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신학이란 무엇인가?
John B. Cobb, Jr.
이 소책자는 존 캅 박사가 2004년 9월 클레어몬트 신학교에 서 했던 강연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캅 박사는 이 강의에서 철학적인 접근보다는 성서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면서, 신의 본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비전문적인 용어로 과정신학의 기 본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John B. Cobb, Jr. 박사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명예교수이자, 과정사상연구소의 공동설립자이다. <과정과 신앙 연구소 Process & Faith>는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찰스 하트숀의 과정사상에 기반한 신학이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제반 경험을 가 장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하는 구성원들로 모인 기관이다. “과 정신학”이란 그 자신의 교리나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대 신 그것은 우주가 창조적이며, 상호연관적이며, 역동적일 뿐 만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고 보는 기본적인 사고의 방 향을 가진다. 김희헌 역 (2009, 여름) 1 1. 성서적 접근 지난 수년 동안 <과정사상 연구소>와 <과정과 신앙 연구소> 는 학기마다 한 번씩 과정신학이란 과목을 개설해왔다. 그것 은 학생들, 특히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에게 클레어몬트 신 학교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일부인 이 신학을 소개하고자 함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매 학기 똑같은 강의를 제공하려는 뜻은 없었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는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수많은 주제를 이야기해 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강의들이 과 정사상에 대한 선지식이 없는 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정 도의 기초적인 수준에서 진행되기를 원했지만, 대부분의 학 생들은 과정사상 자체에 제대로 입문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내가 이 강의를 하게 된 동기이다. 과정신학에 입문하는 일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아마도 과정신학이 철학적 신학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이 과정신학을 고전적인 전통으로부터 이탈 시키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대부분의 신학은 철학적 신 학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적 신학이든지 그것을 특징짓 고 있는 철학적 견해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소개하 는 일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이 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알아야 하고, 플라톤의 신학을 이해하려면 플라톤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칸트 의 신학을 이해하려면 칸트 철학에 입문해야만 한다. 틸리히 를 이해하려면 쉘링을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실 존주의 사상 특히 하이데거에 관한 선이해가 없이는 불트만 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정신학, 최소한 클레어몬트의 과정신학을 이해하려면 화이 트헤드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2 이점은 또한 어떤 특별한 철학적 신학을 공부하여 그것 을 자신의 입장으로 받아들이려는 결심은 그 신학과 연합하 여 있는 철학이 지니고 있는 설득력에 부분적으로 기반한다 는 점을 의미한다. 만약 플라톤이나 칸트가 철학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존적 중요성을 지 닌 것보다는 역사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사고에 기초한 신학 들을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실존주의자들의 통찰에 깊 은 인상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신학자들이 어 떻게 그 통찰을 활용하는지를 보고자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청중으로 하여금 무언가 낯 선 방식의 사고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지 않은 채 철학적 신 학을 곧장 소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 질문이란 평범한 질문들을 습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깊이 있게 밀고나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질 문들을 심각하게 묻지 않거나, 그런 질문들로 이끄는 일련의 반성적 사고를 먼 곳까지 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적 답변이란 그들의 평범한 질문들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지 않는 다. 이럴 때 나타나는 현상은 철학적 신학을 기피하고 성서 신학이나 특별한 교단의 신학을 붙잡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요한 웨슬리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웨슬리가 가 졌던 것만큼도 철학적 문제의식을 지니지 않은 채, 그의 신 학이 지닌 동시대 상황에서의 적합성을 입증하려 한다. 웨슬 리가 자신의 생각을 성서에 대한 탁월한 접근을 통해 형성시 켰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하다. 그가 자기 사고형성 에 영향을 끼쳤던 철학적 관심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다. 이런 방식의 신학 작업이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 음은 분명하다. 나 또한 이런 시도들을 얼마간 했었다. 더 3 나아가 과정신학은 (근대적 사고를 포함하여) 그리스적 사고 방식이 미친 과도한 영향에 의해 왜곡되거나 감추어진 성서 적 사고방식의 회복을 촉진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후대에 이 르러 정통 철학적 신학(그리스적 사유에 의해 형성된 신학을 가리킴, 역자)으로 인정받은 사상에 반대하여 과정신학이 지 지하는 성서적 사고에 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점이 과정신학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접근 이 될 것 같다. 이 방식에 대해서 더 말해 보겠다. 2. 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방식 한 가지 문제는 어떤 점에서 기독교 전통(the tradition)에 대한 다른 유사한 비판들과 더불어 과정신학이 너무 성공적 이어서 그것이 비판하려는 전통적 입장이 일반 기독교인들에 게는 거의 비판받을 것조차 없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우 리가 만약 과정신학의 이러한 모습을 강조한다면 많은 기독 교인들이 충분히 동의하겠지만, 또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렇 게까지 소동을 벌이면서까지 전통신학의 입장(the classical positions)을 비판할만한 이유가 있겠냐고도 생각할 것이다. 이것의 예를 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방식에서 찾아봐야 한다. 전통신학은 신의 불변(不變, God’s immutability)이란 사상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 주장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들이 신에게는 어떠한 실제적인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신에게 어떤 차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다 는 것은 신이 그것들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 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영원히 완벽한 존재요, 따라서 신은 어떤 경우에도 변화도리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리스철학의 과도한 영향을 받은 전통신학이 소위 기 4 독교의 정통 입장이라고 강변해 온, 역자) 이 주장은 성서와 항상 긴장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의 일반적인 예배나 경건과도 긴장관계에 있다. 기독 교인은 기도할 때, 이 종교적인 행동이 하나님에게 어떤 차 이를 만들어 낼 것이라 생각하고 한다. 그 차이란 단지 (기 도를 통한) 감사의 표현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만을 의 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거나, 힘 주시기를 바라거나, 사랑하는 이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 때,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기도가 발생할 사건에 어떤 영향 을 미치기를 희망한다. 물론 어떤 이는 그 영향이란 것이 단 순히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탄원기도나 중보기도는 별 의미가 없 는 것이 되고 만다. 짧게 말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도가 기도하는 사 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 다. 분명히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 고, 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아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서도 응답하신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성서가 일반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기대를 형성시킨다는 점에서, 이런 이해들은 신의 전적인 불변(total changelessness)을 주장하는 전통신학의 공식적 견해를 지지 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점이 전통신학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명백한 문제점이 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답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어떻게 세상 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과 응답의 문제를 신 의 불변(immutability)이라는 관념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단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도 시간이란 실제적이라는 생 각을 부정하는 것에 있는 듯하다. 이 경우, 하나님에게 모든 시간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식으로 주장될 수 있을 것이 5 다. 우리에게는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이 하나님에게는 발생했거나 혹은 영원히(eternally), 다시 말해, 무시간적으로 (nontemporally)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 명은 실제적인 신앙심과 접점을 형성하지 못했던 전통신학의 단절의 문제를 또 다른 단절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할 뿐이다. 만약에 시간이 하나님에게 실재적(real)이지 않다면, 시간이 란 진정으로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뒷받침하는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착각 (illusion)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성서는 이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과정신학은 이 문제를 풀 때, 완전이란 불변을 수반한 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전제하고 있는, 역자) 생각을 부정하는 간단한 조치를 사용한다. 과정신학은 그러한 연결 (신의 완전성은 불변성을 동반한다는 주장, 역자)이 성서로부 터 도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의 불변성에 관한 사상은 역사적인 그리스적 가치를 대변하지 성서의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어떠한 공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 불 굴성(invulnerability)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반면, 유대인들 은 사랑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사랑 자체는 어떤 존재가 다 른 존재에게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자 유롭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는 자식들이 고통당할 때 자신도 고통당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된다. 우리의 사랑이란 매우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다. 만약 하나님이 완전하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완벽한 사랑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완벽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하나님의 경우는 모든 피 조물)에게 발생하는 일에 의해 최대한의 영향을 받아야만 함 을 뜻한다. 하나님은 불변하고 또한 상처를 입지 않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의해서 영향을 받 는 분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받아 6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경험이 자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 은 변화(change)의 한 형태이지만, 그 변화는 상실(loss)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이 변화의 완전한 형태이다. 하 나님은 분명히 무언가가 파괴되는(damaging) 방식으로 변화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완벽한 불변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특성 혹은 본성과 관련했을 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원히 완전한 사랑이시다는 말 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은 완전한 변화 (perfect change)를 뜻하는 완전한 공감 (perfect empathy)과 완전한 감응(perfect responsiveness)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과 고통당하며, 기뻐하는 모 든 이들과 함께 기뻐하신다. 과정신학은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하나님도 다른 존재 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말한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 은 모든 피조물과 완벽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이다. 피조물 들은 일부의 존재와 매우 불완전하게 상호작용할 뿐이다. 이 것은 철학적 진술이지만, 성서의 이야기들과도 잘 어울린다. 특히 예수를 통해 나타난 계시에 입각하여 읽을 때 더욱 그 렇다. 하나님은 완전히 문자적으로 우리가 기뻐할 때 우리의 기쁨을 나누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신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과정신학의 이런 설명은 매우 급진적이며 다소 간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생각 이 오히려 진부한 것이 되었다. 이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과정신학의 두 번째 특징은 위와 같은 변화를 하찮은 것이 아니라 중심적인 것으로 받아 들인 것이다. 그것은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이 라고 종종 불려진다. 범재신론이란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범재신론을 가장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성서구절은 사도행전 17장 28절로,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7 가리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우리 자신의 존 재를 가진다(God as the one in who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고 말한다. 존 웨슬리도 바울을 인용하 여 하나님을 범재신론적인 방식으로 이해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범 신론과 범재신론의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었고, 범신론을 철 저하게 거절하였다. 범신론이란 신과 피조물 전체가 일치한 다는(identical) 주장이다. 신이 우주인 것이다. 때때로 이 주 장은 피조된 실재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가 잘못되었 다는 것, 그리고 진실로 실재적인(truly real) 분은 오직 온 우주를 통합하는 한 영이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였 다. 또 다른 때에는, 오직 존재하는 것은 우주 밖에 없지만 우리가 우주 전체를 가리켜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주장 을 가리키는데 범신론이란 동일한 이름이 사용될 수도 있었 다. (과정신학자들을 포함하여)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위 의 두 형태의 범신론을 거절한다. 범신론에 대한 거부는 보통 신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를 수반하여왔다. 그 말은 또한 한 가지 의미보다 많은 것을 함 축하고 있다. 범신론이 거부되었을 때는, 어떻게 신이 세상과 다르며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는 지에 강조점이 놓였다. 만약 그런 신이 있다면, 결과적으로 형성된 신론은 신이 바깥으로 부터 침입(intrusion)하는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것 으로 기술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가진 이해는 신이 세상을 존재하게끔 만들고 또 세상이 동작할 수 있도록 조절하는 법 칙을 제정한 분이라고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보통 자기 자신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여기는 관점이다. 짧게 말해, 범신론의 반대는 신의 내재성에 대한 거부나 최소화로 나아 갔다는 말이다. 로빈슨 주교의 말을 빌리자면, 신은 “위에 존 재하고(up there)” “밖에 존재하는(out there)”으로 느껴졌다 8 는 말이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신이 세상과 다른(distinct)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이 세상을 초월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 은 신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내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따 라서 많은 사람들은 신이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만약 신이 발생하는 모든 것들과 직접적 으로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또한 신에게서도 일어난다면, 신의 타자성(otherness)과 연합한 신 과의 이러한 밀접성(closeness)은 이해가 된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신 안에서의 우리의 현존이 신의 존재를 고갈시키지 않은 채 우리 모두는 신 안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제안하여 왔다. 이것이 범재신론이고, 이런 생각이 과정신학에 의하여 강력하게 진전되어 왔다. 50년 전에는 이런 생각이 많은 집 단들로부터 위험스러운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범재신론 의 유형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문제보 다는, 어떤 유형의 범재신론을 채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종종 이슈가 되는 듯하다. 과정신학은 “파악(prehension)” 또는 “내적 관계(internal relations)”라는 자신의 철학적 이해를 통 해 다른 대부분의 주장들보다 보다 명쾌한 방식으로 범재신 론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오늘 내가 나 스스로를 제한하여 서론적인 소개를 하려 고 하는 일을 넘어서는 것 같다. 범재신론에 대해 엄밀하게 말하자면 오직 세상이 신 안 에 있다는 생각과만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것과 밀접 하게 연관된 생각 즉 신이 세상 안에 있다는 주장도 포함하 는 것으로 종종 여겨진다. 대부분의 범재신론자들은 이 생각 도 받아들인다. 과정신학자들도 이점을 확실하게 수용한다. 우리는 바울에 의해서 각별히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의 9 내재에 관한 성서의 언어를 강조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며, 그리스도도 우리 안에 있다. 이런 주장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우리 자신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외부를 바라볼 때와 같이, 그 리고 어쩌면 우리 외부를 바라볼 때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안을 들여다 볼 때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다. 과정신학은 어떻게 하나님이 만물 안에서 그리고 특별 히 인간의 경험 안에서 활동하시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기술 하려는 방식으로 나간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지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성서 그리고 기 독교의 대중적 이해로 널리 알려진 형태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고전적인 전통(the classical tradition)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오래토록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었지만,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정신학자들은 그들이 이제 더 이상 급진적이거나 이 상한 부류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을 멈출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우 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방향으로 신학의 무대가 옮 겨지고 있다는 것을 축하할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에조차 과 정철학에서 유래한 범주들을 사용하여 실체철학(substance philosophy)에 의해 형성된 정신의 습관들을 해체할 때에야 비로소 위와 같은 생각들이 보다 명료해지고 그 뜻이 풍부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적인 신념이 과 거보다는 보다 드물게 이 세상 속에서의 신의 활동이 피조물 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보다 빈번하게 신의 활동이 피조물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시되 는 현상에 기쁘다. 10 여태까지 내가 설명해왔던 입장은 여전히 보수적인 복 음주의 그룹에서 논쟁적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클라크 피노크는 “개방신학(open theology)” 이라고 불리는 운동의 지도자인데, 그 신학은 성서로부터 이 러한 생각들을 도입하여 그 주장을 성서에 기초하여 강력하 게 지지한다. 이것은 주로 자유주의적 개신교 전통 출신인 과정신학자들과 보수적 복음주의권의 중요 그룹 사이에서 창 조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30년 전만 해 도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3. 신의 본성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내가 지금까지 설명해온 방식의 신과 세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불변의 교리보다 더 완고한 생각을 고수하는 고전 신학의 다른 교리 들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것들은 전지(omniscience)와 전능 (omnipotence)에 관한 교리이다. 과정신학자들은 전자를 재 구성하였고, 후자는 대부분 버렸다. 전지에 관한 주제를 먼저 다뤄보도록 하겠다. 고전적인 신학전통에서 신의 전지란 신이 항상 발생했던 모든 것과 발 생할 모든 것을 알아왔다는 점을 의미했다. 과정신학은 신이 발생했던 모든 것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 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신이 우리보다는 훨씬 더 많 이 앞으로 발생할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점과 현재까지 발생했던 일들로 인해 지금 결정되는 미래에 관한 모든 것을 안다는 점에 동의한다. 신은 우주의 미래에 대한 많은 과학 적 질문을 제기한 인류라는 생물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신은 이 지구 위에서 이루어 11 질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 지도 안 다. 신은 완벽하거나 이상적인 지식을 가졌다. 하지만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은 미래에 정확 하게 무엇이 발생할지 알지는 못한다. 피조물들, 특히 인간은 그것이 확정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실제적인 결정들을 내린다. 신이 그 결정들과 그것들이 유발할 일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기에 실제적인 결정이 있 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정되기 전까 지는 신이 결정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지식에 제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을 마치 그것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안다는 것은 진 정한 지식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의 완벽한 지식이 란 이미 발생한 것들에 관한 모든 지식이요, 현재 확정되어 미래에 관해 이미 정해진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이요, 불확 정한 미래에 관해 불확정한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발생할 모든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 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과 대립된다고 주장하여 왔다. 과정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 리는 복음주의적인 개방 신학자들이 우선적으로 자신들의 성 서 연구에 기초하여 이러한 결정에서 우리와 입장을 같이 한 다는 점에 기쁘다. 이 부가적인 조치에서 그들은 과정신학자 들과 동일한 움직임을 보인다. 전능 교리에 대한 과정신학자들의 반대는 보다 강력하 고 보다 단호한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교리가 서구문화 에서 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매우 깊은 영향을 주어왔던 것으 로 보이기 때문이고, 또 그 교리가 커다란 해악을 발생시켜 온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어떤 과정신학자들은 이 주제를 전지에 관한 주제 와 유사한 것으로 취급하여 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전지가 12 당연히 완벽한 지식을 의미하듯이, 전능은 완벽한 힘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벽한 힘은 기독교 전통이 전능을 설명해왔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과정신학자들은 전능이라는 말이 너무도 부정적인 기능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전략으로 그 의미를 살려내기 힘 들다고 판결을 내려왔다. 찰스 하트숀은 『전능과 다른 신학 적 잘못들』이라는 작지만 대중적인 책을 썼다. 나는 그가 전능 교리를 긍정하는 것은 신학적 잘못이었다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나는 우리가 이런 잘못을 인정하고, 그런 주장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직시하고, 변화된 방향 으로 우리의 신학적 감수성을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다. 아마도 언젠가는 전능이라는 말이 이렇게 변화된 상황 에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지만, 현재로선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픈 생각은 없다. 나는 그 말의 함축적인 의 미가 너무 강하고 해롭기 때문에 지금 그 말을 긍정적인 방 식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전능”이라는 교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그 말 자체 에서 시작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능이란 신이 모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신이 모든 힘을 갖고 있다면 피조물은 스스로 행사할 힘이 전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힘도 없다면, 결정을 내리거나 책임감을 갖는 일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착각(illusion)에 불과할 것 이다. 모든 것이 실제로 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고, 심지어 우리가 신학적 불일치 속에 있을 때, 신은 양편 모두의 입장에서 모든 논쟁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이다. 또한 신은 모든 전쟁에서 양편의 입장에서 싸우고 죽 이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모든 죄에서 신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13 일부 신학자들은 이런 방향에서 전능 교리의 일관된 결 론을 표현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독자가 명백하게 예상되는 결과를 끄집어내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진술들을 하는 일에 성급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제1원인과 제2원인을 구분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그들은 신이 발생하 는 모든 일들이 꼭 그렇게 일어나도록 만드는 제1원인이 된 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제2원인이라는 것이다. 신이 피조물들 안에서 그리고 피조물들을 통하여 활동한다는 것이 다. 피조물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신 이 그렇게 하도록 결정지은 일을 피조물들이 한다고 할지라 도 신은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판 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이해가 된다고, 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성서 기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신의 전능교리와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감에 대한 문제를 화해시키고자 했던 고전적인 신학 공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의 전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모든 논리적 결론을 그런 사고방식을 통해 도출하지는 않는 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어려운 연관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어린이가 사고로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의 질문은 운전자의 음주상태에 대해서나 부모의 부주의함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발생 하도록 했으며, 최소한 그 일이 벌어지도록 허락했을까를 묻 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어 느 누가 처벌 받고 있다거나, 신이 그 어린이를 천국에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거나, 아니면 유한한 우리의 생각으 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목적이 신에게 있었다거나 하는 식 으로 말이다. 14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분노한다. 다른 사람들은 신을 다시는 믿을 수 없게 된다. 수 백 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일어났거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들 때문에 신을 저버려왔다. 만약 신이 있다면 최소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주요 사건들은 “그 양반(him)”의 의지 로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은 널리 알려진 믿음이다. 이것이 무신론이 발생한 주요 이유이다.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은 과 정신학의 관점에서 악에 문제에 관한 가장 철저한 토론을 해 내었다. 문제는 나쁜 일이 발생한 원인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신의 탓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인간이 가질 책 임감은 줄어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신을 믿 는다는 것은 신이 완벽한 통제를 한다는 믿음을 수반한다고 가정하는 수많은 인문주의자들은 만약 인간이 자유를 경험하 고 책임감을 떠안은 것으로 여긴다면 신은 반드시 부정되어 야 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신의 죽음(의 신학)” 운동에 서 다시 떠오른 니체의 신의 죽음에 관한 단언은 바로 이 관 점을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따라서 과정신학의 눈으로 볼 때, 신을 믿는 것이 전능 교리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제하면 이 교리는 전능한 신 을 믿는 사람과 신을 부정하는 사람 양측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하겠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개방 신학자 들(open theists)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학자들의 관심을 촉구 할 만큼 충분히 심각하다. 그러나 이 교리에 관하여 대부분 의 신학자들은 과정신학과는 다른 조치를 취해왔다. 지난 세 기 어간에 점점 더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이 신 자신을 제한 하고 있다고 주장하여 왔다. 신은 최종적인 세부항목에까지 이르는 모든 것을 통제할 힘을 갖고 있지만, 신은 그 힘을 실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방식으로 신 15 학자들은 신이 피조물들, 특히 인간의 자유를 위한 여지를 만들었다고 믿었다. 분명히 이런 방식으로 변화된 설명은 고전적인 전능 교 리에 관한 많은 반대 논거들을 제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설명은 두 가지 점에서 한계 가 있다. 첫째, 신이 언제라도 개입할 수도 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설명은 왜 신은 어떤 구체적인 사례에서 개 입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낳는다. 개인에게 닥친 비극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의 책임감을 지키려는 가치가 신이 개입 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가치보다 크다는 대답이 가능하다. 그러나 쇼아(Shoah)*나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에 부닥치면, 이런 종류의 대답은 확신을 줄 수가 없게 된다. 만약 신이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임박한 학살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입 하지 않는다면, 과연 언제 신이 개입하기는 할 것이라는 말 인가?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유지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극단적인 이해가 가진 결점으로는, 신의 잠재적 전능 성에 관한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치란 그 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종말에는 선이 마침내 승 리하게 됨으로써 신의 능력을 그들이 납득할 수 있게 될 것 이라는 믿음을 존속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신의 자기제한이라는 관념이 지닌 두 번째 문제점은 그 관념의 일반적인 공식에서 의미하듯 신은 인간의 행동이나 * [역주] 1939년부터 자행된 나치의 장애인 말살작전을 말한다. 나치는 독일 전 역에서 생존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장애인들을 안락사시설로 집결시켜 살해 하였다. 그리고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생체 실험을 거쳐 1940년에는 처음으로 일산화탄소로 살해할 것을 결정하고 패전까지 약 20만 명의 장애인들을 살해 했다. 이 대량학살은 약자와 동성애자, 외국인으로 확대되어 갔다. 16 역사의 사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뜻하게 된다는 점 이다. 신의 자기 제한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인 사람 모두가 이런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장을 강 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신이 이 세상에서 강 압적으로 활동하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그럼으로써 신이 설득 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입장으로 공식 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방식으로 과정 신학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과정신학이 갖고 있는 대안적인 설명은 신과 피조물 그 리고 신의 능력의 본성에 대한 토론에서 신이 사건들을 일방 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식의 모든 이야기는 그 출발에서부 터 헛갈리고 있으며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상 모 든 사건은 복합적 원인을 지닌다. 순간적인 인간의 경험도 과거의 경험들과 현재 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과거와 현재의 외부적 세계, 다른 사람들, 그리고 신에 의해 인과적 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또한 미래에 대한 자기 예기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으며, 자기 스스로를 위해 결정을 내림으 로써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이 원인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정확하게 무엇이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사건들을 형성시키는 어떤 일방적인 인과작용이란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경험의 얼마간의 특색을 선행했던 특정 원 인에서 찾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조차 어림잡은 근사치에 불과한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특색이라도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 (즉 새로운 경험) 안에서 차지하는 그것의 위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용도상, 이러한 근사치는 그런대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경험의 일 정 특색을 신의 직접적인 효과에서 찾을 수 있다. 화이트헤 17 드적 분석에서, 신이 끼치는 공헌은 중요하고 참으로 필수적 인 것이다. 과정신학은 신의 힘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행하는 역할을 검토할 때, 신의 힘을 통제하는 (controlling) 것으로 보는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잘 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과정신학은 주장한다. 통제하는 힘에 관한 사고는 다른 존재 안에서 혹은 다 른 존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도록 만드는 존재로부터 나온 다. 이것은 현재와 관련을 맺고 있는 과거에 된다. 과거에 발생한 것을 부여받은 현재는 일정한 형식(forms)이나 특색 (features)을 (과거로부터) 떠맡지 않을 수 없다. 이점이 때때 로 우리를 좌절시키면서도 또한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규칙 성과 연속성의 기초이다. 그러나 신은 그런 과거의 존재들 (entities)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무수한 신학자들, 예를 들어 몰트 만과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자들은 신이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활동한다는 점을 강조하여왔다. 나는 그 용어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신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 과 과거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서로 대비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나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고, 따 라서 신은 현재에 우리의 미래를 열게 하는 영향이라고 말하 고 싶다. 신은 우리가 매 순간 결정하기 위해 취하는 선택적 인 실제 가능성들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신은 우리로 하여금 저것보다는 이것을 현실화시키도록 부르지만, 그 결정은 우 리 몫이다. 달리 말해, 신은 자유와 책임감의 수여자이며 정 의와 공의를 요청하는 존재이다. 신은 선을 선택하는 힘의 원천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지는 않는다. 신은 해방자, 능력 부여자, 교사, 그리고 안내자이다.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힘과 과정사상이 신에게 18 부여한 종류의 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힘이 전통 적인 방식으로 이해될 때, 신이 보다 더 많은 힘을 행사할수 록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힘은 더 적어지게 된다. 과정신학 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힘을 이해할 때, 신이 강력하게 우리 안에서 일하면 할수록 우리의 능력과 자유와 책임감을 커져 간다. 4. 성서 속의 하나님 나의 접근방식이 철학적이라기보다 성서적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능에 관한 주제를 성서에 관한 언급도 없이 꽤 길게 토론해왔다. 이제 주제들이 세분되었으므로, 성서는 과 연 신의 전능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기로 하자. 선 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control)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가? 아니면, (적어도 예수 안에서 계시되고 바울을 통해 기 술된) 하나님의 힘은 과정신학을 통해 보다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제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 려고 한다. 첫째, 성서는 신의 전능을 가르치는가? 내 생각에는 그 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주장은 하나님이 사건들을 통제하 거나 또는 당신이 일방적으로 활동할 수 있거나 활동하신다 는 것을 암시하는 성서구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이 아니다. 그러한 구절들이 신구약성서에 모두 있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그런 구절을 기록한 성서기자도 하나님이 모든 힘을 가진 분으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 려 그들은 하나님이 개인의 삶과 역사를 위해 품은 뜻이 무 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통제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잘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체계된 사 19 고로의 압박을 받을 때, 그것은 결국 전능이라는 관념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전능이라는 생각이 성서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이 성서의 기본적인 가르 침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수없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과 사 람들이 상호작용하는 내용이 나온다. 요나 이야기에서 하나 님은 확실히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통제 하는 힘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요나가 배에 올라 니느 웨의 반대방향으로 갈 때 하나님은 요나의 불순종하는 행동 을 통제하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요나의 행동에 대해서 하 나님은 요나를 배에서 낚아채 내려서 니느웨에 그를 떨어뜨 리는 방식이 아니라, 폭풍우를 보내고 선원을 통해 요나가 바다에 빠지도록 설득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우리가 보다 덜 공상적인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된다면, 전체적으로 거기에는 신의 통제하는 힘이 약해 지고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보다 많아진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사람들은 응답하며, 어떤 때는 잘 되고 어떤 때는 잘 안 된다. 일반적으로 신약성서를 포함 하여 후대의 문서들에서는 하나님의 통제적인 힘의 행사에 관한 기사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전능 교리와 창세기 1장에 나와 있는 창조기사는 밀접 한 연관이 있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 어느 지점에서,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았던 영지주의 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로 부터의 창조 교리가 발전되었다. 무로부터 창조하였다는 것 은 일방적인 통제적 힘(unilateral controlling power)의 분명 한 예로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론이 발전된 시기 에 이르자 전능이라는 관념은 교회 사상의 일부로 확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성서 본문의 본래의 의미는 다르다. 거기서 20 하나님의 창조는 당시 널리 퍼져있었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 라는 고대 전통을 보다 많이 따라서 묘사된다. “공허(void)” 와 “깊음(deep)” 그리고 심지어 “물(waters)”이라는 단어는 혼돈을 나타낸다. 캐서린 켈러는 최근에 『깊음의 얼굴: 형 성의 신학, 2003』을 출판하여, 성서의 기자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상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분명히 하였 다. 성서 영역본의 많은 독자들은 이러한 언급들이 타당한 것으로 느끼기가 힘들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에서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 혹은 단순히 “전능자(the Almighty)”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보아왔 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공통된 수단이라면 어떻게 고대 유대인들이 신을 전능한(all-powerful) 분으로 이해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전능에 관한 관념이 단지 이론적이고 실존적일 뿐만 아니라 비성서 적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부 르는 보편화된 방식에 대처해야만 할 것이다. 대답을 말하자면, 구약성서는 영어 번역에서 “전능 (Almighty)”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어떠한 토대도 제공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욥기에는 샤다이(Shaddai) 또는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빈번한 언 급이 있다. 여기서 샤다이는 어떤 신을 지칭하는 고유한 이 름(a proper name)이다. 어떤 점에서 그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하나의 이름으 로 이해되어야만 했다. 히브리 성서가 희랍어로 번역되었을 때, 대부분의 경우 고유한 이름은 제거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의 대안이 사용되 었다. 욥기에서 번역자는 우주의 통치자란 의미에서 “Cosmocrator”를 사용하였다. 제롬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 21 하였을 때, 그는 샤다이를 일관되게 번역하고자 하였다. 그 리고 그는 욥기의 희랍어 번역자가 채택한 방식을 유지하였 다. 제롬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희랍어 “Cosmocrator”를 라틴어 “Omnipotens(전능)”로 바꾸었다. 유럽의 언어로 성서 를 번역한 후대의 번역자들은 제롬의 모범을 따랐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영어에서 이 번역자들은 샤다이를 “전능자 (Almighty)”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각주를 달아 그들 이 무엇을 했는지를 설명하였지만, 그것의 적절성을 묻는 방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간주한다 면, 고유한 이름인 샤다이를 “전능자”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서 어떠한 잘못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개방신학 운동의 복음주의자들은 내가 말했던 것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고찰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신적인 능력 사용을 제한한다고 가르치도록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전능 교리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때조차도, 그들은 그 교 리를 포기하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전능 교리가 엄격히 말해 성서적이지 않다는 점 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들은 전통에 호소한다. 이것은 재미난 행동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복음주의권은 신학적 권위에 대한 문제에서 성서를 전통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오래토록 익숙했던 믿음(beliefs)이 성서 본문에 대한 최상의 해석에 기 반한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었을 때,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은 우리의 믿음을 지어낸 전통에서 중심적인 것이라는 이유 로 그 믿음들을 아마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이다. 만약 의심 받고 있는 믿음이 유익한 것이거나 최소한 해롭지 않은 것이 라면, 과정신학은 가끔 인정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22 신의 전능 교리가 무해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5.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 종교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능 교리를 지키려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와 공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 해 확신하도록 한다는 것에 있다고 위에서 말하였다. 아무리 상황이 참혹하다 할지라도 전능한 신이 악을 극복할 힘을 지 니고 있고 선을 도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인권 운동과 같은 정의를 향한 뜻있는 운동에서 강력한 자극을 주 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확신을 지탱시키는 기반에 대한 상실은 과정신학이 다른 주제들을 일관되게 발전시키기 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이다. 결과적으로, 과정신학은 종말론의 다른 형태들을 발전시 켜왔다. 하나를 말하자면, 과정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완 벽하게 알려지게 된다는 견해를 발전시켜왔다. (하나님의) 그 “지식”은 우리에 관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 우리의 가장 깊은 감정을 우리와 공유한다는 것이자, 그 감정을 당신의 삶으로 공감하여 받아들인다(empathetic inclusion)는 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덧없이 퇴색되어가 는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 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점은 우리가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처신의 모든 결과에도 중요성을 부 여한다.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역자) 상실될 것이 없다 는 이런 확신이 세속사회에 출몰하곤 하는 의미상실의 문제 에 중요한 대답이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점이 반대로 새 23 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는 것을 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마조리 휴잇 수하키보다 더 열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대답해 온 사람은 없었다. 과정철학은 죽음 이후의 생존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 는다. 이점은 또 다른 종말론적 숙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데이빗 레이 그리핀보다 더 열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작업해 온 사람은 없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의 의미가 역사적인 계획의 성공에 의 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들이다. 그러나 과정신 학자들이 어떤 점에서도 역사적 계획이 가진 중요성을 최소 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둔다.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또한 신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이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과정신학은 역사 속에서 정의를 향한 갈구와 자연질서를 보 존하기 위한 열망이 강렬해지기를 원하지만, 승리를 보증하 기 위해 초자연적인 개입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런 개입(intervention)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일을 실제로 수행하기에 앞서 그 계획에 대한 성공을 확신하는 것이 실용적인 유용성을 지닌 다는 것을 알지만, 또한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런 보증은 위험 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도 많은 그런 계획들이 역사 * [역주] 과정신학이 신의 활동을 초자연적인 개입의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이해될 때 신학적 해명이 되기보다는 더 큰 난관만 가져올 뿐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그런 설명은 왜 하나님이 쇼아 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신학적 해명 을 줄 수 없다. 초자연적 개입의 방식으로 신의 전능을 설명하는 것은 신의 체면을 (잘못된 방식으로) 살려주려는 신학자들의 기특한 노력의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악의 문제에 관여하는 일에서 신은 오히려 일관되지 못 하다는 이해만 낳고 말 것이다. 그것이 현대 무신론의 기본 논거 중 하나이기 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초자연적(supernatural)”이라는 말의 의미를 피 상적으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철학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할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그리핀의 책을 참고하라: 『화이트헤드 철학과 자연 주의적 종교론』, 장왕식/이경호 역 (동과서, 2004), 53-55.) 24 속에 실패했었고 오늘도 실패하고 있다. 성공에 대한 보증은 실패를 훨씬 더 고통스럽게 만들며, 때로는 자신을 원망하기 에 이르기도 한다. 외부의 개입에 근거한 성공을 보증하는 것은 또한 노력하지 않게끔 만들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무 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신이 그 성공을 거두게 한다면, 왜 투 쟁이 그토록 강렬하겠는가? 과정신학은 하나님이 정의를 향 한 투쟁에서 참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 이 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성공에 대한 보증을 제공하지 않 으면서 어떻게 그러한 사실이 희망의 근거가 되는지를 가려 내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그 기초 위에서, 환상을 갖지 않 고 그리고 우리를 환멸에 빠뜨리지 않고 행동을 촉발시켜내 는 사실주의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6.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 여러분은 이 개론적 서술에서 내가 과정신학을 현대의 자유 주의나 후기자유주의 신학과 연관 짓기보다는 보수적인 복음 주의적 사고와 관련하여 설명하였음을 보아왔을 것이다. 과 정신학은 그러한 (후기)자유주의 전통들이 제기했던 주제와 토론할 수도 있다. 그랬다면 매우 다른 모양을 취했을 것이 다. 그 전통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서 초점 을 맞춰왔던 신의 본성에 관한 토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 로 비쳐질 것이다. 오히려 질문은 과연 우리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고, 만약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언어나 상징체계의 바깥에 있는 것에 대 한 언급이 우리의 토론에서 과연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지난 한 두 세기 동안 신에 관한 이야기 는 신학 담론의 주변으로 밀려났고, 초점은 인간에 대한 이 해였으며, 최근에는 특별히 “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조건 25 이 되는 언어 문제가 부각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에 대해 서 묻지 않고, 신학 담론과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기 능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결론에 기반 하여, 그들의 담론이 담론으로부터 떨어져 존재하는 것에 대 한 직접적인 기술이 된다는 가정이 없이 자신들이 전통적인 상징체계를 매우 전통적인 방식을 재도입할 수 있고 또한 그 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과정신학은 자신의 언어이론을 갖고 있으며, 다른 이론 들을 토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과정신학 의 이론은 담론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과정신학은 신의 본성에 관한 전통적인 토론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입문(서)가 그 것에 관심하여 왔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신”이 라는 말에 관해서가 아니라 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적 교회를 다 시 활성화(revitalization)시키는 일에 공헌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만약 과정신학의 이러한 노력이 우리를 최근의 자유 주의나 후기자유주의 전통보다는 일군의 보수주의자들과 신 학적으로 더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렇게 해 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그러 나 우리는 칸트 이후 서구적 사유의 대부분이 빠졌던 유아론 의 함정(solipsistic trap)으로부터 그들을 유인한 인식론이나 언어이론을 채택하고 있는 우리의 동료 자유주의자들을 설득 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도 과정신학 일반이 그리고 특정 부분의 과정신학이 개인과 교회와 학계와 세계에 의미 있는 공헌을 하는 것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헤아리게 될 것이다. 내 가 말하고 있는 그것을 여러분이 확인하고 나의 주장에 동의 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