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가을여행 5(끝)
10월 20일 자전거여행 마지막 날
정선에서 동강을 따라 쉬엄쉬엄 영월까지 가는 날.
가다가 길이 막히면 자전거 둘러 매고 산을 넘고, 자갈밭이 나오면 끌고 가더라도 영월까지 간다.
영월부터는 자동차로 그냥 내키는 대로 가면 되는 거다... 이젠 심하게 올라 치는 언덕도 몇 개 없으니 말 그대로 룰루랄라 하면서 갈 수 있는 날....
정선읍사무소 옆 한옥집 따끈한 구들에서 푹 자고 아침 먹으러 간 곳은 정선장터....
전날 저녁에 들러서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여량에서 먹은 2인분 점심 덕분에 패쑤~
이른 아침부터 시장 안 골목은 전 부치는 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
이 배추전에 급 끌렸는데....
선택한 메뉴는 참~하게 된장찌개...
종일 자전거 타려면 밥심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한국인...
그렇게 거뜬히 아침식사도 끝내고 09시 20분 도로원표를 출발했다.
수묵화처럼 안개가 감싸고 있는 정선 읍내를 한번 돌아보고...
조양강 오른쪽으로 난 농로를 따라 달리고 달리고....
저 앞에 보이는 가리왕산휴양림으로 가는 다리, 용탄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올라갈 것이다.
42번 국도로 연결되는 오르막길...
소나무숲 사이로 이어지는 꽤 긴 오르막인데 밥심인지 곧 동강으로 들어간다는 기대 때문인지 언덕길도 거뜬히 오를고...
동강길이 시작되는 광하교 밑에 도착하니 동강안내소가 있었다. 이 때가 10시
굽이굽이 휘돌아 가는 동강의 지형도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광하안내소의 최선생님께 동강의 생태와 97년인가... 동강댐 백지화 이후의 뒷 얘기들도 듣고...
한번 퍼질러 앉으면 눌러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걸 좋아하는 나..ㅎㅎ
그렇게 한 반시간 정도 놀다가 동강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자전거에 몸을 싣고 힘차게 페달을 젖는데 갑자기 등에 맨 배낭이 이상해서 치켜올리며 균형을 잡으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꺾이며 내 몸이 아스팔트 위에 내리 꽂혔다.
그리고 엄청난 아픔이 이어졌다.
극심한 고통이 계속됐다. 그런데 그 아픈 순간에도 이렇게 잠시 고통이 지나가면 다시 일어나 자전거를 달리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찢어질듯한 아픔은 멈추지를 않았고, 어쩔 수 없이 119를 불렀다.
그들이 오는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기다렸고 - 실제 119는 15분 만에 빨리 왔음 - 정선의료원으로 실려가 더 아픈 순간을 참으며 엑스레이를 찍었다.
왼쪽 팔이 탈골됐고,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종합병원으로 가보는게 좋겠다는 판정.
그렇게 몇 년만에 작심하고 나온 여행은 미완으로 끝났다.
어려움 있을 때마다 여러 번 도움을 주신 K원장님 도움으로 K대학병원에 예약하고, 일요일 오후 막히는 고속도로를 구급차에 실려 갔다. 서울까지 가는 3시간은 고통의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시간이었고, 덜컹거릴 때마다 팔은 부서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렸다.
K대학병원에서 다시 엑스레이, 접골, 담당의사 진단, MRI....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고 치료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잘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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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한달이 후딱 지나갔다.
팔 한쪽을 못쓰는데도 불편함이 많았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것도, 세수하고 옷 입는 것도, 심지어 기억력이나 판단력까지 떨어진다면 말이 될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한달이었다.
생은 한 순간에 끝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잊혀져 버리겠구나....
그런 중에도 영월에 가서 자동차를 가지고 정선에 들러 자전거를 가져왔고, 부산을 다녀왔고, 남원을 거쳐 순창과 담양을 다녀왔고, 속초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었고, 국립등산학교를 방문했고, 노후경유차로 낙인이 찍힌 나의 일부분 같던 자동차를 폐차장에 보냈고, 춘천에서 여행설명회를 했고, 인왕산 아래 수성동계곡과 부암동을 다녀왔다.
나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바랬지만, 시간은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속도로 지나갔다.
사고 후 3일째 영월로 차를 가지러 같다.
H형과 자신의 시간을 버리고 같이 가줬다. 어려울 때 마다 불쑥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고마운 친구다. 자전거를 타고 갔어야 할 곳을 자동차를 타고 거꾸로 올라간다. 문산리 앞의 투명한 동강이 그리움을 들여다 보는 듯하다.
나리소의 푸른 물과 깎아지른 절벽...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동강은 한국에만 있다. 강원도 정선과 영월 사이에...
운치리에서 본 동강과 병방산 능선에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가수리 느티나무 7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가수리 위로는 조양강으로 불린다.
정선장터에 들러 모듬전과 곤드레밥을 먹고, 커피집에 들러 커피도 마시고 왔다. 사흘 전에 한번씩 들렀을 뿐인데 기억해 주셨다. 나도 정선을 기억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K형님과 원로선배님 두 분을 뵈었다.
오래 전의 약속이라 불편함을 핑계로 안갈 수가 없었다. 어항 속의 물고기나 지구에 갇혀 사는 나나 별반 차이가 없다.
다음날은 모범공무원 K님한테 점심을 갈취하고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추모했다.
유엔군 묘지
69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터에 참가한 연합군 16개국의 전사자들이 묻혀 있다.
전사자들 대부분이 20대 초, 중반의 젊은이들이다. 말 그대로 꽃다운 나이에 그 당시 이름도 못들어봤을 남의 나라에 와서 누군지도 모르는 적과 싸우다 죽었다. 슬프고 또 슬프다.
순창을 가고 싶어 남원으로 가서 산골에 있는 미술관을 찾았다.
J형이 낚시를 포기하고 같이 놀아줬다. 손님으로 와서 친구가 되어준 그이는 가끔 보고 싶은 사람이다.
작은 미술관에서....
이렇게 안뜰에 옛 시골집 정경이 남아 있는 곳에 자러 왔다.
옛날 시골집 같은 여관에 볕이 들고 있다.
새벽녘에 나가본 순창의 경천 풍경 1
새벽녘에 나가본 순창의 경천 풍경 2
새벽녘에 나가본 순창의 경천 풍경 3
담양을 지나며 메타세콰이어길을 가봤다.
J형의 친구 Y형도 왔다. 둘이 만나면 항상 티격태격 친한 티를 낸다. 그런 그들을 보면 흐뭇하다.
속초에 갔다.
술 생각날 때 불쑥 찾아가도 언제든 맞아주던 친구와 생선조림으로 점심을 먹었다.
국립등산학교에도 갔다.
12월 5일이면 개교 1주년이다. 대학산악부 동기학번인 P교장과 오랫만에 만났는데 저녁까지 얻어 먹고 왔다.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수성동계곡을 가봤다.
통인동, 옥인동, 누하동, 누상동 등 서촌 동네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다. 계곡을 따라 가면 인왕산이다. 오래 전 시간에는 서울에서도 계곡이 동네로 들어와 있었구나....
인왕산로 길에서 바라본 사대문 안 서울의 모습
남산을 경계로 빌딩숲과 뒤로 왼쪽에 경복궁, 그 오른쪽으로 서촌으로 불리는 동네의 주택가들이 인왕산쪽으로 낮게 이어지는 모습이 대단지 고층 아파트 숲과 비교된다. 내 기준의 도시는 이 시간에 머물러 있다.
부암동 주택가 골목길 어느 댁에서 김장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이는 배추와 준비된 부재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들 딸 사촌 조카 등.... 다음날 일요일에 모여서 김장을 담근다고.
김장김치 먹으러 오라고 하셨는데.... 그 즐거웠을 분위기가 궁금하기도 했는데 한쪽 팔만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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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달이 지나 갔습니다.
여행도 끝났고 재미없는 여행일기도 끝났습니다.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딸내미가 머리 감기고 말려주기도 했고,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며 늦게 들어오는 아이들 기다리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고...
이제 낼 모래면 부목이 제거될 겁니다.
두 팔을 다 쓸 수 있게 되면 두 팔로 할 수 있는 뭔가를 다시 하겠지요.
나의 시간은 또 그 때에 맞춰서 흘러갈 것이고....
첫댓글 수려한 여행기를 읽으면서 저의 글솜씨 부족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올라오는 멋진 여행기 기대해 봅니다~
성치도 않은 팔로 수고하셨습니다~(글 올리시라고 괴롭힌 보람이 있네요 ㅎㅎ)
재밌게 못쓰네요. 성격탓인가 봅니다.
다 나으셨다니 다행
무척 불편하셨을텐데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팔은 불편해도 걸을수 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죠 . 끝내지못한 나머지 여행을 잘 마칠수 있었던것도 건강한 다리의 힘이 아닐까요 ? ㅋ 모든일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다 잘될꺼라 믿습니다 ~~ ㅎ
가끔 생각없이 사는 것도 좋습니다. ㅎ
왜 미완일까..그랬더니 그런일이 있었네요. 그아픔이 조금은 가늠이 되는 경험을 저도 했었기에 위로드립니다. 다행이 치료 잘 받으시고 전국을 휩쓸고 다니셨으니 건강하신건 틀림없네요. 덕분에 즐겁고 특별한 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집나가면 고생~그래도 사서한다는 여행~~ㅎㅎㅎ
살다 보면 넘어질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고 그런거겠죠... 대부분 사람들이 그럴텐데 실수하는걸 부끄럽게 생각하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는걸 이번에 알았네요....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나쁜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위로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