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利安面 良凡里)는 본래 함창군 상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주군 이안면에 편입되었다.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그 지형이 뱀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양배미기’라 불리다가 변하여 ‘양범리’가 되었다. 이 마을이 바로 배모기 교우촌 터이다.
이곳 배모기에는 1785년 명례방 신앙집회 중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에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당해 낙향한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가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배모기 부근에는 사실(상주 대현리) · 은재(문경 저음리) · 한실 잣골(문경 상내리) · 감바우(상주 아천리) 등의 옛 교우촌이 있었다.
상주 지방은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도 감영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또한 소백산맥 동편에 위치하고 낙동강이 이 지방의 동남쪽으로 흐르며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많은 인재가 배출된 인물의 고장이기도 하다.
천주교가 상주 지방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마도 18세기 실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남인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듯하다. 실제로 1784년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전교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그 이듬해인 1785년 3월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金範禹, ?-1786/7년)의 집에서 신앙집회가 있을 때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연루되어 문중에서 파적을 당한 서광수의 가족들이 상주 지방 이안면의 배모기로 은거해 옴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서광수의 자녀 중 3남인 서유오(徐有五, 1760-1807년) 가정과 4남인 서유도(徐有道, 1772-1837년) 가정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그들의 후손 중에서 순교자가 여럿 나왔다.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은 대구 지방의 명문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집안으로 초기 경상도 지방의 복음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후인 1798년 황사영 알렉시오(黃嗣永, 1775-1801)가 상주의 이복운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무렵부터 복음전파의 노력이 이 지방에서 활발했던 것 같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광수의 4남인 서유도 가정은 문경 한실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서유도 가정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된 것으로 생각되는 경주 이씨 이응동의 선대 가정이 이 지방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하였고, 순교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金允德, ?-1815년) 가정은 은재에서 살다가 청송 노래산으로 피난을 갔다.
신유박해 때 충청도 사람인 김만업이 상주로 귀양을 왔다. 그 후 이안면의 배모기 뿐 아니라 인근의 사실 · 은재 · 멍에목 · 앵무당 · 삼막터 · 오두재 · 보문 · 서산 화형 터와 그 부근의 마을인 율리(밤밭) 등 여러 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특히 상주 시내에는 목사(牧使)의 아문(衙門)이 있었기 때문에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 관아에서 영장에게 문초를 받다가 사망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靑里面 三槐里)와 그 부근의 내서면과 공성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청리면 덕산리(德山里)의 서산 중턱에는 신자들을 처형한 ‘화형바위’도 있다.
이곳의 석단산(石壇山)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 고백비(信仰 告白碑)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에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삼괴 2리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 김씨 집안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 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5년)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참혹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86년 프랑스와의 한불수호통상조약(韓佛修好通商條約)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김삼록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직접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의 화강암에 전통적인 직사각형의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돌로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얹어 신앙 고백비를 건립한 것이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상단의 십자형 안에 천주(天主)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비석 부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신앙 고백비의 비문(碑文)과 해제(解題)는 다음과 같다.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 천주 성교회 성호 십자가 (十字嘉는 十字架의 오자)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神夫는 神父의 오자)
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敎于는 敎友의 오자)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제작
癸卯生本(古)盆城(今 · 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 金氏이다.
비록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서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이렇듯 담대하게 고백했다는 점에서 신앙 고백비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신앙 고백비가 교회 사적(史蹟)으로 공식적으로 고증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었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敎難)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안동교구와 남성동 성당을 중심으로 교회 사적지 개발을 위해 신앙 고백비 주변 부지 매입이 시작되었고, 1999년 당시 옥산 성당 신기룡 신부와 회장단 그리고 청리 공소회장의 봉헌으로 성역화를 추진하여 대형 십자가와 제대, 십자가의 길 14처, 2000년 대희년 상징 조형물 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상주 신앙 고백비는 2009년 12월 22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2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