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규원 시인편 . Ⅲ>
부처
오규원
남산의 한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뉘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者
오규원
성경에 가라시대 마음이 가난한 者에게 福이 있다 하였으니
2백억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9억 원을 축재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 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1백9십9억 원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8억을 축재한 사람 또한 그민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적은 20억 원이니 30억 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돈 이야기로 詩라고 써놓고 있는 나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巡禮 .8
오규원
멸망하지 않는 그대의 꿈일지라도
멸망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저기, 멸망이라는 말을 모르는 바다.
멸망이라는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바다의 슬픔을
해변의 때찔레꽃이 오늘도
울며 대신 떨어진다.
매일
그 뜻을 전하려 바다로 가는 소리.
그대, 돌아오지 마라
누구도 바다에 닿지는 못하지만
바다에 가면
누구나 옷벗은 사람끼리 만나리라.
사랑의 技巧 .1
오규원
K에게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나는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게 당신을 사랑해 하며
아양을 떨고,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버스가 다니는 길과 버스 속의 구린내와
길이 오른쪽으로 굽을 때 너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훔치는 한 사내의 不道德부도덕에게
사랑의 法법을 묻는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취하는 法을 소주에게 묻는다.
어리석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취해야만 法에 통한다는 사실과
취하는 法이 기교라는 사실과
技巧가 法이라는 사실을 나는
미안하게도 술집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취해서 깨닫는다.
내가 사는 法과 내가 사랑하는 法을
낡아빠진 술상에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깨닫는다.
젓가락이 둘이라서
장단이 맞지만,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法은 하나뿐이라 두드려도,
두드려도 장단은 엉망이다.
江 건너 마을에는 後庭花후정화 노랫가락이
높고
밤에도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좌석 밑의 구린내와 지린내를 사랑하고
商女상녀는 망국한을 몰라
노랫소리가 갈수록 유창해진다.
나는 이곳의 技巧派기교파로 울면서, 이 울음으로
몇 푼의 동냥이라도 얻어
너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하여
여기 이렇게 울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길목
오규원
오늘 이 길에 와 있네 이 길에는
늙은 배추장수와 덤핑 책을 파는 삼십대
사내 하나가 나와 함께 있네 우리는 모두
길의 허리를 풀고 있네 그들도 나도
저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 살아 있는 새들이
잘 마른 햇볕에 새끼의 먹이를 데우는 일순처럼
땡볕 속에 서 있네
길 하나를 묶고 있는 것은 배추를 묶고 있는
몇 가닥의 새끼줄과는 달라서 늙은 배추장수도
이마에 땀을 흘리고 매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덤핑 책장수는 길 뒤에 있는
복덕방만 힐끗거리네
이 길의 매듭이 건널목이 어디에 있는지
나도 물론 모르네 내가 아는 것은
배춧단이나 덤핑 책을 열려놓은 비닐 밑에서
숨어서 흐르는 물이 숨쉴 때 내는 소리 하나이네
그 소리가 내 어깨를 받치고 있지만 그 소리는
나보다 먼저 중심을 바꾸고 싶은
이 길의 나무들 잔가지가 가로채는지 자주 끊기네
지금 내가 아는 바는 저 배추장수가 벌여놓은 것은
겹겹이 둘러싼 잎이며 잎을 차례로 벗기면 그곳에
배추가 없다는 사실이네 배추의 잎들이 시드는
지상의 길 하나만 보인다는 사실이네 덤핑 책장수가
자주 보는 복덕방도 들어가는 문이 반대쪽에 있어
복덕방 안은 알 길이 없네
사실 같은 또는 그림 같은 사실의 오늘 이 길에는
배추장수와 덤핑 책장수와 내가 아주 잘 어울리네
시간은 이곳의 배추잎 같겠지만 배추잎이
없으면 시간도 보이지 않으리라
하루가 목마른 사람들은 이 시든 배추와 책장수도
믿지 않는 덤핑 책을 사려고 수고롭게 여기까지 오네
좌우의 가로수 사이로 아래 위의 집 사이로
교회와 판잣집 풀과 꽃 달과 별 사이로 오네
그러나 저 배추장수와 덤핑 책장수와
내가 가야 하는 저 건너쪽은 집만 보이고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네
꿈은 모두 집이 좋아 방에 엎드려 있는지 집 밖으로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네
오늘따라 물통에 받아놓은 물조차 자주 엎지르는
배추장수와 모양을 바꾸다가 다친 나무들의
어깨 위에 숨은 별이 너무 반짝이는지 눈을 깔고
팔아야 할 책 보다 길 따라 마르다가 다시 젖는
그늘을 보는 삼십대 사내와 함께 서서
나는 길 건너쪽에서 건너오는 강의 마른 물냄새와
이 길 위의 작은 돌들을 사내들 몰래 돌아눕히네
아스팔트
오규원
잘 다져진 아스팔트 길, 그 위로
아이들이 삼삼오오 유치원을 갑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국민학교를 갑니다
중학교를 갑니다 고등학교를 갑니다
대학교를 갑니다
하자가 생기면 보수를 서두르는 길
안전 수칙이 정해진 길
아이들이 그 길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일 다시 갈 그 길로 돌아옵니다
어른들이 자동차를 타고 돌아옵니다
사람들을 따라 지상의 시간도 돌아옵니다
궁륭 밑 그 길
길 밖의 나무가 망설이며
잎을 떨어드리다 멈추는 그 길
강 건너
오규원
벚고개에는
산오리나무
갈림길에는
표지판 위의 문호와
서후
그리고 대지에는
애기똥풀과
조팝나무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오규원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보다
더 많다 더러는 건물의 마빡이나 심장
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소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
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놓은 자리에
않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
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
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
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
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젖지 않는 구두
오규원
한 사내가 번뜩이며 급히
내 앞을 가로질러 간다 한 여자가
어깨를 무너뜨리며 급히 비껴 선다 지랄하네
이쑤시개를 물고 혹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함께 몰려오던 일단의 사내들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길을 간다
이마 위로 호텔의 만국기가 주르륵 밀리고
남산의 허리가 시꺼멓게 구멍이 뚫린다
그래도 남산은 무너지지 않는다 나도
길을 하나 만든다 길은 사람을 다치기 싫어
자꾸 구불거린다 내가 만든 길 옆의 서울
음파사는 사랑하는 옥경이를 찾아 고함을
지른다 옥경이가 아닌 여자들이 이빨을
반짝거리며 사랑의 매듭을 훑는다 그런데
말이야 아 그 개 같은 자식이 날 우습게
생각하나 봐 너 그 남자와 끝났다고
했잖아 나 참 그치 가 정치가라고
우리나라에도 정치가가 있어? 웃기지 마
웃기지 마 플라타너스가 잎을 하나 떨어뜨린다
빗방울이 바겐세일처럼 사방의 몸을 치며 떨어진다
비를 피해 급히 달리는
사람들은 발이 젖지 않는 구두를 신었다
비가와도 젖는 자는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빈 자리가 필요하다
오규원
빈 자리가 필요하다
빈 자리도 빈 자리가 드나들
빈 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 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 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 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 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길 밖의 물
오규원
나는 지금 샛강에 서 있다
샛강은 길 밖의 물이요 물 밖의
길이라 이곳에서는 나도
길 밖의 물이요 물 밖의 길이다
그 물 속
그 길 위에
엉겅퀴와 개쑷갓 사이에 숨고 싶은 물과
엉겅퀴와 개쑷갓 사이에 숨겨지는
다 타지 못한 이제는 시대의
낡은 사랑 같은 연탄의 불기와
버려져 뒹구는 구두 속에 함께 흙에 묻히는
하늘의 밑창과
썩지 못한 콘돔처럼 방기된 새와
방기된 새처럼 날고 있는 물 냄새의
샛강과 그리고 나는
여의도를 바라보다 물꼬를 놓쳐버린
물처럼 서서
그래도 물소리에 등을 밀리며
오늘의 메뉴
오규원
오늘은 안쪽에 놓인 식탁에서 식사를
하리라 그늘이 따뜻한 곳에서 식사를
하리라 그늘이 따뜻하지 않으면 내가 몸으로
그늘을 데우며 천천히 그리고 넉넉하게
그늘과 함께 식사를 하리라 광화문이나
남대문시장이나 난장 또는 신길동의 지천에
깔려 기고 있는 공약의 세월과 그늘이여
창가의 식탁은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도록 두고 보거나 가는 방향이 모두
길인 땅을 아는 사람들이 앉도록 두고
공약의 식탁과 벽과 벽 사이 그늘이
깊은 곳을 찾아 찾아올 날들의 식사를 하리라
인적이 끊어진 길을 더듬으며 가보다가
앞이 보이지 않으면 길가의 풀밭에 편히
앉으리라 날이 저물면 다시 나와 해가
뜰 때를 기다리리라 그러나 너무 늦게까지
기다리는 일은 없으리 해가 너무 늦게 뜰 때면
안쪽에서 내가 흑점이 되어 일어나리라
짐승의 시간
오규원
아직도 죽음의 마르지 않는 바람이나
물의 기억은 마른 몸 어디에서
기어이 흐르고 있으리라
나는 낡은 갈대밭을 껴안고 유리창에 내걸며
짐승처럼
순례의 서
오규원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언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후박나무 아래 .1
오규원
잎 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은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날고
후박나무 아래 . 2
오규원
어미 개가 자기 집으로 물어 나른 새끼들
어미 젖통을 머리로 쥐어박으며
젖꼭지를 물어당기다 똥을 싸고 있다
새끼의 항문에 매달려 있는 똥
새끼의 항문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똥
어미 개가 혓바닥으로 핥아내고 있다
쓰윽 쓰윽-
항문 근처가 말갛도록
싸락눈이 내리다 잠깐 멈춘 오후
후박나무 아래 . 3
오규원
어미 개가 배 밑에서 죽은 새끼 하나
입으로 물어내고 있다
어미 개가 졸다가 깔아뭉갠
숨이 막혀 죽은 새끼 하나
어미 개가 입으로 질질 끌어내
뒷발로 문밖으로 차 던진다
배 밑이 차갑다고
뻗은 딱지가 딱딱하다고
우리 시대의 순수 시
오규원
1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광화문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문화사적으로 본다면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저것은 보수주의의 징그러운 미소인데
안녕한 벽, 안녕한 뜰, 안녕한 문짝
그것 말고도 안녕한 창문, 안녕한 창문 사이로 언뜻 보여주고 가는 안녕한 성희
어째서 이토록 다들 안녕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냐
2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세상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16세기나 17세기 또는 그런 세기에 내가 살았다면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을 것인가
청진동(淸進洞)도, 그래 밤사이 안녕하구나
안녕한 건 안녕하지만 아무래도 이 안녕은 냄새가 이상하고
나는 나의 옷이 무겁다 나는
나의 옷에 묻은 먼지까지 무게를 느낀다
점잖게 말하는 점잖은 사람의
입 속의 냄새와
아침마다 하는 양치질의 무게와 양치질한
치약의 양의 무게까지 무게를 느낀다
이 무게는 안녕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 무게는 안녕이 독점한 시간의 무게
미래가 이 지상에 있었다면 미래 또한
어느 친구가 독점했을 것을
이 무게는 미래가 이 지상에 없음을 말하는 무게
그러니까 이건 괜찮은 일--
어차피 이곳에 없으니 내가 또는
당신이 미래인들 모두 모순이 아니다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보수주의란
현상을 그대로 보전하여 지키려는 주의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아침의 무덤이 무슨 말 속에 누워
있는지
말이 되든 안 되든 노래가 되든
안 되든 중요한 것은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는
말의 옷을 벗기는 일
벗긴 옷까지 다시 벗기는 일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를
패배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 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
3
어둠 속에 오래 사니 어둠이 어둠으로 어둠을 밝히네. 바보, 그게 아침인줄 모르고. 바보, 그게 저녁인줄 모르고
진리는 진리에게 보내고
믿음은 믿음에게 안녕은
안녕에게 보내고 내가 여기 서 있다
약속이라든지 또는 기다림이라든지 하는 그런 이름으로
여기 이곳의 주민인 우편함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비어서 안이 가득하다
보내준다고 약속한 사람의 약속은
오랫동안, 단지 오랫동안 기다림의 이름으로 그곳에 가득하고
보내고 안 보내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남은 것은 우편함 또는 기다림과 나의 기다림
또는 기다리지 않음의 자유
거리에는 바람이 바람을 떠나 불고
자세히 보면 나를 떠난 나도 그곳에 서 있다
유럽의 순수시란 생각컨대 말라르메나
발레리라기보다 프랑스의 행복 수..
말라르메는 말라르메에게 보내고 나는 청진동에 서서
발레리는 발레리에게 보내고
나는 청진동에 서서
우리나라에게 순수시, 순수시 하고
환장하는 이 시대의 한 거리에 내가 서서
4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오는 도중에 오기를 포기한 비도
비의 이름으로 함께 온다.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청진동도, 청진동의 해장국집도 안녕하고
서울도 안녕하다.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그리워했던 안녕과 영원히 안녕을 그리워할 안녕과, 그리고 다시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다시 그리워할 안녕이 가득찬 거리는 안녕 때문에 붐빈다. 그렇지, 나도 인사를 해야지, 안녕이여, 안녕 보수주의여 현상유지주의여, 밤사이 안녕, 안녕.
여관에서 자고 해장국집 의자에 기대앉아
이제 막 아침을 끝낸
이 노골적으로 안녕한 안녕의 무게가
비가 오니 비를 떠나 모두 저희들끼리 젖는데
나와 함께 아니 젖고
안녕의 무게와 함께 젖는구나.
그래 인사를 하자, 안녕이여
안녕, 빌어먹을 보수주의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