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러움이 고스란히, 세계문화유산의 창덕궁

[김무홍(창토2반-22기)]

◇ 세계문화유산의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경복궁에 이어 태종에 의해 1405년에 창건된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 후원은 궁궐 중에서 유일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써 높은 가치로 평가받는다.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고궁이라는 찬사와 함께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을 비롯하여 경복궁과 창경궁이 임진왜란으로 잿더미로 변하였다가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창덕궁이 먼저 전각 대부분이 복구되었다. 인조반정 때에는 인정전을 제외한 전각 모두가 소실되었가 1647년에 중건하였다. 인조 대에 창덕궁 후원에 많은 정자와 연못을 만들었으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합과 연경당은 지금의 모습이다.
유례없는 코로나19 창궐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요되면서 세상이 뒤숭숭하고 생각의 폭이 어지러운 시기일지라도 계절은 망설임 없이 찾아와 그들만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더위 기승이 여전한 상황에서 9월이 찾아왔다. 머지않아 가을이 다음 차례를 저울질하며 코로나와 장마에다 잦은 태풍으로 푹 가라앉은 우리의 심신을 선선하게 다독여 줄 것이다.
좁은 차로 대신 널따란 인도가 배려된 사람 중심의 돈화문로가 여정의 어귀로 내민다.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 오늘따라 맑은 빛을 쏟아내고 고운 햇살이 무척이나 반갑게 다가온다. 하얗게 단장한 너른 인도지만 오가는 발길이 드물어 거리가 헐렁하다. 밀려오는 여유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를 어깨동무 삼아 느긋함을 마음껏 소유한다.
시선을 요리저리 건너뛰다가 유난히 번득이는 유럽풍의 고상한 카페에 주목하게 된다. 테라스가 돋보이는 카페에서는 고소한 빵 굽는 풍경이 흐르고 생두를 볶아 내보내는 은은한 향기에 시선이 사로 잡힌다. 사람 만나는 곳이라면 의당 커피 한잔이 따라올 만큼 커피는 대중에게 필수 음료로 익숙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커피 마니아들은 공허한 마음 구석을 채워주고 기분 전환하는 데에 현대 문명의 산물인 커피를 당연하게 받아드린다.
돈화문로는 우리소리박물관, 돈화문국악당, 떡박물관,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의상박물관, 고미술 갤러리, 공방, 국악 동아리, 국악 학습원 등의 전통문화와 서구에서 들어온 커피, 빵가게, 와인 파는 곳 그리고 젊은 음악이 흐르는 사조가 어우져 있다. 건물 하나마저 층간을 경계로 동적인 현대와 정적인 전통이 공유한다. 전통이 숨 쉬는 고도古都에서 시대와 장르를 편 가르지 않고 문화가 고르게 아롱지어주는 돈화문로는 걷고 보는 거만으로도 낭만에 젖을 수 있다.
 
◇ 돈화문 주변과 궐내각사
돈화문로와 율곡로가 교차하는 삼거리에 이르러 창덕궁의 정문이자 ‘백성을 두텁게 교화한다.’는 돈화문敦化門과 맞닥뜨린다.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있어 대문의 자리가 가운데 대신 남서쪽으로 쏠려있다. 누각 2층에서는 통행금지 시각이 되면 종을 울리고 해제 때는 북을 쳤다고 전한다.
돈화문의 월대는 일제강점기에 궁궐로 차량 진입을 위해 노면 아래에 묻혀 도로로 왜곡시켰다. 1990년대 대대적인 창덕궁 정비 사업에 맞춰 복원하였음에도 월대의 길이가 짧고 낮아 위엄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현재 정면을 가로지른 율곡로의 마루를 낮추어 상대적으로 월대의 품격을 높이는 정비가 진행 중이다.
돈화문 안으로 입장한다. 너른 마당 좌우로 눈에 띄게 돋보이는 8그루의 회화나무는 모두 합쳐 하나의 천연기념물이다. 허리가 휘고 서 있기에 힘들어하는 모습이지만 가지마다 촘촘하게 맺힌 이파리는 생기 넘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1830년 무렵에 만들어진 동궐도東闕圖에서 노거수老巨樹로 표시되는 회화나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을 다시 지은 거로 보아 400년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회화나무는 궁궐을 비롯하여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많이 심었다 하여 ‘학자나무’라고 불렸다.
돈화문과 경추문 사이에 왕과 왕실을 밀접하게 보좌했던 궐내각사闕內各司이다. 조선의 대부분 관청이 궐 바깥에 있었던 거와 다르게 정치를 보좌하던 홍문관(옥당), 건강을 보살핀 내의원(약방), 정신 문화원을 담당한 규장각(내각) 그리고 임금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했던 예문관 등의 궐내각사는 왕 곁에서 근위 보좌하였다. 경관이 수려한 금천을 끼고 건물들은 어는 궁궐보다도 당시의 규모로 갖추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고, 2005년에 지금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로 흐르는 명당수 위에 화강석으로 가지런하게 쌓아 설치된 금천교錦川橋는 궐내로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이다. 그동안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축조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조선의 궁궐 돌다리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다리 상부는 불룩한 아치형이며, 바닥은 3칸으로 나누고 모두 장대석으로 고르게 깔았다. 다리 가장자리에 동물상을 조각하여 예술성을 높였다.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성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 난다.
 
◇ 국정수행과 학문수양의 외전
창덕궁 중문中門에 해당하는 진선문進善門에 이어 왕들의 즉위식을 거행한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간다. 인정전은 신하들의 하례, 사신 접견 등 국가적 중요 의식을 치르던 정전이다. 경복궁 근정전에 비해 월대가 낮고 난간석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단층單層 구조로써 천장이 높고 화려하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었고, 현대식 유리창과 전등을 새로 갖추는 등 변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인정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권위 있는 건물답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선정전宣政殿으로 가고자 인정전 동쪽 광범문廣範門으로 빠져나온다. 선정문에서 편전인 선정전까지 행각으로 한통속을 이뤘다. 창건 초기 명칭은 ‘조계청’이었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국사를 논하며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이며, 국정 세미나 격인 경연과 각종 회의가 열렸다. 중종의 계비이며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조선 중기 역사의 질곡이 이루어진 곳이 선정전이다.
선정전은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 인왕산 기슭의 인경궁을 헐어 와 중건하였다. 희정당으로 창덕궁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혼전魂殿과 빈전殯殿으로 쓰였다. 바닥은 마루가 깔려있고 뒤쪽으로 일월오병도를 남겼다. 창덕궁 안에는 청기와 건물이 여러 채 있었지만 현존하는 궁궐 가운데 선정전이 유일한 청기와 구조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들어선 전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몇 시간이 쉬이 흘러가고 마침내 햇빛이 바닥에 달라붙은 탁 트인 공간으로 내어준다. 쉴 곳이 따로 없는 궁궐에서 지탱했던 두 다리에 부하가 걸릴 즈음 선정전 남쪽과 숙장문 동쪽의 조그만 동산 기슭에서 시선을 잡아주는 고즈넉한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틀었다. 이곳은 한일병합 이후 순종황제의 신식 자동차를 보관하던 어차고御車庫였는데, 현재 어차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서 전시 중이다.
창덕궁을 더 알아보고 더 찾아보기를 반복하는 동안 세 번의 계절이 표정을 바꿔갔다. 인간은 감정感情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라고 한다. 정情은 자연이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교감하는 횟수를 더 할수록 깊어지기 마련이다.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는 걸음은 힘들고 무미건조하다고 싶게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생각을 자근자근 토닥여주며 애정으로 바라보면 뿌듯함이 생긴다. 생각을 어떻게 무장하기에 따라 보폭이 정해지고 느낌이 달라진다. 
 
◇ 왕실 생활공간의 내전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내전 일원은 전조후침前朝後寢에 따라 궁궐 앞쪽은 조정을 두고 북쪽에는 침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을 배치하였다. 중국의 고대 궁궐은 주례周禮를 근거로 전조후시前朝後市를 따랐지만, 이처럼 북쪽에 생산과 교역의 기능인 시장을 두면 화를 부른다고 간주하여 조선의 궁궐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받아들여 북쪽에 사람 통행을 막고 복을 받는다는 이념으로 전조후침을 도입하였다.
인정전이 창덕궁에서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熙政堂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중심 건물이었다. 원래는 숭문당이었으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아 편전 기능을 대신하였다. 지금의 희정당은 창덕궁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희정당 굴뚝 네 면에 길상과 문자 문양으로 아름답게 아롱지은 장식은 예술적 가치가 높다. 
희정당 뒤편으로 외부와 단절되었던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던 만큼 세자를 ‘크게 만든다’는 뜻으로 대조전이라 지었다. 대조전과 동쪽으로 맞닿은 흥복헌興福軒은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지어 현재의 모습이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쪽 경훈각 등이 안에서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하는 등 궁궐의 복합적 구도를 이룬 특이한 건물이다.
이름만 보면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았던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은 궁궐의 어떤 건물보다 많은 수난을 겪었다. 이곳에서는 수차례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치가 참석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려 ‘한일병합’이 결정됨으로써 519년 이어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 참극을 가져다주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창덕궁 침전 일원에는 근대 문물의 도입 흔적이 역력하다. 대조전의 자개장 거울과 현대식 나무의자, 수라간 타일이 그렇고, 희정당 굴뚝 마감재로 쓰인 색소 입힌 구운 벽돌 등에서 당시의 시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희정당 앞마당에 죽은 자의 묏자리에서나 쓰인 잔디가 깔려있어 시선이 불편하다. 사람 사는 곳에 잔디 식재는 일본 문화인데, 이곳 잔디는 일제의 입김이 작용하였을 것이며 당시의 풍수지리 정서에 절대 반하는 문화 충격이기 때문이다.
 
◇ 차세대 대권을 꿈꾼 동궁 권역
유력한 차세대 대권 주자인 왕세자가 독서를 하며 학문을 연마했던 성정각誠正閣으로 향하고자 높게 솟은 영현문迎賢門으로 들어간다. 성정각 현판 글씨는 정조의 어필로 전해지지만, 건물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으로는 희우루喜雨樓이라는 현판으로 달려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왕실의 내의원으로 사용하였다.
성정각 뒤편의 관물헌觀物軒에선 순종이 태어났으며, 김옥균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해 고종이 잠시 이어한 곳이다. 개화당 세력이 이곳을 선택하고 작전본부로 삼은 것은 창덕궁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라서 적은 병력으로 청나라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결국 고종이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명성황후 거처로 돌아가는 바람에 개화당의 집권은 이른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성정각과 관물헌 사이에는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심겨있다. 옛사람들이 살구나무 군락을 보면 ‘우선 살구 보자’고 해서 병원이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한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에서 행인杏仁이라 부르는 살구씨는 치료하는 처방이 200가지나 이를 만큼 만병통치로 쓰임새가 많아 ‘약방의 살구’로 불렸다.
살구 열매는 이미 여름 수확을 마쳤지만 그 곁의 감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하며 가을 수확을 예약해놓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은 우리 가을의 풍성함을 상징하는 대표 과일이다. 감은 설사를 멈추게 하고 술을 깨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알려졌다. 성정각에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점과 이곳이 한때 내의원으로 쓰였다는 정황을 두루 고려하면 ‘우선 살구 보자’는 말은 실없는 우스개만은 아닌 듯싶다.
시절은 기어코 8월을 밀어내고 9월을 내주었다. 언제부터인지 귀뚜라미가 울려주는 가을 서곡과 함께 조석으로 찬 기운이 잔잔하게 흐르며 다가올 계절을 재촉한다. 머지않아 성정각의 시퍼런 땡감이 고운 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면 서성거리는 가을은 머뭇거림 없이 다가오겠지. 그리고 수확을 다 마치더라도 한두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놓고 우리 선조들의 인정 어린 따뜻한 속마음을 전해줄 것이다.
 
◇ 마지막 황실 여인들이 머문 낙선재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서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승화루承華樓 등의 일원을 일반적으로 낙선재라 한다. 헌종은 정조를 닮고 싶은 의지로 1847년에 낙선재를 세웠다. 정조 즉위 후 개혁의 일환으로 규장각을 만들어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였듯이 헌종 또한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하며 선대 따라 하기 의지를 담았다.
헌종은 1848년에 낙선재 동쪽에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을 지었다. 헌종은 후사가 없자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맞이하여 그녀가 거처할 석복헌을 지어준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자한과 마할의 영원한 사랑의 거처인 타지마할과 규모만 다를 뿐 헌종과 경빈의 사랑채로 쓰인 석복헌은 공통으로 로맨틱한 사연이 담겨있다. 한편, 수강재는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로 지었다. 정비가 아닌 후궁의 건물과 순원왕후의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었다는 점은 경빈의 위상을 높이고 그녀가 낳을 후사의 정통성을 높이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장밋빛 꿈은 헌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2년 만에 짧고 굵게 접어야 하였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아 헌종의 검소하면서 소박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이다.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다. 마지막 황태자로 왕위에 못 오른 비운의 영친왕이 머물다 갔으며,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의 배우자 이방자 여사도 덕혜옹주와 더불어 서로의 상처를 다독여주며 이곳에서 만년을 함께하다가 1989년 4월 9일 간격으로 생을 마감했다.
 
◇임금의 마음을 훔친 후원
동궁 일원부터 시작하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장을 따라 오르며 후원으로 들어간다. 길은 시선을 잡아주지 못하고 생각은 추억 속으로 돌려놓는다. 걷는다는 즐거움은 걷는 동안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마신 커피 향이 시간을 두고 생각 속에서 여울져 흐르듯 걷는 여운은 일상으로 이어지고 공허한 마음을 활력으로 채워 준다.
구불구불한 오르막이 지쳐 내리막으로 이어지고 그 끝자락에 둥근 섬을 품은 부용지芙蓉池에 두 발을 담근 부용정芙蓉亭이 모습을 드러낸다. 학문적 용도와 휴식의 공간으로 쓰인 부용정의 지붕은 연못에 피어 있는 연꽃 한송이를 형상하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300평 규모의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정조가 정약용, 박제가 등과 실학을 논한 규장각奎章閣 자리였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은 왕실 도서관이었다.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 과거시험인 춘당대시를 치렀는데,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장원급제한 데가 이곳이란다. 양화당 일대에서는 정조 시절 조선의 문화부흥의 핵심 역할이 수행되었다.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지를 비롯하여 느티나무가 많이 있는데, 초록이 짙은 시기에는 여기저기 눈에 띄기 마련이다. 수령이 길고 가지를 많이 뻗어 잎이 무성한 관계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마을 앞 대다수 정자에서 함께한다.
궁궐의 뒷동산을 느긋하게 왕의 걸음으로 이동하면 불로장생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불로문不老門에 이끌려 들어가게 되고 이내 애련지愛蓮池로 연결된다. 애련지는 1692년 숙종이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는데, 현재 섬은 없어졌다. 숙종은 연꽃을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 자라지만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애련지 남쪽에는 효명세자가 공부했던 단청이 없는 소박한 건물 두 채가 북향 구조로 들어서 있다.
초록 그늘에 산들바람이 합세하여 계절의 새삼스러움이 느껴지는 창경궁 담장을 끼고 가다가 왼쪽 오르막으로 올라가면 육가형 형태의 존덕정尊德亭이 이채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존덕정은 1644년 인조 때 축조한 것으로 조선의 건축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여주며 주목받은 건물이다.  
존덕정 일원은 창덕궁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조성된 정원이며, 지금은 관람지觀纜池라 부른다.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폄우사砭愚榭와 관람정觀纜亭 및 승재정勝在亭이 있다. 
거리두기가 강요받지 않은 한적한 길이다. 지절대는 숲 속 매미의 목청이 솔바람을 타고 귓가를 맴돈다. 계절이 내쉬는 숨소리에 선한 바람이 일고 아늑함이 밀려와 대지로 가라앉는다. 자연이 연대해서 만들어낸 꽃길을 지르밟으며 황홀감에 빠진다. 임금님이 걸었던 예전의 후원도 지금처럼만 했을까? 종묘사직을 이어갈 왕세자를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감이나 얼룩진 당쟁 속에서 지존에 대한 존엄과 위상에 도전받으며 느낀 속상함도 외세의 입김으로 풍전등화에 처한 왕조의 운명에 대한 고뇌도 이 길을 걸을 때만큼은 모두 내려놓지는 안 했을까. 
그 옛날 왕들의 마음을 훔쳐갈 만큼 고색창연한 길을 에둘러 내려와 도착한 연경당演慶堂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 경에 창건했다. 궁궐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상류층 사대부 집안을 완벽하게 갖춘 집이다. 이는 임금이 사대부의 생활상을 이해하고 체험하고자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로 특별히 설계하였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연경당 장락문長樂門으로 빠져나와 일정이 마무리로 접어든다. 산책하게끔 내어준 호젓한 오솔길 발치로 후원 초입에서 마주 봤던 서향각과 주합루 지붕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내려앉았다. 머리 위로 뙤약볕을 이고 땀과 이골 나게 몸서리 치렀던 엊그제 날들도 과거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한풀 꺾인 한낮의 태양마저 기운을 잃고 옆으로 드러눕는다. 창덕궁을 마지막으로 조선의 다섯 궁궐에 대한 시간 여행도 모두 내려놓으며 비로소 여정을 갈무리한다.
 
◇ 에필로그
조선의 공식적인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금이 가장 많이 거처한 궁궐은 창덕궁이었다. 동양의 궁궐은 최고의 지존이 거처하는 공간답게 존엄성과 권위를 인위적으로 대놓고 드러냈지만,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은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경복궁과 차별화시켰으며, 경희궁과 경운궁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궁궐은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문화자산이다. 원형이 잘 보존된 창덕궁은 다양한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을 가리지 않고 보유한 우리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이다. 유네스코도 조선의 정통적인 건축 양식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점을 인정하여 우리나라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록하였다. 필자가 오랫동안 창덕궁을 눈여겨보며 애정을 갖았던 이유도 자연과 건축이 물 흐르듯이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며 한국적 특성을 잘 살린 궁궐이었다는 점이며, 이런 연유로 명년부터 창덕궁 문화해설사로 나서기 위한 막바지 학습과정을 밟는 중이다.
아직도 코로나19가 극심한 형국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 대면이 일상화되고 있는데, 폐쇄적인 실내 생활 지속이 활동 부족으로 자칫, 살이 쪄서 속된 말로 ‘확찐자’가 된다면 이 또한 문제는 아닐까? 친환경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너른 궁궐은 사람 간의 접촉도가 여유로운 곳이다. 요즘에는 국내외 관광객마저 급감되어 사실상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의미가 없는 까닭에 밀폐되거나 다중 이용 시설보다 궁궐에서 문화 체험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곧이어 가을로 접어들어 이슬이 맺힌다는 절기상 백로白露이다. 결실을 거두는 가을은 풍성함을 상징하며 가슴을 훈훈하게 만든다. 오뉴월 햇볕에는 못 미치더라도 창덕궁 성정각의 감나무도 가을바람과 햇볕을 받으며 점점 가을 옷으로 곱게 물들어 갈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며, 환경 친화적인 정원으로 평가받은 창덕궁을 둘러보며 영글어가는 가을 정취와 함께 맑은 숲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켠다면 마음의 양식을 풍성하게 살찌우며 코로나19로부터 더 벗어나지 않을까 한다.

사진설명: 2020년 가을, 궁궐지킴이 현장 수습 기간중 창덕궁 후원 부용지에서

[24기 최종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무홍(창토2반-22기)]

최 선생님, 방문해 주시고 좋은 말씀까지 감사합니다. ~

[권혜숙(경토2-21)]

창덕궁에 관련된 내용과 사색이 곁들인 감상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무홍(창토2반-22기)]

경토2반 선배님, 감사합니다. 기회되면 경복궁에 관하여도 기행식으로 쓸까 합니다. 경복궁 선생님들의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