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에도 불구하고(1)
사도행전 15:30-41
지난 주일 오후에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유대인조차도 짐으로 남아 있는 모세 율법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들이 지키기 어려우니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지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따라서 이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린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복음 외에 다른 짐을 지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었으며, 복음의 자유를 재천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국(神國) 백성의 성품과 관련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을 위하여 신국적(神國的) 가치관에 따라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 그리고 ‘목매어 죽인 고기’와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 것’ 등 네 가지를 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덧붙여 편지에 담아서 수리아와 수리아 안디옥교회 그리고 길리기아 지방의 교회들과 남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실루아노라고도 부르는 실라와 바사바라고도 부르는 유다를 함께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들과 함께 안디옥교회에 왔습니다.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들에 대한 교회들의 반응
실라와 유다는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한 내용을 교회들에게 읽어주고 더불어 이방 교회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으니까 자유를 누리고 더욱더 열심히 주를 섬기라는 권면도 더해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수리아 안디옥교회는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31절).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과 예루살렘교회의 가르침이 일치하였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일치였기 때문에 더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가 파송한 유다와 실라 일행은 얼마 동안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면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도와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안디옥교회의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2절).
오늘 본문 15장 3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였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당시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사(恩賜)를 주셔서 교회를 권고할 자격을 받아 활동하는 선지자와 교사가 점차 생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계 여러 나라에 세워지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사람들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그러한 사람을 목사라고 부르든지 교사라고 부르든지 간에 세우셔서 당신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목사의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학교에서 학생을 받을 때도 단순히 경제 원리가 아닌 수용과 공급의 원칙을 파악해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한 해에도 수많은 목사가 배출되고 사역할 임지가 없는 무임 목사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많이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의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
오늘 우리 설교 본문 35절의 “가르치며 전파하였다”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은 양육과 전도를 병행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1에 의하면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었는데 많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이 참 복음인 것을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과 형제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로부터 확인받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적인 문제인 참 복음에 대한 갈등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한 문제가 해결되어 교회가 안정을 찾으니까 크게 부흥하게 되었고 거기에 맞게 사역자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거룩한 교제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점들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안식년을 보내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5장 36절에서 바나바에게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의 영적인 상태를 정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15장 36절의 “며칠 후에”라는 말은 ‘하루 이틀 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년 혹은 2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에 갔을 때가 대략 A.D. 50년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떠날 때가 A.D. 50년 말에서 51년 초쯤입니다. 아마도 51년 이른 봄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36절의 “며칠 후”는 1년 혹은 2년의 기간을 말하고, 또 이것은 제1차 세계 전도 여행을 마친 후부터 생각하면 약 5년 만입니다. 따라서 세계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약 5년이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서 형제들의 신앙을 정검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운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나온 형제들이 지난 5년 동안 복음 안에서 흔들림 없이 잘 세워져 가고 있는가가 궁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형제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고하여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굳건하게 서도록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와 같은 곳에서 나사렛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당한 그 날의 박해를 생각한다면 다시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곳에는 아직도 연약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떻게든지 도움을 주어서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거룩한 소원은 그의 생명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자기 생명과 바꿀 정도로 열정적인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거룩한 소원이 사도 바울에게 또다시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의 이런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제 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들어온 형제자매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세워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면 문제가 일어날 수 있지만, 항상 먼저 다가가고 주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해주고, 주님을 섬기며 사는데 필요한 것이 있는가를 살피고, 도울 수 있으면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먼저 다가가지 못한다’라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형제자매가 바르게 세워져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있는지 확인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설명해 주어서 흔들림이 없이 굳건하게 서 나가도록 사랑의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제 막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이 있을 수 있고, 사탄과 세상과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미혹을 받아서 넘어질 위험이 많이 있으므로 힘써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제 막 믿은 그리스도인의 수준과 상태를 잘 살피면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편에서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나가면 상대가 부담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확신하고 있지도 않은 것을 배웠다고 해서 앵무새처럼 옮기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이 깨달은 정도에서 진리를 나누고, 새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수준과 상태를 잘 살펴 가면서 접촉점을 잘 찾아서 거기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확신 가운데 있는 진리를 나누어야 합니다.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긴 가슴 아픈 일
사도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고 제안했을 때 사도 바나바도 사도 바울과 같은 거룩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가슴 아픈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 거룩한 두 사람 사이에 의견 충돌로 인하여 아주 심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툼의 원인은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에 누구를 데리고 가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인 요한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마가가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 구보로 섬에서 밤빌리아에 도착했을 때 위험에 직면하게 되자 전도 여행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그런 유약한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반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누가복음 9:62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런 사람하고는 이 엄중한 복음 사역과 더불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함께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비록 마가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잘못이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이 문제로 크게 다투었고 전도 팀을 각각 구성해서 다른 방향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요한 마가가 선교하는 일에 어려움이 따르자 중도에 뒤돌아 간 일을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이방인에 관한 관심이나 철저한 사명감으로 세계 전도 여행에 동참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는 예루살렘적이고 베드로적인 영향 아래서 자라 나온 사람이지 바울적이고 이방적인 사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적이고 베드로적이라는 것은 아직은 이방 세계에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가가 이런 의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마가의 성향(性向)이나 사고(思考)가 이방 선교에서 부닥칠 문제들을 놓고 볼 때는 잘 극복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성향과 사고방식 때문에 밤빌리아에서 어려움에 직면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 선교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방 선교에 대한 사명이 투철했기 때문에 고난과 박해에도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한 마가는 예루살렘적이고 베드로적인 성향 아래서 배우고 자랐기 때문에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서 아직은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방 선교에서 어려움이 닫치자 곧바로 뒤돌아서고 선교 일행을 떠나버리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 이방 선교는 자신들이 이고니온에서 당한 것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과 박해가 닥칠 때 사명감이 투철하지 않으면 또다시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서 반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함께 선교하는 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반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연약한 정신이나 소양을 가지고서는 이방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민족들과 다른 나라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순교의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점에 있어서 마가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연약한 형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마가를 무시하거나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제쳐버린 것이 아닙니다. 몇 년 후에는 사도 바울이 마가를 자기의 유익한 동역자로 인정하고 그를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1에서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마가를 ‘아예 이제 소용이 없다. 그러한 사람이 무엇을 하겠느냐 무가치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도 하나님의 복음 전도사역에 있어서 유익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전도 여행 때의 마가를 생각할 때는 아직은 하나님의 큰일, 하나님의 큰 경륜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으로서는 마가 요한을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 마가는 자신의 거처 때문에 사도 바울과 자기 외삼촌인 바나바가 심하게 다툰 일을 놓고 많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외삼촌인 바나바와 함께 선교 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느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자기 생질인 마가와 함께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떠난 기록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바나바를 도와서 하나님의 일에 더욱더 충성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이러한 소문이 사도 바울에게도 전하여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마가 요한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마가가 하나님의 복음 전도사역에 있어서 유익한 사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였고 동역자로서 사도 바울 자신을 믿고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불러주었던 바나바에 대해서 악한 감정을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그 후에 오랫동안 계속해서 복음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6)라고 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바나바를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바나바는 바울과 헤어졌지만 계속해서 복음 사역을 하였고 힘쓴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기와 의견이 충돌되거나 자기를 섭섭하게 한 사람을 아예 버려버리고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사랑의 교제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어느 때에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면, 지금 당장에서는 성숙한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를 더욱 견고하고 능력 있게 자라게 하여 주셔서 큰일을 담당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때에는 어떤 일을 함께하기 어려워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제는 그와 함께 계속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형제자매를 위하여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주고 오히려 그의 영혼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더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내하며 사랑하여야 합니다. 절대로 사랑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분명하게 진리에 비추어서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기 위하여 기도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골로새서 4:10을 보면 이후에 마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문안 인사를 할 때도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마가를 얼마나 귀하게 알고 아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출발하는 상황에서는 함께하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렸듯이 오늘 어떤 형제자매가 연약하다고 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소위 말해서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 같은 생각으로 교회를 이루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 이유로 비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적인 상황에서 볼 때 그 사람이 그런 연약한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은 그 사람에게 그러한 연약함이 있어서도 그럴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설교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세대주의적인 영향 아래에서 율법주의 혹은 규범주의로 나갔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예단(豫斷)을 하고 결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도 비록 지금은 연약한 점이 있을지라도 한 형제자매로 받아서 함께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게 된 사건에서 이런 사실 하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다음 주일 오후에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멘.
(2014. 6. 18 수요 예배)
(2023. 7. 9 주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