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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家思想의 韓國傳來와 嶺南學統의 淵源考察(허창무).hwp
儒家思想의 韓國傳來와 嶺南學統의 淵源考察 (特講)
許昌武 (社團法人 以會書堂 初代院長)
Ⅰ. 直間接資料-上古時期韓中關係資料
1. 中國儒學의 關聯資料
(1) 三皇五帝時期
1) 三皇(半人半獸) :
*女媧氏(創造) : 蛇面女身, 創造人間,
• 伏羲氏(天皇) : 蛇身人首, 敎漁獵法, 畵八卦, 龍師(伏),
• 神農氏(地皇) : 牛首人身, 敎作農法, 炎帝. 火帝(神),
• 黃帝軒轅氏(人皇) : 漢族始祖,黃帝變龍昇天, 於涿鹿(하북성)與蚩尤一戰,
2) 五帝(古朝鮮) :
• 少昊金川氏 : 鳳凰飛來를 보고 鳥官(少)人皇(黃), <山海經>少昊가 鴨綠江변에서 養顓頊, <楚辭>“白民”에서誕生, <史記>“其姓有熊氏小典之子”
• 顓頊高陽氏 : 名-父珠爵. 弓師, 射師로 有窮氏(子).后羿(曾孫),
• 帝嚳高辛氏 : 黃帝之曾孫, 定都於都亳(박), 帝嚳娶陳鋒氏女, 生放勛; 娶娵訾氏女, 生摯, 帝嚳崩而摯代立, 不善而弟放勛立, 是爲帝堯.
• 帝堯陶唐氏 : 德治, 許由巢父, 禪位制, 二女嫁於舜, 檀君與堯竝立, 推位讓國,有虞陶唐. 康衢歌舞 “立我烝民, 莫匪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 擊壤歌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 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
• 帝舜有虞氏 : 孝治, 唐虞(堯舜)之治를 稱太平聖代之理想社會, 舜東夷之人.
(2) 夏殷周三代時期
1) 夏禹氏(BC2070-1600)
• 黃河氾濫之治水, 鯤禹父子, 九州禹跡(冀州-河北省).(兗州-山東서북.河南동북.河北동남). (靑州-山東省).(徐州-江蘇省).(揚州-安徽省).(荊州-湖北.湖南.四川.貴州).(豫州-河南省). (梁州-黑水說) (雍州-山西省과 陝西省을 가르는 黃河地域), 檀君王儉之長子夫婁助言於禹治水之祕書,
• 夏桀 : 妹(末)喜, 山東劉氏之女,
2) 殷商時期(BC1600-1046)
• 殷墟遺跡(河南省安養), 甲骨文 發掘
• 傾國之色(妲己), 三宮六院七十二妃, 紂王의 酒池肉林, 炮烙之刑, 弔民伐罪, 周發殷湯.
• 殷有三仁焉-(紂王의庶兄)微子去之, (紂王의伯父)箕子爲之奴, (紂王의叔父)比干諫而死.
• 商末 孤竹國(河北省昌黎縣)의 왕자伯夷叔齊, 首陽山, 淸節之士, 成三問 題夷齊廟 : “草木亦霑周雨露, 愧君猶食首陽薇.” 杜門洞七十二賢, 京畿道 개풍군광덕면 서록 1783(정조7)년 王命으로 節義를 表象코자 開城 成均館 表節祠를 세워 配享하게 하였다.
• BC1100(武王13)년 武王封箕子於朝鮮, <微子世家>洪範九疇, <漢書>(地理志燕條)犯禁八條(예의와 문화), 箕子東來說, 箕子廟(평양), 箕子碑文(변계량), 箕子田(周尺).
3) 周代(BC1046-476) 570년간
-西周(BC1046-770) 276년간, 安養에서 鎬京東遷까지
• 周文王 : 본명은 姬昌으로 은나라 말기의 諸侯이자 周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周武王 姬發이 殷을 멸망시킨 후에 그를 周文王으로 追尊하였다. 저서로 <周易>이 있다.
• 周武王 : 고대 샤머니즘의 사고를 가진 동이족을 축출하고, 華夏族이 중국의 최초로 장악한 중대한 사건이다. 중국문명의 시작이라는 사가도 있다. 弔民伐罪, 周發殷湯. 都邑華夏, 東西二京. 背邙面洛, 浮渭據涇.
• 周公 : 주공의 이름은 旦이며, 文王의 넷째 아들인데, 둘째 형이 周武王 姬發이다. 후일 魯國에 諸侯로 封해짐. 不禪讓參攝政, 儒敎의 創始者, 金縢之事,
• 姜太公(呂尙), 太公望, 磻溪(周)伊尹(殷), 佐時阿衡.
• 成王 姬誦은 武王의 아들이다. 殷나라 왕족인 武庚祿父와 무왕의 동생인 管叔.蔡叔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東夷로 遠征했다고 한다.
• 周幽王이 褒姒를 만난후부터 驪山山麓에서 殺害되기까지 各種虐政이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실례가 烽火놀이임, 폐위되었던 그의 아들 宜臼가 태자로 복위되어 平王이 되었으나 犬戎의 빈번한 침입으로 도읍지를 鎬京(서안)에서 洛陽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결국 西周시대는 끝이 났다.
-東周(770-476) 294년간, 鎬京(西安)에서 洛陽
(3) 春秋戰國(BC475-221)
1) 五霸王(周諸侯國)
• 齊桓公 : BC685년에 君主로 卽位, 管仲宰相, 甄에서 諸侯會盟, 尊王攘夷, 桓公匡合, 濟弱扶傾(墨家의 논리인 濟弱, 兵家의 논리인 扶傾), 첫 번째 霸主.
• 晉文公 : BC636년에 卽位, 趙衰趙盾父子宰相, 楚莊王과의 約束지킴, 두 번째 霸主, 晉楚更覇,
• 楚莊王 : BC613 卽位, 孫叔敖(蔿敖),
• 秦穆公 : BC650-621년까지 재위하면서, 百里奚.蹇叔.由余.孟明視.西乞朮.白乙丙 등을 등용, 秦晉會盟實現, 覇西戎.
• 宋襄公 : 재위19년 BC639년 초와 녹상에서 회맹, 맹주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宋桓公의 아들이며 宋成公의 父親이다. 宋襄之仁,
◎ 秦穆公과 宋襄公 대신 吳夫差와 越句踐을 交替하기도 한다. “毛施淑姿, 工嚬姸笑.” 毛는 春秋時代 吳나라의 一色으로 越王句踐의 愛妾인데, 毛嬙 도는 毛叱이라고 한다. 施는 越나라 일색 西施로 范蠡가 吳왕에게 바쳤는데, 吳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범려가 다시 데려가 조각배에 싣고 吳湖에서 노닐며 돌아오지 않았고 함. 西施가 배가 아파 얼굴을 찡그리는데, 마을의 못생긴 여자들이 보고 그것을 아름답게 여겨 얼굴 찡그리는 것을 흉내내는 것이 유행하여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전해 짐.
2) 諸子百家
• 儒家(孔孟荀)
• 道家(老莊)
• 法家(商鞅)
• 墨家(墨子)
• 名家(公孫龍)
• 兵家(孫武)
• 陰陽家(鄒衍)
• 縱橫家(蘇秦.張儀)
(4) 秦時期(BC221-206)
• 百郡秦幷 : 秦始皇, 有天下, 廢封建之制, 置郡三十六, 歷代增益, 乃至百郡, 而置郡始於秦, 故曰秦幷. 封建制에서 郡縣制로 (守-丞-尉(군)-監御史), 李斯-荀子之學生, 六國(韓趙魏楚燕齊)平定, 2100년중 최초로 始皇帝呼稱, 黔首-黎首,
• 漆書壁經 : 漢魯恭王, 修孔子廟, 壞古牆壁, 得尙書, 以古篆, 畵漆書於竹簡者也. 得於孔 壁, 故曰壁書. 壁中書, 古文尙書. 自稱殷人, 繼往聖開來學(朱子),
• 焚書坑儒
• 扶蘇反對
• 度量衡標準化
• 馳道整備
• 泰山封禪
• 阿房宮 : 東西로 500步(650m) 南北으로 50丈(115m), 楚霸王(項羽)放火, 而三月不滅,
• 求不死藥
* 東洋易의 辨證法과 定言三段論法을 比較할 必要性, 예컨대 “인간은 모두 죽은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소전제)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를 易의 而的인 論理와 비교할 수 있을 때 동양적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5) 先秦以前時期
* 孔子以前以<中>言心,
• 孔子 : 以仁言心, 以天命言性, 夢見周公,
• 子思 : 中庸以誠言性,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自誠明, 謂之性”
• 孟子 ; 以不動心言心, 以善言性,
• 荀子 : 以思想主體言心 “心者, 形之君也, 而神明之主也, 出令而無所受令.” “天性有欲, 心爲節制.” 節欲. 性僞之界說 : “生之爲性”, “學之爲僞”-可學而能, 可事而成之在人者, 謂之僞.
• 告子 : 以生言性, “生之謂性” “食色性也” “性無善無不善也”
(6) 秦時期(BC221-206)
• 百郡秦幷 : 秦始皇, 有天下, 廢封建之制, 置郡三十六, 歷代增益, 乃至百郡, 而置郡始於秦, 故曰秦幷. 封建制에서 郡縣制로 (守-丞-尉(군)-監御史), 李斯-荀子之學生, 六國(韓趙魏楚燕齊)平定, 2100년중 최초로 始皇帝呼稱, 黔首-黎首,
• 漆書壁經 : 漢魯恭王, 修孔子廟, 壞古牆壁, 得尙書, 以古篆, 畵漆書於竹簡者也. 得於孔壁, 故曰壁書. 壁中書, 古文尙書. 自稱殷人, 繼往聖開來學(朱子),
• 焚書坑儒
• 扶蘇反對
• 度量衡標準化
• 馳道整備
• 泰山封禪
• 阿房宮 : 東西로 500步(650m) 南北으로 50丈(115m), 楚霸王(項羽)放火, 而三月不滅,
• 求不死藥
* 東洋易의 辨證法과 定言三段論法을 比較할 必要性, 예컨대 “인간은 모두 죽은다.(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소전제)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를 易의 而的인 論理와 비교할 수 있을 때 동양적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7) 兩漢時期
• 賈誼 : BC200-168, 漢高祖7年生, 文帝12年卒, 享年33歲. 河南 洛陽人, 그의 나이 20세 때 文帝에게 拔擢되어 律令.管制.禮樂 등 국가적 改革課題에 대한 上疏文을 올려 전로가 蒼蒼하였으나 周勃등 高官들의 猜忌로 후일 귀양기에 오르게 되었고, 汨羅水를 지나다가 신세타령으로 “弔屈原賦”를 지었는데 名文章, 저서 <新書>10권 안에 過秦論이 전해지고 있다. 過秦論의 전체 문장은 후대에 와서 세편으로 나뉘었다. 上篇에서는 春秋戰國시대부터 秦나라가 中國을 統一하가까지의 歷史와 秦나라 滅亡의 주요 原因을 總括的으로 분석했다. 中篇에서는 統一후 秦始皇의 잘못된 路線과 政策을 批判하고, 뒤를 이은 2세 胡亥의 暴惡無道한 政治로 인해 民心이 진나라 皇室에 철저하게 등을 돌렸음을 논했다. 下篇에서는 百姓들의 蜂起와 각지 群雄들의 叛亂으로 皇室은 무너지고 새로 登極한 君主 子嬰은 秦나라를 일으켜 세울 만한 능력이 없었음을 설명했다.
賈誼는 이 글에서 아무리 强大한 帝國이라 할지라도 苛酷한 刑罰과 暴虐한 政治로는 權力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過秦論은 民心을 얻지 못한 權力은 百姓들의 抵抗과 叛亂 앞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警告한 글이다.
• 董仲舒 : 河北廣川人, 春秋專攻, 以可能性言性, 黃老學, 地下水와 地上水, 無爲, 道家術士, 儒家(주류학파), 禮義와 道德, 漢武帝(BC141), 竇太后반대, 敎學方式(선후배), 漢景帝시에 博士職位를 받아 비로소 出仕, 漢武帝시 <天人三策>이 채택됨, 五經博士를 두고 太學建立, 春秋大義, 天人感應說, 陰陽理論을 儒敎에 借用하여 예컨대 五方.五色.五德을 결합, <春秋繁露>, <董子文集>, <春秋公羊傳>을 연구한 公羊學博士,
(8) 宋代理學
中國 古代의 三皇五帝로부터 宋代 儒學者로 이어지는 儒學의 道脈을 시대적으로 고찰한 <聖賢道學淵源>이란 筆寫本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中國三代로부터 전해진다고 하는 <黃帝丹書>에 “敬虔함이 怠慢함을 이기면 吉하고, 怠慢함이 敬虔함을 이기면 滅하며, 義로움이 慾心을 이기면 從하고 慾心이 의로움을 이기면 凶하다”고 한 말을 太初의 道原으로 놓고, 五帝이후 “하늘의 曆數가 네 몸 자체에 있으니, 그 中을 잡아라.”고 한 堯帝의 말을 계승하여 道統이 이어져 斯文의 뿌리가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三皇五帝 이후 孔子.顏淵.曾子.子思.孟子 등 先秦儒學이래 秦漢唐 등 약 300년의 空白期를 거쳐 비로소 宋代의 周敦頤.程顥.程頤.邵雍.朱熹 등으로 이어지는 儒學의 道統淵源을 지적하였다. 끝으로 <答湖南諸友書>에서 자신이 한말을 인용, <中庸>과 <大學>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어 儒學의 中心思想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도 필자의 견해를 동의하지만 여기서는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張載.周敦頤.二程.朱熹로 연결하였음을 밝혀 둔다.
• 張載 : 陝西省 西安 橫渠鎭人, 故曰, 橫渠先生. 二程之外叔, 與二程論周易, 儒佛道涉獵. <正蒙>著述, 氣一元論(宇宙萬物은 氣之集散에 따라 生成變化하는 것인데 이 氣의 本體는 太虛이며 太虛는 無形이라고 설파, 즉 宇宙萬物은 浮沈.昇降.動靜 등 矛盾的인 對立運動으로 生成된 것이다. 반대로 氣가 흩어지면 無形無感이어서 사람이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太虛 즉 온전한 靜의 狀態이므로 萬物의 根源이 된다는 것이다.) 以性與知覺言心.
• 周敦頤(1017-10730 : 무숙, 濂溪先生, 여산기슭의 濂溪書堂에 은거하면서 太極圖說을 지어 道學 즉 性理學의 理論을 마련하였다. 南宋의 朱熹가 그를 道學의 開祖라고 칭함.
“無極而太極”, “易有太極, 是生兩儀.”(周易繫辭傳), “太極謂天地未分前之元氣”(孔穎達의 周易正義), “入無窮之門, 以遊無極之野.”(莊子), “無形而有理”(朱子), “一陰一陽之謂道”(周易),
• 二程 : 明道, 伊川, 以識仁言心,
• 朱熹 : 以性言心, 以理言性.
Ⅱ. 韓國 儒家思想의 受容과 變遷
1. 三國時代
高句麗는 小獸林王 2년(372)에 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儒學이 서기 372년보다 훨씬 이전에 수입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儒學思想은 그 이전 漢四郡(BC 108년) 이래로 漢代의 文物制度와 學術思想을 전반적으로 인식했다고 볼 것이다. 王景은 樂浪사람으로 『周易』에 능통하였으며 天文과 術數를 잘 알았고 다른 技藝도 많았으므로, 한나라 明帝 때에 治水에 많은 공을 세워 노강태수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벌써 樂浪時代만 하더라도 中國古典에 능통한 학자들이 많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 衛滿朝鮮이나 『魏略』에 보이는 燕昭王 29년(B.C. 283) 조선 후왕과 燕나라와의 국제외교관계 속에 周禮에 의한 儒敎思想이 엿보인다. 高句麗인들은 儒學의 五經과 三史, 『三國志』 등을 읽었으며, 曇徵은 日本에 건너가 명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日本書紀』에 보면 五經에 능통하고 繪畵에 능했으며, 종이와 먹과 색채와 맷돌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五經을 중심으로 하는 儒學思想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新羅는 善德女王 9년(640)에 唐太宗이 國學을 장려하기 위하여 國學을 크게 增築하고 海內外의 留學生을 모집할 때 유학생을 보내기는 하였으나 國學設立은 비교적 늦어서 神文王 2년(682)에야 실시되었다. 國學의 敎科內容은 『三國史記』<國學條>에 자세히 나온다. 그 내용은 주로 儒敎 經傳이었으며, 특히 『論語』와 『孝經』이 각급 학생의 필수 敎養科目이었다고 한다. 新羅의 眞興王은 三國統一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서 그 시대에 花郞들이 생겨났고, 四方의 國境을 확장하고 巡狩碑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보면 고신도적 요소가 있지만 그 중에는 특별히 『論語』에 있는 "修己以安百姓"과 같은 儒敎의 政治哲學과 그 用語가 무수히 나온다.
백제는 학교 설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이왕 62년(285)에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 『주역』, 『산해경』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皇太子를 교육하고 文字와 儒敎思想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한 사실로 볼 때 신라나 고구려보다 앞서서 설치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유학사(儒學史)에 있어서 三國時代에는 中國의 學制나 法制를 수입하여 이를 模倣하였으며 政治思想이나 敎育思想 등 제반 社會思想에 응용하였다. 忠孝精神은 國民倫理에, 臨戰無退의 忠思想은 병역의 윤리에 응용하였으며, 심지어는 토지개혁의 제도와 정신까지도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新羅 聖德王 21년 8월조에 "비로소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주었다."고 한 것이 그 예이다. 맹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으며 토지제도의 불균형은 빈부를 고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高句麗 嬰陽王 때 <新集>이이라는 歷史冊을 저술한 太學博士 李文眞과 乙巴素가 있고, 百濟 近肖古王 때 <書記>를 남긴 博士 高興이 있고, 新羅 때 <國史>를 편찬한 居柒夫와 薛聰.强首.崔致遠 등이 있다.
2. 麗末鮮初
高麗 末葉에서 朝鮮 初期는 性理學 導入時期이다. 高麗時代의 儒學은 唐나라 學問的 영향을 받아 儒佛道 三敎가 交涉하는 時代로서 한 사람이 삼교에 대한 지식과 조예가 깊었다고 하겠다. 海東孔子라고 일컬어 질 만큼 순수 儒學者로 알려진 崔沖은 高僧들의 비문을 여러번 쓴 일이 있고, 金富軾도 고려의 大覺國師碑를 撰하였다. 圃隱 鄭夢周의 詩文에도 佛敎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으며, 權近의 『周易淺見錄』은 佛敎와 儒敎를 比較하여 독특한 주석을 하고 있다. 이같이 당시의 학자들은 儒學에 관한 造詣는 물론 佛敎와 道敎에 관한 造詣도 상당히 깊었다.
高麗 成宗 때의 유학자인 崔承老는 그의 28조 上疏文 가운데 儒佛道 삼교의 特徵을 들어 말하기를, 이 삼교는 각각 맡은 바 역할이 있으니 이를 행함에 있어 하나로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佛敎를 행하는 것은 修身하는 根本이요, 儒敎를 행하는 것은 治國하는 根源이다. 修身은 來世를 위하는 것이요, 治國하는 것은 現世를 위한 것이라 하였다. 崔承老가 상소문을 작성할 때 응용된 서책은 오경과 『論語』인데, 得中論을 강조하여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알맞은 中庸思想을 논술하였다.
三國時期부터 高麗末까지의 代表的인 學者로 薛聰, 崔致遠, 安珦, 李齊賢, 李穡, 鄭夢周, 權近, 鄭道傳 등을 열거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는 大成殿에 配享되었다. 대체로 이 무렵의 學風은 儒學思想 자체의 발달이 未熟하여 경전을 잘 이해하고 『史記』를 잘 알아서 政治上에 運用할 수 있는 官吏가 되는 일과 詩賦와 文章을 잘 하는 文仁이 되는 일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學風은 중국의 漢唐風과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弘益人間의 建國理念은 民族的 特徵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생각할 때 漢唐學風이라고 할지라도 民族的인 方向으로의 기반을 잃지 않으면서 朱子學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말의 鄭夢周의 學行은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말에 이르러 佛敎가 墮落하여 社會가 頹廢해지자 國民精神의 振作이 필요하게 되었다. 朝鮮建國과 더불어 國民精神의 진작을 기하여 排佛崇儒 政策을 確立하자 비로소 朱子學的 입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鄭道傳의 『佛氏雜辨』과 같이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이 제 일차로 진행되고, 그 다음에는 李彦迪의 <與忘機堂書>에서와 같이 老莊思想을 배척하게 되었다. 李滉은 李彦迪의 <與忘機堂書>에서 老佛을 排斥한 理論에 感歎하고 "吾道의 本原을 闡明하고 異端의 邪說을 물리쳤다."고 李彦迪을 높이 평가하여 찬양하기도 하였다. 朝鮮朝의 建國이 끝난 뒤로는 思想界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른바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勳舊派와 고려에 충의를 지키고자 했던 節義派가 그것이다. 이 때부터 不義의 문제를 哲學에 묻는 學問硏究의 방향이 일기 시작하였다. 朝鮮初期는 朱子學을 익혀가면서 性理學 全盛期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 鄭夢周 이래로 이어온 吉再, 金宗直, 鄭汝昌, 金宏弼의 學脈을 이어 趙光祖에서 대성한 道學思想은 義理를 높이고 權勢를 천하게 보며 道心을 높이고 人慾을 누루는 綱常을 세우려는 精神이다.
이 道學精神을 繼承하여 理論的으로 分析하고 體系化한 것이 다름 아닌 性理學의 理論이다. 高麗에서 朝鮮으로 바뀌는 政治變動 속에서 忠孝와 義理가 문제 안 될 수 없고, 金宗直의 사史草나 死六臣과 같은 史獄의 일은 韓國儒學의 發展過程이 思想에 反影된 것이다. 趙光祖가 急進派로 지목되어 保守派로부터 제거당하는 비극은 유학의 사정으로 볼 때 道學의 試鍊期요, 앞으로의 발전을 잉태하는 시기로 여겨진다. 사초나 사육신 문제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의리와 충효가 얽혀 있고 趙光祖의 己卯士禍 이면에는 道學의 至治로 太平聖代를 이룩하고자 하는 格君의 강인한 인간의지가 스며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人間觀의 政治的 實現이 士禍로 挫折되었을 때 學問的인 硏究로 그 方向이 轉換되어 갔음은 사리의 당연한 귀추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性理學은 中國과는 달리 韓國的인 發展을 거듭하게 되었고 드디어 다음에 그 全盛期를 초래하게 된다.
3. 朝鮮中期
朝鮮中期는 性理學 隆盛期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學者들은 徐敬德, 李彦迪, 李滉, 奇大升, 李珥, 成渾 등을 위시해서 曺植, 李恒, 金麟厚, 許穆, 張顯光 등을 들 수 있다. 李彦迪은 無極太極 문제를 논한 韓國 最初의 學者요, 徐敬德은 中國의 氣論을 도입한 사람이요, 李滉은 朱子學의 正統을 계승하여 互發說을 주장한 학자요, 李珥는 한국 性理學을 定立하여 一途說을 주창한 학자이다. 이 性理學 絶頂期의 이론은 互發說과 一途說로 要約된다.
韓國 性理學이 中國 性理學과 다른 점은 客觀的·宇宙論的 領域으로부터 主體的 人性論으로 문제를 보다 절실한 內面的 主體에서 體得하려고 하는 것이 中國 性理學 보다 일보 전진한 영역으로 그 방향을 돌려놓은 것이라 하겠다. 人間의 誠實性과 實存性을 통하여 眞理를 主體的으로 把握하려는 것이 四端七情의 心性論이다.
退溪는 理를 극히 尊重하여 絶對的인 것으로 높이는 동시에 天理는 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요, 아무 것에도 명령받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價値觀의 極致를 확립하였다. 栗谷의 理氣論은 二元的으로 분리할 수 없는 현실을 중시하여 理를 떠나서 氣가 存在할 수 없고 氣를 떠나서 理도 存在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理氣를 分離할 수 없다고 해서 純粹한 理와 雜駁한 氣를 混沌할 수는 없다. 理와 氣가 分離되지 않으므로 氣가 흐리면 理도 흐리게 보이고 氣가 맑으면 理도 맑게 보인다. 理가 淸濁이 있는 것은 理 自體에서 온 것이 아니라 氣의 淸濁에 따라 理가 淸하게도 濁하게도 보이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理가 흐릴까 염려할 것이 아니라 흐린 氣質을 밝히는 데 근본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理의 源泉도 하나 뿐이요, 氣의 源泉도 하나 뿐이라고 하였다. 理氣가 分離되지 않는 理氣의 一元處, 즉 理氣之妙는 보기도 어렵고 보았다고 해도 설명하기 어려운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栗谷의 문제는 氣의 優位說이 아니라 理氣之妙處가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라 하였다.
栗谷은 抽象的 原理를 現實에 適用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주어진 現實을 받아들여 보다 진실한 방향으로 이끌어 올려 理想的 狀態로 昇化시켜 가는 논리이다. 이 內面的 心性論이 後期에 이르러 義理學派, 節義派로 이행되어 한국 최근세사에 있어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이에 저항하는 節義派, 實踐派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朱子學에서 道學思想, 性理思想, 義理思想, 義兵情神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겪은 후에 우리는 內的인 誠實性만 가지고는 現實的 國際社會에 生存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어 내실과 더불어 外實을 얻어 國力을 培養하고 實質을 崇尙하는 方向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4. 朝鮮後期
조선후기의 儒學은 實學思想을 중심으로 한다. 儒學이 哲學的으로 深化된 것은 性理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後期 性理學者들은 성리학의 眞髓를 體得하여 具體的인 現實에서 供獻하기보다 理論的으로 抽象化하여 現實을 度外視한 空理空論을 일삼아 마침내 學派와 政治的 黨派가 混線을 일으켜 黨爭의 道具로써 墮落하는 傾向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건전한 국민 사상과 사회적 발전이 침체하여 민생이 점점 어렵게 됨을 바로 잡고자 일어난 것이 실사實事求是의 學風이다. 空虛한 理論을 反對하여 現實的으로 具體的 實際事實에 나아가 事物을 硏究하며, 人間과 社會를 健實하게 育成하려는 實學은 人間의 精神科學的 理論을 政治·經濟·社會 모든 부문에 있어 實事求是의 입장에서 究明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經典硏究에 있어서도 確實한 考證에 의하여 眞正한 意味를 理解해야 하며 따라서 孔孟의 眞意를 밝혀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宋代의 이론 儒學을 反省하여 현실사회에 알맞는 文物制度와 社會文化政策을 건전하게 實現하고자 하는데 그 特徵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향의 모색은 성리학의 말기적 폐단을 구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혁혁한 업적을 거두었다. 柳馨遠의 『磻溪隨錄』, 李瀷의 『星湖僿說』, 丁若鏞의 『經世遺表』, 『牧民心書)』 등은 經世濟民의 구체적 經濟政策과 社會政策을 논의하였으며, 科學的인 學問硏究와 經驗的인 事實을 중히 여긴 막대한 저술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성리학의 남은 폐해를 쇄신하여 새로운 사회건설을 하고자 淸朝의 新文物을 수입하여 실천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 이 實學派의 업적이며 공헌이라고 하겠다. 타락된 선비들의 정신적 청량제가 될 수 있는 문학작품으로서 朴趾源의 『兩班傳』·『虎叱文』 등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實學派들은 淸朝의 文物을 받아들여 배우기에 바빴으며, 당시 중국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청조의 문화를 구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朴趾源의 『熱河日記』라든가 朴齊家의 『北學議』 등은 淸朝文物을 소개하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儒學을 實用主義思想이나 物質主義 經濟理論으로만 단정한다면 정당한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송대나 조선 중기의 성리학적 폐단을 시정하는 의미에서 실학이 대두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지세라 하겠지만 근래에 실학사상을 단순한 경제학이나 사회학과 같이 여기는 것은 다시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Ⅲ. 嶺南學脈과 近畿學風
1. 嶺南學脈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嶺學派)·退溪學派·南冥學派·旅軒學派의 총칭.
<개설> : 어떤 사상의 발달이 원숙하고 학자들의 사유의 심도가 깊어지면, 사리(事理)에 대한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단하는 능력이 자생하고 나아가 견해를 같이하는 학문의 유파가 형성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에 정주학(程朱學)의 학풍이 일면서부터 학맥(學脈)이 서서히 생기게 되었다.
영남 지방은 지리가 아름답고, 인심이 순후하고 전통적으로 학문을 좋아해 예로부터 장상(將相)·공경(公卿)·문장·덕행·절의로 유명한 이들과 선도(仙道)·불도(佛道)·도교(道敎)에 정통한 이들이 많이 나와서 세인들이 영남을 인재의 고장이라 불러 왔다. 그러한 탓인지 영남 지방에는 조선조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학맥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 초기의 김종직(金宗直)을 영수로 하는 영학파, 중기의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 이황(李滉)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 그리고 장현광(張顯光)을 주축으로 하는 여헌학파라 하겠다.
<내용> : 영남학파의 학맥은 정몽주(鄭夢周)에서 비롯해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를 거쳐 김종직에로 계승된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학으로 유명해 당대 유학의 조종이 되었다. 그는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저명한 학자로는 현풍의 김굉필(金宏弼)·곽승화(郭承華), 함양의 정여창(鄭汝昌)·유호인(兪好仁)·표연말(表沿沫), 경주의 손중돈(孫仲暾), 선산의 강백진(康伯珍), 성주의 김맹성(金孟性), 안동의 이종준(李宗準), 청도의 김일손(金馹孫), 밀양의 박한주(朴漢柱) 등이다.
이 학파의 특징은 조선 초기의 학문적 경향이 그러하였듯이 여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요소 중에서 한편으로는 주로 실제적인 정치·경제·법률·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을 혼합한 것이었다.
(1) 嶺南右派
이 학파에서 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은 특히 도학에 정진하여 후세 한국 성리학이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토양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정여창은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해 그 심오한 뜻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가장 치중하였고, 궁리(窮理)함을 위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중용』의 주자장구(朱子章句) 중에서 ‘기이성형, 이역부언(氣以成形, 理亦賦焉)’의 설을 따르지 않고 ‘안유후기지이호(安有後氣之理乎)’라 하여 기(氣)에 뒤지는 이(理)가 있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뒤에 퇴계학파에서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하는 단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김굉필은 존양(存養)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는 수단으로는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학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었다. 그의 학통은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에게로 계승되었고, 조광조의 학통은 다시 성수침(成守琛)·성혼(成渾) 부자에게 이어졌으며, 김안국의 학통은 김인후(金麟厚)에게 전수되었다.
또 이언적(李彦迪)의 스승이 김종직의 제자 손중돈이었으니 동방의 사현(四賢: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은 이 영학파의 이학자(理學者)와 그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이 영학파는 연산조에 이르러 훈구파와의 반목 갈등으로 위세가 침몰되었는데, 학술·문장·절의로 정계와 재야에서 대활약을 했던 당대의 유일한 학파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영남우도(嶺南右道)를 중심으로 조식의 학식과 덕행을 존숭하고 추종하는 학파가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를 남명학파라 하였다. 이 학파의 저명한 인물로는 오건(吳健)·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김효원(金孝元)·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정탁(鄭琢)·하항(河沆)·하진(河溍) 등을 들 수 있다.
이 학파의 특징은 반궁체험(反窮體驗)·지경거의(持敬居義)·충신진덕(忠信進德)·독행수도(篤行修道)라 하겠다. 천길 절벽 같은 기상을 가진 조식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힘을 쏟아 공리공담을 배척하고 실천궁행함으로써 학문과 덕행을 쌓아 갔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의 학덕에 영향을 받아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하고 추종하였다.
오건(吳健)은 자질이 순후하고 기상이 홍대하며 의연하고 효행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학식에 있어서는 『대학』과 『중용』에 밝아 이황도 경탄하였다. 최영경의 청백하고 의로운 절개는 세인을 감복시켰다. 그는 의리가 아니면 한 개의 터럭도 취하지 않았다.
김우옹(金宇顒)은 당대 제일의 강관(講官)으로 알려졌으며 ‘사무사(思無邪)’·‘무불경(毋不敬)’·‘무자기(毋自欺)’·‘신기독(愼其獨)’의 네 구를 진학의 지표로 삼았다. 정구는 경학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공이 크며, 정탁은 경사(經史)·천문·지리·병가에 정통하였다. 이들 중에서 김우옹·정구·정탁은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했던 학자들이다.
(2) 嶺南左派
같은 시기에 영남 좌도(嶺南左道)에서는 이황의 덕행을 숭모하고 그의 학문 사상을 추종하는 유파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퇴계학파라 하였다. 특히, 이 학파는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영남학파로서 이황에게 수학해 도학·문장·덕행·사업으로 일세의 공명이 된 자가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저명한 인물을 약술하면 조목(趙穆)·기대승(奇大升)·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남치리(南致利)·이덕홍(李德弘)·황준량(黃俊良)·권호문(權好文)·김륵(金玏)·홍가신(洪可臣)·정사성(鄭士誠)·김사원(金士元)·유중엄(柳仲淹)·조호맹(曺好孟)·박광전(朴光前) 등의 퇴계문도들과 정경세(鄭經世)·허목(許穆)·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김황(金榥) 등의 사숙들을 들 수 있다.
이 학파는 이황(李滉)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라 칭하고 그의 철학 사상 중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사칠이기분대설(四七理氣分對說), 그리고 물격설(物格說)을 지지·옹호하다가 마침내는 주리설로 발전하였다. 이황의 철학은 원래 주희(朱熹)의 이기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 주희에 따르면,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不相離), 또한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不相雜)이다. 그런데 이황은 이와 기를 서로 섞일 수 없는 것, 다시 말하면 이물(二物)이라는 견지에서 이는 이일 뿐 결코 기가 아니며, 기는 기일 뿐 결코 이가 아니라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理自理, 氣自氣).
주희(朱熹)는 이와 기의 작용에 있어서 기에는 응결 조작 능력이 있지만 이에는 정의조작(情意造作)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기에 똑같이 실질적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이를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사물(死物)로 보지 않고, 태극에 동정(動靜)이 있다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황의 이발이동(理發理動)의 관념을 보게 된다.
이황은 또 가치론상으로 이에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기에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간에 가치의 차등을 두었다. 때문에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서 “사단(四端: 惻隱·羞惡·辭讓·是非)은 이가 발하면서 기가 따르는 것이고(理發而氣隨之), 칠정(七情: 喜怒哀懼愛惡欲)은 기가 발하면서 이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라 단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이(李珥)는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사칠이기분대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의 설에 의하면, 이와 기는 이물(二物)도 아니요 일물(一物)도 아니요, 다만 하나이면서 둘이요(一而二) 둘이면서 하나인 것(二而一)으로서 일체양면적(一體兩面的) 관계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 또,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는 까닭은 이이므로, 기발이승(氣發理乘)은 가하나 이발기수(理發氣隨)는 불가하다고 이를 부인하였다.
조선 초기 김종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영남학파는 당대의 사림을 대표한 학파로서 학계·정계·문학 분야에서 혁혁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때는 훈구파와의 반목으로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 도학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한 갈래는 조광조를 통해 기호 지방으로 전해졌고, 다른 한 갈래는 이언적을 거쳐 이황·조식으로 전승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황은 영남좌도에서, 그리고 조식은 영남우도에서 영남학파의 영수로 추앙 받아 많은 문도를 거느리면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이황이 조식을 경우(敬友)로 여겼듯이 조식도 이황을 외우(畏友)로 대해 조식의 문도들이 이황의 문하에 출입했고, 이황의 문도들이 조식의 문도와 교유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한때 정인홍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부덕의 소치로 묻어 버리고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화합하여 친목을 더해 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식학파는 그 학맥이 쇠잔해지고 퇴계학파는 그 학맥이 날로 성해지면서 우도·좌도의 구별이 흐려지고 영남의 학자들은 퇴계학파로 흡수되어 급기야는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대명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영남학파를 계승하면서 성리학상으로 계승·발전시킨 학맥은 김성일(金誠一)의 문맥을 꼽을 수 있다.
학파가 한때 정치적 이해관계에 연루되어 당색으로 변신하면서 사회에 해악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영남학파의 순정 철학이 한국 근대의 철학 사상사에 이룩해 놓은 업적은 높고 깊다고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남학파 [嶺南學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회서당의 학적 연원과 학풍은 설총과 최치원까지 올라간다.
● 薛 聰
元曉와 瑤石公主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면서 원효 버금가는 聖人으로 推仰 받는 사람이 薛聰이다. 아버지가 佛敎였다면 아들은 儒敎에서 巨木이다. 신라의 두 축 곧 불교와 유교가 이 부자에 의해 세워지지만, 서로가 그리워했을 뿐, 지나간 자리의 자취를 밟지 못한다. 설총이 남긴 글 <花王戒>를 통해 그의 사상에 조금이나마 접근해 볼 뿐이다. 특히 그는 吏讀를 集大成한 분이다. 慶北 慶山市 三聖山하에 薛聰을 제향하는 道東書院(齋)가 있다. 1022(현종13)년 고려 현종은 그를 弘儒侯로 추증하였다. <三國遺事>에 “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이라는 글귀가 있다. 花王戒는 풍왕서라는 이름으로 <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 崔致遠
868 12세 唐留學, 본관:慶州, 六頭品, 翰林學士, 文昌侯, <桂苑筆耕>.<四山碑銘>.<討黃巢檄文>.<海印寺供養塔記文>.<鸞郞碑序文>등이다, 鸞郞碑序文曰 :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但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 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行,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由此可見, 風流道, 就是新羅王朝吸收當時外來思想而成的弘益思想的再發展形態.
<賓貢科合格>(18세).漂水縣尉.館驛巡官.從事官.都統巡官(緋銀.紫金魚袋하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瑞書監事.大山郡(태인)·天嶺郡(함양)·富城郡(서산)太守.賀正使.阿飡.內史令.
著述 : 五言七言今體詩>100수.<雜詩賦>30수.中山覆簣集.大崇福寺碑文.時務策.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帝王年代曆).謝不許北國居上表.上太師侍中狀.東文選.智證大師碑文.法藏和尙傳.浮石尊者傳.釋順應傳).釋利貞傳.法藏和尙傳).浮石尊者傳).浮石尊者傳).
祭享 : 武城書院(전북정읍).西嶽書院(경주).柏淵書院(함양).孤雲影堂(영평).雞林寺(대구).
● 晦軒 安 珦
일명 : 安裕, 1243-1306, 文成, 高麗後期 文臣學者, 本貫 順興, 출생지 慶北興州, 1542(중종37)년 周世鵬이 榮州郡 順興面 內竹里에 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朱子의 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白雲洞書院을 세웠다. 1549(명종4)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紹修書院이라는 明宗親筆의 사액이 내려졌다. 또한 1643(인조21)년 長湍의 儒生들이 鳳岑山下에 臨江書院을 세웠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 晦齋 李彦迪
1491(성종22)-1553(명종8), 驪州人, 紫溪翁, 諡文元, 孫仲墩에게 修學, 金 安老의 再登用을 反對하다가 官職에서 쫓겨나 紫玉山하에 獨樂堂을 짓고 學問에 沒頭. 후일 草堂 許曄이 玉山書院記를 지었음. 27세때 嶺南學者인 孫叔暾과 曺漢輔 간에 벌어진 無極太極論爭에 참여, 主理的 입장에서 그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經歷...文科及第(1514),吏曹正郞吏.司憲府掌令.密陽府使을 거쳐 司諫院司諫(1530), 吏曹判書.禮曹判書.刑曹判書.左贊成(1545).
事件...乙巳士禍,良才驛壁書事件(1545)년 尹元衡등이 乙巳士禍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명종2)년에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제로 流配生活, 그 기간에 상당한 著述을 남겼다.
影向...조선시대性理學의定立에先驅的인人物로서 性理學의 方向과 性格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朱熹의 主理論的 立場으로 確立하여 退溪에게 전해 주었다.
<著述>求仁錄, 一綱十目疏, 進修八條, 五箴, 大學章句補遺, 中庸九經衍義, 奉先雜儀, 續大學或問,晦齋集. 文廟配享.
*帝王學=大學+中庸(王心+天道=配天+敬天)
● 退溪 李 滉 : 1501(연산군7)-1570(선조3)년.
본관은 眞寶. 자는 景浩, 호는 退陶·陶叟.
경북 禮安縣 溫溪里(도산면온혜리)에서 左贊成 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朴氏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숙부 李堣)로부터 『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金麟厚와 교유하고,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金麟厚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成均館司成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乙巳士禍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兎溪의 東巖에 養眞庵을 얽어서 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丹陽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忠淸監司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豐基郡守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朱子學의 선구자 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周世鵬이 창설한 白雲洞書院에 扁額·書籍·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紹修書院이다.
1년 후 退任하고, 어지러운 政界를 피해 退溪의 서쪽에 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求道生活에 침잠하다가, 1552년 成均館大司成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弘文館副提學, 1558년 工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明宗은 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宋寅으로 하여금 陶山記 및 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資憲大夫·工曹判書·大提學이라는 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行狀修撰廳堂上卿 및 禮曹判書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이황의 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崇政大夫 議政府右贊成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大提學·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程頤의 「四箴」, 『論語集註』·『周易』, 張載의 「西銘」 등의 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吏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易簀하였다.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領事를 追贈하였다. 장사는 領議政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遺誡대로 소자연석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學問世界와 著書> : 이황이 『朱子大全』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43세 때였고, 이 『朱子大全』은 명나라 嘉靖刊本의 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成化刊本의 修補本이었다. 그가 『朱子大全』을 읽기 시작한 것은 豐基郡守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心經附註』·『太極圖說』·『周易』·『論語集註』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朱子大全』을 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鄭之雲의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後敍를 썼으며,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後語를 지었다. 54세에 盧守愼의 「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鄕約을 기초하였고, 57세에 『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였으며, 58세에 『朱子書節要』 및 『自省錄』을 거의 완결지어 그 序를 썼다. 59세에 黃仲擧에게 답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奇大升과 더불어 四端七情에 관한 質疑應答을 하였고, 61세에 李彦迪의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序를 썼다. 64세에 李球의 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李彦迪의 遺稿를 정리하여 行狀을 썼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戊辰六條疏」를 상서했으며, 「四箴」·『論語集註』·『周易』「西銘」 등을 講義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聖學十圖』를 저작하여 王에게 獻上하였다. 『聖學十圖』는 제1도 太極圖, 제2도 西銘圖, 제3도 小學圖, 제4도 大學圖, 제5도 白鹿洞規圖, 제6도 心統性情圖, 제7도 仁說圖, 제8도 心學圖, 제9도 敬齋箴圖, 제10도 夙興夜寐箴圖와 圖說·題辭·規約 등 附隨文으로 되어 있다.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의 「西銘」은 張載의 글이고, 圖는 程復心의 작품이다. 제3도의 題辭는 朱熹의 말이고, 圖는 『小學』의 목록에 의한 李滉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주희의 『大學經』 1장(章)이고, 圖는 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規約은 朱熹의 글이고, 圖는 李滉의 작품이며, 제6도의 上圖 및 圖說은 程復心의 저작이고, 圖는 李滉의 작품이다. 제7도는 圖 및 圖說이 모두 朱熹의 저작이고, 제8도는 圖 및 圖說이 모두 程復心의 저작이며, 제9도에서 箴은 朱熹의 말이고, 圖는 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箴은 陳柏의 말이고, 圖는 李滉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下圖 등 5개처는 李滉의 獨自的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李滉의 學風을 따른 자는 당대의 柳成龍·鄭逑·金誠一·趙穆·李德弘·奇大升·金富倫·琴應夾·李山海·鄭琢·鄭惟一·具鳳齡·曺好益·黃俊良·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는 成渾·丁時翰·李玄逸·李栽·李瀷·李象靖·柳致明·李震相·郭鍾錫·李恒老·柳重敎·奇正鎭 등을 잇는 嶺南學派 및 親嶺南學派를 포괄한 主理派 哲學을 形成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壬辰倭亂 후 李滉의 文集은 日本으로 搬出되어, 도쿠가와가 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日本刻板으로 復刊되어 日本 近世儒學의 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代代世世로 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近畿學風>
● 旅軒 張顯光 1544-1637 :
慶北 仁同 출신. 본관은 仁同. 자는 德晦, 아버지 張烈은 贈吏曹判書이며, 어머니는 京山李氏로 齊陵參奉 彭錫의 딸이다.
<生涯와 活動> :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禮賓寺參奉·齊陵參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유명한 「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報恩縣監에 임명되어 赴任했으나, 12월 觀察使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職務遺棄 혐의로 義禁府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柳成龍은 아들을 그 門下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居昌縣監·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 工曹佐郎으로 부임하여 『周易』 교정에 참가했고, 刑曹佐郎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603년 龍潭縣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義城縣令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順天郡守, 1605년 陜川郡守, 1607년 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周易圖說」을 지었고, 1621년(광해군 13)「經緯說」을 지어 ‘理體氣用’, 즉 ‘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仁祖反正 후 金長生·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司憲府持平·成均館司業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司憲府掌令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司憲府執義·工曹參議로 승진되어 經筵과 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吏曹參議·承政院同副承旨·龍驤衛副護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刑曹參判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謝恩했고, 이어서 司憲府大司憲·副護軍, 1628년 吏曹參判, 1630년 大司憲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知中樞府事·議政府右參贊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道德政治의 具現을 강조했고, 仁祖反正 직후에는 功臣들의 橫暴를 批判하고 陷穽搜査를 是正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學問世界와 著書> : 그는 鄭逑에게 修學한 적이 있어 退溪學派로 분류되고 있으나 理氣論·心性論 등에서는 李滉의 學說과 相異한 점이 많다. 그는 理와 氣를 二元的으로 보지 않고 合一的인 것 혹은 한 물건의 兩面的인 現象으로 파악하였다. 「經緯說」에서는 理를 經으로, 氣를 緯로 비유해 理·氣가 둘이 아니고 體와 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心性論에서는 道心을 ‘未發之性’으로, 人心을 ‘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道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道心이 人心 가운데 있고 人心이 道心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四端이 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七情가운데에서 本性을 따라 發現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四端일 뿐이라 하여 四端의 純粹固有한 發現을 認定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哲學은 明나라의 羅欽順과 李珥의 理氣心性論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南人系列의 學者들 중에서는 매우 異色的이고 獨創的인 학설이다. 著書로는 『旅軒集』·『(性理說)』·『易學圖說』·『龍蛇日記』 등이 있다.
● 寒岡 鄭 逑
1543(중종38)-1620(광해12) 文穆, 本貫:慶北星州, 檜淵書院, 中期文臣, 父는 寒暄堂 金宏弼(道東書院)의 外曾孫, 性理學者, 義兵將, 1555년 吳健(이모부)한테서 周易의 乾坤兩卦 배움, 1963년 退溪門下에서 修學, 1566년 南冥門下에서 修學, 成渾을 찾아뵘, 花潭 徐敬德과 交流, 旅軒 張顯光의 妻三寸, 同村友 金宇顒과 交遊.
- 門人 : 徐思遠.宋遠器.孫處訥.韓浚謙.文緯.張興孝.李潤雨.許穆.蝗害宗 등.
- 副專攻 : 算數.兵陣.醫藥.卜筮.風水 등.
- 官職 : 司圃署主簿(1568), 三嘉縣監(1570), 司憲府持平(1581), 校正廳郎廳.工曹正郞.掌樂院僉正(1584), 咸安郡守(1591), 通川郡守.義兵募集.(1592), 承政院同副承旨(1594), 江原道觀察使(1596), 右承旨.工曹參判(1600), 寧越郡守.淸州牧使.同知(1601), 光州牧使.安東府 使(1604), 大司憲(1608) 등
- 1603년 南冥集을 編纂하는 과정에서 鄭仁弘이 李滉李彦迪을 排斥하자, 그와 絶交함.
- 1608(光海君卽位)년 臨海君의 逆謀事件이 있다, 關聯者를 모두 容恕하라는 疏를 올린후 大司憲직을 그만 두고 歸鄕. 鄕里에 百梅園을 세워 鄕友門徒를 모아 敎育.
- 著述 : 家禮輯覽補註.五先生禮說分類, 深衣製造法, 禮記喪禮分類, 五服沿革圖, 退溪喪祭禮問答, 王私不同禮의 단초제공. 또한 昌山誌, 同福誌, 關東誌, 永嘉誌, 平壤誌, 咸州誌 등이고, 그 외에 心經發揮, 改定朱子書節要總目, 聖賢風範, 洙泗言仁錄, 濂洛羹墻錄 등이며,歷史書로는 資治通鑑綱目, 歷代紀年, 古今忠謨, 治亂提要 등이고, 文學書로는 古今會粹, 朱子詩分類 등을 편찬하였으며, 醫學書로는 醫眼集方, 廣嗣續集 등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尨大한 著述은 李滉學派의 朱子를 기반으로 한 學問的 傳統과 徐敬德.曹植學派의 博學的 傳統을 繼承한 結果였다. 近畿 南人 實學派의 脫朱子學的 思想의 뿌리 가운데 적지 않는 부분이 徐敬德.曹植에 있었는데, 그는 이 한 부분을 전달해 주는 橋梁役을 했던 것이다.
<寒岡의 學統>
선생이 우리 나라의 大賢으로 500년 유학사에 뚜렷한 존재가 된 것은 남다른 천품으로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때문이겠지만, 당시 영남 상.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퇴계.남명 두 師門을 찾아 배움을 청했던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보여진다. 즉 21세 때에 퇴계선생에게 그리고 3년 뒤인 24세 때에 남명선생에게 제자의 예를 닦게 된 것은 선생의 일생에 있어서 학문적.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16세기 후반에 1대의 宗師인 退溪와 南冥이 嶺南의 上下道에서 각기 儒學의 광장을 열고 있었던 것은 당시 士林界의 한 偉觀이었다. 星湖 李瀷(1681-1763)은 白頭山脈과 東方의 地理를 諭하면서 "退溪는 生於大小白之下하여 爲東方之儒宗하니 其流深涵濃郁하고 揖遜退讓하여 文彩彪映에 有洙泗之風焉이요 南冥은 生於頭流(智異)之下하여 爲東方氣節之最하니 其流苦心力行하고 樂義輕生하여 利不能屈하고 害不能移하여 有特立之操焉이라. 此嶺南上下道之別也"<白頭正幹, 僿說卷一天地門>라고 하여 퇴계도덕의 깊고 넓음과 남명의 기절의 높음을 들어 영남상.하도의 학풍을 대조적으로 말하고 다시 동방의 인문을 논하면서 "聖朝가 建國하매 人文이 始闡이라. 中世以後에 退溪는 生於小白之下하고 南冥은 生於頭流之下하니 皆嶺南之地也라. 上道는 主仁하고下道는 主義하여 儒化와 氣節이 如海闊山高하니 於是乎 文明之極矣.<東文人文, 同上>라고 하여 퇴게의 의하여 상도는 인을 위주하고 남명에 의하여 하도는 의를 위주했는데, 퇴계 유화를 활해에 비긴다면 남명의 기절은 산고에 견줄만 한 것이며 우리 나라 유교적 문명은 그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남 상하도의 학을 도산과 덕천 두 사문으로부터 흡수.소화하여 자기를 대성시킨 분이 바로 한강선생이었다. 일찌기 선조왕이 퇴계.남명의 학문 및 기상의 차이를 물었을 때, 선생은 퇴계에 대하여 "德器渾厚, 工夫純熟, 階級分明, 學者易以尋入."이라 하고; 남명에 대하여는 "器局峻整, 超然自得, 特立獨行, 學者難以爲要."라 하여 두 스승의 장점과 특징을 명백하 파악하고 설명하였다.
원래 선생은 천성이 豪邁하여 체질적으로 남명에 유사하였고, 남명의 砥礪名行과 출처의리를 본받았지만 선생의 학문태도 내지 수양방법에 있어서는 퇴계를 따랐던 것 같다. 말하자면 선생은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을 가했던 것이다. 선생이 후일 마침내 退溪學의 탁월한 계승자로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영남의 학을 종합.성취한 선생은 茶山 丁若鏞(1762-1836)의 말에 "退溪寒岡之學,傳於大嶺之南."(與猶堂全書第一集, 玄坡 尹進士行狀)고 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대표적 학파를 이루었고, 또한 그의 한줄기 학맥이 近畿地方으로 전하게 되어 선생의 학이 영남의 본고장을 벗어나 近畿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또한 이채로운 일이다. 선생은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특히 당시 영남인사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도들이었거니와, 한편 근기출신의 眉叟 許穆이 따로 선생의 衣鉢을 물려 받아 후일 근기학통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수는 선생의 문하에서 가장 年少했던 분으로 또 후일 가장 오래 생존하여 선생의 광명을 엮고 문집의 서문을 쓰는 등 선생의 학을 계승.발전시키기에 힘을 다한 분이다. 近畿學統에 대해서는 앞사람들의 설명이 많다. 예를 들면 舫山 許薰(1836-1907)이 性齋 許傳에 대한 만장에서도 잘 지적해 놓았다. "眉翁力倡古詩畵, 星順相從又下廬" (舫山全集卷四)
眉叟가 古詩書의 古學을 창도하였고, 뒤를 이어 星湖 李瀷, 順菴 安鼎福이 나왔으며, 下廬 黃德吉을 거쳐 性齋 許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이하는 許昌武가 追記한 것임) 이후의 학통은 性齋 許傳에서 小訥 盧相稷으로 다시 小訥에서 新庵 許格으로 신암에서 耕坡 許棌로 이어져 그 學的 情神이 오늘까지 以會書堂에 살아 숨쉬고 있다. 방산은 성호 우파인 順菴下慮 系列만 들었지만, 실은 鹿庵.權哲身.茶山) 丁若鏞 형제 등 星湖左派들이 모두 모두 근기학통의 주요인물들이다. 寒岡을 淵源으로 한 根畿學統의 系譜는 곧 朝鮮朝後期의 實學思想의 主流를 이루는 經世致用派인 것이다.
● 眉叟 許 穆 : 1595(선조28)-1682(숙종8)
본관은 陽川. 자는 文甫·和甫, 호는 眉叟. 贊成 許磁의 曾孫으로, 祖는 別提 許橿이고, 父는 縣監 許喬이며, 母는 正郎 林悌의 딸이다. 妻는 領議政 李元翼의 孫女이다.
1615년(광해군 7) 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居昌縣監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文緯에게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廣州의 牛川에 살면서 紫峯山에 들어가 讀書 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篆書를 完成.
1626년 仁祖의 生母 啓運宮具氏의 服喪문제와 관련해 儒臣 朴知誡가 원종의 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仁祖는 그에게 停擧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紫峯山에 隱居해 學問에만 專念하였다. 1636년 丙子胡亂을 당해 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江陵·原州를 거쳐 尙州에 이르렀다.
1638년 宜寧의 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泗川으로 옮겼다. 그 뒤 昌原·漆原 등지로 輾轉하다가 1646년 마침내 京畿道 漣川의 故鄕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母喪을 당하자 喪中에 『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內侍敎官이 된 뒤 造紙署別坐·工曹佐郎 등을 거쳐 龍宮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工曹正郎에 이어 持平에 임명되었으나, 孝宗을 만나 疏를 올려 君德과 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司僕寺主簿로 옮겼으나 辭職하고 故鄕으로 돌아왔다.
1659년 掌令이 되어 君德을 論하는 疏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宋時烈·宋浚吉 등이 主導하는 北伐政策에 신중할 것을 孝宗에게 諫하는 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屯田의 弊端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掌令이 되었다. 그 때 孝宗에 대한 趙大妃(仁祖의 繼妃)의 服喪期間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上疏해 政界에 큰 波紋을 던졌다. 이를 <己亥服制>라 한다. 당시 宋時烈 등 西人은 『經國大典』에 의거해 長子와 衆子의 구별 없이 趙大妃는 朞年服(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儀禮>(註疏)에 의거해 孝宗이 體而不正(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衆子에 該當된다고 해석해 朞年服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孝宗이 王位를 繼承했고 또 宗廟의 祭祀를 主宰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服制論爭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三陟府使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正體傳重說』을 지어 三年說을 理論的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孝宗 妃 仁宣王后가 죽자 趙大妃의 服制問題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己亥服制가 거론되었다.
『經國大典』에 따르면 長子·衆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朞年服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朞年, 衆子妻는 大功으로 區別해 規定하였다.
그런데 仁宣王后에게 大功服을 적용함은 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孝宗을 衆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經國大典』이 아니라 古禮의 體而不正說이었다.
이는 孝宗의 服制와 矛盾되는 것으로서 새로 卽位한 肅宗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宋時烈 등 西人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大功服을 朞年服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西人은 실각하고 南人의 執權과 더불어 그는 大司憲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辭職疏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御醫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吏曹參判·備局堂上·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資憲大夫에 승진하고, 議政府右參贊 겸 成均館提調로 特進하였다.
<理氣論>에 있어서 氣는 理에서 나오고 理는 氣에서 行하므로, 理氣를 分離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圖解法으로 해설한 『心學圖』와 『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作品으로 삼척의 陟州東海碑, 시흥의 領相李元翼碑, 파주의 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東事』·『邦國王朝禮)』·『經說)』·『經禮類纂』·『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神位를 봉안하는 賜額書院으로 嵋江書院(麻田郡), 나주의 眉川書院, 창원의 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正이다.
● 星湖 李 瀷
1681(숙종7)-1763(영조39), 退溪의 다른 제자 西厓 柳成龍과 鶴峯金誠一; 曺植의 다른 제자인 東岡 金宇顒 등이 慶尙左派를 이룬데 비해, 京畿道 지역에 李滉과 曺植의 學統을 전수, 近畿學派를 형성했다. 近畿學派에서 南人系 實學이 分派되었으며, 李滉과 曺植의 學統을 모두 繼承하였기 때문에 李滉의 理氣二元論과 曺植의 實用思想이 混在되어 있다. 朝鮮 후기에 近畿地方에서 李瀷을 중심으로 활동한 학파를 近畿學派 또는 經世致用學派라고 한다. 이들은 理氣心性論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여 實證과 實用에 기반을 둔 創造的.批判的인 學風을 일으켰다. 李瀷은 李滉의 性理學的 立場을 받아들였으나 許穆. 柳馨遠 등의 學問傾向에 커다란 影向을 받아 革新的인 學問體系를 이룩하였다. 이들의 특징은 天主學에 대한 비판적 수용, 科擧制와 地主佃戶制의 革罷와 限田制의 實施를 주장하였으며, 歷史觀도 批判的.考證的인 파악과 主體的 歷史意識을 중시하였다. 李瀷의 제자로 <東史綱目>을 쓴 史學의 安鼎福, 天文學의 황운대, 地理學의 윤동규, 文學의 신후담, 經學의 권철신 등이 유명하다. 近畿學派는 經傳의 解釋方法과 西洋文物의 受容態度에 따라 保守派와 進步派로 나누기도 하는데, 穩健主義를 주장하는 保守派에는 安鼎福.黃德吉.許傳 들을 들 수 있고, 急進的 소장층인 進步파로는 丁若鏞.權哲身.丁若銓 등이 꼽힌다. 以會書堂 許格은 穩健的 保守派의 學問的 傾向을 띠고 있다. 驪州, 英祖때의 實學者. 星湖僿說, 東史綱目, 奴婢制 반대, 均田制 선호. 眉泉書院(나주).
● 順菴 安鼎福
1712(숙종말기)-1791(정조말기), 廣州人, 實學의 宗匠인 星湖 李瀷의 영향을 받은 順菴 安鼎福과 茶山 丁若鏞(1762-1836) 등 재야 南人系列의 知識人을 중심으로이른 經世致用의 近畿實學이 형성된 지역이기도하다. 조부 安瑞羽가 蔚山府使에서 罷職된 후, 全 北 茂朱에서 隱居生活, 무주에서의 은거생활은 安鼎福의 學問形成에도 영향을 주어 기본적인 儒學經典 외에 陰陽.星曆.醫藥.占卜.孫子兵法.佛敎.老子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세간에서 方術家로 알려진 것도 이러한 學問的 背景과 무관하지 않다. 10년 뒤인 1735(영조11) 조부가 사망하자 무주를 떠나 고향인 廣州 景安面 德谷里로 歸鄕. 1736년 25세 때 安鼎福은 조상 선영이 있는 德谷里 靈長山 아래에 ‘(麗澤齋)’를 지어 學問生活과 함께 제자들의 講學場所로 이용하였다.
<學問傾向> : 安鼎福은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方術學보다는 性理學에 눈을 뜨게 되어 <性理大全>과 <心經>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修己治人’, 즉 인간의 倫理道德과 社會 參與의 문제로 확장시켜나갔다. 廣州로 還鄕후, 安鼎福은 學問과 著述活動에 專念했다. 26세에 <治統>과 <道統二圖>를 시작으로 27세에는 뒷날 臨官政要의 모체가 되는 <治縣 譜>와 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鄕社法을 짓는 등 쉴 틈 없이 저술에 전념했다. 29세에는 토지제도 개혁안으로서 <(井田說>에 대해 썼고, 30세에는 주자의 글을 모방한 <(內範>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환향 후 몇 년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30대가 되자 廣州近處에 사는 實學者들과 學問的 交流를 시작했다. 33세에 磻溪 柳馨遠(1622~1673)의 曾孫으로부터 <磻溪隧錄>을 입수해서 읽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64세 때 <磻溪年譜>를 짓게 되고, 이를 계기로 現實問題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정복은 35세에 安山 瞻星村에 살고 있는 星湖 李瀷(681~1763)을 찾아가 그의 門下生이된 것이다. 스승 李瀷과의 學問交流는 그가 他界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安鼎福의 代表 저술인 <東史綱目>은 6년간 星湖와의 便紙問答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宦路와 後進養成> : 1749년(영조 25) 38세 때 安鼎福은 門蔭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말단 관직인 萬寧殿參奉을 시작으로 義盈庫奉事.靖陵直長.歸厚署別提를 거쳐 43세에 이르러 司憲府監察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40~50대를 學問과 著述 활동으로 보낸 安鼎福은 61세에 다시 官職에 나갔다. 예순이 넘은 그에게 東宮(훗날의 正祖)을 가르치는 일이 맡겨졌는데, 이는학자로서의 學問的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正祖가 王位에 올라서는 65세 高齡의 나이에 木川縣監이라는 수령 자리가 주어졌다. 安鼎福은 72세에 다시 中央으로 복귀하여 敦寧府主簿(정6품)ㆍ儀賓府都事(종5품)ㆍ世子翊衛司翊贊(정6품) 등을 역임했다. 비록 한직이지만, 이 또한 고령인 안정복을 배려한 정조의 처사였다. 79세에 嘉善大夫(종2품)에 加資되고, 同知中樞府事로서 廣成君에 被封되었으며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인 純祖元年에는 천주교 비판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 資憲大夫(정2품).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ㆍ五衛都摠府摠管이라는 벼슬에 追贈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李瀷의 제자로서 天主敎를 믿었던 이가환ㆍ권철신ㆍ정약종 등 남인 학자들은 사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중 권철신은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의 형이며, 권일신도 장인인 안정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하였다.
<著述活動> : 退職以後 61歲까지 18년간 著述活動에 沒頭하였는데, <臨官政要>(1757. 46세), <東史綱目>(1759, 48세), <列朝統記>(1767, 56세) 등 그의 대표 저술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의 나이 70대가 되었을 무렵, 天主敎의 敎勢가 날로 擴張되자 본격적으로 天主敎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를 비판한 책인 <天學考>나 <天學問答>이 간행된 것도 안정복의 나이 74세 때이다.
● 下廬 黃德吉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길(耳吉), 아버지는 황이곤(黃以坤)이며, 어머니는 배천조씨(白川趙氏)로 조경채(趙景采)의 딸이다. 안정복(安鼎福)을 사사하였다.
형 황덕일(黃德壹)과 함께 경전(經傳)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읽어 15, 16세 때 벌써 학예(學藝)로 이름이 높아 친구가 많았다. 이때 어머니로부터 “명리(名利)를 좋아하는 사람과 교유해서는 안된다.”라는 훈계를 받았는데, 그 뒤로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을 배워 일상생활의 윤리로부터 성명(性命)·이기(理氣)의 근원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여 그 요령을 얻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해박하고도 요점을 얻었으며, 간략하고도 충실하여 조화의 근원을 꿰뚫고 사물의 이치를 밝혔다. 거처를 ‘하려(下廬)’라 이름하고 세로(世路)에 인연을 끊은 채 학문탐구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 『방언(放言)』·『일용집요(日用輯要)』·『동현학칙(東賢學則)』·『도학원류찬언(道學源流纂言)』과 『속찬언(續纂言)』·『삼자실기(三子實記)』·『사례요의(四禮要儀)』·『가례익(家禮翼)』·『동유예설(東儒禮說)』·『경훈사교록(經訓四敎錄)』·『사서집록(四書輯錄)』·『수사연원록(洙泗淵源錄)』·『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증보성현군보록(增補聖賢群輔錄)』·『척견록(摭見錄)』·『어류찬(語類纂)』·『초학편(初學編)』·『소대연편(昭代衍編)』·『고사상고(古史詳攷)』 등을 남겼는데, 모두가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내용의 책으로, 옛 성현의 뜻을 계승하여 후세의 학문을 열어주었다.
Ⅳ. 以會書堂의 設立과 新庵先生의 學脈
《以會書室資料集》〈學詞〉에 “孔孟程朱惟是道, 晦陶寒旅亦斯道.”라고 한 점으로 보아 공자.맹자.정자.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학문을 주축으로 하고 있음을 알수 있고, 《新庵先生文集》〈行狀〉에 “其學問, 則孔孟程朱之道; 其淵源, 則眉星順廬之學也.”라고 연원을 밝힌 점으로 보아 미수 허목,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하려 황덕길 제 선생이 근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新庵先生文集》〈行狀〉에 “盧先生易簣於合浦寓所, 新庵先生, 往哭心喪, 而復請益於河晦峯(謙鎭)及盧誠庵(根容)成溪菴(基德)金醇齋(在華)諸耆碩, 以廣器識, 而歸述家學也.”라고 하였으니, 소눌선생이 타계하신 후 다시 지도를 받은 선생님으로는 회봉 하겸진, 성암 노근용, 계암 성기덕, 순재 김재화 제선생이며,〈行狀〉에 “甫八歲, 從其戚叔毅齋李先生鍾弘及戚兄靜軒郭先生鍾千於冷泉書堂.”이라 하였고, 다시 “往密陽之紫巖書堂, 執摯請業......新庵則二十也.”라고 기록한 점으로 보아 신암선생은 8세에 냉천서당에 입학하여 12년간 학적 기초를 다진후에 20세인 1929년에 자암서당 소눌 노상직선생 문하에서 2년여(1931) 연구과정을 통하여 학문적 이론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현대적 학제로 보면 대학원과정을 수료한 셈이다.
따라서 이회서당(以會書堂)의 학통(學統)은 공맹정주(孔孟程朱)⤍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한강(寒岡) 정구(鄭逑)⤍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44-1637)⤍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순암(順菴) 안정복(安正福, 1712-1791)⤍하려(下廬) 황덕길(黃悳吉, 1770-1827)⤍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5-1931)⤍신암(新庵) 허격(許格, 1909-1991)을 거쳐⤍경파(耕坡) 허채(許棌, 1928-2006)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성재(性齋) 허전(許傳) 선생은 하려(下廬) 황덕길(黃悳吉) 선생께 사사하였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선생은 성재선생께 사사하였으며, 신암(新庵) 허격(許格) 선생은 소눌선생께 사사하였다. 따라서 신암선생께 사사한 경파(耕坡) 허채(許棌) 선생도 이상의 연원에서 그의 학맥을 같이한다고 감언(敢言)할 수 있다. 뿐더러 혼상제례(婚喪祭禮)의 규범은 신암선생이 성재선생의 《士儀》에 근거하여 저술한 《四禮家儀》를 준거의 틀로 전통예절을 기준삼아 현대적 변용을 시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는 性齋⤍小訥⤍新庵으로 이어지는 學脈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 性齋 許 傳(1797-1886)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이로(而老)로서 호는 성재(性齋)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성재는 1797년에 경기도 포천현(抱川縣)에서 일천(一川) 형(珩)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孝經》과 《小學》을 배우고 8세에 《大學》을 읽었으며 9세에 《詩經》의 주남(周南).소남(召南)과 《周易》의 건괘(乾卦).곤괘(坤卦)를 읽었다. 1817년(丁丑)에 하려(下廬) 황덕길(黃悳吉)에게 수학하였으며, 부친상을 수상할 때 《禮記》와 《儀禮》를 읽고 《法服篇》을 저술하였으며, 그 후에 《受廛錄》과 《宗堯錄》(1860)을 완성하였고, 이어〈三政對策〉과 〈誠軒箴〉을 당시 고종에게 지어 올렸다.
183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우부승지(右副承旨), 병조참의(兵曹判書), 세자사(世子師), 형조판서(刑曹判書),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제학(兩館提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하는 동안, 가선대부(嘉善大夫)에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자헌대부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숭정대부에서 보국대부(輔國大夫)로 승차하였다.
1866년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에 부임한 후 명륜당(明倫堂)에서 매월 2차에 걸쳐 삭망강학(朔望講學)을 개최하였는데, 향약(鄕約)을 만들어 향교벽에 게시하고 거관십잠(居官十箴)을 지어 정당(正堂)에 게시하는 한편, 공여당(公餘堂)을 열어 학생들을 교학하면서 그곳에서 학생들을 기거케 조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상중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생활화하도록 하였다. 이 때 밀양의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선생도 학생신분으로 수학하고 있었는데, 고성 송정의 항재(恒齋) 허진(許瑨), 효봉(曉峯) 허용(許瑢), 침계(枕溪) 허진(許鎭), 양고헌(兩顧軒) 허정(許鋌)도 학생신분으로 거기에 수학하였다고 면와(俛窩) 허련(許鍊)이 지은〈松陽齋記〉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성호(醒壺) 허일(許馹)은 성재선생의 추천에 의하여 가락국납릉(駕洛國納陵) 참봉(參奉)으로 봉직하면서 공여당(公餘堂)의 행정업무를 겸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고성 참의공자손들과의 관계설정은 두 가지 사건으로 귀결지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방송정시(訪松亭詩)를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정공산소가 있는 성산산송(城山山訟)을 승소케 측면지원해준 것이다. 성재선생이 김해부사 재직시 송정을 방문하여 족의를 다지고 귀로에 방송정시(訪松亭詩)를 남겨 주심으로써 송정(松亭)이 고성에서 명촌(名村)으로 알려지게 된 내용은 다른 지면에서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성산산송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김해부사를 끝내고 귀경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재직할 당시, 고성참의공파(固城參議公派)의 통정공종중(通政公宗中)에서는 해주정씨(海州鄭氏)와 산송(山訟)에 시달리고 있었다. 성산산정(城山山頂)에 명혈(名穴)이 있다는 전래지언(傳來之言)이 있었는데, 당시 세력가였던 해주정씨(海州鄭氏)가 통정공묘 바로 위에 그들의 선조묘(先祖墓)를 투장한 것이 산송의 발단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코자 화촌(華村) 허성로(許星老)는 송강(松岡) 허관(許觀)외 1명(미확인)과 함께 세분이 상경하여 성재선생(性齋先生)을 찾아뵙고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렸던 바, 성재선생은 이 산송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었는데, 이 사건이 고성(固城) 양천허문(陽川許門)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小訥 盧相稷(1855-1931)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치팔(致八)이며 호는 소눌(小訥) 또는 자암병수(紫巖病叟)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눌(小訥) 은 서기 1855년(哲宗6) 11월 21일 김해 생림면(生林面) 금곡리(金谷里)에서 극재(克齋) 노필연(盧佖淵)의 아들로 태어나 뒤에 백부 우당(愚堂) 노호연(盧滈淵)의 후사로 출계하였는데, 그의 가계는 조선중엽이래로 창녕(昌寧)에 세거한 광산노씨(光山盧氏)로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도인 옥촌(沃村) 노극홍(盧克弘)의 후손인이며, 옥촌의 증손인 해은(海隱) 노한석(盧漢錫)이 김해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았다.
5세때 《孝經》을 배우기 시작해 7세 때 《少微通鑑》을 읽었으며, 10세 때 극재(克齋)로부터 《中庸》과《大學》을 배웠고, 11세 때 《論語》.《孟子》를 읽었으며, 12세 때 《詩傳》을 독송하였고, 13세 때 《周易》을 읽었다. 15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했으며, 17세 때 당시 김해부사 성재(性齋) 허전(許傳) 선생이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하과(夏課)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에 참석을 했다. 21세 때에 대구와 거창의 도회(都會)에 참가했으며, 26세 때에 경과(慶科) 한성시(漢城試에 입격하였고, 28세 때에 동당시(東堂試)에 입격하였으며, 29세 때에 응제(應製)에 응하여 급분(給分)을 받았다. 그러나 31세 때에 생부 극재공의 상을 당하고, 잇달아 성재선생이 이궤(易簣)한 이후로는 공차(公車)에 응하지 않고 오직 독서와 강학에 저념하였다.
소눌의 생애에 있어서 학문의 향방을 결정하게 된 것은 성재 허전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소눌이 이처럼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것은 어릴 때부터 부친과 형을 따라 당시 김해부사인 허전의 문하에서 드나들 수 있었던 가정환경 때문이다. 성재 허전이 부임했을 때 소눌의 나이 겨우 11세에 불과했지만, 부친을 따라 공여당(公餘堂)에서 성재를 배알할 수 있었고, 그 뒤 1873년(癸酉)에 형인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과 함께 새문밖에 살고 계셨던 성재를 찾아뵈옵고, 1878년(戊寅)에 다시 축동(畜洞)으로 찾아가서 《大學》을 배우면서 학자적 소질을 배양할 수 있었다. 1880년(庚辰)에 경과(慶科)의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회시(會試)에서 좌절한 다음부터 불권당(不卷堂)으로 찾아가서 《論語》와 《學則》을 배웠고, 24세 이후 32세 되던 때인 1886년 성재선생이 별세하실 때까지 수시로 찾아가서 학업을 닦아 성재만년(性齋晩年)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결국 그는 성재문하에서 당대 영남의 대표적 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후진들이 소눌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게 된다. 즉, 조선후기에 일어난 한강-성호계열의 학문을 전수한 성재 허전의 문도로서 성호계열 실학자의 여러 저술들을 정리.간행함으로써, 그 학문의 적통(嫡統)으로 불리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던 해, 형 대눌이 일본 헌병대에 구금(拘禁) 되었다가 풀려난 그 다음해 10월 만주땅으로 망명했는데, 한달 뒤 소눌도 가족을 데리고 형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안동현(安東縣)에 거주했다. 이 때 만주에 망명해 있던 성주선비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의령선비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 등과 가까이 살면서 교유(交遊)를 했다. 중국생활도 잠시, 이듬해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당하자 소눌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밀양으로 돌아온 소눌은 그 이듬해인 1914년 자암서당(紫巖書堂)을 건립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선현들의 문적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19년 전국유림들이 巴里萬國 平和會義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巴里長書>를 보내자 이에 제자 14명과 함께 서명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옥에서 나온 소눌은 노곡(蘆谷) 근처에 사남서장(泗南書庄)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1926년에는 다시 자암서당을 중수하였지만, 병환으로 마산합포(馬山合浦)에 우거하였다. 1931년, 한학계(漢學界)의 거벽(巨擘)이었던 소눌 노상직 선생은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신암선생(新巖先生)은 1929년부터 밀양의 자암서당(紫巖書堂)에서 소눌선생(小訥先生)으로부터 지도를 받았지만 1931년 돌아가실 때까지 병수발을 들면서 계속 가르침을 받은 마지막 학생이다. 소눌선생의 많은 문도중에 <一峯四佳>로 평가받는 분이 있었는데, 신암선생은 최연소자로서 <四佳>중 한 분이다.
● 新庵 許 格(1910-1991)
본관은 양천(陽川)으로서 호적명은 도준(道俊)이고 자는 지경(知卿)이며 호는 신암(新庵)이다. 신암선생은 5세부터 7세까지 증조 침계공(枕溪公) 진(鎭)께서 손수 써주신《千字文》을필두로 《解夢集》, 《四字小學》,《童蒙先習》등 한문의 기초과정을 가르친 다음, 8세가 되던 해인 1917년(丁巳)에 냉천서당(冷泉書堂)에 보내어 척숙 의재(毅齋) 이종홍(李鍾弘)과 척형 정헌(靜軒) 곽종천(郭鍾千) 두 선생문하에서 10여년간 경전을 수학케 하였다. 예컨대 《孝經》《史略》《通鑑》《小學》《大學》《中庸》《論語》《孟子》《詩傳》《書傳》《呂氏春秋》《禮記》《周易》등 제서이며, 하과(夏課)를 통하여 《古文眞寶》《唐詩》《楚辭》《漢賦》《唐宋八大家》등 문학류의 작품을 탐독하면서 저작분야의 연습과정을 이수하였다. 이는 오늘의 중고등 및 대학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1929년(己巳) 의재(毅齋)선생의 추천서를 갖고 삼종숙 과재(寡齋) 허철(許哲)과 함께 밀양의 자암서당(紫巖書堂)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선생을 찾아가서 집지청업(執摯請業)하였던 바, “앞으로 고성의 양천허문은 이 두 사람에 힘입어 빛날 수 있겠구나”(固城之陽川門戶, 必賴二子, 自不寥寥云.) 하면서 학생으로 받아 주었는데, 당시 두 사람, 즉 과재는 26세였고, 신암은 20세였다. 소눌선생의 교학방법은 성재선생의 교학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였기 때문에 고저청탁(高低淸濁)과 음훈학(音訓學)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자암서당의 교학방법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과재공은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중도에 하차하였지만, 신암선생은 과재공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젊었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비교적 용이하여 이궤(易簣)하실 때까지 병수발을 들면서 한편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요행함을 이회서실 제생(諸生)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하셨다. 얼마후 1931년 소눌(小訥)선생이 타계하시자 신암(新庵)선생은 더욱 문로(門路)를 넓혀 하회봉(河晦峯), 노성암(盧誠庵), 성계암(成溪菴), 김순재(金在華) 등 여러 대유들과 논학하여 학덕을 넓히고 중정(重庭)으로 돌아와 가학(家學)을 기술하는 데 일생 성력을 다 바쳤다.
동주사공파 특히 고성 참의공자손들은 과재공(寡齋公)과 홍암공(弘庵公) 및 신암공(新庵公)의 위선사업에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업(遺業), 즉 1947(丁亥)년 송양재(松陽齋)의 창건, 1959(己亥) 대동보(大同譜)의 편찬, 진천선영(鎭川先塋) 4대칠위의 수비, 1965(乙巳)년 진경재(鎭敬齋)의 중건과 송양재에서 문경공(文敬公) 및 동주사공이하삼대(東州使公以下三代) 세일제(歲一祭)의 봉행, 1972(壬子)년 동주사공이하삼대설단비(東州使公以下三代設壇碑)의 건립, 1982(壬戌)년 종파보(宗派譜)의 발간 등 제 종역(宗役)의 혈성(血誠)에 대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보다 손쉽게 승선계후의 종무역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은가?
1945(乙酉)년 해방을 맞이한 다음해인 1946(丙戌)년에 나의 할아버지 성재공(誠齋公) 허홍(許洪)의 지원으로 구만면 신계(新溪) 마을에 이회서실(以會書室)을 개설하여 이문회우(以文會友)의 이념과 이우보인(以友輔仁)의 실천으로 사문(斯文)에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는데, 당시 친자(親炙)를 받은 대표적인 학생중 작고한 분으로는 허모(許模), 허종(許棕), 허근(許槿), 허채(許棌), 노한도(盧漢道), 박용숙(朴容淑), 하용만(李用萬), 최정갑(崔正甲), 이용락(李用洛), 양종석(梁宗錫), 최영수(崔榮銖) 등이며, 1961(辛丑)년에 최정갑을 비롯한 30여 명이 동익계(同益契)를 발족시킨 후 직간접으로 훈도(薰陶)를 받은 서부경남 문우들의 참여로 600여 명의 계원이 확보되었고, 신암선생 이궤(易簣) 후에 동익계원들이 <新庵先生文集發刊委員會>를 구성하여 당시 동익계 계장이었던 허택도(許澤道) 고성향교 전교를 위원장에 추대, 2002년 소춘절에 출판기념회 겸 학술평가회를 가진 바 있었는데, 국내외의 학계.문화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웅건(雄建).심오(深奧)한 문(文)과 시(詩)는《新庵先生文集》전권에 향기를 더하고 있으며,《溪上雜誌》,《以會書室日錄》,《朔望講錄》그리고《四禮家儀》 등 편저들은 《以會書室資料集》에 소상히 수록되어 신암선생의 당년의 뜨거웠던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중국중앙민족대학 모종감(牟鍾鑒) 교수는 서문에서 “讀許公的書, 可以從中接收儒家思想精華的薰陶, 可以從中享受詩文審美境界的樂趣,也可以從一个側面了解韓國二十世紀的社會發展和儒學眞象.”라고 평가하였고, 중국인민대학 허계현(許啓賢) 교수는 “我集中精力把新庵隨錄一頁一頁認眞地讀了一遍. 讀後, 掩卷靜思, 深感先生對中國和韓國傳統文化之熱愛.功底之深厚.思想之淵博.文章之嚴謹, 値得我很好之學習. 正如一些資料所說, 他是韓國儒學學統的最後一位繼承者.”라 하여 한국유학의 학통을 계승한 최후의 일인자로 높게 평가하였고, 중앙민족대학 권오택(權五澤) 교수는 “將新庵先生之精神遺産, 昭示于天下, 與人類共分享, 至少對促進中韓文化之交流, 弘揚兩國人民所固有的傳統文化, 極具深遠的歷史意義和現實意義. 因之, 此次其門生們所做的工作, 應該說功莫大焉.”이라고 하면서 이 문집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중국 요녕대학(遼寧大學) 고규상(顧奎相) 교수는 <略述韓國近世名儒許格生平及貢獻>에서 “我相信隨着時間的推移, 他喜品.學品及他筆生心血寫就的公侯都不換的文章, 將永在韓國文化史上, 熠熠生輝.”라고 신암선생의 작품과 인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문화사에서 영원히 빛을 더할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단아순미(端雅純美)하여 향곡간(鄕谷間)에 수많은 금석문(金石文)이 산재해 있는데, 고성지역의 각성씨 문중에서 신암의 수묵(手墨)을 거치지 않은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초기 호정(浩亭) 하륜(河崙)선생이 지은 진주촉석루기(晋州矗石樓記), 20세 전후에 쓴 냉천서당기(冷泉書堂記), 40세 전후에 쓴 송양재기(松陽齋記) 등을 통하여 그 유려(流麗)한 필치(筆致)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며, 신암선생이 밀양박씨(密陽朴氏) 휘 익진(翼鎭), 자 낙언(洛彦), 호 운계(雲溪)의 둘째 사위인 관계로 신암선생의 글과 글씨가 그 집안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신암선생의 사회적 활동상황을 아는 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성의 실질적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진솔회(眞率會)를 결성하여 지역사회의 피폐(疲弊)해진 습속을 예양(禮讓)으로 순화하는데 힘썼고, 제사기능(祭祀機能)만 남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고성향교(固城鄕校)에 교육기능(敎育機能)을 강화하여 질적 변화를 시도하였으며, 지방자치제의 민주화를 위해 구만면에 동신회(同信會)를 조직, 회장으로서 혈연주의(血緣主義) 중심의 정치풍토를 개인주의(個人主義) 중심의 정치문화로 전환코자 선각자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김해김씨(金海金氏) 중심의 가락종친회(駕洛宗親會)가 명실상부한 김허이결합체(金許李結合體)로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코자, 가락국종무위원(駕洛國宗務委員)으로 근 10년 봉직하면서 숭안전(崇安殿)을 창건하여 팔왕(八王)을 모시는 성역화사업에 총무분과위원으로 봉사하였다. 조선조 500년간에는 양천허씨(陽川許氏)가 주로 가락국왕릉(駕洛國王陵)을 수호해 온 사실이 초당공(草堂公) 허엽(許曄), 미수공(眉叟公) 허목(許穆), 묵재공(默齋公) 허적(許積), 성재공(性齋公) 허전(許傳)이 지은 경내의 비음기(碑陰記)와 건물의 중수기(重修記)를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끝으로 고성 향내에 있는 서원(書院)은 물론 진주, 산청, 함안, 창원, 마산, 사천, 거창, 밀양 등 서부경남의 유명서원에 임원을 두루 역임하였고, 특히 성재선생을 모시는 산청의 이택당(麗澤堂)과 김해의 취정재(就正齋) 그리고 미수선생을 모시는 의령의 이의정(二宜亭)의 향례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례하였다.
우리 집 마당 앞에 세 그루의 괴목(槐木)이 있었고, 마을을 안고 흐르는 시냇가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밑에 <日新臺>를 세워 일신정신(日新精神)을 함양토록 격려하였고, 동편 개울가에 <東明臺>를 세워놓고 새벽마다 매일 현주(玄酒)를 마시게 하면서 천부적인 선성(善性)이 물욕에 유혹되지 않도록 범준(范浚)의 심장(心箴)을 외우도록 하였으며, 동구 서편의 <止隅臺> 느티나무 아래를 제생들로 하여금 작시(作詩)의 장소로 활용하도록 유도하였다. 작년에 이회서실을 사단법인 이회서당으로 개칭하고 월 2회 재독반(再讀班)을 개설하여《大學》을 연독(硏讀)하던 중에 비로소 신암선생이 이곳을 그의 이상향(理想鄕)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늦게 알게 되었다.《大學》책을 펴면 첫구절에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이라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것이《大學》의 <三綱領>이다. 이 삼강령의 실천내용이 바로 <明>자와 <新>자 그리고 <止>자에 있음을 깨닫고, 신계마을에 <東明臺>, <日新臺>, <止隅臺>를 세운 깊은 뜻을 이해하면서 우리 모두 신암선생의 숨은 뜻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파전한국학당(坡田韓國學堂) 원장인 김무조(金戊祚)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이회서실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耕坡許棌先生과 以會書室의 學問的 接近》이란 주제의 내용 일부를 옮기면, <日新臺>를 이회서실의 우주목(宇宙木)으로 보고, <以會>가 바로 플라톤의 아카데미라고 정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몽매한 사람들을 모아 가르쳐 깨치게 하는 서실(書室)이 바로 신암선생의 원대한 꿈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서구문명의 연원이라 하여 문명사가들은 저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비하면 신암선생의 <日新臺> 아카데미는 어찌 이렇게 초라하게 보일까 하고 의문을 갖겠지만,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편견일 뿐, 웅지를 갖고 입지한 선각자들의 안목은 같았던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를 들어 동일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BC 318년경 위(魏)에서 버림받은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에 갔다. 제1세인 위왕(威王)이 죽고 난 뒤에 선왕(宣王)이 천하의 선비 70여명을 초청, 국도(國都)인 직산(稷山) 아래에 큰 집을 짓고 학사(學舍)를 개설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理想)을 구현하려 하였다. 물론 맹자도 이 열좌(列座)의 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덕화(德化)와 도화(道化)는 왕도정치의 모범이 되어 소위 <稷山學理>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현들도 예외가 아님을 예시하고 있다. 퇴계(退溪)는 도산(陶山)에, 율곡(栗谷)은 고산(高山)에, 남명(南冥)은 덕산(德山)에 회재(晦齋)는 옥산(玉山)에 그들의 취향에 따라 각각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소위 한국의 유수한 학통을 만들어 내었다고 역설하면서 신암선생도 마찬가지로 선현들의 학맥(學脈)을 이어 신계마을에 <日新臺> 아카데미를 연 것으로 보고 있다. <일신대> 중심의 아카데미가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신암선생에서 경파선생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교육기관이었음을 신암선생이 지은 <日新臺銘>에 일목요연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湯銘日新이요 孔繫日新이라탕임금의 반명과 공부자의 계사에 이른 일신이로다.
夜故有日이요 舊故有新이라밤이 있기에 낮이 있음이요 엣것이 있기에 새것이 있음이라.
夜寐必謹하야 惟行之新하고밤이라 방심하랴 잠잠에도 삼가 행실을 새롭게 하고,
舊愆必省하야 惟德之新하라옛이라 잊으련가 허물일랑 반성하여 덕업을 새롭게 할지라.
日非一日이라 新何一新인가하루 날만 날이 아닐진대 한번 새롬을 어찌 새롬이라 하리요.
日復日日이요 新加新新이라날이야 날마다 알이 오리요 새롬이야 새롭고 새로운 것.
百사如日하고 萬古如新하라백년을 이렇듯 하루같이 하고 만고를 이렇듯 새롭게 하라.
不息之功이 基於日新이니라쉬임없는 저 공이여 일신에 터전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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