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욱 목사
미술시간
제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볼 때, 미술 시간이항상 긴장되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미술 시간에 갑자기 구상을 해야 하고 , 정해진 시간에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이 와서 불안한 마음입니다. 밑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밑그림이 아주 지저분해집니다. 잘 지운다고 지우개를 박박 문지르면 종이가 벗겨집니다. 그러면 물감을 칠해도 예쁘게 칠해지지 않고 자국이 남습니다. 급한 마음에서 두르면 물감이 번집니다. 색을 덧칠한다고 작품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덧칠을 하면 할수록 더 지저분해집니다. 그림을 자꾸 수정하면 못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예 새로 그리는 것이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작가들이 고치지 않고 완성된 그림을 몇 개씩 그리는가 봅니다. 우리 교회의성화 제작자인 문순 선생이 지금 작품전을 열고 있는데 “가난한 손”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가난한 손” 그림을 13장을 그렸다고 합니다. 문 선생의 아이가 “엄마는 손만 그려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새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살고 노력할 때 성취의 보람을 느낍니다. 점점 발전을해 나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저히 한 걸음도 앞으로 더 나갈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다음 순간부터는 발전이나 현상 유지는 커녕 쇠락의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정열이 있으면 있을수록 실망이 커지고 실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무력함을 느낍니다. 나의 한계를 느낍니다.
무언가 내 생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지고 ,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도저히 그 어떤 작은 일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어떤 부분적인 개선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깊은 절망이 우리를 휩쌀 때가 있습니다. 부분적인 개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필요를 절실히 느낍니다.
더구나 과거에 의미 없이 흘려버린 시간들이 보복을 해올 때면 속수 무책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시간들, 더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들, 치를 떨며 미워했던 시간들, 타락했던 시간들이 모든 시간들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보복을 해 올 때면 현재로선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반란이 고스란히 오늘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최소한 20년이 묵은 문제이고 30년 50년 100년 묵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키며 이제사 터지는 것입니다. 잘못 보낸 시간들은 언젠가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만약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간의 물결을 거꾸로 탈 수 없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새창조의 모습
이사야는 인간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친히 하실 새로운 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위있고 능력있고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심판이 있으며 그 심판의 결과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 심판 다음에 오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온 우주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과 자연의 자연스런 진화의 결과가 아닙니다. 새 세계는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새창조, 재창조로서 가능합니다. 평화는 부분적인 개선이 아니라, 근본적인 본성의 변화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악을 멸하시고 , 정의를 살리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함 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질서와 모든 자연의 질서까지 그 본질에까지 새로워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본성이라고 믿었던 일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움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의 인생전기도 새롭기를 원하고 , 우리의 역사도 새롭기를 원합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새창조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
이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서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도저히 역사의 어둠을 깨뜨릴 수 없는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새로움을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를 낳고서 역사적 사명을 띤 위대한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라고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하는 뜻을 가진 위대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그가 유대광야에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가까이 왔느니라.” 세례 요한이 외친 “천국”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도 더 이상 망령 되이 입에 담지 않고 공경스럽게 말하기 위해서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라”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어느 지역적인 나라 또는 장소보다는 주권자와 백성 사이의 지배관계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요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닫고 내 생애를 새롭게 하고 , 이 지구상의 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탄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그야 말로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절망과 좌절이 깊을수록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으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옵니다. 이것이 고통당하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께서 제시한 해결책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전파했을 때, 백성들의 순수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세례 요한에게 나와서 자신의 죄를 깊이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른 채, 겉으로 흉내만 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가 주는 유익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불순한 동기를 지적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세례 요한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합니다. 세례 요한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잘못된 안정성을 비판합니다. 회개란 무엇보다도 종교적으로 뒷받침된 잘못된 안정성에서 각성하고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마3:9).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첫번째 잘못된 안정성은 종교적 안정성입니다.
그들이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라는 안정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세례신자요, 직분에 충실한 교인이요, 그리고 교리대로 믿는다는 것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신앙 태도도 여전히 착각이고 망상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두번째 잘못된 안정성은 의례의 주술적인 신앙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줄 알고 세례를 받으러 나왔습니다. 세례를 이용만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격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세례라는 자격증이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손해될 것은 없다.’ 마치 자격증을 갖듯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실된 회개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 이런 주술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적과 성물과 의식과 마술과 희생제사 또는 율법의 준수 등등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것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뿐입니다. 잘못된 환상을 깨는 것이 참된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들의 세번째 잘못된 안정성은 혈통적 안정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전적 또는 상속적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망상을 세례 요한은 깨는 것입니다.
심판의 내용
세례요한은 죄의 고백을 강조했습니다.
병자는 의사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병을 고백해야 더 나은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병을 시인하고 고백할 때 치유가 시작됩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참된 세례를 전하며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는 물로 죄 고백의 세례를 베풀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3: 11b)라고 선포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이는 자기보다 우월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사명자라고 강조합니다.
영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낱말은 ‘폭풍’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 이상의 것 즉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써 죄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심판의 격렬함을 말합니다. 격한 심판을 통과한 죄의 용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판은 매우 격렬합니다. 완전히 새로워지는 방법입니다. 폭풍과 같은 성령이 우리의 죄를 싹 쓸어가 버려야 합니다. 불과 같이 죄를 싹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불은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새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급격한 심판 없이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내 인생이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판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판단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려면 내 의지가 사라져야 합니다. 내 의지를 비우고 하나님의 의지로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에 행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매를 맞아도 내 부모에게 맞을 때 행복합니다. 있을 곳에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의지할 곳을 의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하나님의 벌에 대한 소름 끼치는 공포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워지길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개혁 중독증에 걸렸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칩니다. 사람들은 ‘신문에 성명서를 낸다 단체를 만든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때때로 개혁되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개혁을 하겠다고 앞장을 섭니다.
개혁은 단순한 파괴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파괴라는 수단에 의한 개혁은 반드시 역사의 후퇴로서 끝났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개혁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개혁을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일입니다. 노력이 들지 않는 일입니다.
참된 개혁은 타인만 개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올바른 길, 성숙한 길로 살아가면서 표상이 되는 것이 개혁입니다. 모범을 만들지 않는 것이 무슨 개혁입니까?
개혁은 단순한 우상 타파가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우상을 부수면 반드시 다른 우상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가지 헛된 이상을 가지고 다른 헛된 이상을 깨면서 개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상으로부터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참된 진리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우상에게 가지 않습니다.
개혁은 잘못을 부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목적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 비전도 능력도 책임도 없는 사람이 무조건 파괴한다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개혁을모범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모범이 있으면 세상은 변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도 모범에 의해서 변화되어 왔습니다. 역사는 위대한 저술과 발명과 위대한 지도력에 의한 변화였습니다.
결론은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개혁하고 , 계몽해야 하며, 선교해야 할 대상은 나 밖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굳이 찾자면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땅끝까지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땅끝이 어디입니까? 최고의 오지를 가보십시오. 그곳이 암흑의 대륙입니까? 진짜 영원한 암흑의 대륙은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는 방법은 우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의 다른 형태입니다. 심판은 우리의 과거의 그림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입니다. 그림 자신이 자기를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과거의 작품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새 작품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과거의 작품은 완전한 부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를 맡길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를 비워 주님이 들어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악마의 소행을 생생하게 묘사한 적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어떻게 악마를 이겨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악마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누가 여기 살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주 예수님께서 문에 나가 말씀하시지요. ‘마틴 루터가 여기 살았는데 이사 가고 지금은 내가 산다.’ 그러면 악마가 그의 손에 못 박힌 자국을 보고는 황급히 도망가지요.”
그렇습니다. 회개는 주님이 오시는 대로를 내 마음과 내 생활에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진실된 회개를 합시다. 우리 모두 주님의 길을 넓게 엽시다.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엽시다. 주님께서 오시는 최고의 길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시는 고속도로를 만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