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변화 1 /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 본 문 : 누가복음 15장 11절 - 24절 (신약성경 121쪽)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멘!
소위 PK(Pastor's Kids) 목사의 자녀들이 정서적으로 비뚤어지기 쉬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려서부터 ‘목사의 자식이 왜 그 모양이냐?’ 라는 말을 많이 듣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위 EK(Eidor's Kids) 장로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서부터 ‘장로의 자식이 왜 그 모양이냐?’ 라는 말을 많이 듣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그렇게 부담이 되고, 그 부담이 커지면서 심리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떠안게 된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 라는 지적을 받을 때, 제일 속상합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그런 지적을 받게 되면,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고 죄의식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께 죄송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당황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앙의 효험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나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내가 정말로 달라진 것이냐? 아니면 무늬만 달라진 것이냐?
아니면 내가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고민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무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다 압니다.
세상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착해져야 하고, 경건해져야 하고,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히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부터 네 번에 걸쳐 주일 오후예배 시간에, 말씀을 선포하려고 준비한 말씀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느냐?」 가 아니고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와 ‘무엇이?’ 라는 질문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는 내 노력으로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무엇이?’ 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달라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느냐?’ 를 강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무엇이 이미 달라졌느냐?’ 를
우리에게 묻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읽고, 묵상하여야 하고
교회 안에서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여러 훈련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내가 알든 모르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람이 일으키는 변화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입니다.
마치 우리 사람이 스스로 거듭날 수 없고, 성령님이 거듭나게 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도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성령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만세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빛을 비추시고, 불신의 마음에 믿음을 부어 주신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변화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변화요, 법적인 변화요, 지위적인 변화요, 운명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모든 외적인, 도덕적인 변화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영적 변화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고 완료형으로 기록해 놓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만일 정말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면, 왜 나는 크리스챤답게 사는 것이 이렇게 힘 드느냐?’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내게 문제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내가 좀 더
기도하고,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은 것은, 저에게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제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아직 영적으로 온전히 변화되지
않는 미성숙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성숙과 우리 인간의 성숙은 비례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의 사랑장을 사도 바울이 언제 썼을까요?
사랑과 정열이 불타올랐던 젊은 나이에 썼을까요?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서 젊은이들은 열광은 하지만, 성숙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아직 없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나이가 들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 깨닫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많은 염려와 고민들은, 우리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하면 무좀과 같습니다. 젊은 사람은 발에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발에 무좀이 많이
생기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면 땀이 줄어들기 때문에 저절로 무좀이 없어지기도 한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많은 문제들도, 우리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저절로 없어질 것들이 참 많습니다.
부부간에 많이 다투는 부부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포기하는 법도 배우고, 또 항복하는 척
하는 법도 배우고, 상대방의 말에 양보하는 법도 배우고, 또 갈등을 피하는 법도 배우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적어집니다.
“많이 다니지 않는 길” 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스코트 팩이라는 사람이 쓴 새 책을 보면, 그가 자신의
고백처럼 한 말이 있습니다. / ‘젊었을 때는 내가 실수를 많이 하고 또 후회할 일을 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까 죄 지을 힘도 없더라.’ 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인생에 대한 평가를 너무 일찍 내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성공을 했느니, 실패를 했느니, 이런 것을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서도 안 되고,
돈을 많이 벌었느냐 적게 벌었느냐를 가지고 내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생활과 사역에 대해서 너무 쉽게, 너무 빨리 평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느냐 못 믿느냐? 이것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주님이 부르시는 날, 천국에 갈 때까지 가 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평가, 신앙과 삶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의 chapter, 우리 인생의 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탕자의 비유’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요한복음 3:16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난 크리스챤들도 모두 잘 아는 비유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고, 비유입니다.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서 탕자가 뜻하는 것은 죄인이고, 아버지가 뜻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 의하면, 탕자, 곧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탕자가 한 일은 첫째로, 스스로 돌이킨 일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배고파 죽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구나, 내가 아버지 집을 떠나고 보니까 이렇게 내가 참
초라하게 되었구나.' 이것은 많은 지혜가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쉬운 것마저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가 한 일은, 첫째 스스로 돌이킨 것이고, 둘째는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돌아온 것뿐이에요. 이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전부 아버지가 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 라고 부르기 보다는 ‘아버지의 비유’ 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아들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춰 주고, 가장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주고, 그리고 그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겨주고,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준 것, 다 아버지가 한 일입니다.
+ 넌센스 퀴즈를 하나 가르쳐 드릴까요? 탕자가 돌아올 때 제일 싫어한 자가 누구입니까?
살진 송아지. 살진 송아지가 제일 싫어했대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아버지가 해 준 것이고 아들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탕자는 그냥 아버지가 해 주시는 대접을 받은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 를 크리스챤들에게 물었더니,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자기에게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가 아버지가 그리워서가 돌아온 것이 아니고, 배가 고파서 돌아왔습니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모르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압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왔든지, 자기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아버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올 때, 일어난 모든 변화는 탕자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위해서 해 준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그 아버지의 사랑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먼저 측은히 여겼습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고 했습니다.
자녀를 두신 아버님들, 아직도 자녀에게 입을 맞춥니까? 입을 맞춘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결혼을 채 하지 못한 총각 청년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입관을 하고, 수의를 입힙니다.
그리고 이제 관에 모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들이 그의 얼굴을 보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갑자기 자기 아들의 입을 맞추고 ‘잘 가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둘러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아이가 정말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입 맞추고 말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아버지의 마음인데, 오늘 본문의 돌아오는 탕자를 보는 아버지의 마음도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겨주고
그리고 잔치를 벌여 줍니다.
오늘부터 말씀드릴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하는 제목의 그 첫 번째로,
오늘 이 시간은 옷을 입혀준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혔습니다.
이 옷이 상징하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혔다는 것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에게 의의 옷을 입혀 준다는 뜻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다음에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나무 잎으로
옷을 해 입고 숲속에 숨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중에 가죽으로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신
그 사건에서, 우리의 벌거벗은 죄를 덮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가 사함을 얻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끄러운 죄와 허물을 다 덮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죄인이 사함을 얻었다는 것과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그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의 자격으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힙 입어 의인으로 여김을 받고, 의인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상달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더 이상 죄인으로 보시지 않고
의인으로 보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믿습니까?
어떤 분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일이라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의인이라고 부름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되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의인 됨은 우리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값없이 받는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은혜’ 라는 말을 우리가 쓰는 것입니다.
마치 이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혀 준 사람이, 그 아버지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탕자가 그 옷을 자기 돈으로 구입한 것도, 자기가 준비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입은 것도 아니에요.
그 아버지가 가장 좋은 것을 내어다가, 손수 그 아들에게 입혀주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의의 옷입니다.
의의 옷.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때, 그것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아멘! 믿습니까?
내가 내 자신을 의롭다 말하는 게 아니고, 사람이 나에게 의롭다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아들의 의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선물로 전달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함께 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보실 때, 우리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함께 보십니다. 예수님의 의를 함께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의 의를 전가해서, 우리도 의롭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도 우리를 정죄할 자격이 없고, 나도 내 자신을 정죄할 자격이 없고,
믿는 사람도 나를 정죄할 자격이 없고, 안 믿는 사람도 나를 정죄할 자격이 없고,
마귀는 특별히 더 우리를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는데, 그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정죄할 때, 그 정죄를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남으로 하여금 나를 정죄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물론 남의 지적을 듣고 우리가 회개하고 반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정죄감을 떨쳐버려야 됩니다.
마치 옷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처럼 정죄감을 떨쳐 버려야 됩니다.
교회에 나오실 때,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 남의 잔치의 구경꾼의 자격으로 나오지 말고
‘나는 이 집의 아들이다, 나는 이 잔치 자리에 초청받았다.’ 하는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여러분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여러분! 돈을 많이 들여서 새 옷을 장만하실 때, 그 옷을 처음 입는 날 어떻게 합니까?
그 옷이 구겨질까, 먼지가 묻을까 함부로 아무데나 앉지 못하고, 함부로 몸을 굴리지 못하고
그 옷에 신경 쓰지 않아요?
옛날에 아이젠하워가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식을 올릴 때, 그 육사 제복이 구겨질까봐
아예 앉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의미 있고, 비싸고, 좋은 옷을 입었을 때는 사람이 조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셨다는 사실을 알면 ‘아,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있구나.’ 그리고 그때부터는 우리가 그 옷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그 옷에 합당하게 행동하기 위하여, 우리의 행실을 조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변화가 실제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 의의 옷을 입을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고, 그 의의 옷은
이미 선물로 받았어요. 이미 입고 있어요.
이제 그 옷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왜 달라져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의의 옷을 선물로 받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의의 옷을 입음으로 영적인 변화를 받은 우리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의의 옷에
합당한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