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추 일기에서) 철전의 기록
1. 계절에 따른 철전의 사거리 평가 변화 2. 철전 시험은 점수보다는 과락으로 판단 3. 장군들의 기본 소양은 철전 120보 4. 철전쏘기는 부료무사의 급료에 영향을 줌 5. 철전의 기피와 부정 행위 만연 6. 아우 영중의 활쏘기에 지대한 관심을 둠 7. 노상추 공의 철전 사거리 8. 기타 1) 이춘기 공과 조명재 공을 검색 2) 무과 시험 종목을 선택할 수도 있음 3) 철전을 무사들에게 지급 ※ 노상추 일기에서의 철전, 육량 검색 모음 |
이 글은 '(노상추 일기에서) 대궁의 기록'에 대응하는 글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전과 육량에 대한 검색을 하였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1. 계절에 따른 철전의 사거리 평가 변화
계절에 따라서 철전의 사거리 평가에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사거리가 짧은 편이었기에,
120보를 넘기기 힘들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을사일기 1785년(정조9) 9월 1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여름에 철전 120보를 쏜 것을 대단한 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9월 초1일(정미) 볕이 나고 동풍이 붊.
오늘 활쏘기 시험에서 선전관 신섬申暹이 출륙出六되고 이어서 가자되었다.
가자한 것은 그가 지난여름에 철전 120보를 쏜 것이 3발이나 되므로
전하께서 특별히 가자하되 출륙한 후에 시행하라고 하교하셨기 때문이다.
☞ 출처 :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9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090
2. 철전 시험은 점수보다는 과락으로 판단
무과시험에서 철전의 과락으로 합격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120보를 넘기면 합격, 못 넘기면 불합격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100보와 130보를 기준으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철전 80보를 과락의 기준으로 설정했던 것은
초보자용 초시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정조때에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무사들이 10,000명을 넘었고,
철전 시험에는 하루 3~400명 정도만 가능했기에,
철전 시험을 점수로 세분화하여 평가하기보다는,
과락으로 평가하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 관련사항 :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1년, 한국고전종합DB,
영조 1년 (1725년) 9월 9일 네 개의 과녁을 설치한 유엽전으로 먼저 시취하겠다는......
영조 1년 (1725년) 9월 15일 지방의 응시자들을 위해 기추(騎蒭)를 먼저 ......
3. 장군들의 기본 소양은 철전 120보
조선의 장군들에게 철전 120보는 기본 소양이었고,
130보 이상이면 우수한 기록으로 인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북방 출신인 별부료무사들의 경우에는,
150보를 넘기면 우수한 기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4. 철전쏘기는 부료무사의 급료에 영향을 줌
철전쏘기는 부료무사의 평가와 급료 책정에 중요한 기예이었습니다.
5월 25일(신해) 볕이 남.
이날 성 밖의 사정射亭에 좌기하여 권무 부료 무사勸武付料武士에게 철전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관아로 돌아와서 주변헌籌邊軒에 좌기하여 유엽전과 편전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였는데,
과녁 세 개를 설치하여 활쏘기를 마쳤다.
급료를 지급하는 재원으로는 대관大館의 성을 지키는 장교를 이번에 양영兩營에다 의견을 붙여 보고하여
혁파를 특별히 허락받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쓰던 1,000섬[石]의 모미耗米와 낙색미落色米 124섬[石],
성의 수리비용 804냥, 이자 240냥을 합하여 요포料布로 삼았다.
그리고 철전 무사 8자리, 유엽전·편전 한산무사閑散武士 10자리, 진무사振武士 5자리, 무경武經 1자리,
병학兵學 1자리 등 모두 25자리를 설치하여 매달 시험을 보아서 급료를 주기로 했다.
철전 무사 8자리는 매달 한사람 당 좁쌀[小米] 7말[斗], 전錢 1냥씩 주는 것으로 규칙을 정하였다.
유엽전·편전 한산 무사 10자리는 매달 한사람 당 좁쌀 6말, 전錢 6전戔 5푼[分]씩 주는 것으로 규칙을 정했으며,
진무사 5자리도 유엽전·편전 한산무사에 의거하여 거행하였다.
무경과 병학에게 매달 좁쌀 6말, 전錢 6전戔씩 지급하는 것으로 규칙을 정하여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고,
절목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출처 :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5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50
☞ 참고사항 : 료사(料射), https://cafe.daum.net/kukmoonyun/JRHv/69
별부료무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 장군들에게도 활쏘기는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습니다.
활쏘기를 못하여 좌천되기도 하였고,
활쏘기를 잘하여 가자(=승진)되기도 하였습니다.
4월 25일(갑진) 흐리고 조금 볕이 나기도 했음.
전경강專經講註 003의 규례처럼 나이 40세 이하는 모두 삭시사朔試射에 참여하게 하였다.
활쏘기 규정은 유엽전柳葉箭 일곱 차례, 편전片箭 두 차례, 기추騎芻 한 차례, 철전鐵箭 한 차례다.
춘당대에 전좌해 친히 시험을 치르셨는데 나는 11발을 명중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다.
선전관 류홍원柳弘源이 점수를 전혀 얻지 못해서 벼슬에서 떨어졌다.
☞ 출처 :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040
5. 철전의 기피와 부정 행위 만연
1808년(순조3)에는 한량들이 유엽전과 편전만 익히는 것을 우려하면서,
활쏘기와 말타기의 기예가 퇴보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4월 22일(무자) 볕이 남.
근래 무신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지 않는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다.
남쪽과 북쪽의 산에 있는 사정射亭에서는 보사步射註 001하는 사람이 없다.
한량은 유엽전과 편전만을 익힐 뿐이라고 한다.
☞ 출처 : 무진일기 1808년(순조8)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190_0040
노상추 공은 벼슬이 높아짐에 따라 무과시험을 주관하게 되었는데,
대리 시험을 보는 등의 무과시험 부정행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825년(순조25) 10월 9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대리 시험과 청탁의 폐단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10월 초9일(임술) 볕이 남.
남원탁南遠托이 와서 알현하였다.
그는 현재 승호포수升戶砲手註 001로서 훈련도감군인데 말미를 받아서
철전鐵箭과 목전木箭을 잘 쏘는 용인龍仁 사람을 데리고 내려와서
대구大丘의 도시都試인 초상초시抄上初試에 참여했다고 한다.
선조先朝께서 윤음을 내려 영남의 지체地體 있는 집안의 한량閑良에게 무예를 권장하였다.
하지만 3년도 못 되어 지체 있는 집안의 무사들은 시험에 참여하지 않고
청탁의 길이 크게 열리는 바람에 군병 같은 하류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합격을 도모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히 개탄스럽다.
☞ 출처 : 재을유일기 1825년(순조25) > 10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180_0100
6. 아우 영중의 활쏘기에 지대한 관심을 둠
아우 영중(노상근)의 활쏘기와 무과시험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것을 일일이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노상추 일기에서는 아우 영중의 철전 기록을 20회 이상 기록하고 있습니다.
7. 노상추 공의 철전 사거리
다음은 노상추 일기에 기록된 본인의 기록입니다.
1778년(정조2) 07월 19일 95보 이내.
1780년(정조4) 02월 22일 124보, 124보, 126보.
1782년(정조6) 12월 16일 15점.
1784년(정조8) 06월 19일 3발 모두 통과.
이상의 기록으로 판단하면,
노상추 공의 철전 사거리는 120보 내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본인이 130보를 넘겼다면,
이것을 특이한 일로 판단하여 일기에 기록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1778년(정조2) 6월 20일에는 신포의 정화경이 철전을 130보 쏜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8. 기타
1) 이춘기 공과 조명재 공을 검색
사예결해의 이춘기 공, 철전을 210보 쏜 조명재 공 등은
노상추 공과 동시대에 관직을 역임한 분들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노상추 일기에는 이분들에 대한 기록이 없었습니다.
2) 무과 시험 종목을 선택할 수도 있음
매번 무과 시험마다 규정과 종목이 달랐습니다.
그 중에서도 3 종목 중에 자신이 잘하는 2개를 선택하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3월 29일(신사) 볕이 나고 서풍이 붊.
금번 무과의 회시 규정은 철전 130보, 유엽전 2푼[分]의 두 기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경신일기 1800년(정조24) > 3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60_0030
1823년(순조 23) 4월 11일 무과 시험 복시에서는
철전 130보, 유엽전 3발 4푼, 목전 240보 3가지 모두 시험하여 뽑는다고 하였는데,
초시에 합격한 무사들이 모두 낙담하였다고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3) 철전을 무사들에게 지급
철전을 무사들에게 지급하였습니다.
4월 23일(기묘) 볕이 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함.
양영兩營에서 특별히 대관大館의 성을 지키는 장교를 혁파하였다.
그리고 병영의 처분에, “그 무사들 모두에게 철전鐵箭을 주어서 무사를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 출처 :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4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40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사 개개인들도 개인의 철전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궁(육량궁)도 개인이 소유하고 연습하였다면,
개인이 철전(육량전)을 소유하였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 같습니다.
※ 노상추 일기에서의 철전, 육량 검색 모음
현명한 선사 선배분들을 위하여, 검색한 자료를 모아보았습니다.
필자는 아둔하여 기록을 검색하면서도 많은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묘일기 1771년(영조47) > 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160_0020
2월 초3일(갑술) 볕이 조금 남.
단자를 적어서 관에 제출하고 남자종을 시골로 돌려보냈다. 과거 규정은 각 시소試所에서 각각 300명을 선발하는데, 무과 기예에서 육량전六兩箭註 001은 130보 이상의 거리를 쏘아야 하고, 유엽전柳葉箭註 002은 3발을 적중해야 한다. 신문新門 밖으로 나와서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으니 궁노宮奴註 003가 시전市廛 상인을 침해한 일 때문에 궁속宮屬註 004을 체포한 뒤에 친국하여 우두머리는 사형시키고 나머지는 유배보냈다고 한다.註 005 두 왕손註 006도 역시 출입할 때 초헌軺軒註 007을 타고 위졸衛卒을 성대하게 갖춘 일로 인하여 능주綾州와 광주光州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도성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이와 같은 일들은 상세히 모르겠다.
2월 초9일(경진) 볕이 남.
이날 이미 시험에 떨어진 응시자가 되었고 계속 서울에 머물러 있을 형편이 못되므로 갑자기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동행 중에 육량전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같이 고생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출발할 작정으로 계속 머물면서 도성 안의 몇 곳을 유람하였다. 임금께서 본궁으로 거둥하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 뒤에 들으니 다른 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하며, 거둥 장소를 바꾼 것이 하루에 세 차례나 된다고 한다. 주인집과 대궐 문이 너무 멀어서 한 번도 임금께서 거둥하실 때의 위의威儀 및 옥체 그리고 용안을 보지 못했으니 마음이 매우 개탄스럽다.
2월 11일(임오) 볕이 남.
대간이 파직된 일 때문에 육량전 시험이 열릴 기약이 없게 되었다. 기예 시험이 없는데도 계속 머문다면 비용만 낭비하게 되므로, 부득이 학봉鶴奉을 데리고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에 남대문으로 나와서 관왕묘關王廟를 구경하고 한강을 건너 40리를 가서 질현점秩峴店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동행과 헤어져서 학봉과 함께 가는 행색이 너무도 쓸쓸하였다. 질현점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상주尙州에 사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충주忠州에 사는 사람이었다.
병신일기 1776년(영조52) 정월 큰 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40_0010
1월 19일(신묘) 볕이 남.
여러 친구들과 함께 동대문 밖에 나가서 보사步射註 005를 구경하였다.
註 005
보사步射:서서 쏘는 활쏘기 시험으로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병신일기 1776년(영조52) > 2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40_0020
2월 15일(정사) 볕이 남.
이날 명을 내려 권무군관勸武軍官에게 시험에 응시하게 해서 4발을 맞추고 육량六兩 120보를 쏜 자 및 1발을 맞추고 육량 120보를 쏜 이 두 사람을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금위영·어영청의 두 군문은 날이 저물어 육량전을 쏠 수 없었다. 나는 문 밖에 나가서 활을 쏘았기 때문에 군문에 참여할 수 없었으니 한탄스럽다. 문과 전강殿講에 응시한 2인도 합격했다고 한다.
정유일기 1777년(정조1) > 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60_0020
2월 21일
활쏘기를 시작하였다. 원사遠射註 002는 다행히 합격하였고 육량전六兩箭註 003 시험도 합격하였다. 조총鳥銃 시험은 높은 점수로 초시初試에 통과했으나 총을 쏘는 격식을 어겨서 합격하지 못했으니, 분하고 한스럽다.
註 003
육량전六兩箭:촉의 무게가 6냥兩인 화살을 지칭한다. 육량은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사용하기 어려운 화살이다.
정유일기 1777년(정조1) > 8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60_0060
8월 초5일
육량六兩을 쐈다.
8월 초7일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정경유鄭敬由·정화경鄭和卿·정청지鄭淸之와 내가 합격하였다. 친구 채한보蔡翰甫와 정여익鄭汝益은 3개 화살이 과녁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조영우趙榮遇는 호적이 기준에 맞지 않아서 육량전을 쏘지 못하였다. 채한보와 조영우는 하루 먼저 출발하였고, 정여익은 함안咸安에 있는 그의 외가로 향하였다.
정유일기 1777년(정조1) > 9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60_0070
9월 17일
육량六兩을 쐈다. 정경유鄭敬由는 첫 번째 화살은 실패하였고, 두 번째 쏘기에서는 10보步를 쏘았다. 정화경鄭和卿은 40보를 쏘았다. 나는 첫 번째 화살은 실패하고 두 번째 쏘기에서는 20보를 쏘았다. 조총은 변邊을 맞추었고, 기추騎芻는 쏘지 못하였다. 정경유는 조총과 기추에서 각각 한 번씩 변을 맞추었다. 정화경은 조총 3발을 모두 적중했고, 기추는 변을 한번 맞추었다. 화경은 점수 90획劃 이상, 나는 70획 이상. 경유는 60획 이상이다.
정유일기 1777년(정조1) > 10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60_0080
10월 25일
육량六兩을 한차례 쏘았다. 채한보蔡翰甫가 집으로 돌아갔다. 정화경鄭和卿 형제와 정봉신鄭奉新은 머물렀다. 나와 정경유鄭敬由는 내일 가기로 약속하였다.
무술일기 1778년(정조2) > 7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280_0080
7월 초4일(신묘) 흐리다가 비가 내림.
궐내에서 선전관宣傳官 내시사內試射를 거행했는데, 남항선전관南行宣傳官 신홍주申鴻周는 급제하고 선전관 구순具純은 철전鐵箭을 120보 거리로 쏘아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고 한다.
7월 초7일(갑자) 볕이 남.
영장營將 류집柳潗을 만났다. 조보가 나왔는데 과거일이 13일로 연기되었고 시험 규정은 목전木箭 150보, 철전鐵箭 100보, 기추騎芻 2중中, 편추鞭芻 3중中, 강講은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오자吳子』를 제외하고 본인이 원하는 책 하나를 강하되 조粗註 001 이상의 점수를 받은 사람을 뽑는 것으로 낙점 받았다고 한다. 목전의 도구를 하나도 미리 준비하지 못했으니 진실로 우습고 탄식스럽다.
7월 16일(계묘) 흐리다가 비가 오다 함.
목전木箭을 철수하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였다.
7월 17일(갑진) 새벽에 비가 쏟아지다가 늦게서야 그침.
여러 친구들이 철전鐵箭을 쏘았다. 선달 정달신鄭達新 척형이 후천동後川洞에서 나왔다가 저녁에 도성에 들어갔다.
7월 19일(병오) 아침에 흐리다가 늦게 볕이 조금 남.
아침 전에 나는 철전鐵箭을 쏘았는데 모두 기준거리에서 15보를 못 미쳤다. 들으니 공충도 관찰사가 장계狀啓를 올려 역적모의한 무리가 있으니 잡아가둘 것을 아뢰었다고 한다. 죄인은 윤문연尹文淵 등 3인인데 윤문연은 윤태연尹泰淵의 재종再從이다. 의금부에 잡아가두고 친국親鞫하기 위해서는 잡는 것이 시급한데도 여러 날 지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실상은 모르겠다.
기해일기 1779년(정조3) > 9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00_0090
9월 21일(임인) 늦게 가끔 비가 내림.
목전木箭을 끝내고 육량전註 005을 쏘았다. 나는 모두 23보에서 25보의 거리를 쐈다. 오후에 육량전을 끝내고 편전片箭을 쏘았는데 나는 관貫에 맞추지 못하였다. 저녁 무렵에 편전을 끝내고 총을 쏘았는데, 나는 2방을 변邊에 맞추었다.
경자일기 1780년(정조4) > 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20_0020
2월 22일(신미) 볕이 났으나 바람이 불었음.
이날 비로소 무과가 치러졌다. 먼저 목전木箭을 치렀는데, 원청장原靑帳註 002은 표식[標]註 003을 240보를 기준으로 세우며, 이 표식을 넘긴 보수步數를 기준으로 한다. 나는 첫 번째 화살에서 30보를 얻고, 2시에서 또 30보를 얻었으며 3시에서 39보를 얻었다. 획수劃數를 계산해보니, 원청장까지는 화살 한번 쏠 때마다 7획을 주므로 3시를 합쳐서 21획이다. 표식을 넘긴 것은 5보당 1획을 주므로 30보는 6획이며 3시를 합치면 19획 4분이 된다. 따라서 전부 합쳐서 40획 4분이다. 저물녘에 목전 시험장을 거두고 이어서 철전鐵箭을 치렀다. 철전의 방패防牌註 004는 80보를 기본 표식으로 삼으며, 표식을 넘긴 보수를 기준으로 한다. 원방패原防牌와 매 화살마다 5보당 1획을 주는 것은 목전과 규식이 같다. 나는 첫 번째 화살에서 44보를 얻고 2시에서 44보를 얻었으며 3시에서 46보를 얻었다. 원방패의 점수가 21획이고, 표식을 넘긴 점수 역시 목전과 규식이 같으므로 3시를 합쳐서 25획 9분이며 두 가지를 합쳐 46획 9분이다.註 005 목전과 철전의 획수를 모두 계산하면 86획 13분이다.
경자일기 1780년(정조4) > 3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20_0030
3월 초10일(기축) 볕이 남.
조보를 보니, 전시殿試 규정은 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기추騎芻·기창騎鎗·편추鞭芻·관혁貫革·조총·강서 총 8기技 가운데 본인이 원하는 1기를 선택해서 본다고 한다.
3월 16일(을미) 구름이 끼고 흐림.
오늘은 전시殿試를 치르는 날이다. 동이 틀 무렵에 통화문通化門 밖으로 나아가니 이미 날이 밝았다. 통화문으로 들어가 명광문明光門을 거쳐 청양문靑陽門 안에 이르렀다. 문과 급제자는 길 왼쪽에 순서대로 서고, 무과 급제자는 길 오른쪽에 순서대로 섰다. 지영祗迎은 오전 8시 45분이었다. 대가가 청양문을 거쳐 들어와 춘당대春塘臺에 전좌殿座하셨으며 시험이 끝나자 궐내로 돌아가셨다. 나는 철전鐵箭으로 시험을 치르고 물러나왔는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전시를 끝마치지 못하고 자리를 거두었다.
임인일기 1782년(정조6) > 11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60_0110
11월 23일(병진) 맑음.
초시의 무기武技는 유엽전柳葉箭·기추騎芻·철전鐵箭이며, 유엽전과 기추는 각각 2발씩 맞추고 철전은 100보의 거리를 넘기며, 3기技 중에서 2기技의 성적을 가지고 뽑는 것으로 재가裁可하셨다.
임인일기 1782년(정조6) > 1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60_0120
12월 초3일(을축) 볕이 남.
정유검鄭惟儉이 철전鐵箭 다섯 발을 모두 통과해 초시 합격이 이미 판가름 났으니 기쁘다. 오늘 백관이 원자 정호定號를 종묘宗廟에 고한 일로 진하陳賀하였다. 이 일과 관련하여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윤尹 빈궁嬪宮註 001의 산청産廳을 거두고 내일부터 비로소 형을 집행한다.
12월 16일(무인) 흐림.
병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남별영南別營에 좌기坐起하여 선천宣薦의 취재를 하였다. 나는 먼저 철전鐵箭을 쏘아 총 15점을 얻었고, 5발씩 세 차례 유엽전과 편전을 보사步射했으나 모두 맞추지 못하였다. 기추騎芻에서 1발을 맞추고, 강경講經에서 2조粗 1략略을 얻었다. 세 기예로 선발하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이번 취재에 도내 사람으로 밀양密陽의 이병성李秉晟, 함안咸安의 이이룡李以龍, 고령高靈의 오현충吳顯忠 등 모두 4인이 함께 합격하였다. 정화경鄭和卿이 과거에 떨어져서 이날 출발하여 돌아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갑진일기 1784년(정조8) > 6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80_0070
6월 19일(임인) 종일 가랑비가 내림.
오늘 금군 별취재別取才를 시행하였는데, 감낙명金樂命이 1등이었다. 나는 유엽전에서 변邊과 관貫을 맞추고, 기추騎芻에서 1발을 맞추고, 철전에서 3발을 통과하고, 강講에서 통과하였다.註 003 그래서 7발註 004이 되어 4등을 차지했는데, 영남 금군 중에서는 1등이었다.
갑진일기 1784년(정조8) > 9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80_0100
9월 24일(병자) 흐림.
임금께서 이날 영우원永祐園에 거둥하시어 나는 화곡 부장禾穀部將으로 가서 참석하였다. 영중英仲이 철전을 쏘아서 모두 120여 보步를 넘겨서 초시에 합격하였다. 초시의 규구는 육량전은 3발을 110보를 넘겨야 하고 유엽전은 관貫과 변邊을 맞혀야 하는데, 이 두 가지 기예 중에서 한 가지 기예로 합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 참고사항) 노상근(盧尙根, 1753년(?) ~ 1809년 3월 26일), 1795년(정조 19년) 무과 급제 - 일명 영중(英仲)
갑진일기 1784년(정조8) > 10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89r_0010_0380_0110
10월 초4일(병술) 흐리다가 낮에 이르러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그리고 밤새 내림.
영중英仲이 철전을 쏘았는데, 규정 거리를 넘은 것이 세 발 이상이 되지 못하였다.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3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030
3월 초4일(계축) 맑음.
유엽전을 마치고 다음으로 철전鐵箭註 002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 들으니 영중英仲이 상처를 부여잡고 철전을 쏘아 3발을 맞추었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3월 초5일(갑인) 맑음.
이날도 철전鐵箭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
3월 초6일(을묘) 맑음.
철전鐵箭 시험을 마친 다음에 기추騎芻註 003 시험을 마쳤다. 다음으로 조총 시험이 있었는데 마치지 못하였다. 들으니 아우가 조총 시험도 합격했다고 한다.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040
4월 25일(갑진) 흐리고 조금 볕이 나기도 했음.
전경강專經講註 003의 규례처럼 나이 40세 이하는 모두 삭시사朔試射에 참여하게 하였다. 활쏘기 규정은 유엽전柳葉箭 일곱 차례, 편전片箭 두 차례, 기추騎芻 한 차례, 철전鐵箭 한 차례다. 춘당대에 전좌해 친히 시험을 치르셨는데 나는 11발을 명중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다. 선전관 류홍원柳弘源이 점수를 전혀 얻지 못해서 벼슬에서 떨어졌다.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9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090
9월 초1일(정미) 볕이 나고 동풍이 붊.
이날 춘당대春塘臺에 전좌하여 선전관과 어가의 앞뒤를 따른 별감에게 활쏘기를 시험하셨는데, 4일에 대가가 거둥할 때 어가를 따르기 때문이다. 반촌泮村에 가서 오도이吳道而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미시(오후 1~3시)에 김몽화金夢華 승지 영감이 다시 승지가 되어서 패초를 받고 승정원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입직하였다. 오늘 활쏘기 시험에서 선전관 신섬申暹이 출륙出六되고 이어서 가자되었다. 가자한 것은 그가 지난여름에 철전 120보를 쏜 것이 3발이나 되므로 전하께서 특별히 가자하되 출륙한 후에 시행하라고 하교하셨기 때문이다. 이날 정사에서 무겸선전관 이언경李彦敬이 주부가 되었다.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10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100
10월 22일(무술) 흐림.
이날 영중英仲이 철전鐵箭을 쏘아 두 발은 기준 거리를 넘겼지만 세 번째 화살에 이르러 실패하여 낙방하였다. 운수이니 어찌하겠는가.
10월 29일(을사) 볕이 남.
이날 오전 8시 45분에 전좌하여 직부直赴한 사람들을 시사試射하셨는데, 일곱 가지 기예에 모두 응시하므로 날이 저물 때까지 시사를 거행했다. 철전鐵箭, 유엽전柳葉箭, 관혁貫革, 편곤鞭棍, 기추騎芻, 조총, 강서 시험 등 총 일곱 과목이었고, 전시殿試에 직부된 사람은 170여인이었다. 시험을 마친 후에 전좌를 마치고 환궁하셨다.
을사일기 1785년(정조9) > 1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20_0120
12월 초10일(을유) 볕이 남.
이날 병조 판서가 금군禁軍과 경과慶科 가설금군加設禁軍註 004의 별취재別取才를 시험하기에 아침에 모화관慕華館에 갔다. 가설금군의 성기省記에 기록된 사람은 모두 1백여 인이었다. 의성義城의 선달 김방金坊 노형老兄이 유엽전柳葉箭에서 2발을 명중하고 편전片箭에서 1발을 명중하고 철전鐵箭에서 3발을 쏘고 기추騎芻에서 2발을 명중하였다. 모두 8발에, 강講에서 약略을 받아서 1번 내금위와 2번 내금위 및 가설 금군에서 일등을 했으니, 친지로서 기쁘다. 성주星州의 무과 출신 박수검朴守儉은 유엽전에서 3발을 명중하고 기추에서 3발을 명중하여 6발로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의 기사騎士 취재에서 일등을 했으니, 훌륭하다. 겨울 날씨가 봄 같아서 진창길 때문에 매우 힘들었다. 여규명呂奎明 별검別檢이 인명원仁明園에 입직하였다.
병오일기 1786년(정조10) > 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40_0020
2월 초4일(무인) 볕이 남.
이날 춘당대春塘臺에 전좌殿座하시어 장용위壯勇衛를 시사試射하셨는데, 시위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아침 별시別試 초시初試의 시험장을 열기에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영중英仲이 활쏘기 시험을 치르는 것을 보았는데, 또다시 유엽전柳葉箭에서 떨어졌다. 이번 과거 규정은 유엽전에서 2발을 맞추는 것과 철전[六兩]에서 110보步를 넘겨서 쏘는 것 두 가지인데,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뽑았다. 영중과 함께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영중은 반계泮界로 들어갔다. 어제 춘당대 강경講經에서 일등을 차지한 유학 안중묵安重默, 책문에 응한 윤광안尹光顔은 직부전시直赴殿試 되었다.
2월 21일(을미) 볕이 나고 바람이 거세게 붊.
입직하였다. 이날 오전 6시 45분에 인정전仁政殿에 전좌殿座하셨다. 생원시와 진사시의 입격자를 발표하고 백패 지급과 선온宣醞이 끝나고 나서 전좌를 마치니 시위와 백관이 물러났다. 집의執義 조윤대曺允大가 오늘 시위에 1번 내금위장 이수붕李壽鵬이 겸별장으로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시위의 대열 속에서 함부로 담뱃대를 문 일에 대해 아뢰니, (이수붕에게) 곤棍 15대를 치고 법을 적용하여 정배定配하라고 하교하셨다. 대저 지난번에 부총관副摠管 이문덕李文德이 이런 일 때문에 대간臺諫의 계啓로 삭직削職되었는데, 이수붕이 오늘 범한 것은 괴이하다. 오늘 시위에는 전원이 참여하였다. 이날 아침에 1, 2소의 중시重試 초시初試의 시험의 시험장을 여는데, 유엽전柳葉箭으로 시험장을 열겠다고 초기草記로 아뢰었다. 임금께서 바람이 이와 같으니 먼저 철전鐵箭을 시험하라고 하교하셨다.
2월 22일(병신) 볕이 나고 바람이 붊.
입직하였다. 시험장 소식을 들으니, 1소에서는 먼저 철전鐵箭을 쏘고 다음으로 기추騎芻를 시험하였으며 2소에서는 먼저 철전을 시험하고 그 다음으로 유엽전을 시험하였는데, 또한 ‘불不’로 호명된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 25일 대가大駕가 거둥할 때에 무겸청의 시위는 10원員이 대가를 따르라고 하교하셨다.
2월 25일(기해) 볕이 남.
오전 1시 30분에 대가大駕가 돈화문敦化門을 나가서 효릉孝陵과 희릉禧陵에 행행하셨는데, 돈화문 밖에서 공손히 전송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아침 후에 모화관慕華館에 나갔다. 대가가 돌아올 때에 양천평陽川坪에 도착하여 영營에 남아있는 군관을 불러내어서 세 영으로 하여금 서로 추격하도록 하였다. 해가 기울 때 먼저 달려 모화관에 도착하였다. 백관이 석교石橋 아래에서 공손히 맞이하는 의례를 거행했는데, 나도 공손히 맞이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대가를 따라 궐문 밖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오현충吳顯忠【도이道而】은 지난번 중시重試 초시初試 때 철전에서 세 번째 화살이 패牌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시관인 대장 이방일李邦一씨와 병마절도사 백동준白東俊이 비벌鼻罰을 시행하였다. 오늘 공손히 맞이하는 의례 때문에 일회一會를 하였는데, 청수廳首 서윤재徐潤載와 공사원 신처문申處文이 “벌을 거부하지 않고 태연하게 스스로 받았으니, 벌의 이름을 ‘수모受侮’라고 해야 한다.”라고 논의를 꺼내었다. 시험장에서 수치를 끼쳤으니 무겸청 전체에서 병조에 낱낱이 보고하는 일에 대해 가부를 논해서 정하였다. 나는 “벌이 응당 지나치다.”라고 말하였다. 또 각구各九의 벌로 논의를 정했는데, 나는 또한 막을 수 없었다. 참으로 스스로 우스울 뿐이다.
병오일기 1786년(정조10) > 3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40_0030
3월 12일(병진) 흐리고 비가 떨어지다가 늦게 맑음.
이날 미처 끝내지 못한 무과 시험을 이날 또다시 시행하였다. 문과는 부賦와 책策으로 8인을 뽑았는데, 전임 현감 목만중睦萬中이 1등하여 가자加資 되었다. 1등 이하는 4인이다.註 003 무과는 70여인을 뽑았는데, 일찍이 판사判事를 역임한 서영보徐英輔가 중시重試로 가자되었고 용유익龍有翼이라는 사람이 1등을 차지하였다. 영남은 백익진白翼鎭이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이로서 출륙出六하여 사과司果에 붙여지고, 하동河東의 주부主簿 김광백金光白, 대구大丘의 초관哨官 정선국鄭善國 만이 합격하였다. 무겸청의 참하參下 박응호朴應浩는 중시重試로 출륙하여 사과에 붙여졌다. 이번 무과 시험의 규정은 유엽전은 2발을 맞추고 기추騎芻는 1발을 맞추고 철전鐵箭은 80보 이상의 거리를 넘기며 강서講書에서 통通 이상의 점수를 얻는 것으로 하여 4가지 기예 중에서 2가지 기예를 취하여 뽑았다. 무과 출신은 출륙出六 여부와 관계없이 아직 출륙하지 못한 자는 이전에 벼슬을 한 자와 현재 벼슬에 있는 자를 모두 출륙시키고, 이미 출륙한 자는 승진시키지 않았다. 시위에는 전원이 참석하였다. 저녁 무렵에 전좌殿座를 마치고 환궁하셨다.
병오일기 1786년(정조10) > 10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40_0110
10월 18일(무오) 볕이 남.
전경강專經講 대신 춘당대春塘臺에서 내시사內試射를 하였다. 이날 오전 8시 45분에 전좌하여 활쏘기를 시험하셨다. 삭시사朔試射의 예에 따라 유엽전柳葉箭 7차례, 편전片箭 2차례, 철전鐵箭 1차례, 기추騎芻 1차례, 포혁布革 1차례를 쏘았는데 해가 기울 무렵에 마쳤다. 4발을 채우지 못한 사람 7인 가운데 1발을 맞힌 사람은 2인, 2, 3발을 맞힌 사람은 5인이었다. 그런데 무겸선전관 이주완李柱完은 4발을 채웠으나 춘당대 시험 기록에서 1발이 누락되었고, 부장部將 김치기金致淇는 5발에서 3발이 누락되어 모두 4발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 들었다. 두 사람이 땅에 엎드려 호소하므로 하교하여 도청과 서전관書箭官의 시험 기록을 살펴서 초기草記하라고 하셨다. 살펴보니 과연 그들이 호소한 것과 어긋남이 없으므로 초기의 내용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저물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 가랑비가 내렸다.
정미일기 1787년(정조11) > 정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60_0010
1월 13일(임오) 볕이 남.
초동草洞으로 친지들을 찾아갔다. 이날도 종일 서풍이 크게 불었다. 늦게 평동坪洞·의동義洞에 가서 여러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어제 조보朝報를 보니, 과거 시험 규칙을 철전鐵箭 120보, 편전 2푼[分], 유엽전 3푼으로 하되 2가지 기예의 점수를 가지고 뽑도록 명을 내리셨다. 저물녘에 권응호權膺祜가 찾아왔다. 상주尙州의 별검別檢 강세규姜世揆가 연초에 조경묘肇慶廟 별검이 되었는데, 어제 향香을 받아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다. 그의 나이는 지금 26세이다.
1월 21일(경인) 볕이 남.
이번 무과 초시에서 훈련원에서 두 가지 기예로 입격한 사람이 15인인데, 이것으로 초기草記를 올리자 다시 육량전 120보 거리를 넘기는 한 가지 기예로 활쏘기 시험을 하여 인원수를 채우라고 하교하셨다. 하지만 영남의 한량 중에는 통과한 사람이 없으니 한탄스럽다. 선달 문경성文敬成, 선달 장한충張漢忠이 찾아왔다. 의동義洞에 가서 친구 정유철鄭惟轍 등 여러 사람과 조유숙趙由叔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경모궁에서 작헌례를 행한 후에 대가가 즉시 환궁하였다. 우의정 조경趙璥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1월 24일(계사) 볕이 남.
파루罷漏 후에 부賦를 출제하고 동이 트자 무과 시험을 실시하였다. 문과는 15인을 뽑았는데, 군수 이의강李義綱, 현감 서매수徐邁修, 김화종金和鍾·이희관李羲觀·김유기金裕己·류영철柳英喆·신약추申若樞·조태영趙台榮·서유문徐有聞·이익회李益恢·윤인기尹寅基·신부申溥·신성모申星模·이면응李勉膺·신철申漵이 합격하였다. 무과에서 직부直赴된 사람은 모두 170여 인이며,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무과 회시會試 규정은 유엽전 2발을 명중하는 것이다. 이번 초시에는 세 가지 기예 중에서 두 기예를 선택하는 것이었는데, 인원을 채우지 못해 결국 철전 120보 한 가지 기예로 인원을 채웠다. 미시(오후 1~3시)에 환궁하여 신시(오후 3~5시)에 숙장문에서 친국親鞫 하셨는데, 시위는 입직이 거행하므로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국청鞫廳에 관한 내용은 개략을 알지 못하겠다. 영중英仲이 이날 아침 친지가 고향으로 내려가므로 따라갔다. 서로 만나보지 못하고 갔으니 슬프기 그지없다. 정화경鄭和卿만 홀로 남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영장 장성한張成漢도 함께 내려갔다. 오늘 정사에서 무겸선전관 김노악金魯岳이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정미일기 1787년(정조11)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060_0040
4월 22일(기미) 볕이 남.
아침에 청교靑橋에 가서 참군參軍 장화심張華深, 선달 장사준張士俊, 선달 조태중趙台仲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날은 전경강專經講 대신에 삭시례朔試例를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였다. 유엽전柳葉箭 7순巡, 오색소포五色小布 1순, 편전片箭 1순을 쏘았는데, 맞춘 화살이 4발 미만인 사람이 꽤 많았다. 철전鐵箭과 기추騎芻를 생략하고 하교하시기를, “이번에는 상도 벌도 내리지 않고 중지할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 열심히 연습하여 앞으로 규정대로 거행할 때에 걱정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늦게 나는 훈련원에 가서 활을 쏘고, 돌아오는 길에 정달신鄭達新 첨정을 보았다. 밤에 비가 내렸다.
경술일기 1790년(정조14) > 4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120_0040
4월 14일(갑자) 흐리고 비가 내리다가 늦게 볕이 남.
들으니, 철전鐵箭 120보步에서 3발을 모두 넘기고 기추騎芻에서 2발을 명중한 사람 3인人은 직부전시直赴殿試되었고, 철전 3발만 모두 넘긴 사람에게는 규정에 따라 상을 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신해일기 1791년(정조15) > 3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140_0030
3월 초9일(계미) 흐리고 평명부터 가랑비가 늦게까지 내렸고 종일 그치지 않았음.
춘당대에 전좌殿座하시어 금군 7번番과 서북별부료西北別付料에게 시사試射를 거행하셨다. 1번 내금위 및 액외額外 가설加設 금군은 기추騎芻와 철전鐵箭 두 가지 기예로만 시험하고,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유엽전柳葉箭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신해일기 1791년(정조15) > 6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140_0060
6월 14일(정사) 흐리고 비가 내리다가 간혹 그치기도 하고 개기도 함.
병조 판서 김문순金文淳이 남별영에서 금군 별취재를 시행하였는데, 하동河東의 선달 이원신李元臣이 유엽전 2발, 기추騎芻 3발, 육량전六兩箭 3발을 맞추어서 모두 8발로 1등을 하였으니 훌륭하다. 밤에 비가 내리고 그치지 않았다.
임자일기 1792년(정조16) > 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160_0020
2월 30일(기사) 볕이 나고 남풍이 붊.
이날은 문과와 무과 복시를 치르는 날로 문과의 강서 시험과 무과 시험을 개최하였다. 모화관으로 나가서 친지 한사겸韓士謙 영공의 아들 한계풍韓啓豊과 이야기를 하였다. 목전은 모두 61보에서 65보이고 철전은 모두 32보에서 35보였는데, 권필진權必辰은 목전이 모두 42보에서 45보였다. 저녁 무렵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임자일기 1792년(정조16) > 7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160_0080
7월 26일(계해) 흐림.
입직하여 위자패衞字牌를 받았다. 정원혁鄭元赫이 출직했는데, 이 사람은 평안도 양덕陽德 사람으로 원사遠射註 001로 가자되어 실직을 받은 사람이다. 경상 중군慶尙中軍 성동일成東一【사순士順】 령令이 이날 하직하고 당일에 출발하므로, 남소南所에서 만나 송별하였다. 이날 밤 군호는 ‘순작巡綽’ 두 자로 내리셨으며, 4~5경(오전 1~5시)에 순찰하였다. 이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내리고 밤새 내렸으므로, 비를 무릅쓰고 순찰하느라 옷이 다 젖었다.
註 001
양덕 사람으로 원사遠射:정원혁은 1792년 6월에 평안도에서 뽑아 올린 무사들을 대상으로 춘당대에서 시험을 치렀을 때 철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오위장이 되었다(『일성록』 정조 17년 6월 21일). 여기서 ‘원사’는 멀리 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점수를 주는 철전을 말한다.
일성록 > 정조 > 정조 16년 임자 >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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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陽德)의 절충장군 정원혁(鄭元赫) - 철전에서 첫 발은 150보(步), 둘째 발은 155보, 셋째 발은 165보를 쏘았고 유엽전에서 변(邊)에 1발을 맞혔다. - 은 수용하고,
임자일기 1792년(정조16) > 8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160_0090
8월 20일(병술) 볕이 나고 연이어 밤에 무서리가 내림.
형제가 서로 만났으니 그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집안이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다행스럽다. 하지만 농사가 흉년을 면치 못했다 하니, 놀랍고 마음이 아프다. 이날 아침에 영중英仲이 권무군관勸武軍官 취재에 대한 일로 어영대장께 현신現身하고, 식후에 남소영南小營의 취재取才에 갔다. 철전鐵箭은 자불自不註 002하고, 유엽전은 3순巡에서 4발을 명중하여 5푼[分]을 받았으며, 기추騎芻는 2순에서 1발을 명중하여 입격하였다.
8월 27일(계사) 볕이 남.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위자패衛字牌를 바치고 위자패를 받았다. 정원혁鄭元赫이 입직했기에, 패牌를 전달하고 출직하였다. 내일 남소영南小營에서 삼영三營 소속의 권무군관에게 실시하는 시사試射에 거둥하신다는 령이 내려졌다. 과거科擧 규정은 철전鐵箭은 3발 120보 이상, 유엽전 2발 명중, 기추騎芻 2발 명중, 강서講書는 조粗 이상인데, 이 4가지 기예 중에서 2가지 기예의 점수를 가지고 뽑도록 판하判下하였다.
8월 28일(갑오) 볕이 남.
대가大駕가 홍화문을 나가서 이현梨峴의 벽문壁門·마전교馬廛橋·훈련원을 거쳐 남소영에 납시어 과거를 거행하였다. 직부直赴를 받은 자가 모두 13인인데, 의령宜寧의 허승許乘과 성주星州의 이극풍李克豊도 합격하였다. 허許는 철전과 강서講書로, 이李는 유엽전과 철전으로 합격하였다. 이李는 경력 이우보李雨普의 둘째 아들이다. 나는 나아가 시위 반열에 참석하였다. 오후에 바람이 거세게 불고 소나기가 내렸는데 저녁 무렵에 그치니, 대가가 환궁하셨다. 이날 밤에 허승을 특별히 가설 내승加設內乘에 제수했는데, 남항南行으로서 관직에 오르는 규정이 있어서이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3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30
3월 초1일(무인) 볕이 남.
이른 아침에 각 반班 하인의 좌기坐起를 거행하고 진무사振武士의 취재 시사를 치렀다. 진무사는 모두 이곳 향인鄕人의 자제인데 취재에서 우등한 자는 순영巡營에 보고한다. 그러면 또다시 취재를 하기 위해서 순영에 거접居接한다고 한다. 이번에 입격한 자는 관貫 1중이 1인, 변邊 1중이 2인에 불과하고, 철전鐵箭에 응시한 자가 없기 때문에 보고할 것이 없었다. 늦게 창성昌城 부사가 도착해서 복검覆檢한 옥안獄案을 작성했는데, 전례대로 서로 만나지 않고 말만 전했을 뿐이다. 하인 32명을 데리고 도착했는데, 순영의 정례定例에는 복검覆檢에 참여해 함께 추문推問하는 행차에게는 12명만 음식을 대접해서 회감會減註 001한다. 만일 촌락이라면 정해진 인원 이외의 하인은 죽은 사람 측이나 피고[元隻] 측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 전례다. 그러므로 하인 중에서 12명에게만 명목대로 음식을 주고, 그 나머지 20명에게는 관료官料에서 책임지고 차출내서 창성부의 하인들이 번갈아 받아먹게 하였다. 그런데 창성 수령이 매우 편치 못하다는 뜻으로 말을 전해 왔다. 대체로 본부는 민병民兵으로 군대를 만들어 군안軍案을 방어영防禦營에 소속시키고, 별무사別武士의 군안도 방어영에 소속시킨다. 그러므로 방어영이 이 두 가지 일로 체통이 있다고 하여 공격公格註 002이라고 스스로 일컬으면서 삭주부를 능멸한다. 그래서 창성부의 하례가 삭주에 대해 이 일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을 한 것이니, 그들의 처사는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르니 오래 알고 지내는 사이의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창성에서 겸해서 관장하는 군무軍務는 하찮고 자그만 일에 불과하다. 민병이란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으며, 별무사의 군적은 삭주에 있는데 창성에 가서 모인다. 그래서 예전부터 삭주부에서 거행할 때에 일이 군무와 관련이 되면 창성을 방어영의 체통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문보文報를 전례대로 하고, 부府의 다스림과 관련된 일이면 관문關文을 보내 거행하였다. 그런데 지금 창성 수령은 문서로 보고하건 관문을 보내건 거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망령되이 자신을 높여서 동료를 능멸한다. 이것이 이른바 ‘진실로 사람을 쉽게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양영兩營註 003도 아니고 또 주진主鎭의 관할도 아닌 겸관의 군무 문서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대단한 공격이 있겠는가? 또 이전의 수령 때에도 이것 때문에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진실로 웃음이 나고 탄식스럽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4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40
4월 23일(기묘) 볕이 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함.
양영兩營에서 특별히 대관大館의 성을 지키는 장교를 혁파하였다. 그리고 병영의 처분에, “그 무사들 모두에게 철전鐵箭을 주어서 무사를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5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50
5월 25일(신해) 볕이 남.
이날 성 밖의 사정射亭에 좌기하여 권무 부료 무사勸武付料武士에게 철전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였다. 관아로 돌아와서 주변헌籌邊軒에 좌기하여 유엽전과 편전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였는데, 과녁 세 개를 설치하여 활쏘기를 마쳤다. 급료를 지급하는 재원으로는 대관大館의 성을 지키는 장교를 이번에 양영兩營에다 의견을 붙여 보고하여 혁파를 특별히 허락받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쓰던 1,000섬[石]의 모미耗米와 낙색미落色米 124섬[石], 성의 수리비용 804냥, 이자 240냥을 합하여 요포料布로 삼았다. 그리고 철전 무사 8자리, 유엽전·편전 한산무사閑散武士 10자리, 진무사振武士 5자리, 무경武經 1자리, 병학兵學 1자리 등 모두 25자리를 설치하여 매달 시험을 보아서 급료를 주기로 했다. 철전 무사 8자리는 매달 한사람 당 좁쌀[小米] 7말[斗], 전錢 1냥씩 주는 것으로 규칙을 정하였다. 유엽전·편전 한산 무사 10자리는 매달 한사람 당 좁쌀 6말, 전錢 6전戔 5푼[分]씩 주는 것으로 규칙을 정했으며, 진무사 5자리도 유엽전·편전 한산무사에 의거하여 거행하였다. 무경과 병학에게 매달 좁쌀 6말, 전錢 6전戔씩 지급하는 것으로 규칙을 정하여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고, 절목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7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70
7월 초3일(무자) 볕이 남.
이날 부료 무사付料武士들에게 시사試射를 거행하였다. 철전 무사로서 120보를 넘은 사람은 3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엽전·편전 무사인데, 그들을 부료付料 무사에 붙였다. 이달은 유엽전과 편전으로 부료 무사가 된 사람이 21인이고, 병학兵學으로 부료 무사가 된 사람은 1인뿐이었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8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080
8월 초6일(경신) 흐리고 아침에 가랑비가 내림.
비가 내리기 전에 사정射亭으로 갔다. 시험장을 열어 철전 무사鐵箭武士를 시험하니 120보를 넘겨서 입격한 사람은 세 사람뿐이었다. 관아에 들어와 좌기를 열어서 유엽전·편전의 부료 무사付料武士에게 시사와 강서 시험을 치렀는데, 7월에 거행해야 했던 양무 시사養武試射를 마친 것이다. 시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10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00_0100
10월 21일(을해) 흐리고 비와 우박이 내리고 또 바람이 붊.
비가 내리기 전에 선전관 권익權翊은 창성昌城으로 향하였다. 비가 내리고 나서 저녁 무렵에 훈련청에 좌기하여 철전鐵箭을 익힌 무사들에게 시사試射를 행하고 해가 지자 관아로 돌아왔다.
10월 28일(임오) 흐림.
아침 일찍 감영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들렀다. 창성부昌城府에 충군된 죄인 윤범서尹範敍를 특별히 방귀전리放歸田里註 004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아들인 중화 부사中和府使 윤항검尹恒儉이 사직서를 올렸기 때문인데, 하교하시기를, “재난을 당한 고을의 수령을 자주 교체할 수 없으니 충군한 죄인 윤범서를 풀어주라.”고 했다고 한다. 수군절도사 윤범서의 죄목은 전임 수군절도사가 사람을 죽게 하고 즉시 장계로 보고하지 않았는데, 신임 수군절도사로서 먼저 장계를 올려서 그 일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죄로 충군된 것이라고 한다. 훈련청에 나가서 철전을 익힌 무사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1백 50보 거리에 방패를 세웠는데, 김만백金萬白·이동초李東楚가 모두 합격자에 들었다.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 11월 작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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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갑진) 볕이 나고 춥지 않음.
훈련청訓鍊廳에 좌기하여 철전을 시사試射하였다.
을묘일기 1795년(정조19) > 윤2월 작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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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2월 28일(기유) 볕이 남.
어제 정선鄭選이 권무군관勸武軍官으로서 금위영禁衛營에 이름을 올려서 철전鐵箭 2발이 149보步를 넘기자, 서울의 권무군관과 한량閑良들이 정선을 구타하였다. 금위대장이 잡아들여서 주범자에게 곤棍 9대를 쳤다. 시험을 보게 하니 1발을 쏘아서 147보를 넘겼다. 비록 원래 정한 기예 점수를 얻지는 못했으나 권무군관 중에서는 1등이었다. 원래 정한 기예 점수인 150보를 넘긴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입계入啓하니, 130보 이상인 사람들에게 다시 시험을 보이라고 하교하셨다. 정선은 재시험에서 첫 번째 화살에서 162보를, 두 번째 화살에서 149보를, 세 번째 화살에서 152보를 넘겨서 원래 정한 기예 점수에 이르니, 이것으로 입계했다고 한다.
을묘일기 1795년(정조19) > 3월 작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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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7일(정사) 흐림.
어제 대내大內에서 집성문集成門을 거쳐 대보단大報壇에 전배展拜하셨다. 이날 대가가 돈화문敦化門을 나가 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의 세 궁에 나아가 전배하고 환궁하셨다. 환궁하실 때에 벽문壁門 파수把守를 없애서 도성 사람으로 하여금 성상의 용안을 마음대로 바라보게 하였다. 한낮에 간혹 비가 떨어졌다. 나는 반촌泮村에 가서 주서 류이좌柳台佐를 방문했는데, 그저께 도성에 들어왔으나 도성에 다시 들어왔다는 단자를 아직 바치지 않고 있었다. 들으니, 풍천豊川 수령 장성한張成漢이 지난달에 맏아들을 잃었다고 한다. 또 직장 권응호權應浩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형원李馨遠에게 들렀다. 이 사람은 바로 창원昌原 수령 이여절李汝節 령令의 아들인데, 액외額外 장용위壯勇衛로서 이번 춘당대春塘臺에서 실시한 장용영 중순시中旬試에서 철전鐵箭 120보를 넘겨서 합격하였다. 들으니, 병조 판서, 금군 별장, 총융사는 그대로 직임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여자종 용단龍丹이 올해 아들을 낳았다.
3월 13일(계해) 새벽부터 비가 내리다가 한낮이 되어서야 그침.
이날 춘당대春塘臺에 전좌殿座하시어 문무과文武科 전시殿試를 시험하셨다. 무과는 식년式年 원방元榜註 002인 사람은 강서講書에 응시했으며, 중순시中旬試에서 철전鐵箭에 몰기沒技한 사람은 철전에 응시했고, 기추騎芻에 몰기한 사람은 기추에 응시했으며, 유엽전柳葉箭과 편전片箭에 몰기한 사람은 유엽전과 편전에 응시했고, 조총鳥銃에 몰기한 사람은 조총에 응시하였다. 기타 직부直赴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번에 응시하지 못하여 급제자 발표에 들지 못한 사람은 8인이라고 한다.
을묘일기 1795년(정조19) > 7월 작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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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을축) 흐리다가 비가 내리고, 종일 서풍이 불었는데, 바람의 기세가 몹시 어지러움.
이날 병조 판서가 선천宣薦과 부천副薦의 천취재薦取才와 별취재別取才를 거행했으나, 비바람이 치는 가운데 치러진 시사試射여서 무사武士들이 그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다. 선천 천취재에 응시하여 합격한 사람은 한량 세 사람과 무과 출신 2인뿐이다. 내금위 별취재에서는 선전관 정유검鄭惟儉이 유엽전柳葉箭에서 2발을 맞추고, 철전鐵箭에서 3발을 쏘고, 기추騎芻에서 1발을 맞추어 부망副望에 들었다고 한다.
7월 24일(계유) 아침에 흐리다가 오후에 볕이 남.
이날 춘당대春塘臺에 전좌殿座하여 혜경궁惠慶宮의 배종陪從 및 영남에서 뽑아 올린 한량 여섯 사람을 시사試射하셨다. 여섯 사람은 철전鐵箭,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강서講書, 기추騎芻, 편추鞭芻, 오색소포五色小布를 규정으로 하였다. 사족士族 세 사람 중에서 장광린張光麟이 소포小布에서 3발을 맞추어 합격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 되었고, 중서中庶 세 사람은 철전으로서 직부전시 되었다고 하는데, 130보步가 규정이었다. 선달 장광린이 찾아왔다. 이 집안에서는 오랫동안 과거 합격자가 없는 것을 친지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위로된다.
7월 29일(무인) 종일 흐림.
묵동墨洞에 가서 영장 장동원張東源 령令을 방문하고, 경상도의 한량이 철전鐵箭을 쏘며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미동美洞의 대감에게 들으니, 지난번에 영남에서 뽑아 올린 무사武士를 시사試射하고 춘당대春塘臺에서 급제를 내린 날, 병조판서에게 ‘본도本道에 공문을 보내서 지방에 있는 무사들을 널리 시험한 뒤에 식년式年이 되기 전에 장계狀啓로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전교하여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을묘일기 1795년(정조19) > 9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20_0100
9월 초3일(신해) 볕이 남.
이날 한낮에 무과의 일소一所와 이소二所 시험장에서 합격자 발표를 했기 때문에 대궐에 나아갔다. 일소의 무예 기량으로 말하자면 변邊에 2발을 맞추고 강서講書에서 조粗의 성적을 얻고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수십여 명이었다. 이소의 무예 기량으로 말하자면 변에 3발을 맞추고 강서에서 조의 성적을 얻고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철전鐵箭 3발을 규정보다 20보 거리나 더 넘기고 강서에서 조粗의 성적을 얻고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에 응시자들의 무예 기량이 아주 출중하다고 할 만하다. 내일 치를 예정이던 회시會試는 초6일로 미루어 정해서 내일은 문과의 회시와 무과의 직부전시만 춘당대에서 시행하며, 무과 정시의 회시는 날을 미루어 거행한다고 한다. 선전관 신선응申善應과 선전관 정유검鄭惟儉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초동草洞에 가서 개천价川 수령 이빈李彬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참시관參試官으로 일소 시험장으로 나아갔다가 지금 막 합격자 발표로 인하여 대궐에 나아갔다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이날 밤에 서리가 내렸다.
9월 초5일(계축) 볕이 남.
이날 춘당대에 전좌殿座하여 먼저 무과 일소所 시험장에서 무사武士들에게 회시會試를 거행하였다. 먼저 철전鐵箭을 쏘아 130보 거리에 3발이 도달한 사람이 유엽전柳葉箭을 2발 이상 맞추면 급제하는 것인데, 영중英仲이 3발은 변邊을 맞추고 5발은 관貫을 맞추어 급제했으니 너무도 천만다행이다. 이번에 ‘상억尙檍’이라는 이름 중 ‘억檍’자를 ‘근根’으로 고쳐서 ‘상근尙根’의 이름으로 급제한 것이다. 인척 장우성張羽成, 손응호孫應虎, 권사억權師億, 이가홍李佳洪 등 여러 사람도 함께 급제하였다. 내가 친지들과 함께 홍화문 밖에 도착하니 앞에서 삼현三絃註 001과 무권舞拳 4, 5명을 앞세우고 무과 출신들이 짝을 지어 걸어가니 대단한 볼거리였다. 장張 인척의 여관이 예동藝洞에 있으므로 모두 앞쪽으로 몰아서 예동에 도착하였다. 예동에 이르러 장우성, 손응호, 권사억 3인은 그곳에 남고 나는 영중을 데리고 직동直洞으로 돌아와서 밤에 또다시 잔치를 거행하였다. 선전관 정유검鄭惟儉이 와서 묵었다.
9월 초6일(갑인) 볕이 남.
이날 춘당대에 전좌하여 무과 이소二所 시험장에서 무사들에게 회시會試를 거행하였다. 먼저 유엽전柳葉箭을 쏘고 다음으로 철전鐵箭을 쏘도록 하였다. 하지만 철전 시험을 다 끝내지 못해서 훈련원訓鍊院으로 시험장을 나누어 정하고 명관命官을 두어서 활쏘기를 마치게 하였다. 이웃에 사는 중군中軍 이욱상李旭祥, 강령康翎 수령 이익해李翼海, 선달 장수초張守初, 감찰 장언극張彦極, 중군 박광진朴光進, 칠원漆原 수령 성언림成彦霖, 선달 권사목權思穆, 선전관 장한주張漢疇, 중군 성동일成東一, 선달 권사룡權思龍이 모두 방문하였다.
병진일기 1796년(정조20) > 정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40_0010
1월 초1일(무신) 볕이 나고 아침에 동풍이 조금 붊.
대가가 환궁하셨다. 객지에서 이날을 맞으니 오히려 서글프다. 대구大丘 사람인 첨사 김인택金仁澤, 인동仁同의 감찰 장언극張彦極, 칠곡漆谷 사람인 부장部將 조창국曺昌國, 김제金堤의 선달 안경국安敬國이 찾아왔다. 김金과 조曺 두 사람은 중인中人으로 관직에 나온 사람이다. 조창국曺昌國은 철전鐵箭에서 3발 모두 150보의 거리를 넘겨서 곧바로 참하 부장으로 제수된 사람이다. 최범성崔範星 삼수三水 수령의 상차喪次에 가서 조문하였다. 염에 쓸 의복을 아직까지 준비하지 못해 염습斂襲註 001의 기일을 내일로 정했으니 참으로 가련하다.
병진일기 1796년(정조20) > 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40_0020
2월 초3일(기묘) 종일 흐리고 비가 내림.
문과와 무과의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시험을 이날 치렀다. 문과 초시는 초장初場에서는 논論과 표表를 시험 보였고, 종장終場에서는 책문策問을 시험 보였다. 무과는 철전의 경우 3발 모두 130보의 거리를 넘기는 것으로 하고 유엽전은 2발을 맞추는 두 가지 기예인데, 두 가지 기예 모두의 성적을 가지고 뽑는다. 문과에서는 300명을, 무과에서는 200명을 선발하는 것이 정식定式이었다. 그런데 문과 시험에서 선비들이 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일소와 이소의 시험을 모두 중지했으며, 선비로서 법을 어겨서 형조로 넘겨진 사람이 30여 명이라고 한다. 무과 시험의 경우에 일소에서는 종일 시험을 치렀는데 철전에서 3발 모두 기준 거리를 넘긴 사람이 7명이며 이소에서는 40여 명이라고 한다. 지난달 명정전에서 친림하시어 춘도기과春到記科를 시행할 때에 유생들의 행동거지가 아주 심하게 나태하고 거만하므로 하교하여 시험을 중지하고 그 유생들에게는 한 달간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대개 오늘날 유생들의 기풍이 날로 추락하여 예양禮讓의 풍도가 사라지므로 정학正學이 다시 이어지기는 고사하고 위학僞學마저도 보기 어려우니, 이 어찌 비통하고 안타깝지 않겠는가?
병진일기 1796년(정조20) > 3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40_0030
3월 17일(계해) 볕이 나고 바람이 어지러웠으며, 저녁에 비가 올 기미가 있음.
선달 안경국安慶國이 찾아왔다. 들으니, 이달 초에 선전관의 활쏘기 대회가 있었는데, “8발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감군監軍의 생기에 올려 감군으로 입직하는 벌을 시행하라. 그리고 4발을 채우지 못한 사람이 모두 4인인데 서북으로 나누어 보내서 부방赴防시키되, 철전에서 매 순巡마다 130보 이상을 넘길 수 있고, 유엽전에서 매 순마다 세 발을 맞힐 수 있고, 기추에서 매 순마다 세 발을 맞힐 수 있게 된 뒤에 관찰사가 장계로 보고하라.”고 하교하셨다고 한다.
병진일기 1796년(정조20) > 6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40_0060
6월 20일(갑오) 볕이 나고 간혹 구름이 낌.
이날 모화관에서 금군 취재를 하였다. 영중英仲은 철전만 넘기고 유엽전 세발을 맞추지 못하여 합격하지 못했으니 한탄스럽다. 시험장에 갔다가 돌아왔다.
병진일기 1796년(정조20) > 1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0r_0010_0240_0120
12월 12일(계미) 볕이 남.
연일 바람이 없고 나흘 동안 따뜻하여 날씨가 풀리니 정신도 명랑하다. 들으니, 이날 병조에서 포폄좌기襃貶坐起를 거행하였다. 어제 정사에서 참판 이정규李鼎揆 영감이 병조 참판이 되었다. 아침에 김영식金永植을 불러서 어제 들은 류홍원柳弘源의 험담을 알려주고서 김영식의 선조와 외계外系에 대해 물으니,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의 손녀사위 김천건金天健이 그의 5대조라고 한다. 만약 그의 말과 같다면, 어찌하여 선천宣薦에 구애되는 것인지 밝히기 어려울 듯하다. 부장 장사준張士俊, 부장 권사만權師萬 노형老兄, 선달 권사억權師億, 선달 권사정權思正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으니, 그저께 장용영에서 시사試射할 때, 수군절도사 이문철李文喆의 아들 이존경李存敬이 철전鐵箭 130보로 직부전시되어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새 급제자를 부르는 데에註 002 방문하여 축하하고 돌아왔다.
12월 16일(정유) 볕이 나고 바람이 없음.
이날 병조 판서가 모화관에서 선천宣薦 금군 취재禁軍取才를 거행하였다. 아우 영중英仲은 철전 3발과 기추 1발을 명중시키고, 강講에서 조粗의 성적을 받아 취재에 합격하였다. 나는 가서 만나보고, 저녁 무렵에 먼저 다시 도성에 들어왔다. 저물녘에 영중이 여관으로 돌아왔기에 들으니, 영남에서 뽑아 올린 무사武士들은 18일에 각자의 활과 화살을 가지고 춘당대에 대령하도록 하교하셨다고 한다.
무오일기 1798년(정조22)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20_0040
4월 11일(을사) 볕이 남.
선전관 문여집文汝緝이 와서 보았는데, 4일 동안 들어가 직숙하다가 오늘에서야 직숙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낭청 이승운李乘運, 선전관 조경하曺慶夏가 찾아왔다. 민식閔植이 도총부 낭청으로서 비변사 낭청을 겸임하고 있는데, 식년 진사시의 회시會試가 실시되는 날에 비변사 낭청으로서 시험장에 가서 대술代述과 대필代筆 행위를 적발하는 일을 맡았다. 민식이 황해도 사람인 장용위壯勇衛 김광익金光翼이 잘 알고 있는 황해도의 부자 놈이 대술하려는 간사한 조짐을 김광익과 함께 도모해서 적발했는데, 김광익이 그 일을 알려주고 민식이 체포하였다.註 005 하지만 황해도의 부자 놈이 간혹 그들에게 뇌물로 4~5백 금金과 3~4백 금을 쓴 일이 결국 염문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민식과 김광익이 모두 충군되었다고 한다.
註 005
민식이 … 체포하였다:김광익이 적간摘奸 낭청 민식과 짜고서 ‘비밀 염탐’ 또는 ‘비변사 적간’이라 하면서 협박하여 뇌물을 받아낸 사건이다. 김광익은 본래 무뢰배로서 철전 등 원사遠射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도성에 오래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거나 장용위를 사칭하기도 했다(『승정원일기』 정조 22년 3월 2일(병인)).
무오일기 1798년(정조22) > 6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20_0060
6월 17일(기유) 볕이 남.
들으니 병조 판서가 훈련원에 좌기坐起하여 영남의 초상 무사抄上武士에게 취재를 거행했다고 한다. 울산蔚山의 이지연李志淵이 철전의 첫 번째 화살에서 152보를, 두 번째 화살에서 149보를, 세 번째 화살에서 147보를 넘겼는데, 임금께 입계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가 되었다. 이원□李遠□□…□유□裕□는 벽동碧潼 수령 이한좌李漢佐의 아들이다. □…□40보 이상은 특별히 명하여 □□했다고 한다. □…□ 문여집文汝緝 여관. 그래서 밤에 가서 □…□.
무오일기 1798년(정조22) > 8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20_0080
8월 22일(계축) 볕이 남.
29일에 경릉敬陵에 거둥하신다는 령이 어제 내려졌다. 오늘 서총대에서 시사試射와 시방試放을 거행하므로 군병이 춘당대에 대령했는데, 내시사를 보는 1번 내금위도 함께 대령하였다. 영중英仲이 액외額外로서 시사에 응했는데 단지 1발만 명중했다고 한다. 경상도 한량인 액외 박기석朴基碩이 철전 130보로 직부전시되었다. 추도기秋到記 전강殿講도 함께 거행했는데, 1등한 진사 안이정安以鼎이 직부전시되었다. 저동苧洞에 가서 판서 권엄權𧟓 대감께 문후를 여쭙고 돌아왔다. 영중은 오늘 내시사 때문에 밤에 순라를 돌러 가지 않았다.
무오일기 1798년(정조22) > 9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20_0090
9월 초8일(무진) 볕이 남.
파루 뒤에 이현梨峴의 □□병문屛門으로 나아갔다. 진시(오전 7~9시)에 대가가 출궁하였다. 금군이 군대의 행렬하는 예에 따라 오마작대五馬作隊註 002를 구성했는데, 2번 겸사복, 1번 우림위, 2번 우림위가 대가를 따랐다. 대가가 훈련원에 납시어 권무군관勸武軍官에 대한 시사試射를 거행하여, 철전鐵箭 120보, 유엽전 3발을 명중하여 4푼[分]을 받은 3인이 직부되었는데, 전임 남항 선전관 이만식李晩植, 한량 변卞□…□ 직부되었다고 한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훈련원에서 정청庭請을 했는데, 강화도 죄인이 □에 들어와 이곳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미시(오후 1~3시)에 환궁했는데, 환궁 뒤에 군병은 마치고 돌아왔다.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파직되었으므로 백의白衣로 대가를 따랐다가 궐 밖으로 나갔다.
무오일기 1798년(정조22) > 12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20_0120
12월 16일(을사) 흐리고 바람이 없음.
이날 □…□ 황기정黃基定과 교대하였다. 어제 춘당대에 전좌하시어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과 강서 시험을 치렀다. □…□ 서춘보徐春輔는 철전 150보를 쏘아 직부전시가 되고, 이어서 □…□ 나의 스승이다. 서춘보의 무과는 남공철南公轍의 문과 □…□ 곧 별군직에 제수되었다. 서춘보는 재상 서지수徐志修의 손자인데 □…□. 또 하교하시기를, “훈융訓戎 첨사 박종주朴宗柱는 박유朴諭 □…□ 정사에서 내직으로 옮겨 별군직에 제수하라.”고 하였다. 포폄문서를 보니, 병조에서 나에 대해서 평가하여 말하기를, ‘□…□ 잘 응하였다.’라고 하므로 ‘중中’을 받았다. □…□註 001 낙점했는데, 그 □□ 포폄 문서에 이르기를, ‘혹 정사를 살피지 않아서 □…□.’라고 하여 □…□. □…□로 내리셨다.
기미일기 1799년(정조23)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40_0040
4월 초7일(을해) 볕이 남.
오전 5시 15분에 옥교玉轎로 영청문永淸門, 명정문明政門, 홍화문弘化門, 유첨문逌瞻門, 일첨문日瞻門을 거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셨다. 입직 금군이 시위에 참여하므로 내가 거느리고 반열에 참석하였다. 옥교가 경모궁에서 되돌아와서 영청문으로 들어가시니 금군이 표신을 가지고 기다렸다가 도로 입직하였다. 오늘 초계문신시사抄啓文臣試射 및 1번 내금위와 서북별부료무사西北別付料武士의 시사試射를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므로, 병조 판서, 금군 별장, 1번 내금위장이 액내 금군과 액외 금군을 거느리고 대령하였다. 어제 조보를 보니 외임外任에서 자급이 오른 사람들은 모두 유임되었다. 오늘 내시사內試射에서 한량 금군 정시鄭蒔가 철전鐵箭 120보를 모두 통과하여 직부전시되었다. 서울 사람 한량 금군 윤범흥尹範興도 철전을 모두 통과하여 직부전시되었다. 유엽전柳葉箭 3발을 맞추어 4푼[分]을 받은 자는 4명인데 우리 집 아우 영중英仲은 오색소포五色小布로 비교하여 1등을 해서 상으로 활과 화살을 받았다고 한다. 별부료 5인은 철전 150보를 모두 통과하여 직부전시되었다고 한다. 이날 밤 군호는 ‘전모展慕’ 두 자로 내리셨다.
기미일기 1799년(정조23) > 6월 작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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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계묘) 볕이 나고 아주 뜨거움.
병조 판서 이재학李在學 주장主將이 이날 금군 별취재禁軍別取才, 선천·부천 납마 취재[宣副薦納馬取才] 및 복직 취재復職取才, 육도 한산 취재六道閑散取才를 훈련원에서 행하였다. 별장別將 이하 각 번장이 대령하였다. 금군 별취재 때에 영중英仲이 유엽전 3발을 맞추어 4푼을 받았고, 철전 3발을 쏘아 1푼을 받았으나 기추騎芻에서 불통을 맞았다. 강경환姜景煥이 유엽전 2발을 맞추고, 편전 1발을 맞추고, 철전 3발을 쏘고, 기추 1발을 맞추어 1등을 하였다. 안경국安敬國은 유엽전 1발을 맞추고, 편전 1발을 맞추고, 철전 3발을 쏘고, 기추 2발을 맞추어 2등을 차지하였다. 박경덕朴慶悳은 유엽전 2발을 맞추고, 철전 3발을 쏘고, 기추 1발을 맞추어 말단 등수를 차지하였다. 영중이 3발을 맞추어 4푼을 받고서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개탄스럽지만 어찌하겠는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바로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운춘李運春 령令이 찾아왔다. 한량 박천응朴天應이 남항천南行薦 취재에 들었으니 기분이 좋다.
기미일기 1799년(정조23) > 8월 작은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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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4일(경인) 볕이 나고 구름이 끼기도 하다가 한낮에 소나기가 내리고 나서 볕이 남.
이날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금군의 내시사內試射를 거행하였다. 초상 금군抄上禁軍 이제년李齊年이 기추騎芻에서 2발을 맞추고 중포中布에서 3발을 맞추어 직부直赴로 급제했는데, 이李 군君은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12대손이고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의 6세손이다. 영중英仲도 내시사를 보았는데, 육량六兩과 기추에서 입격하지 못하였다. 이제년이 풍악을 벌이면서 찾아왔으나, 나와 길이 서로 어긋나서 만나지 못하였다.
8월 28일(갑인) 볕이 남.
어제 춘당대春塘臺에 친림하시어 서총대瑞蔥臺의 활쏘기와 조총을 시험하고, 또 화성華城·용인龍仁·과천果川·안성安城 네 고을 한량의 회시會試를 시험하셨다. 급제한 사람은 모두 □십□□十□인이다. 초시初試는 이미 화성에 거둥하셨을 때 명관命官으로 시취試取하였다. 초시의 규정은 철전鐵箭은 100보, 유엽전柳葉箭은 1발 명중, 강講은 조粗 이상이었다.
기미일기 1799년(정조23) > 12월 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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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10일(임진) 볕이 남.
아침에 선달 안경국安敬國 □…□. 이날은 매우 추웠다. 춘당대에 전좌하시어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친히 시험을 거행하시고, 또 시험 □…□ 하셨다. 선달 조태현趙台鉉이 철전 130보를 모두 통과하니 하교하시기를, “조태현이 삭시사朔試射 때의 시사試射에서 140보를 넘으면 초기草記로 보고하라.”고 분부하셨다고 한다. 이날 영중英仲이 금위영 포폄에 가서 참석하였다. 나는 주동鑄洞에 가서 개천价川 수령 이빈李彬【성질聖質】과 이야기하였다. 필동筆洞에 도착하여 수군절도사 조대趙岱와 이야기하였다. 또 예동藝洞에 도착하여 무겸선전관 문경성文敬成【여집汝緝】과 이야기하고, 또 정재균鄭載均 석사碩士와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남자종 태순太順이 땔나무를 실어오기 위해 나갔다.
12월 14일(병신) 볕이 나고 추움.
이날 병조 판서가 훈련원에서 금군 별취재를 거행했는데, 영중英仲은 한 발도 명중하지 못하였다. 조태현趙台鉉이 편전 1발, 기추 2발, 철전 3발로 1등을 했다고 한다.
경신일기 1800년(정조24) > 3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60_0030
3월 29일(신사) 볕이 나고 서풍이 붊.
이날 예직例直註 005이므로 신영新營에 입직해서 장단長湍 수령 조의진趙義鎭과 교대하였다. 기사장騎士將註 006은 봉산鳳山 수령 박지홍朴志泓이 입직하고 파총把摠으로는 백익진白翼鎭이 입직하였다. 초관哨官은 이기수李基秀가, 교련관敎鍊官은 한필유韓弼瑜가 입직하였다. 이날 무과 1소所 시험장의 합격자 명단이 나와서 대궐에 나아갔다. 금번 무과의 회시 규정은 철전 130보, 유엽전 2푼[分]의 두 기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날 밤 군호는 ‘홍록紅綠’ 두 자로 내리셨다. 한낮에 사각射閣에 올라 활을 다섯 차례 쏘았다.
경신일기 1800년(정조24) > 4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60_0040
4월 초1일(계미) 볕이 남.
이날 새벽의 고찰考察은 기사장騎士將이 하였다. 임금께서 특별히 은혜로운 전교를 내리셨는데, 평안도 사람의 경우에는 곧 철전을 거뜬히 130보를 넘기고도 강講에서 떨어진 사람 및 2발 명중으로 입격한 다음에 강서에 응시해서 두 기예에 합격하고 나머지는 탈락한 사람을 별단別單으로 올려서 회시에 나아가게 하고 단자 문서를 빈청으로 들여서 사실을 조사하게 한 것이다. 한낮에 선전관 제경욱諸景彧이 직소에 와서 이야기하였다. 잠시 있다가 영장營將 장동원張東源 령令이 직소에 도착했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이곳에서 2소所 시험장의 무과 초시의 합격자 명단을 내기 때문에 시관試官과 상의해서 본인 아들의 합격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진실로 개탄스럽다. 잠시 뒤에 그는 다시 나갔다. 이날 밤 군호는 ‘□□’ 두 자가 내리셨다.
4월 초3일(을유) 볕이 나고 서풍이 붊.
몸에 땀을 냈는데도 병이 낫지 않는다. 이날 춘당대春塘臺에서 문과·무과 정시庭試의 회시가 있었다. 또 훈련원에 임금의 빈자리를 설치하고 명관命官이 시험을 열어서 전시 및 회시를 치렀다. 유엽전은 장전帳殿에 들어와서 치렀고, 전시는 전원이 강講으로 시험을 치렀다. 철전은 훈련원에서 시험이 있었으며 평안도 별단別單의 초시 합격자 역시 훈련원에서 뽑았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 씨가 명관이 되었다. 문과는 어제 궐내로 시험지를 들였으며, 어젯밤 3경(오후 11시~오전 1시)에 궐문이 열리자 유생이 들어갔다. 위소圍所는 다섯 곳을 만들어 포장布帳을 설치하였다. 시험지를 합쳐서 뒤섞은 다음에 다섯 묶음으로 나누고, 위문圍門의 포장에 나아가 이내 호명하고 시험지를 나눠준 다음에 응시자들을 포위布圍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동접同接註 001이라는 사람들도 각각 다섯 위소圍所로 흩어졌다. 글을 잘하지 못하면서 초시에 응시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백지로 답안지를 제출했는데 그 수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들으니 박충현朴忠顯, 류수철柳洙喆이 무과에 급제했는데, 박朴 군은 고故 현감 박정명朴鼎明의 아들이고, 류柳 군은 전임 현감 류하철柳河喆의 동생이다. 훈련원에서 시행한 회시의 합격자 명단이 나왔으므로 궐에 나아갔다. 선산善山 몽대夢臺의 김성빈金聖彬이 무과에 급제했는데 중인中人이다.
경신일기 1800년(정조24) > 6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060_0070
6월 13일(갑자) 볕이 남.
이날 병조 판서 김재찬金載瓚 대감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선천 금군 별취재宣薦禁軍別取才를 거행하였다. 영중英仲이 유엽전 2발을 맞추고 철전 3발을 넘겨서 명단에 들지 못하였다. 우등인은 유엽전 2발을 맞추고 편전 1발을 맞추고 철전 3발을 넘겨 모두 6발이고 강서 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신유일기 1801년(순조1) > 3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110_0030
3월 14일(경인) 개고 볕이 남.
아침의 미풍이 늦게야 일었으며 이어서 서풍이 부니, 한량 무리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와서 모였다. 동이 트고 나서 사대射臺에 나가 좌기座起하여 시험장을 열고 78인을 시사試射하였다. 한낮이 되어 목전木箭의 시험을 마쳤는데, 청장靑帳을 넘긴 사람은 36인 뿐이었다. 또다시 철전鐵箭의 시사를 열었는데, 응시한 사람이 47인이었다. 철전의 시사를 마치지 못하고, 저물녘에 자리를 마쳤다.
3월 15일(신묘) 볕이 남.
미명未明에 해미海美와 공주公州의 두 진장鎭將과 함께 객사의 전패殿牌 앞에 나아가 망곡례를 거행하고 또 망하례를 거행하였다. 이어서 동이 틀 때에 사대射臺에 나가 좌기座起하여 어제 마치지 못한 철전鐵箭을 시사試射하였다. 동이 트고 나서 편전片箭을 했으며, 또 조총鳥銃을 시방試放하였다. 철전은 스스로 시험을 보지 않은 사람이 2인이었고, 편전은 합격자가 하나도 없었으며, 조총에서 과녁을 명중시킨 사람은 4인 뿐이었다. 한낮 무렵에 시사를 마치자 서풍이 크게 일어나서 사람들이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매우 걱정스러웠다. 이어서 점수를 계산하여 합격자 명단을 내었다. 1등은 1인이었는데, 한량 유백원兪百源으로 홍주洪州 사람이다. 2등은 3인이었는데, 통덕랑 유도원兪道源은 또한 홍주 사람이고, 부사용 안순安栒은 면천沔川 사람이며, 한량 유익원兪益源은 대흥大興 사람이다. 3등은 9인이었는데, 한량 조응화趙應和는 임천林川 사람, 한량 송득정宋得鼎는 회덕懷德 사람, 한량 홍경묵洪敬默은 면천 사람, 한량 김전옥金銓玉은 예산禮山 사람, 한량 조운제趙雲悌는 임천 사람, 한량 조운서趙雲瑞는 임천 사람, 통덕랑 성도순成道錞은 예산 사람, 통덕랑 남명원南命元은 해미 사람, 한량 민정석閔鼎錫은 부여扶餘 사람이다. 1등은 84푼[分] 12보步였고, 꼴등은 58푼 10보였다. 저물녘에 자리를 마치고 하처下處에 돌아왔다. 홍주의 수관리守官吏가 사통私通을 보내 “의금부에서 신문하고 조사하여 계문啓聞하는 일 때문에 부府의 서리書吏가 당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부에 도착했는데, 홍주 목사가 보령保寧의 수군 조련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급히 통지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일의 실상을 모르니 정말 답답하다. 들으니, 익엽翼燁이 수영水營에 갔다고 한다.
임술일기 1802년(순조2) > 2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150_0020
2월 초2일(계묘) 볕이 남.
이날 아들 익엽翼燁이 정시庭試를 보러 출발하였다. 무리를 지어서 걸어가니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정시 초시는 이달 18일, 회시는 같은 달 28일이다. 무과 규정은 철전 1백 20보, 유엽전 3푼[分], 강서講書는 조粗 이상에서 2가지 기예로 뽑는다. 초시의 정원은 문과와 무과 각각 5백인이라 한다. 이번 도목정사에서 이회식李晦植이 창성昌城 부사가 되고, 조의진趙義鎭이 파주坡州 목사가 되었다. 김성화金聖和는 거창居昌 수령에서 길주吉州 목사로 옮겨 제수되었으니, 세상의 형세가 그런 것이다.
무진일기 1808년(순조8)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190_0040
4월 22일(무자) 볕이 남.
이날 병조 판서가 령令을 내어 별소영에서 당하 무신에게 『병학지남』 진법의 강을 친히 받았다. 병조 판서가 친히 강을 받았다는 말은 지금 비로소 처음 들었다. 그러니 일이 매우 번거롭다. 근래 무신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지 않는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다. 남쪽과 북쪽의 산에 있는 사정射亭에서는 보사步射註 001하는 사람이 없다. 한량은 유엽전과 편전만을 익힐 뿐이라고 한다. 과거 시험이 엄정하지 않은 것과 기강이 해이함은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더욱 심하였다. 조보를 보니, 함경도 관찰사 조윤대曺允大가 입시하였을 때 연석에서 아뢰기를, “성묘하러 길에 나서서 원주原州에 당도하였는데, 판관 김상임金相任이 길에서 피하기는 고사하고 말을 달려 앞으로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상하 관원의 체통은 본래 다른 도의 관원이라도 구별이 없으니 파직하여 내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아뢴 대로 하라.”고 했으니, 이것 역시 당론에 치우친 것과 관계가 있다. 김상임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예이므로 노론의 하관下官이 소론의 상관上官을 무시한 것이니, 우습고 한탄스럽다.
註 001
보사步射:평지에서 활을 쏘는 것이다. 목전木箭·철전鐵箭은 멀리 쏘는 능력을 시험 보고, 편전片箭은 정확도를 시험하였다.
무진일기 1808년(순조8) > 9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190_0100
9월 16일(기묘) 볕이 나고 하늘이 밝고 날씨가 청량함.
이날 주장이 남소영에 좌기하여 기사 추등도시騎士秋等都試를 행했는데 철전鐵箭은 1백50보로 모두 3발을 쏘아 넘기고, 기추騎芻는 2발을 맞추고, 편추鞭芻는 6발을 맞추는 것뿐이다. 1등은 절충장군 조광흘曺光屹이 했는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다고 한다. 어젯밤 초저녁부터 2경(오후 9~11시)까지 월식月食이 있었다. 이날 밤 군호는 ‘청랑淸朗’ 두 자로 내리셨다. 이날 한낮에 수문장 이사언李思彦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무진일기 1808년(순조8) > 10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190_0110
10월 14일(병오) 볕이 나고 바람이 없었으며, 간혹 종일 구름이 낌.
수문장 이사언李思彦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지난번에 올라온 선달 신택헌申宅憲을 통해 기엽箕燁과 종옥宗玉 숙질이 모두 상주尙州의 공도회公都會에서 합격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합격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 조보를 보니, 병조 판서가 또다시 금군 녹시사禁軍祿試射 때에 철전鐵箭에서 150보步를 거뜬히 넘긴 사람 가운데 한량은 직부直赴하게 하고 무과 출신은 가자加資하며 이미 가자를 받은 사람은 가선嘉善으로 올려주는 규정을 적용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하셨다. 이는 실로 긴요하지 않은 요청이니, 그 사이에 특별한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량 별천別薦 4인을 천거했는데, 서영보徐英輔의 둘째 아들 서□□徐□□과 오의상吳毅常의 아들 및 구선행具善行의 자손 구신희具信喜 □…□이다. 이날 밤 군호는 ‘사방射放’ 두 자로 내리셨다.
기사일기 1809년(순조9) > 4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210_0040
4월 20일(기유) 볕이 남.
미명에 궐 아래 나아가 대기했다가 문이 열리자 궐로 나아가 이극문貳極門 아래에 대령하였다. 인시(오전 3~5시)에 궁을 나와서 춘당대春塘臺에 전좌하시어 당상 무신은 대臺 위에서 시사試射하고 당하 무신은 병조 판서를 시켜서 단풍정丹楓亭으로 가서 시사하게 하였다. 당상 무신은 유엽전柳葉箭 8순巡, 편전片箭 1순이며, 기추騎芻는 편전으로 대신하여 1순 대신 10순으로 쏘게 하여 전례대로 거행하였다. 문관은 1순만 하였다. 당하 무신은 유엽전 4순, 편전 3순으로 거행하고 철전鐵箭과 기추는 모두 편전으로 대신 거행하였다. 당상 무신으로서 나이가 찬 사람은 전례대로 시사를 면제하였다. 정오에야 마쳤다. 환궁하실 때에 명정전明政殿을 거쳐 빈양문賓陽門으로 들어가셨으며, 시위는 함인정㴠仁亭 앞에 나아가 있었다. 마치고 나와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경오일기 하 1810년(순조10) > 7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1r_0010_0240_0010
7월 초4일(병진) 볕이 남.
선달 아이가 부장 최주덕崔柱悳, 선달 권의병權宜秉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의 별취재別取才 시험장에 갔다. 아침에 도사 이기준李麒峻이 와서 보았다. 오늘 거행된 취재에 대한 소식을 들으니, 선달 장우성張羽成이 유엽전에서 2발을 맞히고, 편전에서 관과 변에 맞히고, 철전 3발을 기준 거리를 넘겨서 쏘고, 기추에서 1발을 맞히고, 강은 조粗로 1등을 했다고 하니 기특하다. 선달 권필도權必度, 첨정 권민중權敏中이 들렀다. 이날 선천천취재宣薦薦取才도 겸행했다고 한다.
신미일기 1811년(순조 11) > 2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020_0020
2월 초2일(신사) 볕이 남.
능행 날짜는 이달 12일로 정해서 거행한다고 하교하셨다. 무과의 초시 규정은 철전鐵箭은 120보 이상, 유엽전柳葉箭은 2발 명중, 조총은 2발 명중인데, 이 3가지 기예 중에서 2가지 기예의 점수로 뽑는다. 선전관 이유경李有暻이 와서 보았다. 내가 올린 우림위장羽林衛將의 교체 소지에 대한 처분을 내려달라는 계사가 입계되었다고 하니 다행이다.
재계미일기 1823년(순조 23) > 2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140_0020
2월 초2일(임인) 볕이 나고 바람이 어지럽게 불었는데 오후에는 잦아진 듯함.
사면령을 반포하기 위한 차사원差使員 심익지沈翊之가 그의 아버지인 기장機張 수령의 임소에 머물다가 오늘 돌아가는 길에 들어와 만나서 정겹게 대화하고 갔는데, 그는 심흡沈▼{口+聽}의 아들이다.그를 통해서 부장部將 아이에게 편지를 부쳤다. 이날 새벽에 명완明琬의 갓난 아이가 살아나지 못했으니 애처롭고 불쌍하다. 하지만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들으니 가순궁嘉順宮의 장지葬地는 배봉산拜封山 안에 정했고, 장례 길일은 27일이라고 한다. 경과慶科註 001는 4월로 물려서 정했는데, 시험 규정은 철전鉄箭과 목전木箭은 100보 거리에 있는 표적을 쏘고, 유엽전柳葉箭은 3발을 명중시키고, 편전片箭은 2발을 명중시키는 것으로 정했는데, 4가지 기예 중에서 2가지 기예의 점수로 뽑는다고 한다.
재계미일기 1823년(순조 23)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140_0040
4월 11일(경술) 볕이 나고 서풍이 붊.
선달 조카가 오후에 고하고 돌아갔고, 김달모金達模가 와서 보았다. 서울 소식을 들으니 중궁전에게 태기가 있는데 산달이 9월이다. 세자빈궁에게도 태기가 있는데, 산달이 7월이라고 한다. 세자궁도 세자빈궁과 동갑인데 금년에 15세라고 한다. 이운익李雲翼이 와서 보았고, 홍만휴洪萬休도 와서 보았다. 무과 복시의 규정은 철전 130보, 유엽전 3발 4푼[分], 목전 240보의 세 가지 기예 중에서 세 가지 모두 시험하여 뽑는다고 하므로, 초시에 합격한 무사들이 모두 낙담했다고 한다. 영의정에는 남공철南公轍이 다시 임명되었다고 한다.
재계미일기 1823년(순조 23) > 6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140_0060
6월 11일(무신) 볕이 남.
이날 서울 편지를 보았다. 지난달 18일에 보낸 편지였는데, 평안하다는 소식이었다. 태묘에 부묘한 것을 경축하는 정시庭試를 치를 날짜를 정했는데, 8월 29일은 무과 초시이고, 9월 17일은 문과와 무과의 회시이다. 문과는 초시를 생략하고 당일에 합격자 발표를 한다고 한다. 무과의 시험 규정은 목전木箭의 경우에 3발 모두 넘겨야 하고, 철전鐵箭은 3발 중에 2발을 넘겨야 하며, 유엽전은 3발을 맞혀야 하고, 기추騎芻는 3발을 맞혀야 하고, 조총은 한 발을 맞혀야 한다. 이 다섯 가지 기예 중에서 세 가지 기예를 선택하여 600명을 선발한다고 한다. 이전의 과거에서는 300명을 선발한다고 하고서도 겨우 100여 명만 선발했는데, 하물며 600명이 가능하겠는가. 또 들으니 선혜청의 영남사고嶺南私庫 50여 칸이 불에 탔다고 하니 괴이하다. 틀림없이 농간이 있었을 것이다. 또 들으니 4도의 포폄 계본이 이달에 모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목정사는 틀림없이 7월로 미뤄질 것이라고 한다.
재을유일기 1825년(순조25) > 4월 작은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180_0040
4월 22일(기사) 볕이 남.
이날 서산와西山窩와 체악당棣樂堂의 벽에 도배하는 일을 마쳤다. 목수 김삼봉金三奉이 와서 알현하고 안사랑의 서쪽 주춧돌을 바꾸었다. 한낮에 남원석南元石이 서울에서 와서 알현하였다. 그가 가져온 주부 아이의 편지를 보니 평안하다는 소식이며, 명호明琥는 유엽전柳葉箭에서 관貫과 변邊을 맞히고 철전鐵箭에서 3발 모두 기준 거리를 넘겼으며 강講에서 조粗를 받았는데, 이상 세 가지 기예에서 입격해서 초시初試에 합격했다고 한다. 명숙明琡이 백련동白蓮洞에서 돌아와 얼굴을 보았다.
재을유일기 1825년(순조25) > 10월 큰달
http://db.history.go.kr/id/sa_092r_0010_0180_0100
10월 초9일(임술) 볕이 남.
김영환金永煥 사돈이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남원탁南遠托이 와서 알현하였다. 그는 현재 승호포수升戶砲手註 001로서 훈련도감군인데 말미를 받아서 철전鐵箭과 목전木箭을 잘 쏘는 용인龍仁 사람을 데리고 내려와서 대구大丘의 도시都試인 초상초시抄上初試에 참여했다고 한다. 선조先朝께서 윤음을 내려 영남의 지체地體 있는 집안의 한량閑良에게 무예를 권장하였다. 하지만 3년도 못 되어 지체 있는 집안의 무사들은 시험에 참여하지 않고 청탁의 길이 크게 열리는 바람에 군병 같은 하류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합격을 도모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히 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