 성도들에게 모두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적대하는 국가나 당파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을 때 사용하는 관용구이다.
다 같은 말이란 교회에서나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면 대화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성도가 다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높이는 말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하나가 되면 분쟁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습니다.
(2) 바울은 성도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2:5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이 같은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분쟁이 있어도 화합이 되고 다투다가도 화목해 질 것입니다.
(3) 바울은 성도들에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는 것이 온전히 합하는 것이다.
온전히 합한다는 것은 의학 용어로 부러진 뼈를 고치거나 어긋난 뼈를 바로 맞출 때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합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수술을 할 일이 생기는 것처럼 문제가 그대로 남을 뿐만 아니라 악화될 거라는 의미이다. 부러진 뼈를 대충 맞춰놓으면 그것이 나중에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오직 한 가지 뜻이 있을 뿐입니다. 그 한가지 뜻은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중심에 계시면 분쟁을 얼마든지 극복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없는 온전한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뜻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3.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만을 내세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세워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며 부활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었기에 생긴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부활과 함께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라”는 말씀을 들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의 읽으면서도 고난의 메시야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장애물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도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그들의 학문으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키며 인간을 구원받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주님이 죽음의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를 위해서라고 믿을 때 그 공로가 내게 구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내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오직 십자가만 내세우기를 원하시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 구원을 얻고자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을수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죄를 깨닫게 되고 사죄의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역경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우리가 가야할 천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구원을 얻은 주의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갈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각각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내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분쟁과 교회에서의 분쟁이 있는 이유는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도 하나로 모아지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됨은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성향도 다르고 각자의 처지와 환경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 되는 것은 세상의 지혜의 말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교회 중심으로 살아갈 때,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통해 같은 열매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 오신 성도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지니고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설교는 예배와 강단 목차에 따라서 매주 올라옵니다
설교준비자료
고전1:10-31절 본문요약
분열에 대한 소식(10-17)
① 분열의 양상과 배경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각각 파를 자랑하며 교회를 분열로 몰고가고 있었다.
② 일치에의 권고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은 온전하신 분이므로 우리는 분파를 초월해서 하나일 수밖에 없다.
교회의 일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를 둔다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우리는 모두 일치되어야 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
3. 하나님의 지혜(18-31)
① 십자가의 도(18-24)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능력이다.
②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 궁극적인 결실이 없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며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지혜를 드러내셨다.
13절에 바울이 파당을 일으킨 성도들에게 세가지의 질문형식으로 그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의 유기체인데 이것을 왜 나누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주님을 중심으로 너희들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파를 만들어 어떻게 자기의 몸을 나누냐는 것으로 이는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 :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왜 바울을 좆으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했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좋아해도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엄중하게 꾸짖을 수 있는 객관성을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세번째 질문 : “너희가 세례를 받을 때에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 바울, 아볼로 이 사람들이 아무리 휼륭한 주의 종이라 할찌라도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연합에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같이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 , 아볼로, 게바를 따르는 파당을 만드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고전1:10-18 내용의 요약
바울은 글로에의 권속들(노예들이나 해방된 노예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분쟁의 내용은 그들에게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라는 분파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인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분파를 조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울파가 형성된 것은 아마도 그가 고린도 교회를 창설한 창립자였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일 것이고, 아볼로 파는 아볼로가 많은 학식이 있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드로파는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유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특정 음식 삼가 규칙 등을 강조한 베드로의 가르침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파는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인간의 가르침에 얽매일 필요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직접 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바울은 그들에게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짐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간곡히 권고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바울 자신에게 형제이며, 서로들에게도 형제이고, 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분파가 발생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망각했기 때문이고, 교회를 나오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나오기 때문이다. 신자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죄용서를 위해서이다. 때문에 교회에 올 때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의 모임이고,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리운다. 그런데 교회에 분파가 발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하는 행위이고, 주님과의 연합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지금까지 사단의 종으로 살던 것을 예수를 주로 고백하므로 자신을 대속해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누가 세례를 주었느냐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세례 준 사람에 따라서 죄 용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 것이지 결코 바울이나 아볼로 게바라는 사람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만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은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니고 게바도 아니며 오늘날 목사도 아니다(13절).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이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어찌 나뉘었느뇨’(13절)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이시다. 우리가 그 몸이라면 우리는 지체이다. 지체가 서로 싸우면 몸이 찢어져야 한다. 만약 싸운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예수의 몸인 것을 전혀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분쟁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는 것으로 본다. 분쟁은 성도가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분쟁은 해결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스데바나 외에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고 한다(24-26). 그 이유는 바울을 영적인 지도자로 여기고 자신은 바울에게 속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고린도에 보내신 것은 세례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이 목적이라고 한다. 즉 종교 의식, 종교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는 것이 자신이 보냄 받은 목적이라고 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17절). 이것은 복음은 말재주로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는 얘기다. 말의 지혜, 즉 복음을 전하는 자가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거나, 교인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재능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무시하는 인간의 말재주로 그쳐버린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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