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카라코룸 대암탑에 새루트 함께 개척한
최승철과 김형진
"상대방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진정한 파트너" 자일파트너, 흔히 오랫동안 함께 등반활동을 해온 사이라면
자일을 통해 상대방의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등반 중 추락했을 때 살아나려면 자일파트너가 줄을 잡아주어야 가능하다. 때문에 산꾼들
사이에서 얼마나 절친한 사이인가를 논할 때 자일을 함께 묶고 바위해본 적이 있는 사이인가 묻곤 한다. 그만큼 자일파트너란 산악인들에게는 남다른
사이인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이 진정한 나의 자일파트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클라이머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진정한
자일파트너란 그만큼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랫동안 등반을 함께 해온 최승철씨(28·백산회)와 김형진씨(25·대산련 경기북부지부
구조대원) 두사람은 멋진 자일파트너로 꼽을 만한 클라이머들이다.
쌀 한말씩 둘러메고 전국암장 순례 이들의 등반 활동은 매우 치열했다. 바위에 한창 맛들였을 무렵 집에서 각자
쌀 한 말씩 짊어지고 나와 전국 암장을 순례함으로써 이미 극성스런 등반욕을 암시했던 두사람은 의정부 불곡산 골수암에 20개의 고난도 프리클라이밍
루트를 개척하는가 하면, 설악산 갱기폭과 장군봉, 적벽에 인공등반 루트를 내기도 했고, 올해는 설악산 개토왕폭과 의정부 산학폭에 혼합등반루트를
개척하기도 했다. 국내의 암빙벽 뿐만 아니라 요세미티의 대암벽에서도 뛰어난 등반을 해낸 두사람은 지난해에도 큰 일을 해냈다. 파키스탄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대암탑인 크레이트 트랑코타워 하단벽에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 라는 새 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여성을
포함, 혼성3인조가 이룩한 이 등반은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조성대)의 가셔브룸4봉 서벽 새 루트 개척과 함께 지난해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등반을
대표하는 등반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등반활동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서로 배짱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랬다. 처음 만난 것은 군복무중이던 최승철씨가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두 사람의 생활터전인의정부에서 등산장비점을 운영하는
선배가 "너와 비슷한 놈이 있으니 만나봐라"는 말에 따라 최씨가 김씨를 만났을 때, '산에 대한 열정이 나보다 더한 놈을 만났다' 싶었다.
김형진씨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싶었다. 당시 김형진씨는 골수암에 '꼴값길'이란 루트를 개척하던 중이었다. 김씨의 등반 모습을
지켜보던 최씨는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바위에 다가섰지만 어림도 없었다. '내가 이 정도도 못하나' 싶은 생각에 최씨는 어깨가
축 처졌다. 이 때 김형진씨가 다가와 "형 ! 3년동안 군대 있었기 때문에 몸이 굳었을 거예요. 제대하면 나보다 나을 테니까 염려마세요"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때부터 동지애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은 자일 파트너의 길을 걷게 된다. 최씨는 제대하자마자
김형진씨와 함께 전국 암장 순례를 떠났다. 쌀 한 말과 차비만 달랑 들고 시작한 암장 순례였다. 암장에서는 텐트를 치고 지낼 수 있었지만,
장소를 옮길 때는 역대합실에서 밤을 보낸 적이 허다했다. 외국의 거벽등반을 꿈꾸던 두 사람은 '자유등반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 생각했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마 혼자했다면 창피해서 중간에 그만두었을 겁니다. 어쨌든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위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곤 지방의 산 선배들이 도와주곤 했으니까요." 당시 두 사람의 목표는 최고의
클라이머로 통하던 이근택(40), 정승권씨(38 허큘리스월 대표)보다 나은 클라이머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최고등급이었던 5.12급
루트에 막상 붙어보면 어림도 없었다. 때문에 암벽순례를 마친 다음에는 자연암벽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 정승권씨의 실내인공암벽에서 훈련을 쌓았다.
두 사람이 바위에 한창 빠져 지낼 즈음이던 93년 가을, 이번에는 김형진씨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김씨는 군에 입대하면서 최승철씨와
약속을 굳게 했다. "선배들 보니까 군대 갔다오면 직장이나 결혼 문제 때문에 산을 떠난다"며, "만약 형이 변하지 않는다면 제대한 다음
트랑고타워를 등반하자"고.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대산련 경기북부 사무실에 걸려 있는 사진 한번 본 것이 고작인 트랑고타워를
등반하자고 약속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정말 절박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약속을 해놓지 않으면 제대 후에 산에 다닐 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김형진씨가 군에 있는 사이 최씨는 더 열심히 등반했다. 94년에는 혼자 미국 요세미티의 거벽을 찾았다. '형진이 몫까지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최씨는 최고 수준의 루트라는 엑스컬리버와 트리플다이렉트를 단독으로 등반해냈다. 하지만 너무 힘들고 뭔가
허전했다. 바위의 어려움보다 바위에서의 고독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바위도 좋았지만 파트너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등반 또한 즐거웠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시는 혼자서 등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그리고 형진이가 그렇게 보고 싶더군요. 그래서
엽서를 보냈죠. 제대하면 함께 요세미티를 등반하자고-"
등반에 관한 한 평생 파트너 제대하자마자 두 사람은 또다시 붙어다녔다. 입대 직전 해결하지 못했던 루트의
문제점을 하나 둘 풀어내고, 또 다른 미답의 대상지를 찾아 나섰다. 설악산 기정길도, 갱기폭 좌우벽과 소승폭 벽등반 루트도 이때 해결했다.
96년과 97년에는 엽서의 내용대로 요세미티도 찾았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두사람은 드디어 그 어설프게 맺은 약속을 지켰다. 그레이트
트랑고타워를, 그것도 새 루트를 개척하면서 성공적으로 등반해냈다. 물론 그에 앞서 요세미티 거벽을 함께 등반했지만, 트랑고타워 등반은 특별했다.
약속도 지키고, 그와 동시에 두사람 모두 처음으로 6,000m대의 고산 거벽 등반에 성공한 것이고, 더 나은 등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형진이는 등반대상지를 정할 때부터 등반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천한다." "승철이 헝은 극단적이지만 모든
면에서 나보다 순수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이 말에서 두 사람의 성격이 상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는 면에서는 같다. 즉 고집스런 면만큼은 똑같아 처음 대하는 루트만 보면 서로 먼저 등반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럴 땐 결국 가위바위보로 선등을 결정하게 된다. "아마 서로 만나지 못했다면 벌써 산을 그만 다녔을 것"
이라는 두 사람은 이제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최승철씨는 "아무리 어려운 루트라도 형진이와 함께 줄을
묶으면 안심이 된다"며 파트너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트트랑고타워를 등반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파트너간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선 각자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파트너가 편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국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등반을 한다면 과정은 매우 즐겁고 결과는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최승철씨와 김형진씨는 이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큰 등반을 끝내고 나면 가까웠던 사이도 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두
사람은 정반대로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등반에 관한 한 평생 파트너가 된
것이다. 최승철씨는 몇 해 전 의정부에 실내 인공암장인 샤모니를 개설했다. 샤모니는 조금이라도 가까운 데서 운동을 하고 또한 의정부를
비롯한 경기 북부지역의 스포츠클라이밍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은 생각에서 만든 것이다. 최씨는 "샤모니가 몇 해동안 적자를 면치 못해
고민이 많았다"며, 그러나 "후회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최승철씨와 김형진씨는 등반기술 전수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여러 차례의
요세미티 등반과 그레이트트랑고타워 등반에서 얻은 경험을 여러 산악인들과 나누기 위해 '익스트림 레이더스'라는 거벽등반교실도 열고 있다. 두사람이
등반교실을 개설한 데는 두 가지 목적에서다. 첫번째가 기술전수라면, 두번째는 새로운 동지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탈라이사가르, 드류 연장등반 계획 두 사람의 등반은 앞으로 치열할 것이다. 계획도 많다. 올 여름 새 루트를
노리고 탈라이사가르(6,904m) 북벽에 도전한다. 봉우리가 험난하여 인도 히말라야의 여러 봉들 가운데 상당히 늦게 등반된 봉이다 .북동릉,
북서릉, 북벽등 세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지만, 북벽은 91년 헝가리 팀이 초등했고, 다이렉트 루트는 지난해 들어서야 오스트리아 팀이 뚫었다.
한국 팀은 6차례나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한 난봉이다. 겨울에는 알프스 등반에 나선다. 알프스에서는 개척 등반이 거의 끝난 상황이라고
판단한 이들은 연장등반으로써 극한에 도전한다. 드류 서벽 6개 루트를 쉼없이 이어서 등반하는 것이다. 이밖에 이들이 하고픈 등반은 수도 없이
많다. "천여m 높이의 수직벽이 수없이 솟아 있는 캐나다의 배핀아일랜드도 언젠가는 등반하고 싶은 곳 중 하나입니다. 세계 암벽 순례도
했으면 하고요. 아무튼 이제는 새롭고 다양한 각도에서 등반을 펼칠까 합니다." 두 사람의 등반순례의 끝을 벌써 이야기할 피요는 없을
것이다.
<한필석 기자>
2.사진한장 달랑들고 찾아간 '신세계'
- 의정부, 익스트림라이더팀 -
- 비아포계곡의 1,000m 거벽 도전 새루트 개척에는실패
6월 5일, 우린 커다란 꿈을 이루기 위해 인천공항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향했다. 등반대라고 해야 나와 김세준, 박건
이렇게 단출한 세 식구였지만 우린 미지의 개척지로 간다는데 잔뜩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숙소로 향해
비행기에서 지친 몸을 달랬다. 다음날 우리는 행정수속과 차량 등을 협의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행정수속이 끝날 때쯤, 우리를
긴장시키는 소식을 접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스카르두(Skardu)로 가기 위해선 25인승 버스로 비포장길인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27시간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슬라마바드를 떠나 라왈핀디에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길은 예상보다 더욱 험악했다. 고난의 시간…….. ,
운전사가 정말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끝장날 것만 같았다. 특히 벼랑 밑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살은 언제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만큼 요란스러웠다.
말이 하이웨이지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길 상태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도 버스는 잘도 달렸다. 우리가 지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공사 당시 3천명 이상이 사고로 죽었을 만큼 난공사였다고 한다. 인더스강을 따라 거슬러 가면서 험난하기 이를데 없는 이 계곡에 길을
개척한 파키스탄인들의 억센 의지를 느끼면서, 인간의 힘 또한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7시간 동안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려
도착한 곳이 파키스탄 동북부에 위치한 스카르두다.우린 3일간 스카르두에 머물며 등반을 지원해줄 쿡과 포터를 수배했으며 주방기기와 식량을
구입했다. 이곳의 포터비용은 국내비용으로 하루 4천원 정도였다. 식량과 장비점검을 마친 후 우린 아스콜리(askole)로 가는 지프를
수배했다. 길이 거의 없다 싶은 이곳에선 4륜구동이 아니면 움직일 수 없었다. 스카르두에서 아스콜리까지 가는 길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시가르강(Shigar River)을 끼고 이어지는 길은 8시간을 달려야 했으며, 아스콜리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포타렛지 이용해 원 푸시 방법으로 등반 아스콜리는 등반대의 중요한 거점으로 이곳에서 K2나 가셔브롬1, 2봉,
트랑고타워를 등반하기 위해선 파이주와울드카스를 지나 발트로 빙하로 들어서야 한다. 한편 우리가 등반하려는 오우거 돔(Orgar Dome
5,600M)을 가기 위해선 비아포 빙하(Biafo Glacier)로 가야 한다.
아스콜리에서 오우거 돔 베이스캠프지까지는 20여시간이 소요되는데, 우린 3일간 비아포 빙하를 따라 걸었다.
망고(Mango)에서 1박한 후, 바인타(Baintha)를 거쳐 4,450M 높이에 위치한 오우거 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오우거는
오그리(Ogre 7,285M)와 오그리2, 3봉으로 이어지는 산군에 위치해 있다. 베이스캠프 주변으로는 라톡1, 2봉, 3봉이 펼쳐져 있는데
이외에도 아직까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암봉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다. 우리는 오우거 돔의 일반 등반 루트보다는 신 루트를 개척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우거 돔의 중앙벽은 약 1,000M의 등반길이를 자랑하는 거벽이어서, 한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우린 중앙벽 등반을
결정했다. 6월 16일, 베이스캠프에서 중앙벽까지는 3 - 4시간 거리로 이틀동안 벽 아래로 장비와 식량을 운반했다. 하지만 20일부터
25일까지 오전에 비가 내리다가 저녁에는 눈이 내리길 계속 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내린 비와 눈으로 인해 이 일대는
설국(雪國)이 되었다. 26일은 모처럼 만에 화창한 날씨, 우린 등반을 시작하기로 했다. 데포시켜 놓은 짐을 정리하고 난 뒤, 첫 피치를 김세준
대원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은 구간이지만 고소라서 그런지 평지와 같은 등반속도를 낼 수 없었다. A2급의 오버행 크랙을 40여M 오른
후, 평평한 테라스에 고정 볼트를 박고 휴식을 취했다.
다음은 박건 대원이 2피치를 올랐다. 아무런 정보없이 신루트를 개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린 크랙을
따라 등반선을 이어갔으며 중간 확보물들은 모두 회수하며 올랐다. 첫날 두피치를 등반을 마친 후, 우린 포타렛지에 의지해 하룻밤을 보냈다. 낮이면
빛을 받아 뜨겁게 불타던 대지도 저녁이면 초겨울 기온으로 변해버렸다. 벽에 매달려 지내는 첫날밤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공간이 좁다보니 한명은
선잠에 빠져야 했고, 결국 피로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거세지는 눈발 때문에 등반 포기 다음날은 내가 선등을했다. 3피지와 4피치 모두 어려운 크랙은 아니었으나 A2
~ A3급 정도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위로 오를수록 화강암의 암질이 약해졌다. 둘째날도 두 피치를 등반하고 나니 어두워져 두번째
비박에 들어갔다. 다음날도 맑은 날씨여서 등반을 계속했다. 이제 벽에 매달린 지 3일째, 아쉽지만 우리의 등반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고소등반이 주는 어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식량을 최대한 아껴가며 등반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5일간 벽등반에 치중했지만
31일부터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등반시간이 더딘데 비해, 시간은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빨리 지나갔다. 그 만큼 등반은 계속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다시 베이스캠프는 하얀눈 속에 휩싸였고 눈발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우리의 등반도 중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아쉽지만 오우거 돔의 중앙벽을 400여M 오르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후일 기회가 다시 닿는다면 우리는 이 루트를 다시 도전할 것이며, 우리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이곳의
많은 벽들 때문에 다시 올 생각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산악인들도 눈을 돌려 이곳에 널려 있는 수만은 암봉에 새로운 루트들을 개척했으면
한다.
- 글 조우영
3.그레이트 트랑고 타워 등반기 김 형 진
"나 힘든 이길 오르는 이유 하나 있어, 산 밑 저 땅 세상보다 오르기 쉬우니 근심 걱정 모두 잊고 저
하늘보니 먼저 떠난 우리 친구 더 가깝게 보여, 어여 어서가자 어여 가서 쉬세."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한 것 같은 거대한 둔게 빙하위에 우리 원정대의 작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사는 마치
필연의 비장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다.
6월 21일, 김포를 출발한 우리 원정대는 작은 흥분을 가슴에 묻은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 했지만 흥분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다음날부터 등반위의 등반인 현지 행정처리 및 식량과 장비구입, 쿡선정 등과 같은 업무와 비록 양배추이긴 하지만 김치도
담그고, 한국에서부터 같이 출발한 엄홍길 선배와 함께 느긋한 저녁의 여유도 가져보며 며칠을 보내고, 스카두르행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카두르까지의 길은 경이 그 자체라고 표현할 만한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있다. 막대한 양의 폭약이 사용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건설된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인간이 자연의 신비 속으로 가려는 발버둥 그 자체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건설 뒤편에는 정치, 군사,
경제적인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건설 뒤편에는 정치, 군사, 경제적인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스카두르에 다음날
아침 7시 30분경에야 도착했다.아침공기의 상쾌함과 시원함 그리고 우리를 환영하여 주는 것 같으 빗방울들이 장거리를 달려온 우리들을 맞이하여
주었지만 고도의 탓인지 대원들 모두 그저 쉬고 싶어 한다. 인더스모텔 이라는 작은 모텔에 짐을 풀은 우리는 자야한다는 본능의 세계로 곧바로 빠져
들어갔다. 정오가 되서야 일어난 우리는 허기에 굶주린 배를 즉석 짜장면으로 해결하고 포만감에 젖었다. 점점 내자신이 단순의 본능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사실은 내 자신이 궁극적으로 산을 통해서 얻고 싶어하는 것이 이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본능적 욕구의 만족감에 젖어드는 의식속에
불청객 같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노년의 끝을 조용한 시골에서 맞이하고 싶다는 그것은 곧 인간에게는 자연으로 회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자연은 단순 그
자체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더 가야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알지 못하고 나의 생이 마감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에이! 짐이나
챙기자' 대장님, 윤정누나, 승철형 그리고 나는 서로에게 각자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현지인들을 상대해야만 하는 행정업무나 물품 구입등 변변치 않은 어학실력이 발휘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승철형은 약30개가 넘는 우리
원정대의 장비와 식량등을 넣어둔 카고백과 플라스틱 드럼토으이 팩킹리스트를 작성하고, 윤젖 누나는 그 특유의 꼼꼼함으로 경비지출에 대한 기록과
앞으로 지출해야할 경비를 산출, 준비하며 대장님은 원정대의 전반적인 활동을 지시해 주면서 대원들간의 화합과 결속력을 유지시켜 주시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역할에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신다. 하지만 이런 분주함과 긴장속에서도 각자 나름대로의 시간은
있다. 패러글라이더를 가지고 온 승철형은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스카두르의 옛 성고가이 있는 이름모를
산에 올라가서 비행을 시도해 성공을 했다. 그러나 군 정보부대로 비행이 끝나자마자 승철형이 잡혀가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정보부대장이 자신도 예전에
해보았다며 등반이 모두 끝나고 다시 스카두르로 돌아오면 한번더 비행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웃지 못할 연행사건이 벌여졌다. 그 덕에 우린
원정대는 모텔 주인으로부터 공짜 저녁도 대접받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유명인사가 됐다.
7월
1일 카라반의 시작 지점인 아스꼴레 마을까지 짚차가 겨우 한대 지나갈 수 있는 도로를 세대의 짚차를 이용해서 약 여섯시간을 가슴 졸이며
도착한 우리는 아주 경미한 고소증세를 느끼며 짐을 안전하게 베이스까지 수송해줄 포터들의 고용과 장비 지급을 포터 사다의 주도로 끝내고 나서 녹차
한잔씩을 들고 이제 갈 수 있는 준비가 모두 끝난 것에 대해 편안한 안도감을 느끼면 이야기 하고 있는데 몇대의 짚차가 야영장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차를 타고온 사람들은 원정대도 아니고, 트레커도 아니며 현지인은 더더욱 아닌 젊은 서양 여자 한명과 늙은 여자 한명이었는데
이 두 여자는 현재 브로드피크에서 등반중인 어떤 행복한 대원의 신혼 두달째의 신부와 그의 어머니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
먼길을하루갘이 달려온 이들, 부럽다! '누군지 정말 좋겠다. 근데 난 뭐야, 뭐냐구!' '그럼 너도 오라구 해라'. '누굴, 누굴
오라고 해 있어야 오라구 하지' 승철형과 내가 이런 시시껄껄한 대롸를 나눌사이 대장님은 포터들의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드셨는지 얼굴이
어두어졌다. 히말라야를 끼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깊은 상념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삶에 대한 고뇌 같은 것을 느끼시는 것 같다
.더구나 대장님의 직업이 예술적 영감이 주가 되는 일을 하셔서 그런지 적지 않은 충격을 느끼시는 것 같다.
7월 4일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은 그레이트 트랑고타워의 초등자인 한스도세외 핀 델리의
추모 동판뿐이다. 이 두명의 강인한 등반가는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위대한 초등을 이루고 하강의 실패로 인하여 영원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13년전 그들에게 닥쳐왔던 상황이 영화속의 장면처럼 떠오른다. 검 붉은 피 마져 얼 것 같은 추위와 고소, 모든 사고의 이성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그들은 얼마나 처절하게 버텨냈을까?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주고 말았다. 육체와 정신 영혼마저도…..
7월 13일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으으악, 에이C8!' 승철형의 울분에 찬 비명이 빙하위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7월 4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우리 원정대는 전진 베이스캠프를 7월 6일에 설치하고 베이스캠프에서의 기능을 전진 베이스캠프가(Advance Bace Camp) 대신 할
수 있도록 전 대원이 전진 베이스에 머물면서 이번 등반의 가장 난관인 전진 베이스에서 벽등반 시작 지점까지의 짐수송과 고정로프 설치에 6일간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구간은 일명 알리바바 꿀르와르라고 불리우는데 계속되는 눈사태와 낙석등이 치명적인 위험성을 보이는 곳이다. 약
800미터 가량의 고정로프를 설치해야 하며 장비와 식량의 데포지점 선택이 잘못되면 모든 장비와 식량은 눈사태에 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일본대의 경우에는 이 지점에서 25일 동안 등반을 했고 서울 시립대의 경우에는 약 15일의 시간을 소비했다. 하지만 우리 원정대는 모든 장비와
식량을 6일만에 모두 올려놓고 내일이면 등반을 시작할 수 있게 준비를 끝냈다. 전진베이스에서 둘러 앉은 우리는 한잔의 차와 작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음미하면서 내일부터 우리앞에 다가올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각기 다른 상상의 그림을 그려 나가는데 대장님의 손끝이 말도 잊은채
어딘가를 가리키며 작은 경련을 하고 있다. 손끝이 가리키는 그곳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대원들의 눈들이 확대되면서 나의 입에서는 '저거,
저거' 말같지도 않은 말만 맴돈다. 나의 눈 속에 들어노 것은 흰폭풍을 일으키면서 그레이트 트랑고타워 좌측 꿀르와르를 휩쓸고 내려오는 눈사태다.
단지 규모가 큰 눈사태 정도를 넘어서 이 자연의 파괴력은 벽상에 볼트와 피톤으로 고정시켜 놓은 우리의 장비와 식량을 집어 삼켜버렸다. 이제까지
꿀르와르에서 발생한 가장 큰 눈사태다. 흰 포말이 가시기까지의 잠깐의 시간동안 대원들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단
몇분의 시간이 지리하게도 길게 흐르며 벽의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쿡 장길은 망원경을 들고 관망이 더 잘된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 뒤를
승철형이 쫓아가고 나와 대장님은 갑작스런 예측치도 못한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인지 멍하기만 하다. 우리의 장비와 식량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두눈이 보기에는 회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원들 그 누구도 '끝'이라는 단어나 '모두다 날라갔어' 등의 눈앞에
사태를 인정하는 말은 꺼내지 않은채 더없이 맑은 하늘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는 '여기까지 오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참고, 견디고 노력했는데 이건
말도 않돼'라고 중얼거리는 나의 말소리만이 너무도 크게 확성되어 맴돈다. 이 상황세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선택은내일 아침 일찍 데포 지점에
가서 우리의 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대처하는 것 뿐인 것 같다. 침낭속에 누운 나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또 승철형이 가끔 내뱉는
울부짖음에 밤이 깊어가는줄 모르고 아침이 왔다. 나와 승철형이 올라가서 위의 상황을 파악하고 무전으로 연락을 취해서 다음 상황을 대처하기로 하고
'무사할거야, 무사할거야'를 되뇌이면서 꿀르와르 시작 지점에 도착해보니 고정시켜 놓은 줄들은 절단되어서 한참을 쓸려 내려와 노출되어 있기도 하고
눈속에 묻혀 있기도 하다. 우선 승철형과 줄을 파내어서 다시 사용하기로 하고 작업을 하다가 윤정누나가 올라와서 함께 고도를 높여 올라가보니,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장비와 식량은 눈사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갔지만 기묘하게도 함께 쓸려 내려가지 않고 옆으로 튕겨 나가서 그
뭉치가 줄의 꼬리를 표식기 삼아 눈으로 덮여 있었다. 등반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정상에 다 간 것처럼 기쁨이 넘쳐
났다.
7월 22일 등반을
시작하고서 일곱번째 맞이하는 저녁이다. 신기하게도 날씨가 너무 좋다싶었는데 급기야 오늘은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움직임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게
느껴지는 좁은 포타렛지안에서 우리 세명은 건조비빔밥 두봉, 참치캔 하나를 가지고 저녁을 먹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윤정누나는 먹지 못한다.
무던하게 잘 참고 견디어 주는 누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인내하는 것이 몸에 밴 수도자처럼 고소와 목마름 그리고 동료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으로서 참고 이겨내야 하는 것을 내색도 안하면서 버텨냈지만 급기야 오늘은 구토와 두통을 동반한 고소증세를 보인다. 측은하면서도 미안하다.
파트너간에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결여되면 그 등반의 끝은 파국으로 이어진다는사실을 알면서도 때때로 짜증도 내고 입도 험해졌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승철형은 두통을 호소한다. 아마 노래를 너무 크게 불러서 그런 것 같다며, 낮에 고래고래 소리쳐 함께 노래한 일에 대해
후회했다. 하루에 백미터 나아가는 것 조차 버겁다. 신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서,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어디까지 더 몰고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며칠전 피톤을 설치하다 망치로 내리친 손가락이 출혈은 멈추었지만 진물이 흐르면서 좀더
강한 내적인 힘을 이끌어 내어준다. 내 자신이 더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어딘가 숨겨져 있던 본능의 울부짓음이 나를 미치게 한다. 비록 젖은
침낭이지만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작은 행복을 느끼며 안전벨트와 자일의 확보도 모두 풀어버린채 오늘도 이렇게 내일을
준비한다.
7월
29일, 등반 14일째다. 오늘은 정상을 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 포타렛지를 출발했다. 얼마나 더 가야지 정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제
고정시켜놓은 두 피치에서 정상이 얼마 멀지 않은 것 같다는 대장님의 무전을 확신하고 등반에 꼭 필요한 장비와 정상에서 하강 비행에 사용할
글라이더만을 휴대한채 포타렛지와 식량 슬리핑백등은 모두 남겨두고 속공으로 등반을 진행했다. 만약에 정상을 자지 못하게 되더라도 비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빠른 속도로 승철형이 암벽 지대를 끝냈다. 선등을 바꾸어서 내가 암.빙.설 혼합지대로 출발을 했는데 시작부터 상당히 까다롭다. 계속
이어지며 세피치를 더 전진하니 미국 등반대의 흔적으로 보이는 피톤 세개가 박혀있고 그 피톤에는 10mm가량 되어 보이는 자일이 감아져 있다.
사방을 둘러보니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된다. 북동봉 정상이 이곳인 것이다. 이제는 내려갈 수 있다는 기쁨이 등정의 희열보다는 더 크게
일어나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저멀리 보이는 하늘과 구름 이름모를 봉우리들이 나의 두 눈속에 밀려 들어왔다.
등산은 어떤 가능성, 등산은 모험 등산은 적극적인 자연체험, 등산은 창조적 유희적 스포츠 등산은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 등산은 죽음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 등산은 "천국"에서 "지상"으로 옮아감 등산은 차안(此岸), 피안(被岸)을
잇는 다리 등산은 한층 높은 의식세계의 탐구, 등산은 하나의 가능성 - 라인홀스 메쓰너 -
4.여성 3인조 요세미티 거벽등반
여성 3인조 요세미티 거벽등반 김 점숙, 오 경아, 채 미선 여성팀이 엘 캡피탄의 텐저린 츠립(VI 5.8
A2) 조디악(VI 5.7 A2) 등반기
터널을 지나고
거대한 벽이 보이면 턱이 떨어져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는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른다. 그간 무수히 들어온 엘켑(엘 캐피탄을 줄여 부르는 말)에
관한 얘기들로 내 머리 속에 그려본 그 그림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꿈속에 젖어 터널을 지나는 순간 처음 바라본 엘캡의 느낌이란,
글쎄, 내가 처음 인수봉을 보았던 때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솔직히 조금은 실망했다고 말한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정말 그랬다. 너무
크고, 너무 넓고, 너무 높은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왜 벽이 높아 보이지 않는걸까? 내가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텐저린 츠립, 포타레지에서의 첫날밤 이걸 흔들거린다고 해야 하나, 휘청거린다고 해야하나. 그
이상한 침상에서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괴로움 자체였다. 2인용 포타레지에 세 사람이 비집고 자리를 잡은 데다가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로
인해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버복으로 어찌어찌 가려보지만 파고드는 물을 막을 수는 없는 일, 쫄딱 젖은 채 아침을
맞았다. 다행히도 미선이가 먼저 선등으로 나가고 점숙언니가 확보를 보니 얼마간 침낭 안에서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가
머문 네 번째 마디 종료 지점에 장비를 정리도 안 한채 주렁주렁 걸어놓고 가버려 우리의 침상마련에 불편을 준 녀석들이 그새 올라와서는 장비를
주섬주섬 챙긴다. 다행히 등반하려는 것은 아니고 철수해 내려가려는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선등자가 등반중인데…. 미선이는 힘든 구간인지 확보 잘 보라고 하는데 우린 이 녀석들 때문에 이것저것 엉키고 꼬여서 미칠지경이다. 한술
더 떠 장비를 다 챙긴 그 녀석은 혹시라도 우리가 손댈까봐 포타레지와 카라비너 3개, 슬링 하나를 놓고 간다고 몇 번씩이나 말하고는 내려간다.
말이 통해야 욕이라도 해주지. 그런데 그녀석이 또 올라왔다. 래더 한 개를 놓고 갔대나. 참 지독한 놈들이다. 남에게 피해를 안준다던데 이
녀석들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어제 영어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면 이나라를 다시 찾지 않으리라. 일곱 번째 마디의 턱을 넘는
지점에는 누군가 도마뱀 인형을 붙여 놓았다. 이곳의 클라이머들은 정말 장남을 좋아한다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선등을 하던 미선이가
돌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냐고 소리친다. '어쩌긴 뭘 어째, 던져야지.' 그런데 그 떨어지는 돌이 정말 한참이나 오래도록 떨어진다. 저 멀리로
떨어질 것 같더니만 계속해서 가까워지더니 벽 바로 밑으로 떨어졌다. 이제야 내가 많이 올라온 실감이 난다. '그런데 왜 고도감을 못 느끼겠지?
분명 인수봉보다 큰 건 확실한데.' 6월의 엘캡은 참 좋은 참 좋은 날씨였다. 다들 너무 더 울 것만을 걱정하여 화상(?)을 방지하기 위해
긴 팔에 긴 바지, 물도 많이많이, 그러고도 물이 모자랄까봐 맘껏 마시지도 못하고 아끼고 아껴 마셨는데 예상외로 날씨가 너무 좋다. 텐저린
츠립은 루트의 위치 상 많은 시간을 그늘 속에 숨을 수 있었고, 바람 또한 서늘하게 계속 불어와 등반하기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날씨였다. 오후 두
세시쯤이면 몰아치는 이 바람만 아니라면. 포타레지 글라이더를 타고 한참을 날씨 얘기를 하며 다음 이곳을 찾을 때에는
가을보다는 봄이 훨씬 좋을 것 같다며 웃고 즐거워하는 걸 바람이 들었나 보다.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는데 홀백과 같이 매달린 난 정신없이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포타레지를 펼쳐 놓은 채 매달았더니만 글라이더가 된 양 신나게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위로는 벽밖에 안보였따. 순간 저암각에
쓸려 로프가 끊어진다면 글라이더처럼 사뿐히 저 나무 위로 내려 앉을 수 있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이 어지러움과 한쪽 모퉁이에
있는 이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면 부지런히 주마링을 할 수밖에. 바람 때문에 선등자와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말을 잘 듣지 않아 홀백 안에
들어가 처박혀 있는 두대의 무전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드디어 텐저린 츠립에서의 마지막 날. 벽에 매달린 지 오늘이 닷새째. 오늘이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기쁨에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어깨를 누르는 장비의 무게도 오늘이면 끝이고, 끊어질 것 같은 허리의 고통도 오늘이면 해방이다.
무엇보다도 바닥에서 잘 수 있다는 게 어딘가. 화장실도 가고 싶을 때 아무 때라도 갈 수 있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매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이 기쁨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오로지 환희 그 자체! 너무 기뻐했나? 드디어 정상! 홀링까지 끝냈으니 이제 자리 펴는
일만 남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기쁨의 포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장비를 챙기고 있었는데 홀백을 통째로 옮기다가는 통째로 떨어뜨릴 염려가 있어
한 개씩 한 개씩 받아 올리는 중이었다. 침낭을 내려놓는 순간 하나가 굴렀다. 쫓아가 보았지만 "놔둬!" 하는 외침. 잠시 멈칫한 사이 침낭은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었다. 내 몸은 길게 확보가 되어 있어 쫓아갔으면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는다. 날아간 침낭은 미선이
것이었다. '이런 이런…'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우리는 정상 도착 기분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날아간 침낭과 함께.
새 날이 밝았다. 오래간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그리고 진짜 정상을 밟으러 올라갔더니 등반 중 계속됐던 궁금증의
실체가 거기 있었다. 노즈 오른편으로 하강하는 어떤 이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내려가는 걸 한번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수직고도 1000미터가 넘는데? 줄은 어떻게 가지고 간것일까? 어떤 이들일까?' 그들은 돌아가면 2시간이지만 이곳으로
가면 10분이면 된단다. 정말 줄은 어떻게 가지고 갔을까? 말이 통해야 뭘 하지. 정말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는 동네인 것 같다. 한번 내려가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텐저린 츠립을 마치고 우린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 네다섯 시간식 걸리니 우리
실력으로 '메스까리또(Ⅵ 5.11 A3)'를 간다면 10일은 자아야 하는데 도저히 그 식량과 물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우리 체력으로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택한 곳이 노즈((Ⅵ 5.11 A3)! 인수봉에는 대슬랩이 있고 선인봉에는 표범과 박쥐가 있듯이 엘캡에는 노즈가 있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랐고 테라스도 확실하여 포타레지도 필요없고 해머도 필요 없다는 곳이 바로 노즈! 한 번은 해볼 만한 곳이다
싶었다.
노즈의 아이러니와 돌아온 침낭 짐은 이미 데포해 놓았고 오늘은
넷째 마디까지만 가면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느지막이 출발을 했다. 그런데 웬걸? 첫 피치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바위는 왜 그리 미끄러운지 한
슬랩 한다는 난 벽에 제대로 설 수 조차 없었다. 캠프에 훅을 두고 온 게 후회가 되고, 이런 곳을 자유등반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궁금해진다. 우리가 남의 말만 믿고 너무 쉽게 생각을 했나보다. 돌아가자는 유혹을 뿌리치고 계속 전진하다가 결국 브레이크가 걸렸다. 넷째
마디 펜듈럼 구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바로 코앞에 오늘 우리의 잠자리가 보이는데 날은 저물려하고 점숙언니는 캠을 박는데 계속 실패를
하고 있었다. 펜듈럼도 정말 뜻대로 되지 않고., 오늘 따라 날씨는 왜 이리도 추운지. 방풍의를 입고 바람을 피해 잔득 몸을 움츠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후퇴한 점숙언니의 모습은 정말 안쓰러웠다. 등반하느라 방풍의를 안 입고 있었던 점숙언니는 입술이 파래져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장비를 홀백에 다 집어넣고 줄을 연결해 던지고는 곧바로 하강 시작! 머리 위로는 엘캡의 오똑한 콧날 노즈가 거대하게 뻗어
있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날은 저무는데 하늘은 파랗다. 벽은 무슨 공포영화에서난 나올 것 처럼 검은 빛으로 눈앞에 장벽이
되어 가로 막혀 있으니, 아 아! 난 비로소 이제서야 엘캡이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검은 공포. 지친 어깨로 캠프에
돌아오니 행운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침낭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텐저린 츠립을 등반할 적에 안면이 있던 이가 '혹시….'하며 물어 온
것이다. 침낭 찾으려고 노즈에서 돌아왔나 보다며 생각하니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장비를 다시 챙겼다. 장비점에서 캠도 더 사고 훅도
집어넣고 ….. 그리고 다시 출발! 그런데 뭐지? 한참 주마링을 하던 점숙언니가 "너희들 꼭 노즈를 해야 하겠니?" 하고 묻는다. 처음에는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계속해서 묻는 언니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정말 내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어쩌겠어. 하지 말아야지.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게 상책이지!' 결국 우린 아침저녁으로 침낭을 가지고 출퇴근하면서 벽의 거대함을 느낀 것이었다. 돌아서며 생각했다. 그래.
아쉬움이 남아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날은 뜨겁고 오늘따라 바람이 한 점도 없다.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졸음만
쏟아진다.한참을 졸고 있었나 보다. 새들의 고함소리에 졸음을 깰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새 한마리가 내 앞으로 정면 돌진하더니 바위틈에
들어가서는 꼼짝도 않는다. '아니 얘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들여다봤더니 그제야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다. 이곳 새들은
그게 놀이인양 꼭 부딪칠 것처럼 날아 와서는 바위틈에 들어가 한참을 있다가 나오곤 했다. 아니면 이 새들도 시원함을 찾아 들락거리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더운 날씨다. 옆 루트를 등반중인 이들은 신났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고래고래 따라 부르며 율동에 맞춰 홀링(짐
끌어올리기)을 하고 있었다. 간밤엔 둘이서 포타레지를 한 개씩 차지하고는 누워있더니만 그들의 체력과 그 여유로움이 부러울
뿐이다.
착하게 살기를 요구하는 조디악 우리도 먼젓번 등반에 비해서 훨씬 여유를 찾고 있었다. 오후 대여섯
시면 긑나는 등반도 그렇고, (텐저린 츠립은 오후 8시 이전에 마친 적이 없었다.) 그사이 서로 많이 친숙해진 것도 그렇고, 등반이 너무 일찍
끝나 어두워질 때까지 볼일을 뒤로 미뤄야 하는 괴로움이 있긴 했었지만. 고도가 더해지면서 햇볕에 노출되는 시간은 많아졌지만 바람도 가끔
불어주고 도 자주 쉬고 요령이 생겨서 그런지 피로도 훨씬 덜 했다. 또 다시 찾아온 미친 바람만 아니라면 계속 행복했을 텐데….. 마지막
밤을 맞으러 가는 길이었다. 점숙언니를 홀백과 함께 허공에 띄워 주고는 장비정리를 하던중 선선하던 바람이 그새 정도가 지나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점숙언니는 팽이돌듯이 정신없이 돌고 있었고 홀백은 세상에나! 수평이 되어 돌고 있다가 급기야는 포타레지 위에 앉힌 채 돌고 있는게
아닌가? 로프가 스위벨(홀백을 매달아 놓을 때 로프의 꼬임을 방지하는 장비)을 조이고 있어 스위벨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점숙언니는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는데 도와줄 방법이 없다. 빨리 올라가라고 소리치고는 나도 서둘러야 했다. 포타레지가 급기야는 벽에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날
위협하고 있었다. 쫓기듯 올라보니 이런 난리가 없다. 홀링용 로프(스태틱 로프)는 꼬일 데로 꼬여 아예 밑으로 던져놓고 풀어야 했고,
포타레지는 풀린 채 한쪽 나사는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천만 다행으로 테라스가 넓어서 그렇지 큰일 날 뻔했다. 다행이라 여기며 자릴 잡고 쉬는데
이번에는 하늘이 검어지더니 천둥 번개가 몰려와 가슴을 조이게 한다. 제발 하루만. 제발 조금만 참아달라고 빌며 잠을 청했다.
이윽고 아침.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빗방울이 한 방울씩 내리고 있었으니 이젠 크게만 오지 말아달라고 빌며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를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고 있었다. 우리의 기도를 믿어 주었는지 다행히 큰비는 오지 않았고 오후 1시경 우리는 또 한번
엘캡의 정상에서 남은 물로 발을 씻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는 노즈를 네 번째 마디까지 한번 더 등반하고 엘캡 등반을 마무리 했다.
나로선 처음 대하는 거벽 등반이었으니 이만하면 훌륭한 성과라고 스스로 평가해 본다. 암벽이든 빙벽이든 설벽이든 그저 등반이라면 뭐든 좋아
다녔는데 이제 도 하나의 커다란 벽이 생긴 듯하다. 이번 등반은 그만큼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현지에서 우릴 마치 딸처럼 챙겨주는 신
명일부(55세oLA거주) 선배님, 곽호균(50세oLA거주) 선배님 또 이번 등반이이루어지게 도와주신 파이브텐, 마운틴 하드웨어, 트랑고,
어택캠프, 장비점 디딤돌 등 그리고 우릴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글 오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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