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을 두고 아주 흥미로운 시를 읽었다. 아니, 나를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는 시를 접하게 되었다. 무슨 빵을 씹는 듯한 느낌이 시를 읽는 내내 들었는데, 그런 느낌은 또 다시 그 시를 읽게 만들었다. 같은 시를 총 열 번 정도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 느낌이 지루하지가 않았다.
신용목의 시를 읽으면 나는 식빵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나누어져 있는 느낌이 그렇고 또 그 밝기가 그렇고, 빵의 상태(오픈한 기간이나 가열 등)에 따라서 혹은 약간의 가공에 따라서 그 맛과 느낌이 달라 그런 생각이 든 것일 테다. 내가 식빵의 느낌을 받는 것에는 그 색감과 부드러움도 한 몫을 한다.
오늘 이야기 하는 시는 바케트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일단 색감으로 따지자면 거무스름한 느낌의 빵이라 할 수 있겠고, 그 느낌으로는 거칠고 딱딱하다는 것이다. 거칠고 딱딱한 빵은 질리지 않고 오래, 많이 먹을 수 있다. 씹을수록 그 느낌이 좋고 단맛이 더 난다. 그래서 시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다.
난 바케트를 먹을 때, 빵을 눌러서, 그러니까 0모양의 빵을 가운데를 눌러서 8자 모양으로 만들고는 전체적으로 눌러 1자 모양을 만들어서는 마른 빵의 가루를 털어내고 먹는다. 앞니로 끊어서 먹는데, 빵이 벌어지므로 자른 면이 아닌 겉면을 앞니로 끊어서 먹는다.
앙꼬가 있는 빵은 금방 질린다. 제대로 된 빵맛은 가공이 적고 단순할수록 느낄 수 있다. 구운 정도와 밀가루 냄새 그리고 발효되면서 익은 빵 거죽(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의 맛까지 느껴진다. 바케트에는 자르기 전, 초이스 할 때, 그 자태까지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에서 잘라놓은 나무 결의 어떤 단면을 보고는 한다. 이건 순전한 나의 편견일 수 있겠다.
바케트 같은 맛을 주는 시가 있는가 하면 피자 같은 맛을 주는 시가 있다. 피자는 평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구성품(구심력)이지만 판에 올리는 토핑에 따라 일체감과 더불어 입체감을 줄 수 있는데, 그의 시는 조각피자를 모아 끼운 듯하다는 측면에서 일체감과 더불어 상이한, 새로운, 이질적, 독특한 비주얼과 맛을 제공한다. 박강우 심사위원이 ‘000의 시는 더 뛰어난 응모작이 없었다면 좋은 시인이 될 가능성으로 열어두고 당선작이 될 수 있어서 아쉽게 생각한다.’는 평은 이러한 측면을 본, 이 시인 시의 월등함을 알아본, 선자의 고백이라 보여진다.
피자 위에 올려진 토핑 중에서 생과일을 올린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간간히 섞인 구어체어서, 그 느낌을 받았다.
비교적 단일한 구성의 시는 공갈빵을 먹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노랑 구역」같은 경우. (그 말이 이쁘다. 공갈빵 - 대체 불능이다.)
공갈빵을 먹을 때, 일단, 고민한다. 어떻게 해체하느냐? 어떻게 해체하느냐, 에 따라서 그 맛이 달라진다. 천차만별이다. 과장이 아니다.
빵이 부풀어 오르면서 속에 빈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는 설탕의 기운이 녹아있다. 얇게 녹아있는 설탕을 피하면서 바삭한, 그러니까 마른 빵 거죽을 집는 고민, 먹을 게 별로 없어서가 이 빵맛이다. 그런데도 끌린다.
드라이 하다. 이국적이다. 조금 어둡다. 끈적하나 경쾌하다.
‘김광명의 응모작 13편은 고른 수준의 작품들이어서 13편 중 다섯 편을 고르는 것이 본심에 오른 네 분 중 당선자를 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고 그만큼 정독이 필요했다.’는 박강우 심사위원(시와사상-‘시와사상 32회 신인상’-은 복 받았다.)의 말처럼 높은 차원의 신인 시는 오랜만에 본다.
‘광명 있으라!’는 ‘빛이 있으라!’의 다른 말이라네요. 속도 조절 잘 하시길 빕니다.
― 광명 있으시길!
DIY 사이프러스 관 짜기* [김광명]
사원 모양으로 관을 짓습니다
나무판을 말리는 동안 기도도 잘 말랐습니다 햇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성호를 그었지요
한번 쓰는 것이라고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높이를 모르고 자란 사이프러스처럼
나이도 지베렐린,시토키닌을 먹었던 걸까요 언젠가는 베어내야 하
는 순간이 오겠지요
죽음이라는 말은 사이프러스 향기였는지도 모릅니다 관을 짓는 내
내 약 냄새를 맡았습니다
뚜껑을 덮습니다 나무못 끼울 자리에 구멍을 냅니다 쇳소리만 내던
숨길이 아로마로 메꿔지겠지요
십자가 대신 장미 문양을 두고 고민도 합니다 창을 열고 얼굴을 볼
수 있는 하늘문관이 어울릴까요
여행을 떠나는 기분입니다 계획은 있지만 시간을 정하지 않았습니
다 혼자 누우면 꽉 차는 사원입니다
Cupressus sempervirens**
마지막으로 명패를 붙입니다
어제보다 한 꺼풀 더 싱싱한, 무덤을 핥습니다
* 호주 DIY 관 짜기 클럽에서 직접 관을 짜는 모습을 보고 생각함
** '사이프러스'의 어원은 '항상 살아있는'과 '상록'이다
짖지 않게 해주세요 - 나는 불안해서 살아있다 [김광명]
너를 부를 땐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면 좋겠어 안나
까레리나처럼 눈 내리는 역에 서 있는, 그 또는 그녀의 가계도에 쓰일
이름, 하나의 몸통으로 여러 개의 꼬리를 기른 알렉세이, 알렉세이 표
도르비치, 알료사, 료사, 알료시카처럼
너는 항상 노매드, 너의 동공에서 낙타가 날아올랐어 네가 나를 위
해 게르를 세운 적이 없으니 나도 너를 위해 솔체꽃을 준비할 필요가
없지 밤마다 난로를 피우는 사막에 나를 방목하면 좋겠구나
너의 이야기를 따라온 바퀴벌레가 하이힐을 물고 가는 걸 봤어 나는
첼로 소리로 올라탔지 놀란 건 아니야 넌 그저 여권이 없는 타국인 다
중 국적자 혹은 에일리언 어느 나라 말로 날아다녀도 발목 잘린 오른
다리를 끌며 몸을 흔들기 일쑤인
상상 속의 너는 임상실습 교육을 받는 걸까 이따금 온몸이 굳어버리
는 나를 돌보지 나는 너무 얌전해 다루기 힘든 환자, 똥 냄새를 풍기
는 모르모트, 성기를 어쩌지 못해 떨고 있는 X 염색체 군락지, 너는
메스에 피를 숨긴 채 실밥을 매듭짓지
너는 눈 흰자위, 흑백 사진들, 손님 없는 카페, 주문과 동시에 녹는
대낮의 골목, 무성 자막의 도시······쪼그려 앉은 자세로 외우는 괜찮
은 것들의 가면
너랑 같이 진공 목소리를 나눠 마실까 코르크를 한 움큼 토해버릴까
꿈틀거리는 코르티솔,
카페 앞에 버려진 헬륨풍선만한 파트라슈
진짜 거짓말 [김광명]
우린 드라마를 보고 있어요
피노키오는 65번 채널의 아침, 당나귀 귀와 꼬리가 달린 커피타임,
세계로 수출하는 K······
오늘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래요 여우와 고양이처럼 속 보이는 인
간이 된다고 했어요
피노키오는 코가 긴 게 어울려요 코는 자라나 잔가지를 치죠 가지
끝에는 꽃이 피고요
삼십 분 만에 시드는 꽃은 감질나요
유혹을 좋아해요 피노키오는 아이를 낳고 싶어 주인공이 되었대요
제페토 할아버지가 점지한 목소리로
봐요 거짓말은 배가 불러요 금방 인간을 낳을 것 같아요
얘야 거짓말은 금방 들통난단다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어 다리가
짧아지는 거짓말과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
사람들은 코가 기다란 가족을 볼 때 행복을 상상하는 걸까요 막장
드라마의 다음 회는 너무 느리게 오지요
톱밥에도 망치에도 꽃이 피겠죠 거짓말처럼, 15초마다 끼어드는
PPL처럼
피노키오는 진심이 살아있는 이야기
외모도 배역도 완벽한 피노키오,
아빠를 할아버지라 부르는 피노키오, 피노키오를 낳은 피노키오
간절하게 아부하는 것은 이루어질 거예요 제페토 할아버지
코는 그냥 설정이에요 코가 길어 할 수 없이 거짓말해요 거짓말할
때마다 늘어나는 코는 너무 뻔한 얘기잖아요 시청률이 코처럼 자랄 때
새파란 떡갈나무 새빨간 떡갈나무 샛노란 떡갈나무····· 꽃이 피어
요 이번 코는 총천연색이라 재방송이 될 거래요
아빠, 아빠는 어제 겨우 엄마가 낳았잖아요 채널 좀 그만 돌려요
* 동화 속 요정이 하는 말
세번째로 같은 길을 지나쳤다 [김광명]
나는 도착지를 과거에 두고 다니는 사람이다
어떤 걸 가질래? 프랑스식 발음으로, 3초 동안 뜨겁고 30분 동안 식
어버리는 땀의 서쪽
나는 헐겁게 세운 이정표 사이로 헤엄치는 방법을 안다 건물을 동공
속에 넣고 뭉그러뜨리는 수식도
길은 하나의 이미지다 샐러드처럼 알록달록하다 나는 서 있다 서 있
으면서 움직인다 흩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라서
오늘은 완벽해, 선언문을 들고 나서면 항상 처음 가는 길
누나 동생 이모 아버지 형과 내가 사는 동네
지도를 끌어당기면 딱 그만큼의 거리로 어색해지거나 울고 싶어진
다 매일 주저앉기 좋은 길 아빠가 가르쳐 주는 길은 틀린 것 같고
어딘지도 모르고 자꾸 가면서 방향을 풀어 놓는다
헤매는 것에도 영화필름처럼 영사 기능이 있다 서치라이트를 따라
걷는 원형 방황이다 출발점은 도착점이다 보풀을 일으키는 기억이 건
물을 바꾼다 분명 왔던 곳인데 새로운 곳
내게는 거울에 비친 모습과 달력을 추상화로 보는 능력이 있지만
3시 방향이야 하고 말하면 시계만 똑딱거린다 머릿속을 유괴해 바
깥에 꺼내놓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잡아당기면 부에노스아이레스공항 교회 기차역
스케이트장 오락실까지 따라 나온다 찾아가는 일은 어려운 것만이 아
니다 아예 되지 않는 일을 되게 하는 기적이다
왠지 예감이 좋으면, 모르는 길을 가고 있다
다 온 것 같은데
지상에서 온 사람들은 저마다 제 앞으로 오줌을 갈기며 산다
모든 퇴근은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고 나는 낮에 갔던 곳을 밤에는
찾아가지 못한다
누가 어떤 이유로
구두들을 데려왔는지 왼발, 춤을 추며 왼발
다리는 움직이기 위해 태어난다
뒤축 사라진 피아졸라풍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길을 품고 다니는
노랑 구역 [김광명]
― 프롤로그
지역감정이라고 부르진 않았지만 우린 모두 염색이 오래가는 미용
실을 좋아했다
― 비슷한 노랑
횡단보도는 점멸이다
파란불을 기다리는 누구도 노랑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린 모두 젠더 구별없는 커플이었다
―진화하는 노랑
그림자가 커지고 노랑이 더 짙어진다
작은 점이 뭉쳐 세이렌으로 변하기도 했다
패턴으로 번지는 일은 폭력에 가까웠지만 우리에겐 일상이 되었다
―순수한 노랑
입술을 감춘 도시다
봄에 살구를 맺지 못하는 공장이 늘어나고
우린 대를 잇기 위해 불순물을 섞지 않는 시민이다
보색을 알고 싶으면 여분의 귀를 만들어야 한다
― 노랑의 바깥
당숙은 물살이 센 곳에서 죽었다
엉클어진 가르마에서 발견된 물 빠진 머리카락에 대해 아무도 말하
지 않았다
―에필로그
내색하진 않았지만 우린 모두 횡단보도 건너
미용실에 몰래 들렸다
#김광명 #시와사상 #윤관영
첫댓글 감사합니다. 언젠가 직접 감사인사를 전할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 좋은 시를 감상하게 해 주셔서 외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초심을 잃지 마시길 바라고 또한 공부가 시의 숙명임을 잊지 마실 것을 당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