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화요일 맑음
편안하게 잘 잤다. 핑크빛 커텐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잠을 깼다. 가장 기대하는 타지마할을 보기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오늘 밤에 아그라를 떠나야 하기에 체크아웃을 했다. 어제 먹던 식당에 가서 오무라이스로 아침을 했다. 배낭을 메고 서문 입구에 가서 맞은편에 있는 짐 맡기는 곳에서 짐을 하나로 만들어 맡기고 중요한 것만 배낭 하나에 넣었다. 짐 맡기는 곳의 직원은 친절하다. 인도인이 친절을 베풀면 걱정되고 조심스럽다. 거의 다 끝에 돈을 요구한다.
서둘러 입장권을 사는 곳으로 향했다. 자국인과 외국인의 창구가 붙어 있는데 외국인 창구는 비어있고 자국인 창구는 아침부터 줄이 길다. 현지인은 입장료가 600원인데, 외국인은 22500원이다. 익히 들은 것이라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돈을 낼 수밖에 없다. 뒷맛은 씁쓸하지만 성질내면 나만 손해다. 그저 들어가는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일단 표를 샀다. 들어가는데도 엄청 사람이 많고 검사가 까다롭다. 라이터나 성냥, 칼 등 날카로운 물건이 반입 금지다. 손버릇이 안 좋은 방문객이 칼 등을 이용하여 벽에 장식된 보석 등을 떼 가기 때문이란다. 여자 줄과 남자 줄이 다르다. 여자는 쉽게 들어가는데, 남자들이 들어가는 것은 전쟁이다. 밀려 겨우 들어가 아내와 만나 한숨 돌리고 입장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니 가관이다. 유명한 곳 치고는 가이드가 잘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들어서니 또 문이 있다. 이 정문 위에는 11개의 돔이 올려 져 있고 사각형 끝에 4개의 큰 돔이 보이는데 정말 멋지다. 정문을 들어서니 멀리 보이는 타지마할이 정말 숨 막히게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이라 약간 안개가 있어 신비함을 더해준다. 인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중 으뜸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다. 이것이 무덤이라니.......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였던 샤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의 무덤이다.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건축물이다. 36세로 세상을 떠난 왕비는 17년의 결혼 생활동안 14명의 자녀를 낳았고 15명 째 자녀를 낳으려다가 죽었단다. 지혜와 총명함으로 사랑을 듬뿍 받던 그녀가 출산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샤자한은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뭄타즈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결국 역사상 유래 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해 그녀에게 바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뭄타즈가 죽은 해인 1632년 시작된 공사는 그 후 22년이나 이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타지마할 건설을 위해 투여된 총 공사비만 약 720억 원 정도 들었단다. 이 외에도 무덤 걸을 위해 동원한 인원이 연간 20만 명이고, 1000마리의 코끼리 등이 동원되었다. 타지마할은 인류가 만들었던 황후의 무덤 건설의 대부분의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설계는 이란 출신의 천재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가 맡았는데, 그는 자신의 건축 영감을 실현하기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는 물론 중국에서까지 장인을 불러들였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이다. 건축 주체는 큰 사각형 기단위에 세워져 한 변이 56m, 중앙 큰 돔의 높이가 58m이며 기단 4 귀에는 미나레트(아랍어로 등대라는 뜻. 기도를 알려주는 탑)가 등대처럼 서 있다. 이들 건축의 소재는 모두 흰색 대리석으로 바깥쪽 대리석 면에는 검은 색 노란 색 등의 준 보석으로 상감하여 장식하고 있다. 순백색의 대리석은 라자스탄 주 마크라나에서 채취한 것이다.
타지마할 정면에 펼쳐진 수로와 세워진 나무들 그리고 잔디밭 등을 무굴정원이라 하는데 좌우대칭이 타지마할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있어 웅장함을 더해준다. 이 정원은 짜르박이라는 형식의 이슬람 정원이다. 야무나 강변에 세워진 타지마할은 동서 300m, 남북 560m의 넓은 대지위에 세워져 있다. 정원을 수많은 사각형으로 쪼갠 후 사이사이 수로를 건설한 짜르박 정원은 이슬람의 낙원사상을 담고 있다. 즉 타지마할은 뭄타즈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다시 세상에 돌아와 누릴 낙원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짜르박 정원의 정 중앙에 있는 중앙연못은 타지마할을 오늘날 신화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연못을 통해 수면에 반영된 타지마할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참고로 이 연못은 한 여름철 아지랑이를 피워내 타지마할을 몽환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연출해 낸다.
사람들이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열심이다. 찍을 자리를 선점하려고 난리들이다. 우리도 질세라 자리를 차지하고 사진을 찍었다. 남는 것이 사진밖에 없으니......... 물론 맘에 새겨 진 감격은 언제나 맘속에 남는다고 하지만 세월 따라 희미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짜르박 정원 가운데 우뚝 솟은 부분에 있는 다이애나 의자에 갔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앉아서 그렇게 불린단다. 샤자한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듣고 앉아있는 다이애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부러워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공짜로 찍어준다는 친절한 인도인 젊은이의 끈질긴 요구에 사진기를 맡기니 제법 사진 전문가답게 우리를 세워놓고 폼을 수정해 주며 사진을 찍어준다. 친절 뒤에 따라오는 수고비 요구는 예외가 없다. 100루피를 달라고 하는데 미리 준비한 11루피를 주고 두 번이나 찍었다. 금액이 적다고 체념하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지만 이것 또한 인도에서의 거래방식이다.
샤자한과 움타즈 마할의 가묘를 확인하기위해 본당을 향했다. 본당에 들어가는데 아래에서 외국인에게는 신발 카바를 돈을 주고 빌려주고, 인도인들은 신발을 맡기고 맨발로 올라간다. 잠신고 선생님들이 알려준 대로 옆에 휴지통에서 버려진 버선을 골라 신고 본당을 올라간다. 사람들로 붐빈다. 진자 무덤은 본당 지하에 은폐되어 있는데 도굴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란다. 밖의 화려함 보다 안은 썰렁하고 어둡다. 가묘 안은 인공조명이 없기 때문에 어두컴컴하다. 그러나 빛이 투과되도록 정교하게 새겨진 병풍석은 바로 가묘에서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볼거리 중에 하나다. 빛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가묘 주위에 박혀있는 43가지나 된다는 준보석의 영롱함을 발견할 수 있다. 렌턴이 있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면 소영이 없다. 렌턴 불빛을 준보석에 대면 멋진 보석의 투영된 색깔이 어둠속에서 살아있는 듯 살아난다. 바짝 다가오는 인도 사람의 친절로 우리도 보석의 색깔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타지마할의 장식에는 모자이크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 기법이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피에트라 두라는 대리석에 꽃과 같은 문양을 판뒤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은 것 이다. 터키와 중국, 러시아에서 수입된 색색의 돌들이 순백의 대리석과 어울려 오묘한 빛을 발한다. 외벽에도 이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심지어 아침과 한 낮, 석양과 보름날 밤 등 시간에 다라서 각각 다른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둠속에서 렌턴으로 비쳐보는 것이 제일 실감난다.
가묘를 한바퀴 돌고 밖으로 나왔다.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며 타지마할을 살펴보니 화려한 피에트라 두라와 함께 높이 평가되는 대리석 조각도 눈에 들어온다. 반투명한 우유 빛 대리석의 재질을 잘 살린 우아한 작품이다. 웅장하면서도 빈틈없는 섬세함에 화려한 것 같으나 절제된 매력이 있는 건축물이다. 이슬람교의 특성상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 등은 조각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지마할 외벽을 장식한 문양 중에는 아라비아 글자도 있다. 대부분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발췌한 내용이란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재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과 샤자한이 부활할 것 이라는 예언적 내용도 적혀있단다.
바닥도 대리석이다. 본당 밖의 4개의 첨탑 미나라트(minaret)도 타즈마할의 기단 끝에 세워져 있는데, 대칭적 아름다움이 타지마할의 건축적 완성도를 높여준다. 지진이 일어나 이 첨탑이 무너지면 타지마할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단다. 둘러보니 한마디로 수학이다. 수학적 기초가 없이는 세워질 수 없는 건물이다. 당시에 수학이 발달했음을 말없이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강도 보인다. 지금은 강물의 수량이 적고 순하게 흐르지만 여름에는 수량이 많아 겁나게 흘러간단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다.
타지마할 정면에서 보면 좌우에 똑같은 건축물이 하나씩 있다.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해 건물로 들어서니 시원하다. 실내는 밖의 너무 밝음에 대비되어 어둡다. 바닥에 앉아 둥근 문을 배경으로 타지마할을 올려다보니 정말 멋지다. 검은색 테두리 안에 타지마할을 넣어 사진을 찍어보니 재미있다. 아내와 여유를 갖고 앉아서 타지마할을 감상해본다. 혼자 보는 기쁨보다 아내와 공유하는 기쁨은 더욱 큰 것 같다. 다시 나와 벤치에 앉아서 강을 내려다 본다. 시간을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여행의 장점이 더욱 실감나는 시간이다. 타지마할 뒤편으로 돌며 대리석덩어리를 살펴보니 대리석 덩어리도 감동이지만 세겨 진 문양들은 더욱 놀랍게 한다. 반대편 광장에 서니 물이 나온다. 사람들이 분수 같은 수돗가에서 이빨을 닦고 손과 발을 씻는다. 인도사람들은 씻는 것을 좋아하는데, 왜 지저분해 보일까? 못살던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니 좀 이해가 간다.
다시 정면으로 와서 신발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무질서 한 것 같아도 나름대로 굴러가는 질서가 보인다. 우리도 내려와 신발 버선을 벗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반대편에 있는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측면에서 보는 타지마할의 모습도 궁금했다. 어디서 보나 당당한 모습이다. 다시 수로가 있는 정면의 짜르박 정원으로 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팀으로 보이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잔뜩 몰려온다. 남자 고등학생들은 시커멓게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교복만 없으면 누가 학생이라고 할까?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반갑게도 함께 아그라에 올라온 잠원고 선생님들을 만났다. 아침 일찍 들어오셨단다. 누구나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입구 건물도 멋지다. 귀티가 나는 인도 부인과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얼마나 정신없이 구경했는지........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보니 좀 여유가 생긴다. 긴 화랑을 지나 화장실에 다녀온다. 황토 빛 돌로 만들어진 긴 화랑도 견고해 보이고 볼만하다. 어느 것 하나 주의 깊게 보면 허술한 것이 없다.
이제는 나가야 할 것 같다. 만나고 싶어 정말 오랫동안 간직하며 기다리고 기대했던 타지마할이다. 잠깐의 만남이지만 깊게 자리 잡았던 보고픔이 이제는 해소된 듯 시원하고 흐뭇하다. 와서 보면 될 것을 맘만 졸이고 있었구나. 동문에서도 남문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
타지마할을 나와 락카 룸에 잠시 들러 가방 속에 있는 카메라 건전지를 꺼내고 다시 맡겼다. 직원들은 일단 친절하다. 끝에 가서 팁을 주지 않으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다. 성벽아래에는 석수들이 보수작업을 하느라 망치소리가 시끄럽다. 사이클 릭샤를 타고 아그라 성으로 향했다. 별로 멀지 않았다.
아그라 성은 붉은색 성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무척 견고해 보인다. 성벽 앞에는 없는 교통수단이 없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통가(tonga)라는 마차다. 화려한 색상의 천들로 장식한 말들이 피곤해 보인다. 장군 동상이 하나 보인다. 철통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아그라 성이다. 표를 사서 입장하려니 등에 맨 작은 배낭도 맡겨야 한단다. 중요한 것은 주머니에 넣고 옆에 마련된 짐칸에 표를 하나 받고 거의 빈 배낭을 맡겼다.
아그라 성은 야무나 강가에 1566년, 무굴의 제 3대 황제였던 악바르가 지은 성이다. 무굴제국의 강대한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물답게 높이는 20m, 폭은 무려 2.5km에 달한다. 원래 요새로 설계되었지만 악바르와 제항기르, 그리고 샤자한의 치세가 이어지는 바람에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 건축광인 샤자한은 황제가 된 이후에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아그라 성을 궁전으로 변모 시켰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샤자한이 이곳에 유배된 채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온 성 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아마르 싱 게이트라고 한다. 겹겹이 둘러싸인, 견고해 보이는 성인데, 아직도 군인들이 정면으로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누가 공격해 오는 감........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의 수다스러움이 시끄럽다. 특이하게 모두 흰색 구두를 신고 있다. 모두 덩치가 크다. 붉은색 교복 치마가 더워 보인다. 많은 인파로 인해 밀려들어가니 정원이 나온다. 제항기르 펠리스가 오른쪽에 보인다. 디와니암의 흰색 기둥이 2시 방향에 보인다.
디와니암은 1628년, 샤자한에 의해 건설된 왕의 공식 접견실이다. 초기의 목조 구조물을 붉은 사암으로 재건축 한 뒤 다시 하얀색으로 회칠을 해 다듬은 건물로 황제가 사무적인 일이나 건의 사항을 들을 때 사용했다. 건물 옆에는 나지나 마스지드라 불리는 조그만 사원과 무굴제국의 여인들이 애용했던 레이디스 바자르가 있다. 레이디스 바자르는 여성 전용시장으로 남자는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하지만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악바르 황제는 분장한 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더 들어가니 디와니카스다. 1636년을 전후로 샤자한이 세운 건축물로 개인 접견실이다. 중요한 고위관리와 외국 대사들을 만날 때 사용되었다. 그 유명한 공작좌가 맨 처음 있던 곳으로, 1660년에 아우랑제브에 의해 델리로 옮겨졌다. 규칙적인 무늬를 갖는 기하학적 정원이 특이하다. 계속 걸어 건물 끝에 서니 강이 보이고 멀리 타지마할이 보인다. 강 옆, 성 바로 아래로 도로가 있고 차량들의 이동이 분주하다.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무삼만 버즈-포로의 탑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샤자한이 1666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마지막 8년을 보낸 곳이다.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1658년에 큰형인 다라 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병들고 늙은 아버지 샤자한을 이곳에 유폐시켰다고 한다. 샤자한에 대한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의 학대는 대단했단다. 일례로 아그라 성 옆에 흐르는 야무나 강을 막아 여름 한철동안 짠 맛 나는 우물물만 마시게 할 정도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샤자한이 아우랑제브에게 보낸 간곡한 편지에서도 확인이 가능했다. 결국 샤자한은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의 무덤인 타지마할을 지척에 둔 채 이곳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왕비에 대한 애절한 사랑 탓일까? 무삼만 버즈에서 바라보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가까이에서 보는 타지마할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타지마할이 훨씬 낫다고 할 정도다.
넓은 성벽 위에는 거대한 사가 대리석상이 2개 마주하고 있는데 하나는 검은색이고 다른 하나는 흰색이다. 검은 색 돌덩어리에 앉아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흑 백의 두 돌덩어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성벽 아래는 해자로 이어진 성벽이 견고해 보인다. 우삼만 버드에 들어서니 멋있다. 식물 모양이 대리석에 만들어져 있고 보석 돌이 박혀 있다. 대칭형 문양도 보기 좋다. 물이 흘러나와 흐르도록 만들어진 공간도 있다. 건너편에서 보는 포로의 탑은 하늘을 배경으로 멋있다. 왕은 유폐 되도 왕이다.
대충 구석구석 살펴 본 것 같다. 다시 디와니암이 있는 곳으로 나와 정원 가운데로 가니 큰 우물이 있다. 철망으로 덮여 있다. 우물 속이 보인다. 뭔가 싶어 주변사람들도 본다. 정원 길 가에 서 있는 고목나무에는 다람쥐가 7~8 마리가 정신없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잉꼬 우는 소리가 많이 들리고 비둘기도 많이 보인다. 세계 문화 유산의 표시가정원에 만들어져 있다.
입구에서 지나쳐 온 제항기르 펠리스로 향했다. 악바르 황제가 어렵게 얻은 아들인 살림(제항기르의 아명)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힌두 양식과 아프가니스탄 양식의 건축 기법이 혼합되어 묘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사실 악바르와 제항기르 부자는 샤자한과 아우랑제브 만큼 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부자간에 반목이 이어지게 된 이유는 무굴제국의 후계자 계승방법에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란다. 무굴제국의 후계자 계승은 장남에 의한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아니라 철저한 능력제로 결정된다. 왕자들은 황제가 죽거나 중병에 걸릴 때를 대비해 개인 군대를 거느렸고, 이는 끝없이 피를 부르는 결과를 낳게 됐다. 이런 이유로 무굴제국의 정권이양은 한 번 도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항기르 펠리스에는 이스라엘의 다윗의 별 모양이 세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머리를 곱게 손질한 예쁜 소녀와 아내는 사진을 찍는다. 주황색 인도 옷에 금줄이 있어 부티 나는 소녀다. 커다란 돌 항아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 커다란 돌 항아리는 용도가 무엇일까? 한참을 둘러보다가 나왔다.
아그라 성의 남문인 아미르 싱 게이트에서 사진을 찍고 근무하는 군인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인도인들은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진의 화면을 밝게 해 준다. 입구에 마련된 짐 보관소에서 배낭을 찾으니 돈을 달란다. 빈 배낭 속을 보여주고 그냥 나왔다.
릭샤를 타고 자미 마스지드를 가려고 했다. 자미 마스지드는 샤자한이 1648년에 지은 이슬람 사원이다. 정문의 이름은 샤자한이 특히 사랑했던 딸 자하나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여행자 보다는 현지인이 많이 찾는 곳으로 관광지의 북적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꼭 들러보라는 곳이다. 옆에 있는 시장 끼나리 바자르에서 인도인의 삶을 느껴보고 싶었다.
우리가 탄 릭샤꾼은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간다. 몇 번이고 사진을 보여주며 얘기해도 알았단다. 20여분을 아그라성 언덕길로 가더니 잠시 상점에 들러 가겠단다. 걸어가면 5분 걸리는데........ 쇼핑에 관심 없는 우리는 곧장 갈 것을 요구했으나, 아들 릭샤꾼 까지 나타나서 함께 달려간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결국 상점 앞에 왔다. 약속한 10루피를 주고 아내와 함께 큰 길로 나왔다. 정말 짜증나게 한다. 인도니까! 라고 아내와 씹으며 위안을 하니 좀 화가 풀린다. 고급 포장 마차 식당이 보인다. 배가 고픈데 잘 되었다. 스마일 마크가 크게 그려진 펀자비 음식 체인점이다.음식의 종류를 4가지 영역으로 나눠서 요리사들이 요리를 한다, 신나고 활기차면 분주하다. 아내와 함께 요리하는 모습들을 구경하다가 싱가폴 누들과 믹스 차이니스 스푸, 버터도사 등을 시켜서 먹었다. 맛있다. 깨끗하고 풍성했고 바로 요리해주니 먹음직스러웠다. 든든히 먹고 나니 이제 역으로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지나가는 오토릭샤를 흥정해서 타고 타지마할 서문 입구로 갔다. 짐 맡긴 곳에서 우리 짐을 모두 찾았다. 오후 3시 50분이다. 오토 릭샤를 타고 아그라 포트역에 도착하니 오후 4시 5분이다.
아그라에는 역이 3개있다. 아그라 칸트 역과 아그라 포트 역 그리고 아그라 시티역이다.3개중에서 이용 빈도가 가장 높은 곳은 칸트 역이다. 델리, 뭄바이, 바라나시 등에서 오는 기차가 정차한다. 우리는 우다이뿌르로 가기 때문에 이곳에서 탄다. 우리 출발 시간은 6시 20분이다. 포트역은 생각보다 작고 지저분하다. 역 밖에 줄 지어있는 포장마차 가게에서 물을 사고 웨이팅 룸에 들어가 대충 씻고 기차 탈 준비를 했다.
인도가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기차는 1시간이 연착되었다. 이런 환경이 이제는 익숙해져간다. S2기차에 올라타고 59UB 칸을 찾아가니 표는 UB칸인데 중간 침대다. 아내는 위에자고 할 수 없이 나는 중간 침대를 펴고 잠을 청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평 없이 따라주는 아내가 무척 고맙고 사랑스럽다. 우다이뿌르 시티에 내일 아침 6시 10분에 도착예정이니 한참을 달려야 한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무척 차다. 있는 옷을 잔뜩 껴입어도 춥다. 새우잠을 잔다. 함께 탄 시끄러운 가족들도 기차의 흔들어 줌에 모두 잠이 들고 기차의 규칙적인 소리만 들린다. 잠이 안와 다른 칸을 돌아보니 잠자는 모습이 모두 다르지만 또 비슷하다. 신분이 무엇이든, 인종이 무엇이든, 얼마나 부자든......... S2에 탄 사람들은 모두 같아 보여 좋다. 누워 눈을 감으면 타지마할의 멋진 모습이 영화처럼 떠올라 흐뭇하게 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지만 그래도 좋구나.
1/13 경비
아침식사 80루피 점심 140루피 입장료(타지마할) 1500루피 오토릭샤 45루피 사이클 릭샤 20루피 물 13루피 아그라 포트 500루피
계 2309(69270원) ----- 누계58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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