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락골 추모공원은 개발만능주의 소산인가? |
역사·문화·전통 단절시키는 ‘헛깨비 도시’ 안산 부채질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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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추모공원 부지가 양상동 서락골로 결정되면서 안산시와 주민들 간 지역논쟁이 뜨겁다. 급기야 정치권이 나서면서 힘겨루기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안산시든 정치권이든 해당 주민들의 분노와 요구를 제대로 달랠 수 있을지, 적절한 타협점을 과연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추모공원과 관련해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건립 필요성 보다는 지역에 대한 입장과 해당 부지를 보는 관점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데 있다. 해당 지역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지역 공간의 오랜 가치와 역사 문화, 원주민들에 대한 이해관계들을 일거에 무시해 버린 행정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주민들은 재정지원이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 수 있게 내버려 달라는 것이고 또 다시 ‘전체를 위한 희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변들이다.
사실 안산시가 과연 무슨 자신감으로 추모공원을 밀어붙였는지 모르겠다. 안산 도시형성 과정에 대한 성찰이나 도농균형 발전전략도 없이 결과적으로 지역여론일 수 있는 주민정서에 불을 지핀 꼴이 되었는데, 마치 점령군처럼 들어앉아 시민행복을 부르짖는다고 다수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예의 다수 시민들은 침묵할 것이며, 주민들의 반발과 논쟁은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안산 도시공동체의 정체성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추모공원 문제를 일방적으로 지역 이기주의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행정과정과 절차를 거쳤다고는 하나 사회적 합의와 동의가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안산의 경우 지역 간 상호 이해가 부족하며 공동체적 판단을 내놓기에는 ‘도시 유동성’이 크고 마치 ‘이방인 집합’ 같은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재산 가치나 생활편익으로 밀려들었던 시민들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 속에 땅을 지키면서 지역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주민들의 형편과 의지를 우선적으로 살펴야할 이유이다. 특히 해당 주민들은 안산시가 개청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아왔던 사람들이며, 거주역사나 정주의식으로 볼 때 누구보다도 안산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주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추모공원 문제는 안산의 정신과 정체성, 안산 미래를 위한 ‘주민들의 저항’이라는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안산시는 추모공원 건립을 통해 안산이 더 선진화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해당 부지선정은 복잡한 기술적인 여건을 포함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편의적인 발상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양상동의 공간적 가치와 문화, 역사적 이해가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지자면, 그렇지 않은 땅이 어디 있겠냐만, 이를 고려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정책근간을 흔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양상동은 부곡동, 수암동 등과 함께 간척지 땅에 건설된 안산 도시경관 중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자연부락이자 전통지역이다. 외지인들에겐 미개발된 오지로 보이고 어쩌면 시 행정 눈에는 대규모 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산역사와 생태적 흐름이 내재해 있는 소중한 삶의 공간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추모공원 예정부지로 올라왔던 대부분 지역이 과거 역사시대를 관통해온 문화재와 유물, 선조들의 공덕과 자취가 숨 쉬는 공간들이었다. 그래선지 안산은 역사와 문화, 전통과는 단절된 ‘헛깨비 도시’라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경험해왔듯 불과 2,30년 만에 수십만의 신도시는 세워질 수 있겠지만, 땅의 역사와 가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수백 년간 풍상 속에 우리 정신과 문화로 아로새겨야만 한다.
이번 추모공원 사태가 안산의 장소적 가치와 문화를 찾아나가고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또 안산 개발과 성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개발만능주의 소산은 아닌지 성찰해봐야 한다.
안산의 진산인 ‘마산’의 울창한 산맥들이 내려와 안산평야로 펼쳐진 동네가 양상동이다. 마산에서 시작된 개울이 양상동을 지난 장하동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과 합류하여 안산천을 이루어 서해로 유입된다. 양상동이란 지명도 버드나무 ‘양’(楊)으로, 마을이름도 개울 따라 자라는 버드나무 골 ‘윗버대,’ ‘아랫버대’로 불렸다. 도심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안산천의 발원지자 꾀꼬리가 많아 ‘꾀꼴봉’이라 불렸던 이곳이 고속도로와 인터체인지로, 이젠 추모공원으로 어떻게 변해버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천년 안산’에 근접한 800여년 마을 형성 역사를 가진 양상동 역시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많은 곳이다. 청동기 지석묘 군과 적석토광묘와 주거지가 있고 특히 조선시대 전국 도로교통의 요충지 안산의 유일한 역(驛)이었던 석곡역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조선시대 역은 통신기능 뿐만 아니라 역사의 제공이나 운송의 기능을 겸하여 국가동맥의 구실을 하였다.
안산향토사연구소 정진각 선생은 양상동 석곡역지와 인근 원후마을 서서울IC 부근은 관원 유숙지인 원(院)이 있어 안산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최대 교통로였다고 한다. 그곳엔 전국의 이름난 선비와 위인들이 왕래를 했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안산의 문화적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명소는 인물을 키우고 인물은 문화를 낳는다. 이 마산 산세를 따라 조선을 대표하는 충절과 의열의 정기가 선연히 서려있다.
양상동의 강징 선생은 연산군 폭정에 항거해 중종반정 첫 깃발을 올렸던 분이고, 산 넘어 화정동 고송정지와 오정각은 김문기, 김충주의 3대에 걸쳐 단종복위 충절로 그 통곡의 눈물이 소나무를 말라죽게 했던 기념비적 장소이기도 하다.
역사문화적 차원에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은 안산 정신의 뿌리를 찾지 못하는 현재의 우리들의 삶과 깊게 연관되어있다. 후세에 길이 빛낼 위대한 유산인 안산 ‘충절의 길’을 제대로 닦지 못하고 고속도로나 추모공원 등으로 대치해 나간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진각 선생은 이곳에 ‘충효역사관’을 짓고 양상동, 와동, 화정동에 이르는 그 충절의 길을 개척해 안산 역사문화의 정신적 명소로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안산시의 이 일대 지역문화 선양의 그랜드 디자인이 펼쳐질 수 있다면 그 역사의 후손들인 주민들과 함께 이 또한 추모공원의 새로운 해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갑곤 기자
첫댓글 예 양상동에 그런 깊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개발로 한번 파헤쳐지면 복원이 불가한 역사,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전하고 후대에 전하는 노력이 필요함에도 단지 생활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서 파헤쳐지는 개발논리는 개발이 아니라 파기라고 봐야할 겁니다.
‘충효역사관’을 짓고 양상동, 와동, 화정동에 이르는 그 충절의 길을 개척해 안산 역사문화의 정신적 명소로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 선각자들의 말씀 왜? 왜? 왜~애 ? 못알아채리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