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의 늦은 마지막 인사
To.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공연진들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길래
심장 아주 깊은 곳 새겨넣은 너희에게!
안녕. 연출입니다. 밀린 스케치를 쓰며 우리의 공연을 되새기고 있어요. 2022년 아주 더운 여름날, 내년 겨울공연 연출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저는 공연진 모두를 끈적하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랍니다. 여름날처럼 끈적끈적하게. 결국 공연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못 버틸 것 같았거든요. (사실 세상 일이 다 그렇죠)
그리고 겨울은 너무 춥잖아요. 우리끼리 뜨거운 무언가를 나누고 싶었어요. 공연 준비하면서 마구 비비적대고 질척거리며 나온 열기로 올 겨울을 나면, 다가올 날들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연출 결심은 제 인생 터닝 포인트라기보다… 그냥 커다란 그을음 자국 같은 걸 만들고 싶었어요. 살면서 너무 힘들 때 돌아보면 있을 새까만 자국. 내가 무언가에 미쳐서 엄청나게 열정적이었다는 증표가 있으면 했어요. 사실은 이만큼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 그래서 여러분과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를 올리게 되었답니다. 나를 태워줘서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영광이에요.
이렇게 잘 버텨서 무사히 공연을 올린 것을 보니 여러분을 많이 사랑했던 것 같아요. 물론 공연을 준비하면서 마냥 기쁘고 행복하고 재밌고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늘 불안했고, 초조했고, 두려웠고, 무서웠고… 그랬어요.
그치만 티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연출인 나를 믿고 따라와주는 19명,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나까지. 40개의 눈동자를 끝까지 꼭 지켜내고 싶었어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단단하고 굳센 연출이 되고 싶었는데… 힘든 티가 많이 났는지 (???: 그게 티 안내려고 한 거였어요?) 공연진의 걱정을 무지하게 사는 연출이 되어버렸네요.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지치고 힘들 때 여러분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심지어 여러분으로 인해 힘들 때마저도) 하하하. 어쨌든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나는 그냥 같이 연극하겠다고 모인 것부터 신기하고, 고맙고, 충분히 예쁜데. 더더더 잘 하기 위해서 맨땅에 헤딩하고, 헤롱거리는 머리로 또다시 고민하고 고민한 내 사람들. 한도끝도 없는 욕심쟁이들. 답이 안 나오는 막막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기상천외한 갖가지 방법들을 총동원한 괴짜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내겠다고. 결국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을 보여준 사람들. 하루하루 너무 힘들 텐데 서로 웃겨주겠다고 으쌰으쌰 분위기 띄워준 사람들.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위해 매일 같이 왕복 3~4시간 거리를 통학한 친구들. 같은 대사를 수백 번, 수천 번씩 뱉어낸 사람들… 여러모로 참 힘들었을 텐데. 버티고 버텨서 다함께 완주한 사람들. 신기해.
그리고 무엇보다-. 웃기는 소리지만, 매일매일 꼬박꼬박 연습 시간에 맞춰 연습실로 온 너랑 나. 공연진이 공연 준비를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건 정말정말 기본 중의 기본. 당연한 건데도 나는 그게 참 좋았네요. 우리가 다같이 모여서 그저 가만히 있을 때마저 여러분으로부터 힘을 얻었어요. 머리 싸움하는 것도 나름 좋았는데… 가만히 옆에 있기. 생각해보니 그게 참 좋았어요. 존재만으로 힘이 됐어요.
너희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뭘까? 나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너희였는데. 초반에는 몰라도, 후반부에는 여러분 덕분에 연극 할 수 있었어요. 그런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한 겨울 밤의 뜨거운 추억? 절대 잊지 못할 인생의 경험… 에라 모르겠다. 차차 고민해보자. 일단 나에게는 네가 남았고, 너에게는 내가 평생 남아있을 테니! 이것만은 꼭 약속할게. 그러니 나는 기본으로 깔고, 나머지를 생각해보자. ㅎㅎ
(+)
얘들아… 매일 같이 살 부대끼며 하루종일 붙어 있다가 하루아침에 떨어져 있으려니 너무 어색하다. 자꾸만 보고 싶고 그러네. 뭐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연출 할 때는 킹왕짱 쎈 모습만 보이겠다고 애교도 일절 안 부리고 애정표현도 잘 안 했는데. (사실 내 사소한 행동 하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라서 불안했던 것 같기도)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아쉽다. 좀 더 표현할 걸. 그게 꼭 좋든 나쁘든. 내가 너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너희도 나를 사랑할 수 있단 걸 몰랐네. 나 이걸 자꾸만 까먹어! 우릴 믿고 좀 더 지지고 볶고 할 걸 그랬나. 그러니까 앞으로는 자주 표현할게… 사랑했어! 그리고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 사랑해. 그리고 사랑할 것 같아… 아니? 사랑할게.
연출의 주저리는 여기서 끝!
마지막으로…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사실 우리의 공연은 3막이 끝이 아니야.
제가 각색할 때 조금 손 봤답니다.
대본을 덮으면 나오는 새하얀 뒷장부터가
끝없이 타오르는 4막의 시작이야! ♥
앞으로도 화이팅. 내 사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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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출의 편지를 읽고 올려준 사진을 흐름 따라 쭈욱 감상하다보니 어느새 눈물이 한 방울 또륵…
영원할 나의 연출 수경아! 영원할 나의 (나 포함ㅎ)스무 명의 공연진들아! 진짜 사랑했어요. 감사했습니다.
내게 축복을 준 당신들을 잊지는 못할 거예요…
영원히 사랑해! 여기서 하고픈 말 다 하면 글자수 제한 막힐 것 같으니 ㅋㅋ 우리 못다한 이야기는 나중을 기약해보기로 해요❤️
우리 공연진들, 불이 무서워 다가가지 못 하던 저에게 따뜻하게 다가와 그을음 자국을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이 공연이, 그리고 여러분들이 제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되었는지 밤을 새도, 아니 영영 말해도 제대로 말 못 할 거에요. 여러분이 이 공연의 4막을 써내가다 지칠 때마다 이 그을음 자국을 보며 느끼셨음 좋겠어요. 여러분이 어떠했고, 이미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그을음 자국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게요😊
태윤이 울엉🥲❤
4막의 시작도 너희라서 좋다.
사랑하는 우리 공연진들. 공연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눈물이 나고 그리운게 왜그러나 했는데 연출님의 글을 읽고서야 알겠네요. 이 공연이 제 마음 한켠에서 뜨겁게 티올라 새까만 그을림을 남겼다는 사실을요. 하얀 백지와 함께 시작된 우리의 4막이 때론 막막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 자국을 보며 뜨거웠던 우리의 겨울을 버팀목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라요. 나의 마음에 지워지질 않을 자국이 되어버린 공연 그리고 공연진들 모두 사랑했고,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하겠습니다.
감동네이션... 두 달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너무너무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누구보다 제일 수고 많았습니다! 모두들 앞으로의 4막도 후회 없이! 멋있게 잘 꾸려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저도 못 다 한 이야기들은 나중을 기약해보겠읍니다. 💙 그 때까지 현생 파이팅...
별안간 나를 투썸플레이스에서 눈물나게 한 나으 연출...나으 아빠...나으 수경이.... 사실 공연이 끝나고 일상에 집중하면서 이 모든 게 꿈은 아니었을까?하는..마치 네버랜드나 나니아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 자꾸 들었는데...수경이의 글을 읽으니 환상이 아니었단 걸, 우리가 만들어냈던 그 세계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비록 2023년 새해를 맞이하며 만들어냈던 우리의 세계에 다시는 갈 수 없겠지만- 우리의 대화 속에, 추억 속에,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새까만 그을음으로 기억할게요:)
8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해준 내 가족들, 사랑합니다. 우리 각자의 4막도 멋지게 만들어가요! 우헤헤
수경 혹시 내 4막 대본 좀 다시 손봐줄 수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