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책 리뷰 쓰기가 잘 안되는 거 같아서 '이다혜의 리뷰쓰기' 온라인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의 후속모임에 들어갔다.
'내담리(내 이야기를 담은 리뷰)'라고 이름 붙인 이 모임은 토요일 아침6시에 모인다. 조찬기도회도 아니고, 신박하다. 그러나, 모임 시간 때문에 젊은이들이 들어오긴 어려울 듯.
거기에 제출한 다시 쓴 영화 'Mass' 리뷰
그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영화 매스(Mass)를 보고
영화 제목 '매스 Mass'를 처음 봤을 때는 ‘덩어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어의 맨 앞글자 M을 대문자로 쓰면 가톨릭의 ‘미사’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두 부부의 슬픔, 분노, 절망, 후회가 폭발하는 111분의 마스터피스’. 네이버에 영화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짧은 소개이다. 영화를 보기 전 줄거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영화 역시 저 두 줄만 봤으니, 어떤 사건일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영화는 죄를 고백하고, 성체를 주고 받으며 서로 용서하는 한 편의 미사처럼 전개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달 전에 본 이 영화를 떠올리는 내 마음 속에, 이 작품은 큰 바위 덩어리같은 감동을 남겼다.
영화는 2018년 미국 플로리다 총기사건이 배경이다. 6년이 흐른 뒤 가해자와 피해자의 두 부모가 만나 한 방에서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영화의 전부이다.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같은 곳에서 변함없이 전개되지만,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모르겠다. 인물들이 서로를 겨냥하듯 터뜨리는 분노와 회한은 보는 이의 가슴까지 터지게 만든다. 절망 속에서도 이들은 서로 아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간청한다. 애써 말하고 귀 기울이려 노력하는 이들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그저 ‘피해자’와 ‘가해자’로 남지 않기 위해, 서로의 아이가 의미있다는 걸 복원하기 위해 아이 이야길 들려 달라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한 거예요. 재정상태도 엉망이었어요. 슬픔은 멀게만 느껴졌죠."
"바뀌지 않을 과거에 집착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막상 사건이 터지면 삶 자체가 풍비박산이 난다. 그리고 정말 눈 앞에 떨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느라 슬픔이 오히려 '멀게 느껴진다'. 나 역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일을 수습하는 몇 개월동안 그러했다. 바뀌지 않을 과거에 ‘집착’한다는 표현은 오히려 능동적으로 느껴진다. 남편이 떠났다는 바뀌지 않는 과거를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은 내게 숙명과 같다.
두 시간여의 대화 끝에 불완전하나마 이들은 화해에 가까운 마음을 드러내 보이고, 서로 받아들인다. 가해자 부부가 교회를 나섰을 때 영화는 이대로 끝나려나 보다 했는데, 에피소드가 하나 더 이어진다. 가해자의 어머니가 다시 돌아와 피해자 어머니에게 아이가 총기사고를 실행하기 전날, 방에서 보았던 모습을 들려준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들의 반항적인 태도를 피하고 싶어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그때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취했어야 했던 거 같다고 말한다. 눈물은 고백보다 먼저 눈에 가득 차오른다. 어쩌면 이 두 어머니는 마지막에 덧붙여진 고백을 통해 비로소 용서를 시작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감독 프랜 크랜즈는 불과 1981년 생이다. 미국의 플로리다 총기사고로 정부와 학교가 부담하는 소송과 피해 보상액은 4,000억이 넘어갔다고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소송으로 해결하기에는 사회적 부담이 너무 커지자 정부는 이를 전향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 치료, 또 중심사건으로 등장하는 ‘서로 대화를 시도’하는 제도적 장치다. 회복적 정의를 통해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짜고, 전문가들이 도울 수 있게 했다. 영화 초반에서, 이 만남의 주선자-상담전문가이거나, 사회복지사일 법한 등장인물이 서로가 대화할 장소를 매우 꼼꼼하게 점검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이별할 때에 마음은 슬플지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죽음으로 이별한, 원망과 후회로 멀어진 마음이 슬픔에서 헤어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욕심 같다. 그럼에도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서로 만난다는 것, 죽은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은 세상을 떠난 이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나도 내 남편의 이야기를 남편을 아는 이들만 만나면 쏟아내고 싶다. 내가 그를 되살리고 싶듯, 영화에서 두 부부는 서로의 아이가 되살아나는 작업을 고통과 용기 속에서 해내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