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다
계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네가 본 짐승은 교황권을 가리키는 13장 첫째 짐승 즉 3절에 나오는 붉은 빛 짐승을 가리킨다. 천사는 이 구절로 17장의 시점에서 시작하여 교황권의 과거, 현재, 미래를 폭로하고 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다”는 구절은 8절의 끝과 11절에 다시 반복되며, 짐승이 상처를 받아 거의 죽게 되어 일시동안 잠적해 있는 걸 가리킨다. 그런데 상처가 나은 후에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하는 부활하는 짐승을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라고 표현했다.
지금(시방)은 언제를 말하는가? 17장의 시점을 고려해볼 때 “지금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가 아니고 교황권이 꺾인 1798년부터 교황권이 다시 살아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13:3의 “죽게 된 것”이라는 표현과 동일시된다. 즉 교황권이 꺾여서 무저갱에 내려가 힘을 쓰지 못하는 기간을 말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계시록에서 현재시제는 종종 미래를 말한다(16:15 17:11-13). 둘째, 17장은 음녀의 미래 심판을 예언한 것이다. 셋째, 17장이 여섯째, 일곱째 재앙에 대한 반복적인 확대예언이기 때문이다. 즉 아마겟돈 전쟁과 바벨론 멸망이다. 현재에서 볼 때도 여전히 미래에 있을 일이다.
8절에 나오는 짐승의 정체에 대해 재림교회 학자들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견해, 전에 있었다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던 로마 제국을 가리키고, 지금은 없으나는 로마의 박해가 끝나고 교황권의 박해가 시작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며,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는 교황 로마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둘째견해, 전에 있었다가는 짐승과 그의 일곱 머리의 시기를, 지금은 없으나는 일곱째 머리가 상하고 여덟째 머리로서 그 짐승이 회복되기까지의 시기를, 장차 나올 짐승은 짐승의 회복을 가리키며 이때 짐승은 여덟째 머리가 된다는 견해이다. 셋째견해, 전에 있었다가는 각 시대를 통해 활동하는 사탄을, 지금은 없으나는 20장의 천년기를,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는 천년기 후 잠간 동안 사탄이 활동을 하다가 즉시 멸망당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세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17장의 시점에서 짐승의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머리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전에 있었다가는 교황권이 꺾인 1798년 그 전의 교황 로마를 가리키며, 지금은 없으나는 1798년 교황권이 꺾인 후 무저갱에 잠적해 있는 교황 로마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라고 한 건 교황권이 일곱째 왕으로 회복되는 걸 가리킨다. 회복 후 멸망당할 때까지 여덟째 왕이다(11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17장의 시점은 요한이 계시를 보던 그 순간이 아니고 말세의 어느 때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미래에 대한 계시를 보았기 때문이요, 17장에 묘사된 짐승은 장차 활동할 짐승으로 요한 시대에 아직 상태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문맥에 나오는 지금은 요한 당시가 아니고 1798년 후 즉 짐승이 사라져 활동하지 않은 무저갱에 잠적해 있는 기간이다. 그 짐승이 전에 있었다는 것은 말세의 바로 그 기간에서 볼 때에 과거에 활동하였다는 뜻이요 지금은 없다는 것은 짐승이 활동하지 않고 얼마 동안 무저갱에 잠재해 있을 상태를 말한다. 장차 무저갱으로 부터 올라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없는 것 같으나 실지로 잠재해 있기 때문에 10절에서 “하나는 있고”라고 표현했다. 8절은 10-11절과 주제적 평행을 이룬다, “전에 있었다”는 “다섯은 망하였고”와 평행을 이루고 “지금은 없으나”와 “하나는 있고” 그리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과 평행을 이룬다. 셋째, 그 짐승이 없는 기간이란 여섯째 머리 기간을 말하는데(10절) 머리가 죽게 된 상처를 입은 때(13:3)로부터 일곱째로 소생할 때까지의 그 짐승이 무저갱에 잠적해 있는 기간을 말한다.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은 짐승이 일곱째 머리로 소생하는 걸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라고 한 것은 “그의 머리 중의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13:3)라고 묘사한 것을 가리킨다. “죽게 된 것”은 짐승이 경험하는 무저갱 시기이다. 그리고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13:14)은 “장차 나올 짐승”(8절)이라는 표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짐승이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것을 “상하여 죽게 된 것”(13:3), “칼에 상하였다”(13:14)로 표현한 것이다. 죽임을 당한 것 같아 보인 짐승의 사라짐을 무저갱으로 내려간 것으로 비유한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비록 13장의 첫째 짐승과 17장의 짐승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가 있다 할지라도 두 짐승은 동일한 짐승이 확실하기 때문에 “머리가 상함”(13:3) 혹은 사로잡혀감(13:10)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무저갱에서 올라올 때는 일곱째 왕이다. 이 짐승은 멸망으로 들어가기 전 잠간 동안만 여덟째 왕으로 나타날 것이다(10-11절). 그 일곱째와 여덟째를 포함하여 “살아난”(13:14)이라 표현했다. 전에 맹렬하게 활동하다가 칼에 상처를 입고 일시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것 같았으나 죽지 않고 생존하였던 것이다. 악은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이나 항상 되살아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넷째, 문맥에서 “네가 본 짐승은” 교황권을 가리키고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는 짐승(교황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로마나 프랑스 등에 적용할 수 없는 게 확실하다. 프랑스로 적용하는 오해는 11:7절에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프랑스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장의 8절은 다르다. 문맥적으로 볼 때 다섯째(짐승의 과거), 여섯째(짐승의 현재), 일곱째(짐승의 미래)가 모두다 교황로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8절의 나머지 구절도 13:8절과 비교해 볼 때 무저갱에서 올라올 짐승이 교황로마를 가리키는 게 너무나 확실하다. 그 짐승이 잠적해 있던 곳은 무저갱이다. 무저갱의 헬라어 아부쏘스(αβύσσος abyss)는 밑이 없는 구렁텅이, 나락, 광막한 심연(深淵) 등을 의미하며 칠십인 역에는 음부(Hades)로 쓰였는데(시 71:20 롬 10:7) 악마들의 거처이다(눅 8:31 벧후 2:4 유 1:6). 붉은 용 마귀는 잠시 무저갱 열쇠를 가졌다(9:1). 예언에서 무저갱은 이 지구성 혹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그리고 용(사탄)과의 관계 등을 상징한다. 3절에서 요한이 그 짐승을 무인지경의 광야에서 보았기 때문에 무저갱과 광야는 같은 곳이다. 역사주의자들은 9:1-2절의 무저갱을 아라비아 사막으로 적용한다. 음녀가 앉아 있는 붉은 빛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온다는 말은 첫째, 이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11:7). 둘째로 악마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 짐승은 악마들의 거처인 무저갱에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교황권이 무저갱 열쇠를 가진 용과 관련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짐승이 용 즉 사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배후세력일 뿐이다. 사탄이 무저갱을 열었을 때 메뚜기 떼 즉 그의 부하들인 타락한 천사들이 거기에서 나왔듯이 (9:2-3) 8절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올 거라 하였다. 이 짐승이 지금은 없는 것처럼 보인 것은 무저갱에서 용의 비호 아래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있고
계 17:9-10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일곱 머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천사는 요한에게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요 일곱 왕이라고 언명(言明)한다. 일곱 산이란 무슨 뜻인가? 큰 음녀는 1절에서 많은 물 위에 앉았고 3절에서 짐승 위에 앉았으며 9절에서는 일곱 산에 앉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예언에서 산, 짐승, 그리고 많은 물은 모두 다 일맥상통하여 나라 혹은 제국을 상징하고, 거기 앉은 것은 그 세력과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어 권세를 휘두르면서 압제하는 전제를 의미한다. 음녀는 오만하게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18:7)라 하였다. 일곱 산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첫째, 과거주의 자들은 일곱 머리를 BC 27-AD 96년까지 로마 제국을 지배했던 일곱 명의 황제로 보고 일곱 산은 일곱 언덕의 도시인 로마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둘째, 일곱 제국과 그 통치자이다(Ladd). 셋째, 로마 가톨릭의 일곱 교황이다. 넷째, 단지 짐승의 본질을 드러내는 세상권력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네 견해 중에 두 번째가 타당하다. 산(山)의 헬라어 호로스(o[ρος)는 언덕(hill)이 아니라 그야말로 산(mountains)을 의미한다. 계시록에서 8번 사용된 이 단어가 모두 산으로 번역되었으며(6:14, 15, 16; 8:8; 16:20; 17:9; 21:10; 14:1), 스트랜드가 관찰한대로 산은 왕국(王國) 혹은 제국(帝國)을 상징했지 결코 통치자 개인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느브갓네살 꿈에서 돌은 신상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고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단 2:34-35). 이 태산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을 의미한다(단 2:44-45). 예레미야는 고대 바벨론 제국을 멸망의 산으로 언급하면서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 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렘 51:25)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곱 머리를 로마의 일곱 황제로 해석하는 과거주의 입장이나 또한 일곱 머리를 일곱 가톨릭 교황으로 보는 미래주의 해석도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일곱 머리를 역사 속에 등장한 연속적인 일곱 나라나 제국으로 보는 역사주의 입장이 이 점에 있어서는 좀 더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천사는 일곱 산을 즉시 다른 말로 표현하여 일곱 왕이라고 했다. 일곱 왕이란 무슨 뜻인가? 구약에서 왕들은 종종 나라와 제국을 의미하기 때문에(단 7:17, 23) 일곱 왕은 세상나라나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산 곧 일곱 왕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곱 나라 혹은 제국들이다. 요한이 “지금은 없으나” 라고 했을 때의 시점을 전후하여 있었던 일곱 나라나 제국을 가리킨다. 큰 음녀는 연속적인 제국들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요한은 짐승의 일곱 머리를 구분함으로 그 나라들이 분명한 역사적 실체임을 시사했다. 이미 망한 다섯 제국들은 요한이 예언한 마지막 시점에서 기준하여 볼 때에 그 시대 전에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들이다. 즉 나누는 분기점이 1798년 교황권이 붕괴된 때이며 그 시점에서 볼 때 망한 다섯 나라는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제국 로마, 작은 뿔 교황 로마이다. 천사는 하나는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시점(1798년 이후)에서 당시에 있는 나라이다. 즉 여섯째 나라인 머리가 상처를 입은 상태의 교황 로마이다. 이때는 교황권이 붕괴된 혁명기의 프랑스(11:7)시대이다. 무저갱에 잠적해 있는 기간이기 때문에 8절에서는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한 나라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에 일곱째 나라는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왕이다. 칼에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상처가 나은 짐승이다(13:3). 즉 일곱째 나라인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다시 소생한 교황 로마이다. 1929년 베니토 뭇솔리니(Benito Mussolini)와 교황 비오 11세가 라테란 조약(Lateran Treaty)을 채결하여 교황권이 잃었던 그의 최상권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 무저갱에서 올라온 것이다. 그 이후 이 짐승은 점점 세력을 얻어 일곱째 나라에 속하면서 여덟째 왕으로 세계적인 경배와 각광(脚光)을 받을 것이다. 혹자는 일곱째 머리는 13장의 둘째 짐승으로 상징되는 미합중국으로 간주한다. 미합중국은 1776년 7월 4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1787년 각 주가 연방 헌법을 채택하여 이 헌법에 의하여 1789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 미국 연방 정부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그러나 문맥은 그 잠시 동안의 전성기 상태를 11절에서 여덟째로 짐승(교황권)을 일컬었다. 잠시 동안이란 말은 시간의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12:12절에서 이 기간은 사탄이 십자가에서 패해 쫓겨나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이다. 일곱째 나라가 여덟째로 화려하게 패권을 잡지만 잠시 동안 머무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0절에서 말하는 일곱 나라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데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린다. 재림교회 성경주석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네 가지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곱을 상징적인 숫자로 보고 일곱 머리를 특정적인 일곱 나라로 지정하지 않고 숫자와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의 백성과 사업을 반대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이해한다. 둘째, 시점(時點)을 요한 당시로 보고 망한 다섯 제국은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메대-파사, 헬라이다. 현존하는 머리는 로마 제국이고 아직 이르지 아니한 머리는 교황 로마이다. 스트랜드, 스테파노비치, 폴린 등의 주장이다. 레이놀드(Reynolds)는 다섯 제국은 동의하나 여섯째는 이교로마와 법왕로마를 가리키고 일곱째는 13장의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매긴다. 셋째, 시점을 요한의 시대가 아니라 마지막 시점(1798-1844년 전후)에서 보고 망한 다섯 나라는 바벨론, 메대-파사, 헬라, 로마제국, 교황 로마이고, 여섯째 나라는 머리가 상처를 입은 상태의 교황 로마이며, 아직 이르지 않은 일곱째는 다시 소생된 교황 로마이다. 맥스웰과 두캉은 셋째견해에 동의한다. 넷째, 처음 네 나라는 다니엘 2장과 7장의 네 제국 곧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및 로마이다. 다섯째 머리는 다니엘 7장과 8장의 작은 뿔과 계시록 13장의 표범과 같은 짐승으로 상징되는 교황권이고, 여섯째 머리는 혁명기의 프랑스(11:7)로, 그리고 일곱째 머리는 13장의 둘째 짐승으로 상징되는 미합중국으로 간주한다. 재림교회 대부분의 학자들은 둘째 견해 곧 애굽(출 5-14장), 앗수르(왕하 17:1-8), 바벨론(단 7:4), 메대-바사(단 7:5), 헬라(단 7:6), 로마(단 7:7), 그리고 교황 로마(단 7:8, 21, 24, 25)로 본다. 네 가지 견해 중 필자에게는 맥스웰과 두캉이 주장한 셋째가 가장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8절과 10절 그리고 11절을 대조하여 종합 분석해 보면 문맥적으로 그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첫째, 17장의 시점은 요한 당시가 아니고 말세의 어느 시점이기 때문이다. 즉 1798년 교황권이 꺾어지고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8절에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라로 짐승 즉 교황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게 너무나 확실하다. 둘째, 성경 내적 증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8절은 교황권을 말하는 13:3과 평행이다. “전에 있었다가”는 교황권이 상하여 죽게 되기 전의 건강한 상태의 교황권을 말하고, “지금은 없으나”는 1798년 교황권이 치명상을 입어 무저갱으로 내려간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하고 표현한 교황권을 가리킨다. 따라서 짐승의 일곱 머리 중의 하나는 분명히 교황 로마를 가리키며, 일곱째 머리를 교황권으로 확인하게 된다(9-11절). 그리고 일곱 산 혹은 일곱 왕 위에 앉은 여자(9절)와 짐승(교황권)을 탄 여자(3절)는 평행임으로 또 다시 교황권으로 확인하게 된다. 셋째, 느닷없이 애굽과 앗수리아를 포함시키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애굽과 앗수리아 제국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주요한 적들이었던 게 분명하다 할지라도 다니엘서에는 바벨론부터 시작하고 그 두 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비록 북방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할지라도 남방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했다. 따라서 바빌로니아로부터 시작하는 게 합당해 보인다. 다섯째, 계시록의 짐승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네 짐승의 머리 합계(사자 1, 곰 1, 표범 4, 무섭고 놀라운 짐승 1)와 같고, 모양도 표범 같았으나 발은 곰, 입은 사자와 같아 네 짐승의 속성을 다 가진 복합 세력인 걸 가리킨다. 따라서 다니엘 7장의 짐승이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계시록의 짐승의 머리의 시작도 바벨론으로 매기는 게 옳은 것이다.
열 뿔은 열 왕
계 17:12-13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천사는 요한에게 붉은 빛 짐승에게 있는 열 뿔에 관심을 돌려 그 정체를 밝혀주었다. 붉은 빛 짐승의 뿔은 틀림없이 왕을 상징한다는 확실한 언급이다. 그런데 이 왕들은 요한의 시대는 물론 17장에 묘사된 짐승이 활동할 시기인 마지막 시대에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나라를 갖고 있다(17절). 그들은 아직 왕이 아니지만 짐승이 출현할 때에 권세를 얻을 것이다. 이 왕들은 음녀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며(18절) 그녀와 더불어 음행을 저지를 것이다(2절). 그러다가 열 왕들은 한 뜻으로 뭉쳐 여자를 배신하여 자기들의 능력과 권세를 붉은 빛 짐승에게 몰아주고(13절) 그들의 나라들도 짐승에게 바칠 것이며(17절) 거기 빌붙어 왕처럼 한 동안 권세를 누릴 것이다. 또한 한 뜻을 이룬 열 왕과 짐승은 서로 연합하여 어린양과 그의 진실한 추종자들을 공격하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결국 그 전쟁에서 패전(敗戰)할 것이지만(14절),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그 음녀를 멸망시켜 버리는 주체 세력이 될 것이다(16절).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저지를 열 왕들이란 과연 누구일까? 학자들 사이에 여러 주장이 회자된다. (1) 이것은 다니엘 7:7, 24의 넷째 짐승의 열 뿔로 상징된 열 왕들로 된 열 나라이다. 열이라는 숫자는 특정한 열 왕이나 나라를 지칭한다. 이 뿔들은 요한의 시대에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지만 로마 제국으로부터 나누어져 현대의 서구 나라들이 되었다. (2) 열은 대략을 말하는 개략적 숫자이기 때문에 정확한 산술적 수와 관계없이 열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지상의 모든 정치적 세력의 총집합이다(Mounce, Ladd, Johnson). (3) 바벨론의 종교적 요구에 정치적 지지를 보내는 현대 국가들을 나타낸다. 세 가지 견해는 다 옳은 일면이 있기 때문에 이를 종합해보면, 열 뿔이란 분열된 유럽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종교적 요구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오늘날 모든 현대 국가들이나 왕들의 연합체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첫째, 성경본문에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분열 당시에 파생된 나라들로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17장 시점에서 볼 때에 열 왕들이란 16:14에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 천하 왕들을 상징하는 것이 맞다. 셋째, 적용범위가 다니엘 7장에서는 유럽에만 국한되던 것이 계시록 17장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넓어진 것이다. 그렇게 적용해야 할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 세계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래드(G. E. Ladd)는 12절의 열 왕을 유럽의 열 왕국으로 해석하는 걸 반대하면서 “열 왕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될 지상의 모든 나라들의 전체적인 권세를 나타내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상징이다”고 하였다. 하이델 베르그의 칼빈주의 교수였던 페레우스(David Pareus, 1548-1622)는 실제적인 열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열 왕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27개국으로 이루어진 유럽연합(EU)이나,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 24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는 군사 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NATO)와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해 온 경제적 동맹체인 서방선진 7개국인 G7(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거기다 러시아를 포함한 G8, 또한 브릭스(BRIC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21개국 정상들 회의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혹은 주요 20개국인 G20 등이 후보가 될 수 있다. 세상 끝 마지막 때에 이러한 단체가 반드시 세계사의 정치적, 경제적인 강대 세력으로 잠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열 왕은 아직 나라를 얻지 못했다고 했으나 왕의 행세를 다 한다. 열 왕이 음녀와 음행을 했다는 말은(1-2절) 그들이 한 때 왕권을 누렸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17절에서는 그들이 나라를 가진 걸로 표현된다. 17장의 시점인 말세에 열 왕들이 아직 세계에 대한 지배와 통치권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왕관이 없는 것이다. 실제적인 주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열 뿔은 능력과 권세와 나라를 짐승에게 줄 것이다(17:13, 17). 그런 측면에서 나라를 얻지 못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한동안 짐승과 더불어 통치할 것이며(12절), 그 기간에 어린양과 더불어 싸울 것이고(14절), 짐승과 의기투합하여 음녀와도 싸울 것이다(16절).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 동안 권세를 받으리라”는 구절에서 한 동안(one hour)은 짧은 기간을 말한다. 18:8에 “하루”가 10, 17, 19절에서 “일시간”으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7장의 열 뿔은 유럽의 열국(列國)을 의미하지만 12절의 열 뿔은 종말에 전 세계에서 나타날 정치적 세력들이다. 이는 16:14의 온 천하 왕들을 의미한다. 열 왕은 짐승과 내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잠시 동안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열 왕은 말세에 종교 정치적 세력의 연합체 형성에 골간(骨幹)이 될 것이다. 16:13-14에 언급한 악의 삼인조(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의 삼중연합체(교황권, 개신교, 강신술)가 마지막 전쟁을 위하여 귀신의 영을 통해 온 천하 왕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연합이다. 정치적 세력이 한 뜻으로 연합하는 게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과 주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17절, 시 83:1-8). 뜻의 헬라어 그노매(gnw,mh)는 의견, 의향, 목적, 결심, 온전히 합하기 등을 의미한다. 열 뿔이 한 뜻(mi,an gnw,mhn one mind)을 가진다는 말은 그들이 총 결속하여 전원일치의 동의로 세계적인 연합을 추구할 걸 뜻한다. 즉 세계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교황권이 있을 것이다. 세계단일정부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국가 민족 주권 등을 다 없애고 하나의 정부로 통일하여 인류 전체를 그 국민으로 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말한다. 오늘날 탄소가스 배출로 인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된다는 우려 속에 출범한 국제기구는 세계정부구성의 실현을 위한 주요한 일예가 된다. 세계의 열 왕들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연합하지만 그들이 짐승에게 굴복하여 집단적으로 저들이 결정한 것을 수행하는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몰아줄 것이다. 짐승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 뜻이 되어 저들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바칠 것이다. 열 왕들은 지상의 거민들도 그들 지배아래 통일시키고(2절) 짐승은 열 왕들을 이용하여 목적 달성을 강행하려 할 것이다. 그 목적은 그분의 백성을 진멸시키는 것이다. 결국 짐승의 영도 아래 사탄 세력들이 총 결속하여 뭉칠 것이다. 짐승은 이미 보좌를 취했기 때문에(계 13:2) 열 왕들로부터 능력과 권세만 취할 것이다. 열 왕들의 의향은 우선 보기에는 자기들의 뜻 같았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신 것”(17:17)이다. 나라들의 전원일치 동의하에 세계적인 종교 정치적 연합을 이룰 것은 어린양과 성도들과 전쟁을 위한 총연합으로서 그 예언의 성취시기는 유예기간이 끝나고 하나님의 제어의 손길을 거둔 후이다.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이것을 강력한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여러 왕들의 반응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의 왕들이 미합중국의 강력한 지도력 하에서 종교 탄압에 힘을 몰아 줄 것을 13절에 적용했다. 그가 물론 13장의 둘째 짐승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적용했겠지만 그러나 13절의 짐승을 미국의 지도력에 적용한 것은 13장 첫 짐승과 17장의 짐승이 동일한 짐승이란 차원에서 볼 때에 그가 줄곧 교황권으로 적용하던 것과 모순되는 획기적인 적용이지만 수용하기가 곤란하다.
아마겟돈 전쟁
계 17:14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17장에는 두 전쟁이 묘사돼 있다. 하나는 열 뿔이 짐승과 연합하여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는 전쟁이며(14절) 다른 하나는 열 뿔과 짐승이 의기투합하여 음녀와의 무서운 권력투쟁에 돌입함으로 그녀를 멸망시키는 것 즉 바벨론의 붕괴이다(16절). 요한이 14절에서 언급한 전쟁은 열 뿔과 짐승의 세력이 완패하고 어린양과 성도들이 승리할 걸 예언한 것이다. 이 전쟁은 마지막 시대의 세계적인 투쟁이며 16:16절에서는 아마겟돈이라 불린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경제적, 종교적 세력을 포함시킬 것이다. 실질적으로 16절에 예언된 삼중연합체의 자중지란에 의한 붕괴 즉 바벨론 멸망이 14절에 예언된 전쟁보다 먼저 있을 사건이다. 14절 전쟁은 재림 때에 있을 것이지만 16절 전쟁은 일곱째 재앙 때에 치러질 것이기 때문이다(16:16-19). 16절에 나오는 전쟁에서 승리한 짐승과 열 뿔은 한 동안 권세를 누릴 것이지만(12절) 잠시 후에 14절에 예언된 어린양과 성도들을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할 것이나 완패당하고 말 것이다. 그게 바로 재림 때에 있을 일차적인 아마겟돈 전쟁이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들은 열 뿔들 즉 열 왕들이다. 열 왕들은 짐승과 연합세력을 형성한다. 열국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노할 것이다. 시편 2:1-2에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1-2)라 했다. 여섯째 인 아래서 나열된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6:15)은 어린양과 그 백성들을 대항해서 전쟁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큰 환난을 주도하는 장본인들로 파괴적인 바람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이 전쟁은 19:11-21절에 잘 묘사돼 있다. 왕들이 짐승의 지지를 받아 그리스도와 그의 신실한 추종자들을 대항하여 벌이는 전쟁은 19:19과 정확하게 평행을 이룬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의 전쟁”(16:14)이라 불리는 아마겟돈 전쟁이다.
“일곱째 재앙이 시작되면서 악의 세력이 성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스도가 개입한다.” 이방인들의 분노에 주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다(11:18). 맥스웰은 케어드(B. B. Caird)의 주장을 지지하여 열 왕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울 싸움은 양편의 추종자들을 통해서 수행될 쟁투라 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무리와 용의 무리와의 싸움이다(12:17). 하늘의 전사(戰士)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이기실 것이요 그를 추종하는 택함 받은 자도 이길 것이다. 이것은 아무도 짐승과 더불어 싸워 이길 자가 없다고 야유하던 13:4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다. 라론델이 지적했듯이, 성도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할 것이다. 어린양이 이기는 이유는 본문에서 그분이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라 했다. 이 구절은 다니엘 2:47을 인유한 것으로 특별히 재림 때에 그의 원수들을 멸하시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된다.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란 칭호는 아버지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되나(신 10:17 시 136:2, 3 단 2:47 딤전 6:15) 아들 하나님에게도 사용되었다(19:16). 함께 있다의 헬라어 메타(μετά with)는 동반하다는 뜻이다. 어린양의 당연한 승리에 그분이 부르시고 택하신 진실한 성도들도 동반할 걸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택하심을 받는 자격을 갖는 게 아니요(마 22:14), 택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이기는 무리에 속하는 게 아니라 진실해야 한다. 그들은 “죽도록 충성하여야 한다”(2:10). 결국 그들은 하늘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설 것이다(14:1).
삼중연합의 붕괴
계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6절은 에스겔 23:29의 인유이다. 요한이 천사로부터 큰 음녀에게 심판의 무서운 선고가 내려지는 걸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여 극적인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세계적 종교, 정치 동맹을 맺었던 삼중연합(여자, 짐승, 열 뿔)은 자중지란을 일으켜 열 뿔과 짐승이 등을 돌려 부패한 개신교 연합단체를 넘어뜨려 말살할 것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위세(威勢) 당당한 음녀가 결국 멸망당할 것이다. 그들의 지원철회는 그 음녀가 앉아 있던 유프라테스 강의 고갈을 의미한다(16:12). 16:17-19에서 큰 성 바벨론은 지진에 의해 붕괴 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지만 16절에서는 열 왕과 짐승이 주도한 자중지란에 의해 붕괴된다. 지진과 자중지란은 같은 의미이다. 18:2에서는 붕괴의 방법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그들이 왜 음녀를 미워할 것인가? 첫째, 일곱째 재앙에서 핍박받던 성도들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구원되자(16:17) 열 왕들은 공범자가 된 걸 알고 두려운 각성을 하게 된다. 둘째, 그들이 당하는 일곱 재앙을 막는데 무능한 걸 보고 열 뿔과 짐승은 그 여자에게 지금까지 속임을 받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 결국 그 여자에 대해 환멸을 느끼며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공적 지지를 철회하고 사랑이 증오로 변하여 오히려 적대하게 될 것이다. 열 왕들이 여자를 미워하는 걸 어떤 주석가들은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의 몇 나라들이 교황권에 대한 태도 변화에 적용하지만 그게 아니고 16절은 일곱째 재앙에서 일어날 악의 삼중연합체의 해체로 인한 바벨론 몰락을 예언한 게 틀림없다. 그건 여섯째 재앙의 때에 준비가 되어 일곱째 재앙 기간에 있을 것이다(16:12-19).
다른 천사
계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요한은 17장 계시를 받은 후에 다른 천사를 보았다. 17:1에 나오는 천사와는 전혀 다른 천사이다.
재림교회는 1절의 다른 천사는 인간 사자(使者)를 상징한다고 여긴다. 또한 성도들에 의해 수행되는 “운동”도 상징한다고 본다. 이는 세 천사기별(14:6-13)에 나오는 천사들이 하나님께 사명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나오는 다른 천사는 세 천사의 큰 외침에 협력하기 위해 적합한 때에 나타난 늦은 비 천사이다. 다시 말해 1절의 다른 천사는 큰 능력 즉 성령의 늦은 비를 받게 될 말세의 성도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일반교회들이 세 천사의 삼중 기별을 거절한 결과로 둘째 천사가 예언한(14:8) 바벨론 상태에 빠졌을 때에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이 권위를 가지고 바벨론의 죄악상을 경고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기에서 탈출시키는 일에 도울 것이다. 또한 안식일을 더 온전하게 선포할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큰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 곧 그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는’ ‘다른 천사’의 사업은 대부분 우리 출판소를 통하여 성취될 것이다”고 하였다.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올 시기는 셋째 천사의 기별이 전해지고 있는 동안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다른 천사는 셋째 천사와 연합하여 이 세상을 위한 사업을 마칠 것이다.
요한은 다른 천사가 지금 하늘에서(evk tou/ ouvranou/ out of heaven) 내려오고 (katabai,nonta coming down) 있는 걸 지상에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15, 16장에서 하늘에 있었다.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말세의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 사명이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바벨론의 종말에 대해 지구 거민들에게 경고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일을 돕는 것이다. 둘째,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성도들의 태생적 기원을 나타낸다. 예컨대 계시록 10장에 보면 말세의 성도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힘센 천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도로 태생된 공동체이다.
이 다른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특별한 목적을 수행할 큰 권세를 가졌다(e;conta evxousi,an mega,lhn). 여기서 권세의 헬라어 엑수시안(evxousi,an authority)은 권위 혹은 능력을 의미한다(막 2:10 계 9:3, 10, 19). 천사가 권세와 영광을 가졌다는 언급은 아주 드문 일이므로 이 천사는 아주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들이 바벨론의 타락상을 경고하고(2-3절) 그 종국에 대해 세상에 경고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권세를 위임받은 걸 가리킨다.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졌다”는 구절은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환하게 되는 것을 언급한 에스겔 43:2에서 끌어온 묘사임에 틀림없다. 영광의 언급은 천사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늦은 비를 받은 성도들에 의해 온 세계적 범위의 사업이 찬란한 능력으로 성취될 것이다. 빛나는 천사는 흑암의 세상을 환하게 할 구원의 진리를 가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그분의 성품을 가리킨다. 모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을 현현하셨다(출 33:18-19; 34:6-7).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남은 백성들의 이마에 그분의 성품을 기록하실 것이다. 1절에서 천사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빛나게 함으로 온 땅이 환하게 될(h` gh/ evfwti,sqh the earth was enlightened) 것이다. 진리는 모호하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더욱 분명해져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게 바로 그의 영광으로(evk th/j do,xhj auvtou/ from the glory of him) 땅이 환하여진다는 의미이다. 엘렌 G. 화잇은 1절에 나오는 천사의 영광으로 온 땅이 환하게 되는 것을 마지막 큰 외침의 때에 오순절이 반복되어 늦은 비 성령이 부어질 것으로 적용하였다.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이 그분의 자녀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교회들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이다.” 늦은 비 성령을 받은 자들은 시련의 때(야곱의 환란, 일요일 휴업령)를 성공적으로 통과할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AD 31년경에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1844년부터 하늘 지성소 사역을 시작하셨다(단 8:14). 은혜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에서 하실 일은 하늘 첫째 칸에서 하시던 중보사역을 포함하여, 하늘 성소정결 즉 재림 전 확인심판, 죄의 도말, 첫째부활에 참여할 자 확정, 인자가 나라와 왕권을 받게 될 어린양의 혼인예식, 그리고 인치는 사업 등이다. 따라서 어린양의 혼인예식은 예수님의 하늘 지성소 사역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는 세 국면이 있는데, 첫째, 혼인예식이 있기 전에 혼인잔치에 데려갈 사람들의 적합성을 조사하여 자격을 결정하는 것이고(마 22장 비유), 둘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새 예루살렘과 혼인하는 것 즉 아버지께로 나아가 영광의 나라와 치리하는 권세를 받는 것이며, 셋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혼인만찬에 참여시키기에 적합한 손님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교회가 아직은 아내가 아니며 혼인 전에 있는 정결한 처녀임을 가리키며 혼인은 종말론적 사건임을 암시했다. 에베소서 5:25-32에서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그의 아내로 비유하였지만 실제적 결혼은 미래로 묘사되고 있다. 그 외에 복음서에 결혼의 상징이 여러 곳에 나온다.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비유(마 22장), 열 처녀의 비유(마 25장), 큰 잔치의 비유(눅 14:16-24) 등이다. 그런데 복음서의 혼인잔치와 관련된 비유들에서는 신부나 혼인예식 장면이 나타나지 않고 단지 초청과 손님들의 반응과 주인의 결정들이 나온다.
7-8절에서 신랑은 누구인가?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백성들에게 찾아온 신랑으로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 2:19).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지칭하면서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누구인가? 요한은 21:2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신부로 비유 했다. 천사도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라 하였다(21:9, 10). “하나님의 성”(3:12), “거룩한 성”(21:2, 10), “하나님의 장막”(21:3)이라고도 불리는 새 예루살렘을 사도 바울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이라 하였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을 여인으로 묘사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사야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가리켜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사 6:1-2)이라 했고, 갈라디아서 4:26은 새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백성의 모친으로 표현하여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였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곧 거룩한 도성 자체가 결국 이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11:15) 영광의 나라의 수도가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이 그의 신부 곧 아내이지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아내라고 한 것은 새 예루살렘 성이 결국 구속받을 성도들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정결한 신부인 새 예루살렘 안에 거하실 것이다(22:3). 그곳은 그분의 처소이자(겔 37:27) 성도들의 처소이다(요 14:1-3). 따라서 새 예루살렘성이 어린양의 신부라는 사실은 구속적(救贖的) 은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큰 성 바벨론을 악의 “큰 음녀”라 하고(17:1-2) 예루살렘 성을 “어린양의 아내”라 표현한 것은 바벨론 성과 예루살렘 성을 대조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 성이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아내와 신부는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약혼만 하면 아내로 불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7년의 약혼기간이 지나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창 29:21)고 하였다. 또한 천사는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마 1:20). 약혼은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언약관계였다. 약혼한 남자는 병역 의무를 면제 받았고(신 20:7) 약혼녀도 기혼자로 간주돼 그녀를 강간한 남자는 남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돌에 맞아 죽었다(신 22:23-24).
신부가 새 예루살렘성이라면 마태복음 25:1에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들”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열 처녀들”을 “열 신부들”로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엘렌 G. 화잇은 “그러므로 신부란 거룩한 성을 대표하며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은 분명히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에 대해 순수한 신앙을 가졌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열 처녀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말한다. 혼인잔치에 참석할 손님들이다. 구속받을 십사만 사천은 처녀들로 묘사된다(14:4).
신부와 손님은 다른 두 무리인가? 대단히 혼란스럽다. 여기에 대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신부와 손님은 동일하다. 둘째, 신부는 교회 전체를 의미하고 손님은 초청에 개인적으로 응한 신자들이다(Hoeksema). 레만도 손님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개인적으로 응하는 자들이라 했다. 셋째, 교회를 신부로 손님들은 구약시대 및 천년왕국 시대의 성도들로 나누어 두 무리로 본다. 넷째, 신부는 새 예루살렘이고 손님은 모든 성도들이다.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성을 지닌다. 엘렌 G. 화잇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손님들로 불리어지고 있다(19:9). 손님이 된 자가 동시에 신부로 대표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혹자는 그리스도가 양과 목자로 다중역할을 하듯이 교회도 신부이자 동시에 초대받은 손님들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혼인잔치에 참여할 손님들 혹은 친구들은 아담 이후로 모든 세대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이다. 이리하여 신랑은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새 예루살렘이며 손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게 너무나 확실해졌다.
그러면 혼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결혼은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하는 비유이지만 19장의 문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 전 확인심판을 끝내고 아버지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실 것인데 영광의 나라의 수도 새 예루살렘을 받으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등극하는 것이 혼인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재림이 아니라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를 받으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하늘 지성소에서 재림 전 확인심판을 막 끝내신 신랑 그리스도께서는 지성소에서 나오시기 전 아버지께 나아가 신부 곧 영광의 나라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 성을 받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다(요 14:1-3).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영광의 나라와 수도 새 예루살렘에서 온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권세를 받는 걸 혼인으로 언급한 사실은 구속적 은유의 표현인 것이다.
지상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혼인식에 어떻게 참석하는가? 사실 그리스도의 혼인은 하늘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세상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직접 그 혼인 예식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혼인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적 및 영적 경험을 의미한다. 엘렌 G. 화잇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실 때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성도들은 하늘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혼인 예식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럼 혼인 예식과 혼인잔치는 언제 있는가? 7절에서 언급한 혼인(o` ga,moj 호 가모스, the marriage)과 9절에 나오는 혼인잔치(to. dei/pnon tou/ ga,mou,, 토 데이프논 투 가무, the supper of marriage)는 서로 다른 두 사건이다. 어린양의 혼인(가모스)은 재림 전에 일어나는 것이고 혼인잔치(데이프논 가모스)는 재림 후에 일어날 일이다. 새 예루살렘 성과 혼인을 마치신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거행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시킬 손님 곧 그분의 백성을 데리러 재림하실 것이다. 다니엘이 그리스도께서 하늘 혼인예식에 나아가는 것과 하늘 혼인에 대해 언급한 다니엘 7:13-14에서 인자가 항상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1844년 혼인예식을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요, 그리고 재림 전 조사심판 끝에 거기서 인자가 아버지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것은 혼인을 의미한다. 앤더슨(Roy Allan Anderson)도 이를 가리켜 “이것이 실지로 신랑 곧 어린양의 결혼이요 그가 성도들을 위해 땅에 돌아오시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다”고 했다.
누가복음 19:11-27에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가는 걸로 상징한 비유는 왕위를 받는 일이 재림 전에 일어날 것임을 시사한다. 비유에서 어떤 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고, 왕위를 받는 일은 혼인식을 상징하였으며, 그리고 귀인이 없는 동안 그분의 사업을 행하도록 위탁받은 “그 종 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혼인식의 시점은 재림 전이고 장소는 하늘이기 때문에 지상의 성도들은 직접 혼인예식에 참여할 수 없다. 다만 믿음으로 참석할 따름이다. 혼인잔치(피로연)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 있을 사건이다. 성도들은 단지 하객(賀客)들로서 자기들을 혼인잔치(피로연)에 데려가기 위해 혼인식을 마치고 돌아올 신랑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 12:35-36)고 하셨다. 그렇게 깨어있는 사람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눅 12:37). 이 말씀은 주님의 뜻을 행한 종들의 신실함과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혼인잔치를 하는 장면이다.
1844년 혼인식을 위해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시점에 혼인예식을 치를 것인가?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유(마 22:1-14)에 그 답이 나온다. 이 비유는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오찬에 대한 초대이다(마 22:4). 이 비유에 보면 혼인식 장면은 없다. 왕이 모든 손님들에게 손수 준비한 예복을 나누어준 다음 혼인식이 거행되기 전에 손님을 보러 들어와 혼인예복 착용여부를 조사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값비싼 새 옷을 입고 있는 자에게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못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임금은 그를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 버렸다. 이 비유에서 혼인예복 착용 조사는 1844년부터 그리스도께서 하늘 지성소에서 행하시고 계시는 재림 전 확인심판 즉 조사심판을 표상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혼인예식하시기 전에 조사심판이 있고, 혼인예식이 끝나면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재림 후에 손님을 데려가 하늘에서 혼인잔치가 있을 것이다. 다만 혼인예복을 입은 손님들만 그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혼인식을 끝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집에서 있을 혼인만찬에 성도들을 데려가기 위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결코 혼인잔치에서 돌아오거나 혼인하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눅 12:36)어야 한다.
엘렌 G. 화잇이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를 재림 후에 있을 혼인잔치가 아니라 이 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하늘 지성소에서 있을 혼인예식에 적용한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에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들은 교회를 상징하고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 있는 처녀들로 나누어진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들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은 초기 재림성도들의 재림운동을 가리키며, 그리고 신랑이 와서 준비된 자들을 데리고 간 것은 1844년 하늘 지성소에 임하신 것을 가리킨다. 비유에서 준비된 성도들을 상징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마 25:10). 사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행해질 혼인예식에는 직접 참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 봉사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따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상징적으로 혼인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어린양의 혼인식은 1844년부터 시작된 조사심판이 끝나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때 이후의 모든 성도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 혼인식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처녀들에 속하는 것이다.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등뿐만 아니라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마 25:4)간 자들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22장에서 말한 혼인예복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소정결과 조사심판은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조사심판을 마치고 아버지로부터 나라와 왕권을 받는 것과 혼인예식도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성소정결, 조사심판, 죄의 도말, 나라와 왕권을 받음, 어린양의 혼인예식, 그리고 인치는 사업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 봉사에서 이루어지는 내용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늘 성소 첫째 칸에서 하시던 중보사업도 포함하여 그와 같은 지성소 사역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 25:10)고 한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이 닫혔다는 말은 첫째, 1844년 당시 예수님의 하늘 성소 첫째 칸 봉사를 마치시고 둘째 칸 봉사에 들어가신 걸 강조하는 말이다. 둘째, 하늘 지성소에서 조사심판이 끝나고 어린양의 혼인식이 마쳐진 후 은혜의 시기가 완전히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에서 나오시면 이 땅에 칠 재앙이 내릴 텐데 은혜의 문이 닫혔기 때문에 성도들은 중보자 없이 살아야한다.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약혼식을 치른 아내가 혼인예식을 위해 즉 신랑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 새 예루살렘 성이 준비된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신부가 자신을 위해 능동적으로 준비하듯이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셨다. 이 구절은 성경시대 동양의 결혼 예식 관습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 당시 신부를 선택하는데 주로 부모가 결정적으로 역할 하였다. 일단 신부가 결정되면 혼인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약혼식이 있었다. 이때에 신랑 측은 신부 측에 결혼 지참금(wedding dowry)을 지불했다. 약혼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엄숙한 언약이었다. 아직 두 사람이 한집에서 함께 살지는 않지만 결혼한 것으로 취급한다. 둘째, 신랑이 집을 마련하고 있는 동안 신부는 개인적 준비를 한다. 장에 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시집에 가져갈 물건도 챙긴다. 약혼식과 혼인식 사이의 기간은 형편에 따라 달랐다. 일반적으로 일 년이었지만(신 20:7 삿 14:8), 야곱은 칠 년(창 29:18-21), 이삭은 열흘간(창 24:50-67)이었다. 셋째, 결혼식은 보통 밤에 단순하게 거행되었다. 사모(紗帽)를 쓴 신랑이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을 동반하고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으로 갔다. 넷째, 신부는 화려한 옷과 자기 보석으로 단장한 후 얼굴에 면박을 드리우고(사 61:10 아 4:1, 3; 6:7) 여자 친구들을 동반하여(시 45:15) 신랑에게 나아갔다(창 24:67). 다섯째, 혼인식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면 신랑이 공중 앞에서 신부의 어깨에 그의 망토를 걸쳐준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여섯째, 신랑은 신부와 그녀의 여종들을 데리고 신부의 집에서 나와 큰 행렬을 지어 횃불을 켜들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혼인은 첫 날 밤을 치르면 완성되었다(창 29:23). 일곱째, 신랑의 집에서는 초대받은 손님들을 위하여 혼인잔치(피로연)를 베풀었다. 혼인잔치는 신랑의 집에서 주로 신랑의 부모가 담당했었고, 보통의 경우 일 주일간 계속되었다(삿 14:12). 그러나 몇 날 혹은 몇 주 동안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토빗 8:20; 10:7). 하객들은 여흥을 즐기고 신혼부부를 위해 연가(宴歌)를 부르며 축사를 하였다. 삼손은 이 기간 동안 내기도 하였다(삿 14:10-20). 첩을 위한 혼인잔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성경시대의 동양적 결혼 관습의 배경에서 그리스도의 혼인예식과 혼인잔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부르셨을 때 그것을 약혼식으로 언급했다. 그분은 말하기를 “내가 네게 장가들어(betroth, 약혼하다)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19)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초림은 그분의 혼인잔치에 데려갈 손님 즉 그분의 교회를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혼인 손님을 맞아 혼인잔치를 하고 그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였다. 지금은 아버지 집에 가서 그분의 백성의 처소 곧 새 예루살렘과 결혼하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다(요 14:1-3). 따라서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는 말은 하늘 새 예루살렘 성이 준비된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분은 하늘 지성소에 계시는 동안 재림 전 확인심판을 끝내면 아버지께 나아가 영광의 나라와 권세를 받으시고 그 수도 새 예루살렘을 받으실 것이다. 그걸 혼인식으로 비유했다. 지성소의 일을 마치면 이 세상에 강림하여 그분의 백성들을 혼인 만찬에 데려가실 것이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재림교회 주석은 이 구절을 신부인 새 예루살렘에 적용한다. 그에게는 문맥상으로 7절의 그 아내를 지칭하기 때문에 옳은 적용이다. 천사는 요한에게 “이리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21:9, 10)라 하였다. 이 세마포 옷은 음녀의 자주 빛과 붉은 빛 옷과 대조를 이룬다(17:4). 8절은 새 예루살렘이 마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처럼 비유한다. 새 예루살렘 성이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건 놀라운 표현이지만 요한은 이미 큰 성 음녀 바벨론도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다(18:16)고 묘사했다. 새 예루살렘 성의 모형인 지상의 성막도 그 뜰이 비싼 재료와 아름다운 세공으로 된 세마포 휘장으로 둘러싸였다(출 26:1-13). 예수님의 시신도 세마포로 싸였고, 그분이 재림하실 때 세마포 옷을 입고 오실 것이다(시대의 소망 739). 새 예루살렘 성은 종류와 질에 있어서 “강도의 굴혈”로 변질되었던(마 21:13) 지상의 예루살렘이나 큰 성 바벨론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빛나고 깨끗하다는 말은 그 성이 거룩한 성임을 암시하며 휘황찬란하고 영화로우며 정결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 빛나고 깨끗한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다(21:23). 요한은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21:18),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수정 같이 맑더라”(21:11)고 하였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천사들의 옷이고(15:6), 하늘의 군대(14절)와 이십사장로들의 의복이며(4:4),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의복인데(레 16:4), 마치 신부가 혼인식 때 입는 예복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을 아름답고 정결한 세마포 옷을 입고 단장한 걸로 비유했다. 요한은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고 하였다. 새 예루살렘이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은 정금으로 된 그 도성의 바깥에 벽옥으로 된 성곽이 둘러 있는 걸 시사한다(21:18). 그 성곽 기초석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다(21:18-21). 이것은 구원을 상징한다. 이사야는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사 26:1)고 예언하였다. 세마포 옷을 입는 건 애굽에서는 높은 직무의 표장 중의 하나였다(창 41:12). 그것은 내세에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거할 자격이 될 것이다.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3:4)하였다.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결국 신부에게 그 옷을 입힐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그 성을 준비하였음을 뜻한다(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645, 648).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단장된 것처럼 비유한다.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하나님 백성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옳은 행실 즉 세마포 옷을 입는 자는 그 성의 영구한 거민이 된다는 상징적인 묘사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 52:1을 인유(引喩)했다. 이사야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고 하였다. 그 도성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부정하지 않은 자가 들어오는 것임을 뜻한다. 옳은 행실의 헬라어 타 디카이오마타(ta. dikaiw,mata the righteous deeds)는 법령 혹은 옳은 행동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첫째, 법령으로 볼 때 칭의를 뜻한다. 둘째, 믿는 자들의 옳은 행동을 가리킨다(Mounce, Johnson, Ladd). 필자가 보기엔 두 가지 사실 모두 타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디카이오마타(dikaiw,mata the righteous deeds)가 둘 다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의”를 목적의 소유격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행하신 옳은 행실을 의미하고, 주격의 소유격으로 번역하면 성도들에 의해 행해진 옳은 행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가지 모두 다 타당하다. 그리스도의 피로 옷을 빨아 흰 옷이 되는 게 새 예루살렘에 살 수 있는 조건이다(7:14). 세마포 옷은 그리스도의 의이고 그 의가 성도들에게 입혀질 때 성도들의 의 즉 옳은 행실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옳은 행실은 그리스도의 의(義) 혹은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상징한다. 세마포 옷(옳은 행실)을 입는 건 그분의 의가 성도들의 의가 되는 걸 상징한다. 15:4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일”로 번역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성도들의 의”(the righteousness of saints)라 번역하였다. 물론 의로운 품성을 가진 자들은 의로운 행동이 생활의 열매로 나타난다. 의로운 행실은 구원받은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비유(마 22:1-14)에서 예복이 품성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그 의 때문에 승리하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기록할 것이다(3:1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성을 바랐다(히 11:10).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그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이다. 아무튼 새마포 옷과 옳은 행실이라는 구절을 새 예루살렘성의 질을 비유하는 상징적인 언어로 사용했다는 것은 난해하고 놀라운 사실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는 본서에 나오는 일곱 복 중 네 번째 복이다. 이사야 25:6-8이 실현되는 것이다. 원문에는 복이 있도다가 서두에 나와 복을 강조한다. 혼인잔치(to. dei/pnon tou/ ga,mou the supper of marriage)의 초청은 저녁 식사이다. 데이프논(dei/pnon supper)이 만찬(supper), 저녁식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2:37에 나오는 혼인잔치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이 혼인잔치에 대하여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라고 하셨다. 그분이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고 했을 때 하늘에서 있게 될 혼인잔치를 두고 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잔치에 대해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30)고 하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만찬에 참석할 자를 초청하신다(3:20). 성도들이 비록 지금은 고난과 고통을 받는다할지라도 종국에는 어린양의 혼인만찬에 초청을 받기 때문에 축복을 받는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눅 14:15).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신다”(22:17). 요한의 관심은 혼인잔치에 청함 받은 손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청함을 받은 자의 헬라어 케클레메노이(keklhme,noi having been called)의 시제는 수동태 완료분사로 직역하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초청을 받는 손님을 말하며 구원은 항상 그분의 부르심으로 시작되는 것을 상징한다(17:14 마 22:3 눅 14:17). 수동태는 이 청함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게 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이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손님들은 창세 이후로 모든 세대로부터 나온 자들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연회(宴會)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확실히 구속받을 성도들이다. 이 개념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타나 있다(마 22:1-14; 25:1-13).
예언의 신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요한이 10절에서 두 번이나 언급한 예수의 증언(marturi,a tou/ VIhsou/)이라는 문구는 문법상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에 대한 증언(목적격 속격)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고(RSV, NAB), 둘째는 예수로부터(from) 온 증언(주격적 속격)으로 그분이 주신 증언 즉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증언하시는 자기 계시이다(TEV). 문맥은 주격적 소유격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들에게 하셨던 증언을 가리킨다(22:20). 그들이 가진 증거(1:9; 6:9; 12:17)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증거 하셨고 그들이 다시 받아서 하였던 증거를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세 가지로 정의 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선지자가 본 계시적 선물을 뜻한다(1:2). 이 경우 요한이 본 것이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을 의미한다. 둘째, 복음 즉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가리킨다(1:9). 요한이 계시를 받기 전 밧모 섬에 정배되어 있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의 증거(증언)가 예언의 신(대언의 영, 예언의 영)이다(19:10). 세 가지 견해가 모두 다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예언의 신(to. pneu/ma th/j profhtei,aj)이란 표현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데, 첫째 예언의 선물을 주시는 성령을 뜻한다. 둘째 이 문구가 성령께서 주신 은사중의 하나인 예언을 의미한다. 셋째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의 증언이나 저술을 의미한다. 재림교회는 마지막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예언의 신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가 계시로 본 것(1:2)이나 혹은 선지자가 계시로 예언의 선물을 받아 기록한 저술들을 가리킨다. 대언의 영이란 선지자를 통해 말하는 성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오신 성령은(요 15:26) 선지자를 통해 예수를 증거한다. 천사가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신)이라고 한 것은 “말세에 성령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수를 증거하는 선지자의 기별은 예수의 증언이자 예언의 신이다. 예언의 신은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남은 백성의 표식들 가운데 하나이다(12:17). 예언은 성령의 특별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 선물을 받은 자를 선지자라 한다(고전 12:10 엡 4:11). 그러므로 종말에 예언을 선물로 받은 선지자가 있는 교회가 남은 교회이다(12:17). “남은 자손”은 12:6, 14에 언급한 1,260일의 예언이 지난 후 즉 1798년 이후에 존재하는 교회를 일컫는다. 따라서 그때 이후의 교회에 나타나는 예수의 증거 곧 예언의 신인 것이다. 재림교회는 엘렌 G. 화잇의 사역이 그것을 이루는 것이라 간주하고 그녀를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로 인정하며 그녀가 받은 계시적 선물을 예언의 신 혹은 예수의 증거라고 일컫는다. 예언의 영이라 했을 때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시는 영감된 기별을 말한다. 선지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말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하나님의 대변인이다. 그는 하나님의 기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아 전달하는 자로서(엡 3:2-6),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자이다. 참 선지자는 예언의 영을 소유하고 자기의 일상 언행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증거한다. 선지자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 하늘사역, 그리고 재림에 관한 모든 비밀을 푸는 것이다. 요한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마지막 선지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선지자의 사역이 각 시대에 걸쳐 계속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늘의 군대
계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4-21절은 아마겟돈 전쟁의 절정 장면이다. 14절은 하늘 군대의 수장(首長)이신 그리스도가 전사(戰士)로서 하늘 군대를 진두지휘하시며 오시는 장면이다. 위엄 있는 전투적인 왕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재림하신다. 이것은 역사의 아주 극적인 절정의 순간인 것이다. 18장의 현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주제가 였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15절)을 때가 이른 것이다(14:17-20).
대쟁투의 승리자 되실 그리스도를 호위하는 하늘 군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랐다. 군대들이란 누구인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천사들이다(Ladd, Rist, Barclay, Swete, Morris, Beasley-Murray). 둘째,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다(Johnson, Barker). 셋째, 천사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이다(Alford, Mounce, Plummer). 세 가지 견해 중 첫째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땅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살전 4:16-17).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천사의 수행(隨行)에 대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라고 말씀하셨다. 천사들은 구속받을 자들을 모으는 일을 할 것이다.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스테파노비치는 이들이 흰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천사들이 아닌 성도들로 보며 그들은 17:14에 나오는 “부르심을 입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요 16:12의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라고 했다. 타당성 없는 주장이다. 군대들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동반(同伴)하게 될 천만 천사의 무리들을 일컫는 게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리스도처럼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백마는 승리한 정복자를 상징한다. 천사들은 흰옷을 입었으나 그들의 대장은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실 것이다. 14절은 천사들이 마지막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승리에 동참하기 위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치르시는 전투장면이 15-16절에 나온다. 따르더라의 헬라어 시제는 미완료 직설법이다. 이 단어는 따르는 행동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 지속되는 현상을 뜻한다.
불 못의 심판
계 19:19-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19-21절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묘사하는 것인가? 아니면 천년기 후 삼림 때의 사건을 묘사하는 것인가?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요한은 11절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고 있다. 20:1부터 연속적으로 재림 때에 일어날 천년기 시작을 다루고 있다. 문맥의 연결을 통해 볼 때에 19:19-21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일어날 사건들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는 것의 언급으로 말미암아 천년기가 끝나고 둘째 부활 이후의 일을 언급하는 듯하여 혼란이 온다. 왜냐하면 20절에서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유황불에 던져지고 20:10에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때 거기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는 표현 때문이다. 그러나 천년기 시작과 끝에 불의 심판이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제임스 화잇은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으면 천년기 시작과 끝 양쪽에 다 불 못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였다.
19절은 17:14과 평행을 이룬다. 이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이라 불리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16:14)이다. 우두머리 짐승은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을 모은다. 사탄은 아마겟돈 전투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최후 일전을 치르기 위해 자기의 사자들을 모은다(16:13-14).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온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들이 기만에 의해 조직화되어 어린양을 대항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전투에서 세계적인 연합체를 완전히 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모인 모든 악의 세력은 완패하여 전멸당할 것이다. 바울은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8)고 하였다. 짐승의 군대들은 복수로 표현된 오합지졸이고 그리스도의 군대는 일치를 이룬 단수로 표현되었다.
주님 재림 때에 이 땅에서 악의 삼위일체(용, 바다짐승, 땅 짐승)를 이루어 교회를 외적으로 압제했던 정치 종교적 세력인 짐승(교황권)과 교회를 내적으로 타락시키고 괴롭혔던 거짓 선지자(미국)가 잡힐 것이다. 기만의 거대한 두 조직체,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속여 짐승의 표를 받게 하던 장본인들이다. 특히 거짓 선지자는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짐승의 우상을 만들게 하여 예배케 하던 자들이다. 짐승은 다니엘 7장의 짐승들의 속성을 가진 복합 짐승으로 정치 종교적 세력을 가진 교황권이다(13:1-10). 거짓 선지자는 사탄에게 속아 강신술의 이적을 행하면서 첫째 짐승과 협력하던 13장의 둘째 짐승이다(13:11-18).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그리스도 앞에서는 무기력하여 잡힐 것이다.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에서 둘(oi` du,o the two)이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가리킨다. 에녹과 엘리야가 산 채로 하늘로 승천하였듯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산 채로 유황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동사의 시제가 수동태로 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 던져질 걸 의미한다. 용은 천년 왕국이 지난 후에 제2차 아마겟돈 전쟁에서 유황 불 못에 던져지지만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재림 째 있을 제1차 아마겟돈 전쟁 후에 바로 유황불 못에 던져진다. 유황불 붙는 못(eivj th.n li,mnhn tou/ puro.j into the lake of fire)이란 유황이 타는 곳을 뜻하며, 거기에 던져지는 것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완전한 멸망을 뜻한다. 이 시점은 천년기가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이며 지구의 표면이 불바다가 될 것을 불 못으로 표현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0, 12)라고 하였다. 재림 때의 불 못은 일차적인 것이고 또 한 번의 불 못 곧 둘째 사망의 불 못이 있을 것이다(20:10, 14).
“그 나머지”에 포함되는 자는 모든 악인들 즉 왕들, 장군들, 장사들, 자유인들, 종들, 여러 계층의 모든 자들이다(18절). 재림 때에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6:16)고 절규하게 될 무리들이다(6:15). 짐승을 경배하는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다(13:8).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검에 의해 죽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10)고 하였다.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전투장에는 결국 악인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맹금(猛禽)들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죽은 악인들의 시체를 뜯어먹고 포식할 것이다(겔 39:17-20). 이것은 악의 세력의 완패와 그리스도의 완승을 의미한다. 우주적 쟁투가 완결될 것이다.
곡과 마곡의 전쟁
계 20:7-8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7-10절은 천년기 후에 있을 “곡과 마곡 전쟁” 즉 제2차 아마겟돈 전쟁을 묘사한다. 제1차는 천년기가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이다. 복 천년이 차면 둘째 부활 즉 하나님께서 모든 죽은 악인들을 일제히 부활시킬 것이다. 잠깐 놓임을 받은 사탄은 이들을 다시 모아 새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최후의 전쟁을 감행할 것이다. 이게 바로 제2차 아마겟돈 전쟁이다. 이 때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와 모든 악인들과 죄의 창시자인 마귀를 태워 영멸시킬 것이다. 이리하여 선악간의 대쟁투는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완벽한 승리인 것이다.
문맥을 자세히 보면 곡과 마곡을 땅의 사방 백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곡과 마곡은 둘째 부활에 참여한 모든 악인들을 상징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로 나타낸 모든 자들이다. 곡과 마곡 두 이름은 백성(타 에드네 ta. e;qnh the nations)과 동격이다. 백성의 원어는 3절의 만국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3절의 만국은 구속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나 8절의 백성은 땅의 모든 악인들을 의미한다. 곡과 마곡은 고대 이스라엘의 북방 적들의 이름들에서 채택되었다(겔 38:2). 곡은 인명이고 마곡은 지명이다. 곡은 마곡 땅의 왕이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북쪽에서 온다(겔 38:1). 에스겔 38-39장에서 곡과 마곡은 온 세계에 사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악인들을 상징한다. 싸움(to.n po,lemon the war)의 헬라어 폴레몬은 정관사를 가졌는데 특수한 전쟁 곧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킨다. 천년기 끝에 악인들이 부활하자 사탄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마지막 전투를 위해 광범위하게 활동하여 모든 하수인들을 자기 휘하에 집결시킬 것이다. 그 악한 무리에는 무훈(武勳)이 혁혁한 장군들을 비롯하여 이 지상에서 가장 호전적(好戰的)이던 무리들과 악한 정복자들로 떼를 이룰 것이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곡과 마곡은 둘째 부활에 참여한 모든 악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다.
영멸(지옥)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악인들의 배후세력인 악의 삼위일체의 총수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멸망당할 것이다. 이 불은 원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마 25:41)이다. 악의 궁극적 근원의 최후의 파멸을 뜻한다. 불과 유황 못이란 무엇인가? 9절에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모든 악인들을 태울 때 불바다로 변한 지구의 표면을 10절에서 상징적으로 불과 유황 못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다. 요한은 이미 재림 때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19:20)라 했다. 요한이 10절에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영멸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완전히 멸해진 것처럼 그들의 총수인 사탄도 완전히 없어져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다. 그것으로 죄가 근절되고 지구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져 영멸을 고할 것이다(14절). 하나님께서 사탄을 벌하시는 과정은 그분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탄을 벌하시는 건 4단계이다. 사탄이 반역하자 제1단계로 그를 땅으로 추방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의 본색을 완전히 드러내자 제2단계로 땅에 결박해버렸다. 그러나 어느 정도 활동을 묵인하신다. 그의 악의 행동이 절정에 달하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제3단계로 사탄을 무저갱에 결박된 채 아무 것도 못하도록 가두실 것이다. 천년기 끝에 잠간 놓아주니 사탄은 여태껏 하던 대로 다시 활동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제4단계로 하나님은 그를 결국 불로 영멸시켜버릴 것이다. 악의 완전한 근절이다. 필립 휴즈가 말했듯이, “이 마지막 심판에는 집행유예가 없다. 사망의 선고는 취소할 수 없다. 회복이 결코 없는 멸망이다.”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 구절은 완전한 소멸 곧 영멸(永滅)을 의미한다. 왜 상징적 표현이냐 하면 첫째, 세세토록(eivj tou.j aivw/naj tw/n aivw,nwn unto the ages of the ages)이란 표현은 원문을 직역하면 “시대들의 시대들”이다. 이 문구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고 근절이란 뜻의 관용어이다(참조 14:11 주석). 둘째, 마귀와 그의 사자들은 영물(靈物)이고 불은 물질적 세계에 속해있다. 불 못이 어떻게 비육체적 존재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셋째, 괴로움을 받으리라의 복수동사의 주어는 마귀,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이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상징적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불 못이란 실제적으로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 아니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마 10:28)는 완전한 멸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죄의 원조(元祖)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완전히 멸망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나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여기서 뿌리는 사탄이고 가지는 사탄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바로 죄의 자멸성을 말한다.
백보좌 심판
계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1-15절의 큰 흰 보좌의 심판은 1-10절을 다시 한 번 요약 확인해주는 계시이다. 천년기 동안 있을 악인들의 심판과 천년기 끝에 있을 둘째 부활과 악인들의 집행심판을 묘사한다. 주로 둘째 부활에서 일어난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흰 보좌 심판 장면이다. 요한이 11-15절을 논리적으로 연속되는 순서를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다. 11절은 포괄적인 묘사로서 조사 심판, 천년기 심판, 그리고 천년기 끝에 심판을 집행하실 때에 심판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백 보좌 위에 앉으신 분으로 소개하고 그 집행심판이 완결된(7-10절) 후의 새 하늘과 새 땅(21:1)을 시사한다. 13절은 둘째 부활을 묘사한다. 12절은 둘째 부활한 자들을 공개 심판하고 그 결과로 14-15절은 집행심판을 행하신다.
그 위에 앉으신 이의 신원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은 주로 아버지이시다(4:2, 8, 9; 5:1, 7, 13; 6:16; 7:10, 15; 19:4; 21:5). 둘째, 아들 하나님이시다(Beasley-Murray). 셋째, 두 분이 함께 재판하시는 광경이다. 성경에는 아버지와 아들 두 분 다 심판자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 오즈번(Grant R. Osborne)은 여기서 두 분 다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여기에서는 아들 하나님인 것 같다. 심판자인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성경언급을 보면, 바울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히 12:23),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고 하였다. 이처럼 아버지가 심판자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심판자의 권력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재판장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라 하셨다.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5:27)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행 10:42)로 선언했다. 바울은 심판자 그리스도에 대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크고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시는 분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승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겠다는 3:21의 예언이 성취된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악인들의 최후 심판이기 때문이다. 삼림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위에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대관식을 마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의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 도성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보좌를 보았으며(22:3) 그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로부터 “기록하라”는 말을 들었다(21:5). 마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실 것을 내다보았다(마 25:31 요 5:27).
성전을 보지 못함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는 구절에 대한 네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요한은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대쟁투가 끝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보와 심판의 장소로서 성소는 그 기능을 다 마쳤다. 사탄도 짐승도 없어졌고 죄와 사망도 끝났다. 더 이상의 속죄와 중재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둘째,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항상 그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임재가 곧 성전이다.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입방체(立方體)의 하늘 지성소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성전이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별한 곳인데 하늘 도성에서는 그런 장소가 따로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항상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심을 상징하는 건물이 필요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자신을 성전으로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요 2:19-21). 셋째, 그 도성 전체가 하나의 성전이기 때문에 별개의 성전이 필요 없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자체가 성전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아무런 장벽 없이 만나는 “하나님의 장막”(3절)이다. 그곳은 지성소처럼 장광고가 같은 정육면체의 형태이다(16, 왕상 6:20). 넷째,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분과 갈라놓는 휘장(揮帳)이 있는 가시적인 성전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다. 네 가지 견해가 모두 다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 도성 전체가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전인 게 분명하다.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구속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중보사역 없이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22:4) 직접 교제를 나눌 게 확실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자유롭게 교통하는 특권을 얻는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고전 13:12) 그때에는 시야를 가로막아 놓았던 희미한 휘장 없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것이다.”
성 밖의 생활
계 21:24-26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문맥적으로는 새 땅에 두 무리가 있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새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이다. 둘째, 예루살렘 성 바깥에 살고 있는 자들이다.
요한은 이사야 60:3, 11을 서로 결합하여 도성의 거민들을 묘사했다.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킨다. 만국(萬國)의 헬라어 타 에드네(ta. e;qnh the nations)는 이방나라들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7:9) 구속받을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5:9 사 60:3, 5). 그들은 도성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로 거닐 것이다. 땅의 왕들(oi` basilei/j th/j gh/j the kings of the earth)은 많은 사람들에게 권력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이방나라 사람들이다(사 60:11). 이들은 자기의 영광을 가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된 만국과 땅의 왕들은 구원받는 대상자들의 보편성(普遍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서 구속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인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늘 도성의 거민이 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말한,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3)는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열국과 왕들에 대해 말했다(사 2:2-4 56:6-7 렘 3:17 슥 8:21-13). 새 예루살렘은 이 모든 희망과 꿈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사 11:12).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5). 우리는 이방인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한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예레미야는 “그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렘 3:17)라 하였다.
낮에 도성의 문들을 결코 닫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안전함과 동시에 공개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이사야 60:11에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고 한 예언의 성취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적군이 없기 때문에 성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또한 성문을 닫지 아니한다는 건 구속받을 자들의 참된 자유의 생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기 때문에 그곳엔 밤이 없게 된다(21:23; 22:5). 요한은 밤을 강조하고 이사야는 낮을 강조했다. 밤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피곤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휴식을 해야 할 밤이 필요 없다. 언제나 신선하고 기분이 유쾌할 것이다. 둘째, 사람들은 어두움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영구한 광명 때문에 두려운 밤이 없을 것이다. 어두운 세상 곧 암흑의 시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밤도 낮과 같이 비친다. 요한은 밤이 없어진다고 두 번이나 언급하였다(21:25; 22:5).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는 24절의 반복이자 재 확증이다. 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사 60:11-13) 했다.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만국 즉 모든 구속받은 자들의 헌물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1)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는 원문에 “하나님의 그리고 어린양의”란 소유격으로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란 뜻이다. 마땅히 복수인데도 불구하고 보좌가 단수이기 때문에 단수 동일체이다(참조; 3절 주석).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그리스도가 아버지 보좌에 동석하여 보좌를 공유(3:21)하고 있는 걸 표현했다. 5:7-8에는 승천하신 그분께서 아버지의 보좌 오른 편에 왕과 대제사장으로 등극하여 그 보좌를 아버지와 공유하시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의 보좌가 아들의 보좌이고 아들의 보좌가 아버지의 보좌이기 때문에 단수 동일체이다. 둘째, 아버지의 보좌와는 구별된 “어린양의 보좌”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두 가지 견해 중 전자는 틀린 말이 아니고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문맥적으로 볼 때 여기서는 후자가 타당하다. “어린양의 보좌”의 문구가 성경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단독 보좌라는 점에서 참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 시점은 승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아 천년기 동안 악인들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할 걸 예언한 3:21이 성취된 후의 일인 게 틀림없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미 천년기 동안 악인들의 심판정을 묘사한 20:11과 새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을 나타낸 21:5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좌에 앉으신 이”로 나타내었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기점으로 하여 아버지께 영광의 나라를 받으시고 단독 보좌 즉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에 대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라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하였다. 누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예수님은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 하였다(눅 1:32-33). 그래서 요한은 새 하늘 새 땅의 정경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라 칭했고 3절에서도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라 하여 그리스도의 단독 보좌를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2)
계 22:3-4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복수여야 하지만 원문에는 단수의 동일체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수식을 받는 보좌의 드로노스는 단수이고 “있으리니”의 동사 에스타이도 3인칭단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종들에서 그는 제3인칭 대명사 남성 단수 소유격 아우투(auvtou/ of him)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동일체로 가리킨다. “그를 섬기며”에서 그를(아우토 auvtw/| to him)도 역시 동일체로 간주하는 단수 여격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각각 자기 보좌에 앉으실 것이지만 공동통치자로서 임재(臨在)하여 도성 안에서 직접 치리하실 것이며 구속받은 자들이 자발적으로 경배할 걸 가리키고 있다. 그 가운데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 도성 안에 임재할 걸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에 성령 하나님까지도 함께 하실 것이다(17절). 에스겔은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겔 43:7)고 예언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뜻인 임마누엘(마 1:23)로 불린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분이 구속받은 자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기뻐 노래 부르는 것에 관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고 하였다. 그의 종들은 구속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섬기며 라는 동사 라트류수신(λατρεύσουσιν will do service)은 자발적인 경배나 봉사를 뜻한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와 봉사하는 걸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마 4:10; 눅 2:37 히 8:5).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에서 그는 단수 동일체로 간주되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0, 23)고 하셨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구속받은 자들이 자유롭게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직접 대면하여 그들을 경배하며 섬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거하기 때문에 그분의 얼굴을 직접 볼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모세 같은 위대한 사람에게 거절되었던 특권이 구속받은 자들에게는 허락되어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여 볼 것이다. 다윗은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 하셨다. 요한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에 대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라 하였다.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는 것은 소유와 인정의 상징이다. 이 건 빌라델비아 교회에 약속하신 것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요한은 시온산에 서서 찬양하는 십사만 사천 인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14:1) 하였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품성을 나타낸다. 구속받을 자들이 저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는다는 건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걸 의미한다. 또한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받을 걸 뜻한다.
조사심판의 종결
계 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매우 극도로 엄숙한 선언인 이 구절은 은혜의 기간 끝에 하늘 중보 사업을 마치신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실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재림 전 확인 심판(조사 심판)을 끝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선포가 있을 때는 스웨터(H. B. Swete)가 “한편으로 회개 받을 기회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배교의 기회도 없을 때가 올 것이다”고 말한 변화나 회개가 불가능한 때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라는 어법은 악인들에게 구제불능을 선언하는 “이제는 끝이다”는 식의 진술이다. 자신의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어야 된다는 뜻이며, 은혜와 자비의 기간은 끝났으므로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그런 뜻이다. 두 번째의 은혜기간은 없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그대로라는 뜻의 에티(e;ti still)가 네 번이나 나온다. 마태복음 13:30에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고 하여 각 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록 은혜의 시기가 끝나는 정확한 때가 계시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때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음으로 마지막 지금 은혜의 때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7절부터 계속해서 문맥의 근저에 흐르고 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
계 22:14-15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요한이 하늘 도성에 입성할 수 있는 자와 못할 자의 범주를 제시하면서 언급한 이 구절은 계시록에 나오는 칠복 중 일곱 번째의 복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결과로 구원 얻는다는 요한의 생생한 표현이다. 두루마기의 헬라어 타스 스톨라이(ta.j stola.j the robes)는 늘어진 겉옷을 의미한다. 그것을 “빠는 자들”(호이 플루논테스 oi` πλύnontej the washing)은 제임스왕역(KJV)은 어떤 고대의 필사본들을 따라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사람들”(호이 포이운테스 타스 엔톨라스 아우투 oi` poiou/ntej ta.j evntola.j auvtou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이라 번역하였다. “자기 두루 마리를 빠는 자들”의 헬라어 본문(호이 플루논테스 타스 스톨라스 아우톤 oi` πλύnontej ta.j stola.j auvtw/n)과 비교해보면 두 번역의 구절들은 매우 흡사하여 필사(筆寫) 과정에 착오를 일으킬 만해 보인다. 필사자의 오청(誤聽)이든 오독(誤讀)이든 다행히 두 번역은 서로 배타적인 의미를 가진 게 아니기 때문에 두 해석이 모두 다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피로 옷을 빠는 것이 새 예루살렘에 살 수 있는 조건이다(7:14). 7:14은 부정과거를 사용하여 십자가 구속사역에 참여함을 나타냈고 여기서 “빠는”(플루논테스 oi` πλύnontej)은 현재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깨끗한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19:8). 이사야는 구원의 옷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하였다. 옷을 씻어 희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이다. 또한 계명을 지키는 문제에 관해서도 문맥적으로 모순되지 아니한다(12:17; 14:12 요 14:15, 21; 15:10 요일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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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