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네이버 이미지 검색이야)
정성왕후 서씨
성은 서씨(徐氏)이며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되었다. 1
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나이는 31세, 정성왕후의 나이는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를 매우 아꼈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시 용두동 서오릉 능역(陵域)의 홍릉(弘陵)이다
어린날 영조(영인군)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장희빈 과 숙종 인현왕후 동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 경종이 일찍 죽고 동이의 아들이였던 연잉군이 영조 임
정성왕후 서씨는 첫날밤 소박을 맞았음.
이유가 이상함 이유는
영조가 정성왕후 서씨랑 첫날밤에 (왕이되기 전 연잉군시절)
당시 정성왕후 서씨가 15세
영조曰 그대는 손이 참으로 곱소
정성왕후 서씨曰 소첩이 궂은 일을 하지 않아 그런듯 하옵니다.
이말 하나로 정성왕후는 소박을 맞았음
이유인 즉슨 영조의 어머니인 '동이'는 무수리 출신 이였음.
궂은 일을 많이 했던 자신의 어머니의 손을 우습게 여긴다고 영조가 생각해버림.
그리고 학자집안인 정성왕후 서씨에게 무언가 주눅이 들음.
그래서 정성왕후를 싫어했음.
영조는 진짜 오래산 임금이였음.
조선왕조 사상 제일 재위기간이 길었음.
무려 82세까지 사셨음.
영조는 극도로 불안한 정신세계를 가졌던 분이였음 아마 무수리출신 후궁의 아들이라 그랬던거.
그런 영조를 만나 험난한 세월을 보내다가 소박맞고 서른살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왕비가 됬음
하지만 왕비가 되었다고 고단한 신세가 달라지지는 않았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임.
일국의 왕비로 세상의 관심 속에 살았지만 죽는 날까지 고독했음.
정성왕후는 조선 전기 유명한 학자였던 달성 서씨 서거정이 있었고, 달성서씨 집안을 최고 명문가로 만든
약봉(藥峯) 서성(徐省)이있었다. 서성의 후예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나중에 정조 임금은 왕실
자손의 번창을 위해 자기 이름까지 이산(李蒜) 에서 이성(李蒜)으로 읽도록 한자사전의 음을 바꿈
서성은 정성왕후의 오대조로서 서성 아래로 정성왕후 친정과 조선후기의 저명한 학자 집안인 서명응 집안이 갈라졌음.
하지만 정성왕후가 결혼할 때만 해도 정성왕후 친정은 명문은 아니였음.
혜경궁이 궁궐에 들어올때 혜경궁이 정성왕후 친정은 현달한 이가 없다라고 평가했음
정성왕후의 아버지 서종제는 딸을 왕자 영조와 결혼시키기전에 소과는 합격했지만 대과는 합격을 못함.
그래서 일종의 명예직인 진사에 머물렀음. 서종제는 딸의 혼사뒤에 겨우 말직하나 얻었는데
그게 군수임.
첫날밤일화로만 보면 영조는 아주 대단한 집안의 딸도 아닌 아내에게 주눅이 들었던거임.
게다가 제일 불쌍했던건
정성왕후가 죽었을 때 이야기임.
정성왕후는 병이 엄청 위중했음.
근데 영조는 아내의 병세를 듣고도 걸음도 안함 신경도 안씀.
그러다가 서씨가 거의 죽기 직전이되서야 비로소 병소로옴. 혜경궁도
"원래 영조와 정성왕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시나 병환이 위중하시니 오신지라"
라고
영조 부부의 냉랭한 관계를 언급했음.
그런데 아내를 찾은 영조는 아내를 볼 생각은 안하고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음.
당시 사도세자는 모후의 임종을 맞아 한편으로 통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병 수발하느라
옷매무새를 돌보지 못했던거임.
영조는 그렇게 진짜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머니보다 더좋아하던 서씨의 병환에 슬퍼하여 멘붕이던
사도세자한테 화만 내고 돌아감.
그리고 결국 정성왕후 서씨가 마침내 운명하고 장례를 치루려면 절차를 진행해야하는데
영조의 명령이 꼭 필요함.
근데 영조?
걍 무관심임.
발상해야하는데
죽은 아내를 두고 영조는 내인들한테 아내를 처음만난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놈
그러는 사이 몇시간이 걍 흘러감.
정성왕후는 오후에 죽었는데 날은 벌써 저뭄..
사도세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함,
이때 공교롭게도 영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죽음.
영조는 그제야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하고
신하들이 극구 만류하는데도 부마의 집으로 갈려고함..
아내가 죽었는데
사위가 죽었다고
사위한테 가려고 했다 이말.
장례는 진행할 수 있게 됬지만, 신하들은 아내가 죽은 판에 사위가 죽었다고
가겠다고 때쓰는 임금을 말렸음.
왕후는 여염집 부인이 아님. 나라의 어머니 국모임.
부부사이가 아무리 안좋아도 임금이 국모의 죽음을 외면할 수는 없는법임.
영조는 누가 봐도 과한 행동을 했음.
[영조실록]에 승지,대사간 등이 말리자 영조가 그들을 해임시켰음.
밤에 화완옹주 집에 갔음 결국.ㅋ
자정넘어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음.
정성왕후 서씨는 죽어서도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얻지못함.
정성왕후 환갑도 걍 지나감.12월임.
영조가 후궁 문씨처벌때문에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와 대립해서 소동이 엄청났음.
하지만 이미 그전 11월에 약방 도제조 김약로와 우의정 김상로가 왕비의 회갑연을 거듭 청했을때도
영조는 허락안했었음.
정성왕후는 인생의 가장 큰 경축일인 환갑도 아무행사가 없었음.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정성왕후가 살았던 대조전을 단. 한번도 찾지않았다.
라고 적혀있음.
[승정원일기]에 '상어대조전'즉. '임금께서 대조전에 납시었다'가 한건의 결과도 나오지 않음.
정성왕후는 이례적으로 오래사는 남편덕에 무려33년이나 왕비로 살았지만 영조가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는 건은
한건도 보이지않음.
영조는 자기애가 매우 강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남의 기분 이해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족하고
남편 혹은 부인이 잘 되거나 자녀가 영달하는 것에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잘 되어야 행복한 그런 사람이었음.
다만 그런 사람들이 완벽론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의도적으로 훈련을 통해 남의 감정 이해한 듯 함
그래서 백성들 소리는 잘 들었지만 자기 아들 소리는 못 들은 거.
화협옹주가 그런 성격의 희생자
그런데 사실 화협옹주는 언니나 동생에 비해 못 받은 것이지 다른 옹주들 평군 이상은 받았음
그럼 왜 정성왕후는 극도로 대우 못 받았을까요?
이유는 사도세자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한중록은 친모자관계가 아님에도 매우 효성이 지극했고 이는 남편의 성품이 원래 그랬다라고서술합니다
정성왕후는 평소 대조전 큰방에 거처했지만 체증이나 감기 같은 작은 병만 걸려도 건넌방에 내려와 살았음.
그이유는 정성왕후는 소생이 없었음..
병이위독해지자.
"종사를 이을 왕손을 낳을 대조전이 얼마나 지중한데, 내 감히 이집에서 생을 마치리" 하면서,
대조전 서쪽에 있는 관리각으로 바삐 옮겨가서 죽었다(한중록73쪽)
라고함...ㅠㅠ
옆방으로 넘어가서 서씨는 검은 피를 한요강이나 토했다고함..
왕후로써 책임을 다하지못해 송구스럽다고 했음.
그래서 직접 낳진 않았지만 후궁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을 수 있었음.
그래서 경희궁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친생자로 삼음.
정성왕후는 사도세자를 친생자처럼 더 극진히 사랑해줬음.
사도세자도 자신을 잘 보살펴준 정성왕후에게 효성을 다함.
엄격한 성품의 생모 선희궁과 대조되어 더좋아했음.
정성왕후가 죽기직전 모후가 토한 피 그릇을 들고 나와
의관에게 보이며 울었고, 정성왕후가 의식을 잃자 "소신왔소,, 소신왔소"하고 울부짖었다고함.
혜경궁이 정성왕후가 토한 피가 어려서부터 영조때문에 쌓인것이 다 나온거 같다고 했음.
혜경궁은 정성왕후의 가슴속 응어리를 보았던거 같음.
정성왕후가 52살때 영조는 신하들한테 정성왕후 일로 화를냈음 ㅋ
내의원 세 수석 신하가 왕에게 뵙기를 청함 이유인 즉슨,
도제조이자 영의정인 김재로가 먼저 임금의 안부 대왕대비안부 묻고 왕비의 안부를 물으려는 찰나.
"왕비의 안부야 내 대답하지 않아도 경들이 벌써 잘 알것아니오. 왕비가 원래 담증이 있었는데, 이번일로 인해 더욱
편치 않소 . 이번에 사실 왕비에게 별로 새로운 증상이 없는데, 중간에서 잘못 전하여 삼제조가 나를 보자고 하기에 이르렀소.
이 일은 궁중의 기강과 관계되는 일이오. 매우 놀랍소.왕비가 이일로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이제 식사도 하지 않소.
말을 전한 시족들이 서로 탓하며 변명한다고 해도 그대로 둘수 없소. 그리고 수의는 더욱 그릇되었소.
나에게 먼저 말했으면 처음부터 이런 일이 없었을것을. 시종에게 말을 전하여 약방 제조들에게까지 흘러가게 했으니
잘못이 매우 크오. 말을 잘못 전한 시종은 해당 관청에 죄를 묻게 하고 수의는 의금부에 잡아들여 조처하는것이
옳소."
이말이 무슨말이냐면 자기한테 먼저 말안하고 왕비를 치료하겠다고 해서 그럼.
집안일을 바깥에서 먼저 알고 말을 꺼낸게 불쾌했던거임.
신하입장에선 평소 영조가 왕비에게 무심해서 그렇게 한거고 영조는
자기 무관심이 들킨 거 같아서 화낸거임.
내가무심하다고 해서 너희가 나를 이렇게 까지 욕보이냐 한거임.
신하들이 왜이랬냐면 정성왕후는 병이 심했는데 걍 담증이라고 했음.
걍무관심 담증도 종류가 여러가진데 걍 자기도 걸렸었다고 걍 넘김.
정성왕후가 낙상했다는 소식의 승정원일기에도 별일아니라는듯이 넘김.
의관들은 이미 이런 영조의 무관심을 알고 있었기에 처벌위험을 감수하고 약방제조에게 알린거임
왕비병증이 심각한데 임금한테 말해야 별 소용없으니 그렇게 알린거임.
정성왕후 가슴에는 새까만 숯덩이가 앉았을거임..
그리고 원래 왕들 옆에 왕후무덤 놓는데
정성왕후는 혼자 있음. 홍릉에.
정성왕후 뒤에 정순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때문에 자신의 옆에 뉘이려고
정성왕후 홍릉옆에 영조무덤 못만들게함.
그래서 왕비중에 유일하게 혼자 있는 왕릉임..
죽어서까지 외로웠던 정성왕후 서씨..
정성왕후가 죽고 영조는 15살짜리 를 왕후로 들임..
이때 영조나이 66세...
영조가 업적이 많은 왕이지만...참....
첫댓글 저한마디때매몇십년을...아무리그래도그렇지
진짜 너무 한듯..얼마나 힘들었을까ㅠㅠ
아.. 서씨..
나도서씬ㄴ데..
소생이뭐야..ㅠㅠ?
자식을 뜻하는거 같아!
울엄마 달성서씨인뎁..
헐....ㅠㅠㅠ
너무해..
ㅠㅠㅠㅠ얼마나외로웠을까ㅠㅠ
그나저나 열다섯이라니열다섯이라니...
말의중요성ㅠㅠㅠㅠ
아졸라빡친다......
와 진짜..한이 얼마나 맺혔을까
헐진짜ㅜㅜ나쁘ㄴ다
와 진짜나쁘다 이왕후분 처음알았는데 우리집안 조상님이라니 그리고 영조임금도 너무하네
내가 달성서씨인데.....억울해.....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건 별로 중점을 두는 얘기가 아닌것같아...그건 다 이해하지만 다른쪽을 말하는거잖아 글에서도 그렇고
아ㅡㅡ영조ㅡㅡ 이순재아저씨 !!!! 왜그랫어!!!!!불쌍하다.ㅠㅠㅜㅜ
헐...
뭔가이상해
너무햇다.......
ㅋㅋㅋ그럴수도있고 저럴수도있는거지..
내가 달설서씨...ㅠㅠㅠ우리 조상님ㅠㅠㅠㅠㅠ
사도세자도 너무 안쓰러움
나 달성서씨
우와 달성서씨많구낳ㅎ
황후 너무불쌍하셔ㅠㅜ 다음생에선 사랑만받고 사셨으면 좋겠다...흡...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