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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4장
의인은 없나니 죄 아래에 있다, 믿음으로 이루는 칭의,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스도의 의
1~8절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이방인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의 참된 유대인, 참된 할례자로 만든다고 주장한 뒤 민족적인 유대인이 되고 육체적으로 할례 받는 것에 어떤 '나음'이나 '유익'이 있는가라는 논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1절). 우리는 바울이 유대인의 이점 또는 '유익'은 없다고 대답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했다는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씀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2절).
유대인들은 '믿지 아니 했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신실하시며 따라서 자신의 언약의 약속들 특히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모든 유대인이 다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9~11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더 자세히 논합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 되고 죄인이므로 하나님은 심판에 공정함이 있어서 특히 (이 문맥에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의롭다 함'을 얻으십니다. 즉, 정당함을 인정받으십니다(3~4절).
바울은 자신의 논증에서 도출할 수 있는 잘못된 함의를 고려합니다.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할 수 있다면 바울을 반박하는 유대인들에 따르면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신다는 것은 불의한 처사일 것입니다. 죄인인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5절).
바울은 여기서의 반론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은 반론에 제기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하나님은 세상(이방인)도 심판하실 수 없을 것이고 어떤 악한 행위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6절).
실제로 바울을 반박하는 유대인 중에 일부는 바울이 '값싼 은혜'의 교리,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행한 뒤에 용서받을 때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교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견해를(비방으로 여겨) 단호히 거부하지만 6장에 이르러서야 이런 비판에 대해 보다 자세히 고찰합니다(7~8절).
9~20절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은 유대 민족에게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어떤 고유한 이점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헬라인은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 사회 전체를 가리킵니다(9절).
바울은 모든 인간의 인간의 죄악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울이 '의인은'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고 말할 때 이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구원을 얻을 만한 소원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외적으로 선에 부합되는 약간의 행동을 한다는 점을 바울이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에 이르기 전에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이 아니며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여전히 악에 물들어져 있습니다(10~12절).
'무덤'에 대한 언급은 마음의 부패나 죄의 치명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인간은 아침이나 거짓말을 통해 상대방을 속이며 '독사의 독'은 사람의 말의 해로운 효과를 가리킵니다. 악한 말은 단지 우발적인 것에 불과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의 입은 악으로 가득하므로 저주와 악독이 구원 이전의 삶을 특정짓기 때문입니다(13~14절).
여기서 율법은 로마서에서 전형적으로 그렇듯이 모세 율법을 가르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율법이 오직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면 왜 '모든 입'이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는가? 바울의 논리는, 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 백성인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의 양심을 통해 율법의 많은 부분을 배우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정죄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입니다(19절).
율법의 행위를 어떤 이들은 의식법, 즉 (할례, 음식법, 안식일 같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분리시키는 율법만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문맥은 그런 제안에 대한 어떤 암시도 주지 않으며 따라서 이 문구는 율법의 요구하는 모든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벽한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어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따라서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의롭다 하 심을' 얻는다는 것은 법적인 용어이며 아무도 자신의 선함을 통해 신적인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임을 가리킵니다(20절).
21~26절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된 구원 역사의 시대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이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났고 이는 이 의가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순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바울은 이 의가 시내 산 언약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의는 율법과는 별개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은 바로 이 구원의 길을 예언했습니다(21절).
이러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믿는 자'에게 가능합니다. 자신의 순종을 바탕으로 이 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2~23절).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과분한 은총)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신적인 재판장에게 유죄를 선고받지 않고 의롭다고 선고 받는다). '속량'이란 말은 구약의 촐애굽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출애굽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자기 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얻으신 더 큰 속량을 예고합니다(24절).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렸습니다' 즉, 해소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인을 용서함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화목'이란 말을 속죄(죄의 일소)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해소시키거나 가라앉혀 은총으로 바꾸어 놓는 것도 가리키므로 이 말을 죄의 일소에만 국한할 수는 없습니다. 죄 용서를 받으려면 그 전에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 가운데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푸시기 위해(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리신)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고 이 의로우심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기 때문에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전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신 하나님이 즉시 인간에게 완전한 형벌을 가하시지 않고 인간의 죄를 용납하실 수 있는가?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은 죄의 책임에 대한 완전한 보상이 이뤄지는 십자가, 즉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실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25절).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우심', 즉 자신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구원 역사 가운데서 '이 때에' 나타나셨다는 점을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우시며'(전적으로 거룩하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이 없어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충족되게 하시며) 또한 '의롭다' 하시는 분(칭의의 수단을 제공하시고 사람들을 자신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선언하시는 분)이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구주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기 때문입니다(26절).
27~31절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구윈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성취되므로 모든 인간적인 '자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법'이란 말은, 비록 어떤 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원리를 뜻할 것입니다. 만일 의가 행위를 통해 왔다면 인간들은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해 자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27절).
'있지 않고',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율법의 행위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의 주님이므로 칭의의 길은 오직 하나,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길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28~30절).
'파기하느냐....굳게 세우느니라', 이신칭의는 율법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웁니다. 즉, 율법 그 자체가 율법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완벽한 율법 성취와 십자가에서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을 믿는 모든 자를 대신하여 이 의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말하면서 또한 율법의 지속적인 도덕적 기준을 인정하며 그에 따라 반율법주의에 대한 비난을 예상하고 이에 대해 6장과 7장에서 더 자세히 답변합니다(31절).
아브라함은 여기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관점에 대한 선례가 되는 사례로 고찰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 민족의 시조였고 따라서 아브라함의 예는 바울의 논증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1~25절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선행을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면 그는 진정으로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순종이 하나님과 그 와의 관계에 기초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2절).
앞 구절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혀 자랑할 근거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6절이 입증하는 대로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3절).
바울은 일상생활에서 얻은 한 예를 사용합니다. 만일 구원이 일에 바탕을 두었다면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은 마치 고용주가 일꾼에게 일꾼이 한 일에 대한 "보수를" 주는 것처럼 단지 그 사람에게 빚진 것을 되갚으시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4절).
그러나 복음안에서 행위는 완전히 다른 등식 아래 있게됩니다. 의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따르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른 관계를 맺는 의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 대신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5절).
바울은 다윗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두 번째 예로 소개하면서 다윗의 의("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가 다윗의 일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시 32:1~2를 인용합니다(6~8절).
아브라함은 할례(창 17장)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고 따라서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할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9~10절). 할례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아브라함의 의의 '표'이자 '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할례는 아브라함이 할례 이전에 누렸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증명하고 실증해주었습니다(11절).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온 세상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과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상급(최종적 구원을 뜻하는 또 다른 말 인 상속)은 다가올 세상입니다(13절).
만일 상속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어진다면 의는 더 이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행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근본적으로 대립됩니다.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성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약속을 신뢰 내지 의지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14절).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는 상속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합니다. 바울은 '범법'이란 말을 엄밀하게 사용합니다. 따라서 범법은 죄와 구별해야 됩니다. 범법은 드러난 명령에 대한 위반으로 정의되며 이는 기록된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에 대해 훨씬 더 큰 책임이 있었으며 이방인 못지않게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할 큰 필요가 있었음을 뜻합니다(15절).
'그러므로', 이는 '믿음'과 '은혜'의 특별한 관계를 지시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다른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정확히 은혜에 상응하며 이는 과분한 은총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신뢰하는 일을 수반합니다. '율법에 속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신자를 가리킵니다(16절).
'많은 민족', 아브라함의 보편적 조상들은 창 17:5를 통해 확인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nihilo)교리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는(창1:1) 하나님만 존재하셨고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일반적 진리를 아브라함이 신뢰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단언하는데 이용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17절).
아브라함은 자신과 사라가 자식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늙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했습니다(19절).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제로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될수록 늘어났습니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자신의 약속하신 일을 행할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계속해서 믿었고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20~21절).
바울은 창 15:6을 독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우리도 위함이니',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경을 멀리는 창세기에 이르기까지 새 언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기록되었다고 봅니다(23~24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둘 다 죄 용서와 칭의를 위해 필요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성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그것은 성부가 그리스도의 권한과 죽음을 죄에 대한 완전한 보상으로 받아들이셨으며 더 이상 성부의 죄에 대한 진노가 아닌 은총이 그리스도에게로, 또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이들에게로 향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부활 때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정은 또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모든 이들에 대한 인정으로 귀결되며 이렇게해서 그들의 '칭의'로 귀결됩니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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