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술 권하는 사회
장기오
할아버지는 술을 참 즐겨 드셨다. 많이 드시는 것도 아니고 꼭 한 잔씩 그것도 반주로 드셨다. 동향집이라 아침 햇살이 안방까지 가득하고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부드러운 햇살이 한 잔 걸치시고 벽에 기대앉으신 할아버지의 얼굴에 비칠라치면 당신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 같았다.
“할배요, 술 맛 있는교?” 하고 물어보면 할아버지는 말없이 내 얼굴을 끌어당겨 당신의 허연 수염 난 얼굴에 비비대곤 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가끔 요기 대신 할머니가 술 찌기미를 주곤 했는데 그걸 먹고 어지러워 혼 난 일이 있었기에 도대체 그걸 왜 마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할아버지는 5대 독자의 손 귀한 집안에서 하나 뿐인 아들을 잃고 어린 손자와 함께 지내는 자신의 처지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동란의 와중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형님 뒷바라지 하려 대처로 나갔고 8살까지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나는 지금 옛날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술을 즐긴다. 그렇다고 술을 많이 먹고 주정을 한다거나 정신을 잃고 개망나니 짓을 하는 따위의 술주정뱅이는 아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할아버지가 술로 달랜 고적(孤寂)을 이해할 것 같다. 가끔 비가 온다든지 바람이 부는 날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신다. 외로울 때, 누구에게도 내 슬픔을 말할 수 없을 때 속으로만, 속으로만 생의 고뇌를 삭여야 할 때 술 마시는 버릇은 할아버지를 닮았다. 술집에서 혼자 마시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에게 처량하게 비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해 나는 집에서 가족들 잠든 밤에 혼자서 마신다.
술은 확실히 위안이 된다.
나의 문학적 기질이 술을 당기게 했는지, 내 멋에 내 풍류에 취해 술을 마시다 보니 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술은 내게 있어서 절망을 건너뛰는 징검다리다.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고 누구에게라도 종 주먹을 들이대고 삶이 왜 이래야 하는지 따지고 싶어도 술을 마시면 정화가 된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억울하고 어디 분풀이라도 해야 할 때 나는 술을 마시고 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다. 그래서 절망스러울 때, 감당하지 못한 시련이 다가올 때 나는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포기할 때가 많다. 술 마시고 그냥 체념해 버린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나의 인생은 한 달음이 아니다. 주춤거리면서 머뭇거리면서 이까지 왔다. 때로는 의지박약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인생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웠다. 16살의 어린 소년이 눅눅하고 축축한 골방에서 배가 고파 웅크리고 있을 때 살겠다는 의지보다는 죽고 싶다는 절망감에서 자학적으로 술을 배웠다. 때로는 석파(石破)의 파락호시절을 흉내 냈고 때로는 30년대 문인들의 허무적 행동을 일삼으면서 세상을 비웃었다.
꽃이 지면 꽃이 진다고 짐짓 시인인척 술을 마시고 기쁘면 기쁜 대로 갖은 핑계를 대 마셨다.
동양에서 술은 시대를 조롱하는 은자(隱者)들의 무언의 반항이다.
짐짓 술에 취하듯 진의(眞意)를 숨기고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한다. 그래서 문을 닫고 세상을 거부하고 거문고나 타면서 난세를 비웃기도 한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밤새 마시고 그마저 없으면 달 밝은 밤, 술잔에 뜨는 달을 벗 삼아 마신다. 지조 있는 선비는 섣불리 세상에 눈 돌리지 않고 고담준론을 일삼으면서 자연과 술로 소일한다.
“兩人對酌 山花開(꽃피는 산중에 둘이 앉아 마시노니)
一杯一杯復一杯(한 잔 한 잔 끝이 없네)
我醉欲眠卿且去(내 취하니 그대 이제는 돌아가게나)
明朝有意抱琴來(혹시 내일 아침에도 마음이 내키면 거문고를 안고 다시 오게나)”
이 백의 시다.
숫한 문인들이 술로 인해 그들의 문학이 완성되었음은 변영로의 <명정(酩酊)40년>을 읽어보면 안다. 천상병이 주옥같은 시를 남겼던 것도 술의 순수함을 빌어서였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 박인환의 낭만도 술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술은 절망을 견디는 희망의 노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절망할 때 술을 마시고 술상을 치고 고함을 내 질렀던가. 술이 없었다면 이 가파른 역사의 고개를 넘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술 권하는 사회>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그래서 술에는 한숨이, 눈물이, 노래가 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김현승의 시다.
한국인은 술을 마시면서 울고 웃는다. 친구를 사귀어도 술이 있어야 하고 불같은 사랑에도 술은 빠지지 않는다. 거문고를 타고 권주가를 부르고 삶의 허무를 말한다.
“먹세 그려,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뉘 한 잔 먹자 할 꼬”
하는 송강(松江)의 권주가가 그러하지 않는가?
그러나 서양에서는 관점이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서『디오니소스』는 술의 신(神)이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광기와 비합리성을 대변하는 신이다.
서양에서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면 곧 격리 수용되지만 우리는 술에 취해 파출소에서 소동을 부려도 술 마신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서양에서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주로 아편이다. 그것은 파멸을 의미한다.
한 남자가 슈퍼마켓에서 술병을 카트에 담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그 남자는 손이 떨려 수표에 서명도 못한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다.
젊었을 때 빛나던 그의 재능을 이제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지막 퇴직금을 받아든 그는 라스베가스로 떠난다. 그는 거기서 한 여자를 만난다. 거리의 여자를. 둘 다 밑바닥 인생이다.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거를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간섭을 전제로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술병과 붉은 색의 와이셔츠를 선물한다. 남자도 여자에게 귀고리를 선물하면서 말한다. "호텔 방에서 낯선 남자와 누울 때, 귀고리의 차가운 감촉을 느낄 거야." 라고. 서로 간섭하지 말자고 했던 남자가 매춘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들어낸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씩 당황한다. 남자는 그런 부담을 위악(僞惡)으로 가장한다. 창녀의 방으로 다른 창녀를 끌어들여 성관계를 가진다. 아무리 창녀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을 용서하거나 방관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남자는 무작정 술만 마시고 끝내는 허름한 모텔에서 마지 막 숨을 몰아쉰다. 연락을 받고 달러온 여자는 죽어 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이 세 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마지막 섹스를 한다. 남자는 고통과 방황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여자의 품에 안겨 잠든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다.
이 잔상은 오래간다.
누구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에 통증이 남고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흐른다. 이토록 로맨틱하고 순수한 사랑이 있었던가. 그 처절함이 오래도록 잠 못 이루게 한다.
이처럼 술은 서양에서는 죽음을, 동양에서는 삶을 전제로 한다.
서양에서의 술은 절망 그 자체지만, 동양에서의 술은 절망을 희망으로 환치(換置) 시키는 낭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나이에도 추적추적 가을비가 나리는 저녁이나 목마르게 사랑이 그리울 때면 술이 먹고 싶어진다. <끝>
<문학미디어 겨울호에 게재>
내 생애에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꼽으라면 위 글을 쓴 思石군이다.
이 친구 Tv문학관의 잘나가던 감독이 정년퇴직하고
엔터테인먼트의 고문으로 있다가 그 마져도 퇴직하고,
자기 말로 "팽팽 논다"고 했는데, 수필은 계속 쓰는 모양이다.
친구라서 그런지 수필도 이제는 점점 무르익어 가는 같다.
특히 감독 출신이어서 그런지 영화<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예리하게 분석하여 이것 저것을 집어내는 것이 너무 놀랍다.
길 손
첫댓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참 좋았지요. 명장 프란시스 코플라 의 조카로서 그저 액션 영화나 나오는 줄 알았던 니콜라스 케이지의 알코올 중독자 연기 니콜라스 케이지가 좋았던 적은 그때가 유일한 것 같아요. 그의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요. "술과 섹스" 어쩌면 신이 만들어 낸 것과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좋은 낙이 아닐런지요. 술에 관한 많은 시 이백과 두보, 도연명 등 지금 친구와 대게집에서 술 한 잔하고 11시 넘어 집에 와서 컴켜고 음악듣는데 술 이야기 하시니 많은 선인들의 술에 관한 시가 떠오르는 군요. ㅎㅎㅎ 나는 언제나 나의 정원을 가꾸려나...
대게집 이야기를 하시니 지난 년말의 대게집에 같이 갔었던 일이 생각나군요. 언제 한번 원수를 갚아야 할건데.......ㅎㅎㅎ
현진건인줄 알았어요 운수좋은 날 문장 하나 하나 끊어서 읽었는데
그러고 보니 님의 말에 동감이 되군요. 현진건의 소설도 내면의 생각들을 하나 하나 뱉어내는 식으로 풀어 나갔던것 같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