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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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란 무엇인가. 시조 이론은 어디에서 나온느가.
우리는 시조가 과거에서부터 있어왔던 정형시이기 때문에. 이미 정립된 시조 이론에 맞게 창작해야 한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시
가 생성, 변형되어온 과정과 현대시조로 자리매김하게 된 배경, 시조가 지향해오던 가치, 시조를 향유하던 계층의 특성과 문학적 반영등은 시조문학사에 근거한다. 따라서 지금 다시 시조문학론을 집필한다고 해도, 일부 추가 · 변형되는 내용이 있을 뿐 그동안 기술했던 내용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 나온 시조문학론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장르의 역사가 길다는 점에 착안하면 우리가 꺼낼 수 있는 얘기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과거부터 지니고 있던 시조의 특성, 장르적 자기동일성을 바탕으로 하여 특정 시인과 학자에 의해 시조 이론이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해설 김태경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지천명의 내리막에서 삶의 에움길을 만난 백윤석 시인이 붙잡은 것은 시조였다. 정말 간절하게 "꿈에서도/ 시를 썼다"(시인의 말)는 고백에서는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처절하게 무너져 버린 그 낭떠러기 끝에서 어떻게 시조를 생각했을까. 운명과도 같이 자신의 모든 결기를 담아낸 그의 첫 시집 『스팸메일』은 온전히 그 소삽한 길에서 길어 올린 차가운 샘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윤석 시인이 그린 화초에는 "버선발로 끌려가신 꽃다웠던 우리 할매" (「달개비 궁궐」)도 숨을 쉬고 "안으로 멍든 세상에/오체투지 던지는'"(「비파꽃 설법」) 한 인간의 절규도 녹아 있다. 그의 입김을 받아 새로 태어난 꽃들의 모습에는 옹골찬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아픔과 시대의 우울한 그림자도 일렁이고 있다. 또한 그늘진 역사의 갈피에서 몸부림치던 이산(정조)에게는 "하늘가 동녘 샛별도 금빛 눈물 떨군다"(「이산」)라는 위무를 건네고 유배지에서 부인에게 하피첩을 그렸던 다산도 시인의 따스한 손길을 받아 단아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조를 움켜잡았던 백윤석 시인의 시안은 다채롭고 끈질기며, 보다 새롭고 각별한 시각을 작품에 투사하고자 진력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신방」 「해토머리, 오후2시」처럼 해학의 불맛을 가미하기도 하고 「논개, 용궁에 가다」 「알리바바 한국에 오다」 등의 작품에서는 자신만의 엄청난 상상력으로 고전을 패러디하는 도전도 서슴지 않는다. 비장한 마음으로 상재하는 백윤석 시인의 『스팸메일』은 그래서 다채롭고 싱싱한 시조의 감칠맛으로 가득하다. -정용국 시인
■시인의 말
꿈에서도
시를 썼다,
늘 가편의 시를 썼다
평소에는 쓸 수 없는
절창에 감탄하며
이번엔
놓치지 않으리
달달 외며 잠이 깼다
내 삶도
꿈깥아서
그 속에 쓴 시 같앗
잡았다 생각하면
늘 빈손만 남아 있는
오늘은
그 신기루 잡으려
연필에 침을 묻힌다
타래난초
너 한 발 나 한발로
내딛는 무욕의 땅
엎어지면 일으키고
일어서면 잡아끄는
저들녘
하늘 오르는
두레박 물질 소리
비파꽃 설법設法
미황사 대웅전 앞 햇살 한 뼘 남은 자리
안거에 들지 못한 벌 몇 마리 불려 와서
비파꽃 향기를 안고
현 고르는 저물녘
봄 그리 기다리며 탑을 도는 사람보다
털외투 입고 와서 꽃망울 터뜨리는
안으로 멍든 세상에
오체투지 던지는 꽃
너테 낀 가풀막 위 수레 한 대 뒤뚱인다
장갑도 양말도 없이 어둠을 되작이는
할머니 꽁꽁 언 손발,
눈보라를 헤쳐 간다
꽃대, 일어서다
소슬바람 귓속말로 보도는 들썩인다
스팩 없는 발걸음들 박자 놓친 퇴근길에
볼록 틈,
제 계절 잃은
제비꽃에 발이 멎고
비정규직 후일담이 무자맥질 하는 길목
몸통 불린 큰 그늘이
일순, 나를 덮쳐오면
꺼지던
불씨 살리는
보랏빛 몸짓 하나
피곤한 뒤축 끌며
또 하루가 눕는 시간
불쑥 이는 삼각파도 골목 꽉꽉 조여와도
철 이겨 피는 꽃대는
끝내 막지 못한다
어떤 우산
후드득 빗소리에 대합실이 다 젖는다
쉼 없이 비를 털며 들락대는 사람들 속
척추 휜 우산 하나가
구겨진 채 나뒹군다
한때는 온몸으로 빗줄기를 막던 그도
살대가 부러지면서 하염없는 잠에 빠지고
노숙의 차디찬 빗소리꿈결인 듯 듣고 있다
일순, 그 안에서 꽃대 하나 일어선다
성긴 꽃 잎눈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비 듣는 세상 밖으로무릎걸음 걷는다
문장부호, 느루 찍다
점 하나 못 챙긴 채 빈 공간에 갇히는 날
말없음표 끌어다가 어질머리 잠재우고
글 수렁 헤쳐 나온다,
바람 한 점 낚고 싶어
발길 잡는 행간마다 율격 잠시 내려놓고
어머니 말의 지문 따옴표로 모셔다가
들레는 몇몇 구절을
초장으로 앉혀야지
까짓껏, 급할 게 뭐람 쌍무지게 뜨는 날엔
벼룻길 서성이는 달팽이도 불러들여
중장은 느림보 걸음,쉼표 촘촘 찍어보다
그래도 잘 익혀야지, 오기 울컥 치미는 날
뙤약볕 붉은 속내 꽉 움켜쥔 감꼭지로
밑줄 쫙 종장 그 너머
느낌표를 찍을 터
사이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나, 너는 모르던 사이 콤마조차 없던 사이
단어, 단어 사이에는 협곡의 바다가 있다
그곳엔 돌고래가 와서 점프하며 뛰논다
'와'라는 낯선 다리가 협곡에 놓인 순간
외딴섬인 단어들은 연륙교에 묶인다
다리가 놓이자마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
꿈틀조차 않던 섬이 '와'에게 붙들린 뒤
어느새가 둥지 틀자 우리로 변한 사이
관계를 무너뜨린 건 초겨울의 핀 개나리
개나리는 새를 날리고 고래마저 사라지자
나는 다시 백지 위 외마디의 굼뜬 단어
발등에 대못을 질러 구두점을 찍는다
네팔
히말라야 근처랬지 수도는 카트만투
서울에서 비행시간은 기껏해야6시간 반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난 2달째 비행 중
급유는 하는 걸까
조바심 자꾸 생겨
만년설 덮였어도 따사롭게 느끼는 곳,
이제는 그만 내려서 그곳에 닿고 싶네
지상에 단 한 곳, 이르고픈 미답의 성지
아, 코앞에 있어도 쉽게 닿지 못하는
언제나 가 닿을지 모를
그리운 그, 너의 팔
돌돔
탈옥을 꿈꿔왔다,
입질은 핑계였다
식상한 미끼를 문 건
치밀히 짠 나의 계획
내 몸에
새겨진 죄수복
벗어버리고 싶었다.
조용히 살려 해도
등 떠미는 오지랖에
아무거나 잘 먹으며
엄지손 척! 내미는
답답한
너의 입맛을
사로잡고 싶었다.
여름, 그 에피그램
1. 여우비
어제 낮 대로에서
방뇨하던 고 계집애
메마른 이내 가슴
불 잔뜩 싸지르고
제 볼일
이미 봤다고
내빼는 꼴이라니
2. 분수
발설 못 해 누른 속내
시절 고이 벼르다가
한여름 뙤약볕에
뜨겁게 몸을 달궈
단번에 달아오른다
오
한 르
홀 가
황 슴
, .
저 .
.
그림자
햇살이 나를 범해 나는 그를 낳는다
배부름도 산통도 없이 쑤욱쑥 낳은 그
그래서 만만한 게다
무덤덤히 품는 게다
단 한 벌로 계절 나는 무채색 저 의복을
한평생 단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하면서도
그는 참 비위도 좋다,
날 따르는 것을 보면
편안하다, 저 어둠 속 그에겐 굴레가 없다
땅바닥 드러누워 온갖 흉내 다 해내다
비 듣자 따르던 발길
잠시나마 멈춰 선,
스팸메일
1.
한 톨 씨앗 잎눈 뜨는 문패 없는 내 뜨락에
잔뜩 덧난 상처마냥 몸 불리는 메일들이
용케도 바람벽 넘어와 술술 옷을 벗는다
끊임없이 거듭되는 공복의 내 하루가
한순간 눈요기로 허기나마 면해질까
꼿꼿이 때론 덤덤히삭제 키를 눌러댈 뿐
2.
눈발처럼 떠다니는 많고 많은 인파 속에
어쩌면 난 한낱 눈먼 스팸메일 같은 존재
무참히 구겨진 채로휴지통에 던져질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외로 선 골방에서
팽개쳐져 들어앉아 변명조차 잊었어도
엉켜진 오해의 시간
술술 풀 날 기다리는,
2 + 1
걸핏하면 폭탄 세일
지라시 넘쳐난다
혼자서도 너끈한 길 끼워 파는 난장에서
십진법 절대 가치가
덤으로 흔들린다
2 ×4 센터 2×9 아나
헷갈리는 셈법 사이
나도 몰래 동떨어져 떨잇거리 되어버린
아, 나는
누구였더라
짚어보는 이 아침에,
나는 어느 진열대 위 덤 포장된 상품일까
반반한 묶음 따위 바라지는 않았어도
어눌한
손가락셈으로
저문 하늘 가눈다
어떤 내성
외로움도 참다 보면
내성이 생긴다고
살갑던 품속 그녀 떠나보낸 어느 해 봄
누군가말해주었네눈이 녹듯 잊을 거라
눈이야 때가 되면 제 스스로 결박을 풀지만
내 안엔 얼키설키 똬리 튼 인연의 끈
스르르
풀리면 좋겠네
이내 깜냥만으로도
밤새도록 뒤척이다 목울대 잠기는 날엔
창가를 지켜주던 성긴 달빛 몇 줄기가
차라리 눈물이면 좋겠네,
내게는 다 말라버린 …
인연은 강들의 조우, 묵묵하던 강들의 조우
만나고 헤어짐이 이리도 쓰린 거라면
바위가 길을 막아도
소리 내지 않으리
-백윤석 시조집 『스팸메일』 시인선 책만드는 집
(2019년 초겨울에)
첫댓글 백윤석 시인의 글은 참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매끄러움과
깊음이~
정말 연금술사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