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신행
[黃淨信行, 1903~2004]
본명은 온순(溫順). 법호는 팔타원(八陀圓). 법훈은 종사. 재가교도로 여성 최초의 구인제자인 수위단원 역임. 휘경학원과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을 설립했다. 대한민국 사회사업의 대모,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렸다.
생애와 활동
황정신행은 1903년 7월 10일 황해도 연안에서 부친 원준(元俊)과 모친 송귀중화(宋貴重華)의 장녀로 출생하여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13세에 서울로 유학,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여자보통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우던 중 부친의 열반으로 귀향, 3ㆍ1운동을 맞았다.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가 3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했고 이어 유치원 교사를 하다가 귀국, 이화여전 보육과를 1927년에 제2회로 졸업했다. 개화기의 신여성인 황정신행은 일본계 정토종 불교재단에서 경영하는 화광교원(和光敎院)에 들어가 관수동에서 화광유치원을 신설하고 교사 일을 맡아 보았다.
27세에 황해도 재령 사람으로 당시 서울 장안의 부호인 강익하(康益夏)와 결혼, 1남 2녀를 두었다. 서울 종각 부근에 순천상회(포목점)를 차리고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을 인수하는 등 부(富)를 축적했다.
황정신행과 원불교의 인연은 불연지인 금강산에서 비롯되었다. 원만하지 못한 가정 문제와 세속생활의 번뇌를 떨치고자 1935년(원기20) 여름 아들 필국(弼國)을 데리고 금강산을 찾아 여행하던 중에 개성교당 교도 이천륜(李天倫)을 만나 불법연구회를 소개받았다. 이어 그의 연원으로 서울교당(당시 돈암동 소재)에 나가 이완철과 이동진화를 만나고 이완철로부터 《금강경》을 배웠다.
이어 1938년(원기23) 35세 되던 해에 서울교당에서 소태산대종사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소태산과의 문답을 통해 30년 동안 들어온 기독교 목사의 말과는 달리 현세에서 무슨 희망이 있는 것 같았고, 부처되는 법까지 가르쳐준다는 말씀이 마음 가운데 크게 부딪혀 옴에 황정신행은 신심을 크게 발하여 제자가 되었다.
영생과 인과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소태산이 새 부처님이라는 확신을 가진 황정신행은 중앙총부와 서울교당의 유지 발전은 물론 창업기 갖가지 교단 경제난을 극복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소태산은 황정신행이 서울에서 한번씩 익산총부에 오면 특별히 대중을 모아 성리 법문을 설하여 그로 하여금 큰 사업과 아울러 속 깊은 공부를 겸하도록 배려했다.
1939년(원기24) 기묘동선(己卯冬禪) 때였다. 선원대중이 총부 공회당에 모여 소태산의 법설을 받든 후 송도성의 지도로 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혜수와 혜시 등 사업성적 관련사항을 세세히 기록하게 함을 보고 황정신행이 심도 있는 질의를 소태산에게 했고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한 것이 다음 《대종경》 교단품35장 내용이다.
황정신행이 “과거 부처님께서는 무념보시를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오른 손으로 주는 것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 했사온데, 대종사께서는 사업등급을 두시어 모든 교도의 성적을 다 기록하게 하시니, 혹 사업하는 사람들의 계교심을 일으키는 원인도 되지 아니하오리까”하고 묻자, 소태산은 “사업을 하는 당인들에 있어서는 마땅히 무념으로 하여야만 무루의 복이 쌓이려니와 공덕을 존숭하고 표창할 처지에서는 또한 분명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심히 간고했던 당시 총부 살림에 서울에서 총부로 내려올 적마다 상당한 정재를 가져왔던 황정신행의 입장에서 무념보시의 정신을 대중에게 일깨웠던 점은 교단 만대를 통해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정산종사는 이러한 황정신행에게 1957년(원기42) 4월 제1차 법훈증여식전에서 대호법의 원훈(元勳)을 주어 그 빛나는 공덕을 기렸다.
성장하면서 부친이 약자들을 돕는 모습에 영향을 받은 데다 이어 원불교의 타자녀교육의 교리정신에 바탕하여 황정신행은 한국고아들의 대모가 된다. 총부 안에 탁아소를 하게 되자, 소태산의 명을 받아 탁아소장이 되었고, 8ㆍ15광복이 되자, 송도성과 더불어 서울 남대문에서 ‘전재동포구제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서울 한남동의 일본인 사찰인 약초관음사(若草觀音寺)를 인수해 ‘보화원(普和園)’을 설립, 초대 원장이 되었다. 60여 명의 고아들을 수용해 설립한 보화원은 원불교 고아원의 효시가 되었다.
1950년 4월 UN의 사업 분야 지도자 양성을 위한 요원으로 선발되어 사회사업 훈련 및 시찰을 위해 영국을 순방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난 황정신행은 9ㆍ28수복 이후 귀국, 전쟁 중에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 9백여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한국보육원 원장직을 맡아 혼돈과 무질서, 겹치는 흉년으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고아원을 꾸려가면서도 원불교의 정신을 원아들에게 심어주어 용기를 잃지 않게 했다. 1956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전송가(戰頌歌)〉란 영화를 제작하면서 황정신행 원장과 한국보육원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어린이는 가정이나 국가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초월한 우주적인 존재이다. 국가나 지역을 떠난 우주적인 안목으로 한 생명을 바라보고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고 호소, 외국인들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았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황정신행은 동원도리ㆍ동기연계ㆍ동척사업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더욱 새롭게 체험했다. 제주도에서 7년여를 지낸 한국보육원은 그 후 서울 이문동 천막촌과 휘경학원 자리를 거쳐 현재 양주 진달래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황정신행은 1982년(원기67)에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昌弼財團)’을 설립, 한국보육원을 이에 귀속시켜 원불교 교단에 희사했다.
새싹회에서 1984년 그에게 수여한 제28회 소파상은 한국고아의 어머니로서 일생을 오롯이 헌신해온 거룩한 삶에 한 증표가 되었다.
또한 황정신행은 1970년에 학교법인 ‘휘경학원(徽慶學園)’을 설립, 산하에 휘경여중ㆍ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건학이념에 원불교 정신을 담아 여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2년에 《황온순, 천성(天聲)을 받들어 구십 년》이라는 문집이 발행되었다. 원불교 교단사업에 많은 정재를 희사하여 원불교의 수달장자라는 별호를 얻었다. 2004년 6월 29일 열반했다.
* 대종사와 황정신행 인연
어찌 대종사님과 같은 성현을 만날 수 있는 기연이 될줄이야 꿈엔들 알 수 있었겠는가?
다만 머리를 식히고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는데 우연히 골짜기에서 이천륜씨(종로교도)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원기 20년 여름 한달을 금강산에서 보내면서 새로운 내 인생의 출발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천륜씨와 얼굴이 익어가고 오며가며 만나는 동안에 나의 괴로움을 털어놓게 되었고, 그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게 되었다. 천륜씨는 내게 세상일이란 모두가 전생의 인연이니 부처님 뜻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初發心 自警文」이란 책을 주어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世樂後苦인데 何貪善哉 何不修哉리요」라는 구절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樂 뒤에는 고해가 있는데 무엇을 탐할 것이며, 어찌 불도를 닦지 않으리요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 머리를 휘감고 있던 무거운 안개가 말끔히 걷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고 천륜씨는 불법연구회라는 단체가 있다고 일러주면서 거기에서 정신을 수양하면 편안하리라고 간곡히 권했다.
이렇게 만난 천륜씨는 한달동안의 생활을 통해 나를 감화시켰다. 이미 대종사님의 가르치심을 본받아 생활 속에서 그 법을 실천하고 있는 천륜씨의 보살행은 결국 나로 하여금 불법연구회와 인연을 맺게한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의 영원한 길잡이이신 대종사님을 친견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 처음으로 교당을 설립했던 돈암동에서 상경하신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담임교무이셨던 응산님과 육타원님이 함께 계셨다. 나는 대종사님을 알아 뵙지 못한 채 인사할 줄도 모르고 그냥 있었다. 대종사님께서는 무명바지 저고리를 입으셨고, 육타원님은 옥색치마 저고리를 입으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처음 뵈온 대종사님은 안광이 부셨다. 겁없이 들어선 나는 대종사님의 그 위풍에 눌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다. 완전히 압도되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종사님의 첫 말씀이셨다. 나는 천륜씨의 소개로 왔다고 대답하고는
『여기는 부처님 공부하는 곳이라던데요?』
『그렇지라우』
처음듣는 전라도 사투리였다.
나는 촌사람들이 하는 곳인가 싶어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고 방자해졌다.
『어떻게 부처되는 공부를 합니까』
대종사님은 나의 당돌한 질문에 『내가 가르쳐 주지』하시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르치시며 『이 시계가 어디로 돕니까?』
『오른쪽으로 돌지요』
『몇번 돌면 하루가 됩니까?』
『스물네 시간입니다』
『며칠 돌아야 한달이지요?』
『30일 돌면 한달입니다』
『몇달 돌면 일년이지요?』
『열두달 되면 일년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쉬운 것을 물으시니까 잠시 위축되었던 내 어깨가 펴지면서 말씨도 약간 거칠어졌다. 왜 이렇게 어린 아이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물으실까 하고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다시 대종사님께서 물으셨다.
『사람이 얼마를 살아야 많이 사는 것입니까?』
『일흔살을 살면 많이 살지요』
『그렇게 치라우. 부처되는 것은 내가 가르쳐 줄테니 이완철선생만 만나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심으로 응산님보다는 육타원님이 좋을 것 같았다.
그때는 대종사님이란 호칭도 몰라 그저 「시골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골선생님만 오시면 가서 뵈었고 그러면서 나는 점점 부끄러운 생각과 잘못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으며 법회날이면 빠지지 않고 돈암동으로 가게 되었다.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몇 명 안되었다. 육타원님을 비롯, 성성원씨와 지환선씨등 그리고 몇 분이 모여서 설법을 들었다.
어느 날 응산님은 내게 한문공부를 권하였다.
『한문을 아십니까? 이런 책이 있는데 배우시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아쉬운 입장이 되셨던 응산님.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죄송하고 민망스러운 태도였는지 모른다. 응산님께서 내놓으신 책은 「금강경」이었다. 나는 이로부터 새벽 4시면 일어나 교당으로 가서 금강경을 배웠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응산님은 이미 우물가에 나와 계셨다. 법당에 들어가 좌복을 깔고 배우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배우다 보니 진리에 대한 새로운 터득이 있게 되었고 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교당 살림살이에도 관심이 생겼고 무엇이 부족한가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게되어 그때부터 집에 있는 것중 먹을 것이나 살림도구를 하나씩 싸가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행여 누가 알까봐 살짝 부엌에다 가져다 놓고 오는 것이다.
마음 속으로는 자꾸 시골선생님이 뵙고 싶어졌고 부처되는 일이 궁금해졌다. 쉬임없이 다니면 될 것도 같아졌다. 이에 따른 관심은 가을 추수기에 들어오는 곡물을 수레로 실어 날랐고 괜히 신이 나기도 했다. 아마도 이때가 初發心인 것 같았다. 그래서 총부에 다니는 길을 텄다. 날이 갈수록 처음 대종사님을 만나 뵈었을 때의 경솔함이 뉘우쳐졌고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촌스럽다고 생각했고 응산님에게도 날이 갈수록 고개가 숙여졌으며 하시는 말씀마다 새롭게 나를 감화시켰다. 겉으로 보는 육안의 경망스러움이 자꾸 송구해졌다. 혜안의 열림이 어떤 것인지는 몰랐지만 진실한 그리고 뭔가 까닭이 있을 것만 같은 수도자의 생활에 이끌려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원불교신문사, 구도역정기)
원기 20년(1935) 10월 경에 황정신행(黃淨信行)이 이천륜의 인도로 서울교당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뵙게 되었다.
『대종사님, 저는 신식교육도 받았고, 부자집으로 시집가서 물질적으로는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물질적 풍요를 주는 이상으로 정신적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는 것도 별 재미가 없고, 남편은 사랑보다도 미움이 앞섭니다. 지옥같은 이 생활을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극락과 지옥은 다 사람의 마음속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면 지옥생활을 하게 되고, 세상에 감사하면 극락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원망하고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큰 발심이 나서 영생길을 찾게 되었으니 모두 은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족이나 남편을 모두 부처님으로 알고 부처님께 불공하듯 잘 받들고 섬기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륜이와는 금강산에서 서로 만나 나를 찾아오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소중한 인연이라 서로 영원한 도반이 되어 함께 공부 잘하기 염원합니다. 정신행은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이니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 물질을 잘 활용하면 영원한 세상에 그 복락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장차 자선사업이나 사회사업에 뜻을 세워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황정신행은 대종사의 뜻을 받들어 고아사업·교육사업·사회사업에 일생을 헌신 봉공 하였다.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님은 일정 때 이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대종사님의 제자가 되어
교단 초기 어려운 때 물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신 불교로 치면 수달장자와 같은
선진님이십니다.
이 팔타원 종사께서 강익환 선생과 결혼하셨는데, 강익환 선생은 서울의 갑부로 구한말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자가용 세단 제1호차를 타신 분입니다.
강익환 선생이 팔타원님을 만난 인연으로 별장을 지어 준다면서 양주에 땅 35만평을
사주었습니다.
팔타원님께서 이 기쁨을 누구하고 같이 나눌까 생각하다가 익산에 계신
소태산 대종사님을 오시라고 하여 같이 야산을 걸어가는데 앞질러 가면서
손으로 솔잎을 훑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훑고 가는 겁니다.
대종사님께서 그걸 보시더니 정신행에게 물었습니다.
“왜 솔잎을 뜯어 버리는가?”
그러자 정신행이 대답했습니다.
“뭐 쓰지도 않는 것, 산에 많이 있는데 뜯어 버리면 어떠나요.”
대종사님께서는 조용하지만 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마디 일러 줄 터이니 똑바로 들어요. 만일 누가 정신행 머리카락을
마구 뽑으면 아프지 않겠소. 솔잎도 생명이 있어요. 살아 숨 쉬는 자연을 마구 꺾고
뜯어내면 산신이 노여워 않겠소. 앞으로 솔잎 하나라도 괜히 까닭 없이 뜯지 마세요.”
여기서 산신(山神)이라 하는 것은 천지지간에 다북찬 신령스러운 기운
식(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와 화초에도 아는 식이 있는가! 없는가!
기독교 성경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은 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얘기하며 산길을 가다가 물이 흐르는 개천에 이르게 되었는데 여름인지라
얼굴에 땀도 나고 더우니까 팔타원님이 물위에 얼굴을 대고 푹푹 세수를 하면서
“대종사님도 와서 좀 씻으시지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대종사님께서 허어 웃으시면서
“정신행 얼굴이 얼마나 커서 그 물을 그렇게 쓰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물을 어떻게 씁니까?”
물을 손으로 떠서 물가로 고개를 돌려서 이렇게 하라고 일러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흘러가는 물이지만 아무렇게나 쓰면 되겠소.
물을 함부로 쓰면 수신(水神)이 노여워하고 수신이 노여워하면
정신행이 물을 건널 때 다리를 잡아당겨. 그리고 후생에 물 귀한 곳에
태어날 수도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지금 같으면 물도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고 앞으로 세계가 물가지고
전쟁을 치른다고 하니까 이런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75년 전 당시에는 세상에 흔한 게 물이 아닙니까? 집 앞에만 나가면 개천에 흐르는 게 물이 고 산골짜기나 강가에 나가면 맑은 물이 끝없이 흐르는데 계곡 흐르는
물에 세수하는 것을 아껴 쓰라는 대종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겠습니까.
만일 지금부터 60년 전 6․25 이후 어떤 사람이 앞으로 얼마 지나면 물도 돈을 주고
사먹는 세상이 온다고 하면 저 사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냐고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흐르는 물도 아껴 쓰리고 하신 대종사님의 말씀은 정말 살아 있는
현장 법문입니다.
저는 당시 대종사님 말씀의 배경을 “풀 한 포기, 흐르는 물, 마시는 공기 이 천지자연(天地自然)이 다 우리를 살려 주는 생명의 은혜가 되는 것이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천지자연을 살려 쓰라 그래야 복된 삶을 사는 것이다.”하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 공부인은 물질이 넉넉하더라도 의식․거처 등에 항상 욕심이 없이 담백하고 간소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삿된 마음이 치성하여 수도하는 정신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마음에 모신 두 분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땐 거지가 많았던 때였다.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집이라 날마다 거지가 찾아 왔다. 온순 어린이는 거지가 먹던 수저를 따로 챙겨 두고 거지가 오면 그 수저를 얼른 내어 주곤 하였다. 거지가 먹는 수저와 집안 식구가 먹는 수저가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루는 아버지 황원준 님께서 이를 보시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참하다고 칭찬을 받을 거란 기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꾸중은 조용했으나 그러나 어린 온순은 뼈아프게 새겼다.
“사람은 본래 다 똑 같다. 그들도 부모가 없어서 거지가 된 것 뿐이다. 그 누구도 차별 해서는 안 된다. 능력껏 남을 도와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임을 너는 명심해야 한다.”
황정신행 종사는 이 말씀과 함께 이런 인생의 지표를 주신 아버님 앞에 평생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아버님을 가슴에 모시고 그 뜻을 좇아 살았다.
1936년, 황온순의 나이 33세 때 소태산 대종사를 돈암동에서 처음 뵈었다. 첫 만남에서 바로 법명을 받았다. 정신행(?信行)이라고. 이 법명은 후일 그 분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그린 듯한 이름이 되었다.
황정신행은 소태산을 통해 크게 깨친 바가 있다. 대웅전에 모신 금부처만이 부처상이 아니라 처처에 참 불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가의 보잘 것 없는 돌도 불상이요, 나무 한 그루도 부처라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황정신행 종사는 이런 깨달음과 함께 이런 인생의 지표를 주신 소태산 대종사 앞에 평생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소태산님을 새 부처님으로 가슴에 모시고 그 뜻을 좇아 살았다.
크게 살리는 집념
황정신행 종사는 영감(靈感)으로 느낀 일은 평생을 두고 일관 하셨고 그 추진력과 집념은 뜨거운 삼복의 햇살과 같았으나 외양으론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열 살 때 꿈을 꾸었다. 빨간 벽돌 높은 집에 푸른 잔디가 깔린 집이 종종 꿈에 보였다. 그 꿈을 꾸고 나면 하늘을 나를 듯 희망에 넘쳤다. 13살 때 이화학당 중등부에 입학 했을 때, 어려서 꿈에 본 그 집이었다.
붉은 벽돌집이 우뚝 서 있고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그 꿈에 본 건물과 푸른 잔디! 평생을 두고 팔타원님이 지은 집은 거의가 붉은 벽돌에 잔디가 깔려있다. 일도 한번 시작하면 여름 햇살처럼 뜨겁게 집념을 갖고 정성을 다 하여 일관 하셨다.
6·25 한국전쟁에서 서울대 문리대 중국어과에 갓 입학한 외아들 필국을 잃는다. 이럴 수가?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다. “자기 아들만 아들인가. 전재 아동 9백명을 제주도에 데려다 놓았으니 그들을 필국으로 알고 돌봐 주구려!”
황정신행 종사는 6·25가 터지자 영국에서 바로 귀국하여 부산 원불교 초량교당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마음을 추스르고 기도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아들 하나의 어머니가 아닌, 수 천 아들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되는 기연이 된 것이다.
황혼기에 시작한 교육사업
그 뒤 팔타원님은 인재양성에 뜻을 둔다. 슬기롭고 아름답고 진실한 여성교육을 스스로 해보려 든 것이다. 그때 여사의 나이 70이 가까워 진 때이다. 호적 나이로 68세였다. 지금도 이 나이는 정년퇴임을 하고 일 손을 놓을 나이요 또 놓으라고 권유를 받을 나이이다.
더구나 그 분은 부군도 없고 아들도 없고 따님 한 분은 피아노 교수로 사업엔 무관심할 뿐이고 또 하나 딸은 미국으로 건너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오직 혼자서 1970년에 휘경학원을 세운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머리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2005. 6. 29. 열반 1주기에 효산 조정근 종사님 글
ㅡㅡㅡㅡ일화
이제 인력거 타고 오지 마시오
나는 이리역에서 내려 총부에 올 때는 인력거를 타고 들어왔다. 교통수단이 어려웠던 그 당시 인력거만이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인가 대종사님께서 인력거 타고 오는 나를 보시고 『이제 여기 올때면 인력거는 타고 오지 마시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옵니까?』
『기계는 괜찮지만 인력거는 사람이 끄는 것이라 …이 다음에 땀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남들도 모두 다 타는데요…』
『차차 내 말을 이해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요』
무엇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는지 언뜻 이해가 안 갔지만 살아가면서 「그렇지!」하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총부 구내에는 여러 어른들이 계셨다. 전무출신 私家도 한도량이라 따로이 구분이 없었다. 물론 살림살이는 따로 했지만 도량상규는 똑같이 지켜졌고 밤으로 여는 법석에는 같이 참석하여 법문을 받들었다.
대략 총부에 머무는 기간은 7∼20일 정도였다. 이 기간 중 대종사님의 챙기심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대종사님께서는 많은 대중속에 특별히 나만을 챙길 수가 없으셨다. 이런 상황에서 道山님은 자주 의논할 것이 있다고 나를 불러 조실로 안내해 주셨다. 그래서 대종사님의 한말씀을 받들게 되었는데 마치 빈 독에 물을 부어주신 듯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도산님이 고맙다. 법설 듣도록 역할 해주신 그 배려가 정말 가슴깊이 감사한 것이다.
그 때 총부구내는 약 80여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일제치하의 곤궁함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난이었지만 초창기 교단의 어려움도 결코 작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내 힘이 닿는대로 총부에 내려올 때면 財産을 가지고 왔었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거의 돈을 세어보는 일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털어놓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보시를 하면 할수록 다시 채워지는 것이다. 애써 발버둥치지 않는데도 우연히 생겨났다. 하는 일마다 순풍이 돛단 듯 사업이 잘 되었다.
순천상회도 아주 잘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인간관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부부의 인연이 무엇인지?(원불교신문사, 구도역정기)
ㅡㅡㅡ
문이 열릴 때가 있을거야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인생의 또 다른 보람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보육원을 경영하면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아이들이 줄어가는 것을 보고 무엇인가 적절하게 활용되어질 장소가 되었으면 생각을 하였다. 학교를 구상해 보았다.
열릴특히 여성교육도량으로서 역할을 해보았으면 하고 원기 55년에 결단을 내렸다.
한국보육원이 양주로 이사를 하고 그 자리인 휘경동에 학교법인 휘경학원 설립인가를 1월 28일자로 받게 되었다. 첫해 입학 학급은 중학교 7학급 4백 90명이었다.
현금이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된 교육사업이었다. 보육원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교사로 했다. 장독대와 김치독 창고는 강당으로 수리하였고 아이들의 1인 1기 습득을 위해 세운 직업훈련학교 8개교실이 개교의 산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산과 논 등 약간의 부동산을 처리하면 별 어려움없이 전연 매매되지 않았다. 융통이 되지 않아 나는 교사 월급을 주기 위해 50만원을 빌리게 되었다. 그러나 빌린 돈 마저 한달이 지나도 갚지 못하게 되자 나는 용기를 내어 그분에게 학교에 희사한셈 치라고 했다. 그분은 어찌 생각했는지 나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빚쟁이가 되었다. 쉽게 풀리지 않는 경제사정은 몰릴대로 몰려 여기 저기 빚을 쓰게 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나는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던 것이다. 교도와 사회친구 등 약 25명에게 돈을 빌어썼고 어느 때는 붙들려갈 경우가 있었다. 매월 치뤄야 하는 이자와 원금 때문에 내 치마가 찢길 번도 했다.
나는 기도했다. 하루속히 부동산들이 팔려 이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도록 법신불의 가호를 빌었다. 나의 하는 일들이 사심에서가 아니고 후진들 기르는 교육도량을 건설하기 위함이므로 끝없는 은혜 베풀어 주시라고 매달렸다.
이렇게 시련이 시작된지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무 생각없이 쪼들린 생활은 길다면 긴 4년동안, 나는 어떻게 그래도 학교문을 닫지 않고 버텨 왔는지 모른다.
나는 대종사님 계실 때 나의 답답함을 울면서 호소했었다. 그럴때면 대종사님께서는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구름타고 하늘을 날아 갈 때가 있을 것이요』라고 하셨다. 나는 3년도 3개월도 견디기 어려운데 어떻게 30년을 기다립니까 하고 말씀드리면 『저렇게 못날 수가 있나? 문이 열릴 때가 있을텐데 … 30년이 지나면 모든 소원 이루어질텐데…』하시며 나의 중생 업력을 안타까워하시며 위로해 주셨다.
그 당시 멀게 느껴졌던 30년 세월은 흘렀고 사회사업이다 교육사업이다 하여 하늘을 나르기 몇십번이었던가?
성현의 한 말씀은 하나도 헛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학교 설립 후 겪었던 어려움도 4년이 지나자 자연히 풀리게 되었다. 산속이나 다름없었던 이곳 휘경동에 길이 나고 버스정류장이 생기는 등 도심지로 발전했으며 묶였던 땅들이 매매가 되어 빚을 갚았던 것이다.
나는 하나하나의 일들이 이루어질 때마다 어려웠던 고비가 풀릴 때마다 더욱 새롭게 생각나는 대종사님의 그 정신이 새로워졌다.
어찌 다행히 직접 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던가? 몇생을 갚아도 못다할 은혜다.
(원불교신문사, 구도역정기)
ᆢ아상을 버려라
원기 25년(1940) 4월 총회를 치르고 제1회 교도 교리강연대회가 열렸다. 4월 27일 익산총부 대각전은 지방에서 모여든 교도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찼다.
26명의 연사가 출연하여 각자의 실력을 자랑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직접 강평을 하면서 즉석에서 채점까지 하였다.
『초량교당의 임칠보화, 강연제목은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점수는 삼갑(三甲).』
당시 대종사는 강연 점수를 갑·을·병·정 이외에 1갑에서 12갑까지 평가하였다. 자신의 체험과는 상관없이 어려운 말이나 남의 말을 지나치게 많이 인용하면 을·병·정을 주었다.
그러나 비록 말이 약간 서투르다 할지라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 1갑에서 12갑까지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이 강연회에서는 영광교당의 이병오(李炳吾)가 1등, 남부민 교당의 김응섭(金應燮)과 이리교당의 이세옥(李洗玉)이 2등, 서울교당의 황정신행과 총부의 최상옥(崔常玉)이 각각 3등으로 입상했다.
한편 이 때 겨우 15세 소년 김정용(金正勇)이 10갑으로 특상을 차지했다. 김정용은 연사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으나 야무진 열변을 토했다.
김정용은 아직 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송도성이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는 연제로 대신 써준 원고로 대중 앞에서 적당한 몸짓 손짓을 섞어가면서 열변을 토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칭찬의 소리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대종사도 마음이 흐믓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십갑이다. 아주 잘했다. 장래에 큰 연사가 되겠다.』
한편 연사들 중에서 황정신행과 성성원은 약간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이 1등 할 줄로 알았는데 시골 사람들이 1·2등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현대교육을 받은 지식여성인 자기들이 무식한 시골사람들에게 1,2등을 빼앗겨 자존심이 약간 상했던 것이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가자 이동진화 교무에게 1등하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번 강연대회에서 대종사님이 잘못 판정하신 것 같습니다. 1,2등을 한 시골 사람들은 교무가 원고를 대신 써줬다고 합니다. 그건 부정이 아니고 뭡니까? 대종사님께서는 그런 줄을 아시고도 그렇게 판정하셨으니 이건 분명 편파적인 판정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등을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황정신행과 성성원은 1,2등 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변명한다는 것이 마치 대종사에 대해 섭섭한 생각을 늘어놓은 것처럼 되고 말았다.
얼마 후 대종사가 서울로 왔을 때 이동진화가 말했다.
『대종사님, 지난 번 교리 강연대회에 대해서 황정신행과 성성원이가 약간 섭섭한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무가 원고를 대신 써준 사람들에게 1,2등을 주었다면서요?』
대종사는 황정신행과 성성원을 불러 말했다.
『너희들 마음속에 섭섭한 생각이 있었다면서? 설사 교무가 대신 써줬다고 하자. 그런데 너희들이 듣기에 잘하더냐 못하더냐? 대중들이 박수와 감동은 또 어느 정도더냐? 장내의 분위기와 대중의 감동에 따라 판정했다. 대중 앞에서 교무가 대신 써줬다고 깎아 내리고, 너희들은 자신의 실력대로니 더 올려준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들은 그만큼이라도 배우기 위하여 교무에게 열심히 쫓아다니지 않았더냐. 너희들은 배우기 위하여 교무에게 얼마나 정성을 다해 쫓아다녔느냐. 교무란 집이나 지키라고 그냥 갖다놓은 것이 아니다. 교무는 바로 나 대신이다. 너희들은 그만큼 배웠다고 하면서 그만한 이해심과 아량심도 없단 말이냐. 알만한 사람들이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어떻게 수행하고 도를 이룬단 말이냐. 내가 조금 배웠네, 지식여성이네 하면서 마음속에 꽉 차 있는 아상을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황정신행과 성성원은 추상같은 대종사의 꾸지람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ㅡㅡ 정신행을 믿고 왔다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을 앞두고 〈불교 정전〉의 편찬 발행을 서두르는 한편 법복 법락이 라든가 경종 목탁 등의 법요도구 제정도 서둘렀다.
독경할 때 경종을 치고 목탁을 두드리는 것은 원기 27·8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는 조석심고에 호르라기를 신호로 사용하였다.
원기 27·8년 경에 소태산 대종사는 서울에 직접 가서 법복 법락을 몇 벌 사 가지고 왔다. 또한 옷감을 구해 세탁부에서 법복 법락을 짓게 했다. 이런 일들을 서둘러서 진행했다. 이 때의 법복 법락은 일본 조동종의 것을 많이 참조하였다. 당시 상야(上野)스님이 박문사 주지로 있었는데, 〈불교 정전〉 발행을 위하여 김태흡스님과 함께 상야스님과도 교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조동종의 의식 행사를 참고하게 된 것이다.
상야스님은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 가 조동종 관장(管長)까지 지낸 고승이었다.
원기 28년 3월 경, 소태산 대종사가 예고도 없이 서울교당에 왔다.
팔타원 황정신행이 교당에 와 인사를 올렸다.
『대종사님께서 어찌 아무런 소식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목탁과 경종을 마련하려고 올라 왔다.』
『돈은 준비해 가지고 오셨나요?』
『정신행을 믿고 왔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물론 목탁과 경종은 황정신행의 돈으로 샀다. 이 무렵 대종사는 광전(光田)을 박문사로 보내 경종치고 목탁 두드리고 경 읽는 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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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신행은 당시 서울에서도 이름난 갑부이던 강씨(康氏) 문중에 출가하였다. 황정신행이 살던 동대문의 저택은 매우 웅장했다.
한 번은 지하실에서 일하던 여자 셋이 석탄까스에 중독되어 죽고 말았다.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죽어있는 모습이 어떻게나 처참했던지 대낮에도 집에 있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황정신행은 대종사에게 집안의 사정을 호소했다.
『대종사님, 저희 집 지하실에서 일하는 여자 셋이 석탄까스 중독으로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떻게나 처참한지 모릅니다. 대낮에도 집안에 음산하고 무서운 기운이 감돌아서 살 수가 없습니다.』
『뭐가 그렇게 무섭단 말인가? 내가 한 번 구경해볼까?』
대종사는 집안 구석구석 한바퀴 휘-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대낮에도 무서워 소름이 쫙 끼치던 집안이 대종사가 한 번 다녀간 후로는 무서움이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