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가 내 고향이다. 현재 내가 사는 이 곳, 대구시 수성구 만촌1동에서 차를 몰아 50여분이면 너끈하게 가닿는 지척.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630번지가 내 본적지 주소이다. 방올음산이 내려다보는 이 '번지' 위에 아직도 나의 본가(생가)가 있다. 그 집은 '소잔등 둥두렷한 등성이 넘어 불쑥이//해 떠오르'(필자의 시 '아버지' 중 일부)던 아버지의 집이요, '여름날 저녁 칼국수 반죽을 밀'면서 '둥글게 둥글게 어둠을 밀어내면/달무리만하게 놓이던'(필자의 시 '칼국수' 중 일부) 흰 땅, 거기 지어진 어머니의 집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 그 품이며 그늘의 너비가 바로 내 고향이다.
그렇듯 우선 내 어린 시절의 발길이 미쳤던 '영역'으로만 그 범위를 좁혀 잡은 고향, 초전면(草田面) 소재지 대마(大馬·대장리). 바로 이 마을에서 나는 나고 자랐다. 나의 유년기는 오롯이 이 곳에 안겨 있었다. 면 소재지라고 하지만, 1950년대의 농촌이란 궁벽하기는 마찬가지. 그런 시골 아이에겐 당연히 저의 눈에 들어오는 반경 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가끔씩, 무엇인가 까닭 없이 서러울 땐 날 불러내는 듯한 '바깥'을 느끼곤 했다. 설렘 반, 두려움 반. 그것은 야릇한 자극이었다. 50리 밖 왜관 쪽에서 꼬리 길게 넘어오던 아득한 기적 소리와, 그리고 저 먼 하늘 아래 고래등같이 나타나 푸릇푸릇 거대하게 일렁이던 가야산의 원경이 그것이었는데, 그 미지의 바깥 세상이 훗날 나의 남루한 '타관객지'가 된 것 같다.
농촌 인구가 나라 전체 인구의 8할이 넘던 시절. 가난이 죽을 쑤던 그때의 아이들은 그러나 '공부'에 찌들 일 없어 명랑했다.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며 구김살 없이 놀았고, 잔대뿌리며 삘기며 산딸기며 뭐든 저 알아서 군입을 다셨다. 나도 그 '야생의 아이들' 속에서 혹은 소 먹이고 꼴 뜯으며 초·중등학교(초전초등학교·성주중학교)를 마쳤다. 그때, 시오리길 성주읍내로 넘어가는 대티고개(필자의 시 '대티고개' '밤길' 등의 소재), 60리 밖 김천 방면으로 넘어가는 신거릿재(필자의 시 '신거릿재' '봉선화' '방올음산 이야기' 등의 소재), 백리 길 대구 방면으로 넘어가는 달암치재(필자의 시 '달암치재'의 소재)도 알게 되었다. 당시 내게는 먼, 험한 이 길들이 말하자면 내가 만난 세상 모든 길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고향, 이 아름다운 길 위의 고개들이 또한 내 삶의 여러 고비를, 세상과의 온갖 불화를 예고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견강부회' 말해 본다면, 글쎄 열 예닐곱 살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나는 그리도 싸움질이 하고 싶었다. 동네 패거리와 함께 장날이나 단옷날, 혹은 사월 초파일, 그리고 학교운동회 날이면 잔치(행사)가 벌어진 장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공연히 낯선 '놈들'을 집적거리고 다녔다. 특히 사월 초파일이면 해마다 어김없이 이웃 면 지역 '선석사'(월항면 인촌리 217)엘 몰려 올라가 꼭 한 판씩 붙곤 했다.
'사월 초파일이면 이 절에 왔습니다./사람 구경 싸움 구경 왔는데요. 아니, 여차하면 나도 한 판 붙고 싶어 왔었지요. 놈의 이마를 돌로 찍었습니다. 대웅전 뒤 산그늘 아래 한참 숨었다가 그 환한 두려움 밖으로 달아났었지요.//사십여 년 만에 이 절에 다시 왔습니다./흰 불두화 커다란 대가리가 뭉게뭉게 멀쩡합니다./작은 날벌레들 무수히 들락거리고요,/뭉게뭉게 자꾸 웃습니다.' -'선석사' 전문
그 기간에, 그러니까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62년. 성주농업고등학교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를 졸라 대구의 대구고등학교로 전학을 해버렸다.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질투가 '쟁취'한 길. 그것이 나의 최초 '출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일이 내 '잘못 든 길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후, 이십대 중·후반까지 나는 자주 어깨가 처져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청춘! 그 어디에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떠돌던 타관객지(필자의 시 '빗소리는 길다'의 소재)를 고향에다 헌옷처럼 벗어 처박아놓고 대책 없이 빈둥거린 그런 세월이 있었다. 그 지리멸렬한 날들을 지금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어머니의 번듯한 집, 이제는 허물어져 가는 그 옛집(필자의 시 '머위' '칼국수' 등의 소재)이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향은 역시 '육친' 같은 것. 나는 몇 해 전 서해 전라도 쪽의 변산반도 일대를 여행하던 중 고향 땅 '성주'를 만난 적이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먼 데서 '성주참외를 봤다'는 것이다.
#'변산반도 위도 선착장, 배에서 내리다가 봤다. 한 사내가 든 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피피끈으로 묶은 마분지 박스에 커다랗게 찍힌 '성주참외'란 글자 도안이 그랬다. 가득 담긴 참외가 당장 투시처럼 옹기종기 떠올랐다. 생산지 표시가 또 '초전면'으로 돼있는 게 아닌가, 더욱 반가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이 여기서 어디냐. 전라도, 서해 멀리 흘러들어와 고향 땅 참외를 보다니, 격포에서 나랑 한 배를 탔던 거다. 단박, 이 섬하고 뭔 한 촌수 생긴 것 같았다. 나는 금세 금쪽 같은 애착이 갔다. 누구네 농사일까, 혹시 동장형님? 배다리들 용수형님? 친구 전병규? 문상곤씨? 미처 생산자 농민이름은 못 봤다. 사내는 어느 새 포구마을 골목길로 뒤뚱뒤뚱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속으로 "잘 살아라." 뜬금없이 뇌까리고, 혼자 씨익 웃었다. 이 어인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생가를 찾은 문인수 시인.
10대후반 무렵 시인은 사월 초파일마다 어김없이 '선석사'에 올라 낯선 이들과 싸움을 벌이곤 했다.
의인(擬人)? 섬을 뜰 때, 배 뜰 때, 노오란, 향기달콤한, 엉덩이가 어여쁜 그런 석별도 있었다.' -'성주참외를 봤다' 전문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다 참외라니, 참외는 까마귀와 같은 그런 밉상도 아니다. 아주 곱상이다. 참외 주산지 성주, '성주참외'가 바야흐로 전국 생산량의 60%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주의 들녘을 온통 뒤덮은 비닐하우스의 바다. 뭐, 그 같은 '자랑'은 이 글에선 사족이다. 다만 반가웠다는 것이다. 나의 현 거주지, 대구에서 보는 성주참외는 그야 예사다. 그런데, 몇 백 리 밖 생판 객지에서 본 성주참외는 단박 '의인화'되는 그 무엇, 말하자면 머잖은 촌수의 '조카'라도 만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어느 시대는 '촌놈'들이 걸핏하면 주눅 든 때도 있었다. 그랬지만 요새는 오히려 시골을 고향으로 두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서 궁할 때가 있는 것이다.
고향의 '전형'은 어떤 풍경인가. 그것은 바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일 것이다. 첩첩 산골일수록 아름답고 애틋한 곳, 그 고향을 그리는 데는 또한 역시 '천리타향'이나 '이역만리 타국 땅'이 제격인 법이다. 그래, 향수(鄕愁)는 향수(香水)보다 진하다. 변산반도에서 '상봉'한 성주참외의 고운 빛깔, 그 '향기'에 자극 받아 잠자던 '애향심'이라도 깨어난 걸까. 나는 그 무렵 내친김에 참외농사 농민을 주제로 한 '성주찬가'라는 노랫말(?)도 썼고, 고향 땅 성주를 열고 들어가는 '고목열쇠' 삼아 성주읍 경산리에 자리한 '성밖숲'에 대한 시도 썼다.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성주읍성의 위엄을 고목의 눈으로 처연히 바라보는 내용이다.
#'성 밖엔 숲이 있었다. 그 언제 읍성은 허물어지고/허물어져 이미 자취 없지만/숲은 남아 지금도/사람들은 성 밖 나가는 거고, 성 밖 숲 가는 거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왕버들 숲엔 /오래 된 기억처럼 나이테처럼 고목들이 껴안은 험준한 읍성이 그대로 있다. … 중략 … 성밖숲에 해지고, 나무도 늙어 그런지/더 어두워지는 기미가, 성문 닫히는 소리가 많이 굼뜨다.' -'성밖숲' 중 일부
성밖숲은 성주군의 중요 국가지정 문화재 중의 하나다. 옛 성주읍성 밖에 인위적으로 조성한 숲으로 300~ 500년생 왕버들 노거수 56주가 남아 우거져 있다. 이 고목의 숲은 조선시대 선조들의 풍수지리 사상과 자연관을 오랜 세월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성밖숲, 그 그늘 아래엔 현재도 성주군민들은 각종 문화행사를 펼치고, 휴식하고, 운동도 하는 등 정신문화의 재현 공간으로, 쉼터로, 체육공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주의 옛 왕국을 신라로 잡기보다는 자꾸 가야국에다 그 뿌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성주의 옛 왕국, 가야국 '출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음악가' 우륵(于勒)을 마음에 모시게 된다. 그런데, 왜 가야이며, 왜 우륵인가. 내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그것은 단지 가야금, 가얏고에 대한 매혹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가실왕의 명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전란의 세월에다 열 두 줄 현을 메워 천상의 소리를 '발명'해 낸, 그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영혼을 깊이 울리게 한 우륵, 그의 가야금! 나중에 신라로 망명한 우륵의 행적을 더듬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저 가얏고의 선율에 취하면 될 것이다.
정치적·역사적으로 가야국은 멸했으나, 가야의 그 소리는 결코 멸하지 않을 터. 어릴 적, 고향 땅 성주 초전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원경은 말했다시피 하늘 아래 거대하게 나타난 푸른 고래등 같았다. 지금, 거기에다 덧붙여 상상을 해본다면, 그 푸른 고래등은 한 척의 커다란 배일 수도 있겠다 싶다. '가야국은 어디로 갔나?//다만 망망대해라는 슬픔'(필자의 시 '가야금' 중 일부) 그래, 그 배는 수평선 너머 먼 바다로 나아가 한 채의 둥근 섬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망하지 않을 푸른 소리의 섬으로, 영원한 제국으로 어디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또한 그리하여 가야국, 사라진 그 영화는 두 번 다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사라지지 않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저 아름다운 가야금의 선율이요, 그것을 듣는 이의 감동이라는 것이다.
지난 시대의 부와 권력이 지금 어디에 남아 있는가? 사람의 짓 중에 마침내 남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가야금, 그 소리는 지금도 우리 곁에 '현역'으로 남아 절묘하다.
#시인 문인수는
1945년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에서 태어나 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등이 있다. '심상신인상'(1985), '대구문학상'(1996), '김달진 문학상'(2000), '노작문학상'(2003), '금복문화예술상'(2006), '시와 시학 작품상'(2006), '편운문학상'(2007), '한국가톨릭문학상'(2007), '미당문학상'(2007) 등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2008년, 올해의 시'에 시집 『배꼽』이 선정돼 금메달을 받았다. 영남일보 기자(1990~98년)와 제8대 대구시인협회장(2006~2008년)을 지냈다.(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