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는 콩브레의 추억들을 상기시킨 후, 그 추억의 가치가 의지적인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덧없는 감각에 의해서 제공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밝히는데, 이러한 덧없는 감각은 자신의 내면에 갇혀있던 시간을 해방시켜주었다. 이러한 사유는 <되찾은 시간>에서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그 유명한 마들렌(그 맛은 매우 풍부하게 콩브레의 몇 가지 이미지들을 밝혀주고, 옛날의 자아를 소생시킬 것이다) 에피소드는 프루스트의 미학을 밝혀준다.
Ⅱ. 마들렌
콩브레는 나의 취침이라는 무대이고 그 비극이었다는 것뿐, 이제 그밖에는 아무 것도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게 된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내가 몹시 추워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평소 습관은 아니었지만 홍차를 좀 마시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어머니는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짤막하고 통통한 과자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가느다란 홈이 패인 조가비 껍질 속에서 본떠낸 것 같았다. 울적한 하루였는 데다가 내일도 쓸쓸하기만 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마음이 짓눌려 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홍차 한 스푼을 입으로 가져갔다. 홍차 속에는 마늘렌 한 조각이 부드럽게 녹아있었다. 그런데 과자부스러기가 섞여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의 내면에서 뭔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일종의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것은 고립되어 있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쾌감이었다. 그 쾌감은 마치 사랑이 가져다주는 효과처럼, 어떤 소중한 정수로 나를 충만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그 즉시 나는 인생의 유의변전에 초연해지고, 인생의 재액이란 무해한 것이며, 인생이 짧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차라리 그 정수는 나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는 나 자신을 더 이상 평범한 존재, 우발적인 존재,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라는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을까? 이 기쁨은 홍차와 과자의 맛에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의 맛을 무한히 능가하는 것이어서, 동일한 성질에 속하는 것일 수는 없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디서 이 기쁨의 정체를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처음 마셨을 때 이상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시 또 한 모금. 그러나 이번에는 두 번째 만큼도 못한 느낌이었다. 이제 그만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료의 효력이 감소되는 것 같다. 내가 찾고 있는 진실은 이 음료 속에 있지 않고, 나 자신 안에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나 자신 가운데 있는 진실을 눈뜨게 하긴 했으나, 그 진실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며, 조금씩 그 효력을 상실하면서 막연히 되풀이하여 똑같은 표명을 할 수 있을 뿐이어서, 나는 그러한 표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결정적인 해명을 위해서 그 음료에 다시 한 번 그러한 표명을 해주도록 요청하여, 지금 당장 그것을 자유롭게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되찾고 싶은 것이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정신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진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은 정신이 할 일이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심각한 불확실성. 그것은 정신이 스스로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느낄 때마다, 그리고 정신이 탐구자인 동시에 암흑지대로서 거기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되고, 거기서는 정신이 소유하고 있는 온갖 지식이 무가치하게 될 때의 심각한 불확실성이었다. 진실의 탐구? 그뿐이랴, 창조하는 것이다. 정신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직면하고 있다. 정신만이 그것을 현실로 존재하게 할 수 있고, 이어 그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 미지의 상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 하나 논리적인 증거라고는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그 행복감과 실재성은 명백하여 그 앞에서는 다른 모든 생각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상태를 다시 한번 출현시켜 보려했다. 나는 사고의 흐름을 거슬러 최초로 한 숟가락의 홍차를 들었던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똑같은 상태를 되찾는다. 그래도 새로운 빛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 정신에게 가일층의 노력을 요구하며 달아나는 그 감각을 다시 한번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는 그 감각을 다시 잡으려고 애쓰는 이러한 정신의 비약이 그 무엇에 의해서도 꺾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일체의 장애를, 일체의 잡념을 멀리하는가 하면, 옆방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귀를 막고 주의를 흩뜨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무런 성과 없이 정신이 피로해 지는 것을 느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정신에게 지금까지 거부해왔던 방심을 강요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최후의 시도를 하기에 앞서 기력을 회복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런 다음에는 정신 앞에 공허를 만들어 아직도 생생한 저 홍차의 첫 한 모금의 맛을 다시금 정신과 대면케 했다. 그러자 나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가 소스라치면서 몸을 움직이고, 일어서려는 것을 느꼈다. 깊은 물 속에서 닻을 끌어당기듯 그것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떠오른다. 그것의 저항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머나먼 시간의 거리를 지나서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내면에서 이렇게 꿈틀거리는 것, 그것은 분명히 어떤 심상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맛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맛의 뒤를 따라서 나의 표면에 떠오르려는 시각적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먼 곳에서, 너무나 막연히 허우적거리고 있다. 휘저어놓은 것처럼 온갖 색채가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소용돌이쳐서 뒤섞여 있는 이 생동감 없는 기억의 반영을 내가 가까스로 기억한다 해도, 나는 그 형상을 분간할 수 없고, 또 설명해줄 수 있을만한 유일한 해설자에게 부탁하듯이 그 반영에게,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여 그것과는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게된 그 반려, 즉 그 맛이 표명하는 것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 과거의 어떤 시기에 관련된 것인지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었다.
과연 지금 동일한 한 순간의 인력이 저 먼 곳으로부터 나의 내면의 심층에 이르러 유인하고, 감동시키고, 북받쳐 오르게 하는 그 추억, 그 옛 순간은 나의 뚜렷한 의식의 표면에까지 도달할 것인가? 나는 모른다. 지금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떠오르다말고 다시금 침잠했는지도 모른다. 그 어두운 밤 속에서 언젠가는 그것이 다시 부상할지 누가 알랴? 열 번이라도 되풀이하여 침잠한 추억 쪽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때마다 소임이 수행하기 어렵거나 과업이 중대하다 싶으면 아예 그것을 회피하게 만드는 그 무기력은 그런 짓은 이제 그만두고 차나 마시면서 손쉽게 반추할 수 있는 오늘의 권태라든가, 내일의 욕망이나 생각하라고 나에게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단번에 추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맛은 바로 내가 콩브레 시절에 일요일 아침마다(일요일에는 언제나 미사시간 전에 외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레오니 고모의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가면, 고모가 달인 홍차나 보리수차에 담궜다가 곧 잘 나에게 주곤 하시던 그 조그만 한 조각 마들렌의 맛이었다. 그 조그만 마들렌을 맛보지 않고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 이후에 제과점의 선반에서 자주 그것을 보기는 했지만 먹은 적이 없어 그 모양이 콩브레 시절의 나날을 떠나서 그보다는 근자의 다른 나날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어쩌면 이렇듯 오랫동안 기억의 바깥에 버려져 있던 이러한 추억에서는 살아남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붕괴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래서 이 추억의 형상―그리고 준엄하고도 경건한 주름에 감싸인, 그토록 풍만하고 육감적인 그 과자의 조그만 조가비의 형상―도 소멸했거나 혹은 반쯤 수면상태에 빠져 있어서 다시금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수 있는 팽창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붕괴된 뒤에 그 옛날의 과거에서는 이제 존속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때에도, 냄새와 맛만은 무엇보다도 덧없는 것이지만 오히려 뿌리깊고 보다 비물질적이면서 더욱 끈질기고 더욱 성실한 것이어서, 그것은 영혼처럼 변함 없이 오랫동안 남아서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상기하고 기다리고 기대하며, 작은 물방울처럼 거의 촉지할 수 없는 정도의 냄새와 맛일지라도 결코 휘어지는 일 없이 그 위에 추억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Ⅰ, 4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