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산UBF 특강 제 15 강 메시지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말씀 / 야고보서 2:1-26
요절 /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말씀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선택적인 행함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선대해야 할 사람에게만 선을 베푸는 일이 있습니다. 둘째는 아예 행함이 없는 것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날 선별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상에게만 선을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혹은, 아예 실천도 행함도 개선도 없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야고보서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여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주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13)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차별한다’는 말의 기원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이라 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스펙을 중시합니다. 돈이 많은가 적은가 기준을 삼습니다. 나에게 잘해주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삼는 일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도 받으셨고 38년 병자도 받으셨습니다. 이방인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도 받아주셨고 많은 유대 백성들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서에서 지적하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차별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부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재물을 많이 맡겨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 특별한 신뢰를 받은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부의 편중, 부의 불균형이 심하였습니다. 소수에 불과한 부자들은 로마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이면서도 세금을 적게 냈습니다. 많은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자를 부러워하면서도 부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를 보는 심사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였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부자를 우대한 것이었습니다. 회당에 금가락지 끼고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이 들어왔을 때, 회당에 모인 신자들이 그를 우대한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가난 한 사람이 들어오자 그 사람에게 앉을 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앉으려면 발아래 바닥에 앉으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를 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차별의 근거는 악한 생각입니다. 차별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인데, 바탕에 있는 악한 생각, 마귀적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귀는 교만해진 천사입니다. 마귀의 특징은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한 마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제 마음대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생명을 이용하고자 할 뿐, 생명이 죽든지 말든지 인격이 다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를 위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이 차별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을 가려서 만나고 사람을 대할 때, 자기유익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높여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관심을 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시로 일관합니다. 차별의 바닥에는 악한 생각, 마귀의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 아니냐’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차별하는 것은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이미 올라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입니다. 차별은 마음이 매우 교만하고 악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결과물입니다.
대학 총장 대하는 것과 학생 대하는 것이 다르다면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고위직 VIP 대하는 것과 믿음의 동역자들 대하는 것이 다르다면 차별이 일상화 된 것입니다. 서울대 학생 대하는 것과 호서대 나사렛대 학생 대하는 것이 다르다면 차별하는 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어쩌다 방문하는 유명한 시니어 선교사님들 대하는 것과 센터 목자님들 대하는 것이 다르면 믿음 안에서도 차별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난한 자들 가운데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으며, 가난한 자들을 키우시고 높이셔서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주는 위대한 사도요 인류의 스승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된 70명의 야곱족속을 남자만 100만이 넘는 큰 민족을 이루셨으며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금과 은과 각종 보화를 가지고 나가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가난한 성도들이 더 많았고 가진 것 없는 많은 노예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며 모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왜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당시 부자들은 믿는 자들을 부당하게 법원에 고발하는 짓을 행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이름을 비방하며 복음역사를 훼방하는 짓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형제를 멸시하고 부자를 우대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을 또한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산다는 증거가 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가장 큰 율법, 가장 우선되는 율법이 무엇인가? 논쟁을 오래 벌였습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 여쭙자 예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은 모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됩니다. 차별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차별하면 율법이 차별하는 사람을 반드시 율법을 어긴자로 정죄할 것입니다. 차별은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지적 받으면 자기가 잘 한 것을 들이댑니다. 형제를 무시하여 상처 준 것을 지적하면, 내가 그 형제 밥도 사주고 잘 섬겨주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목자들이 양들에게 실수한 것을 지적하면 ‘내가 해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반응합니다. 율법의 기준은 지킨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지키지 않은 것을 따집니다.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음죄를 지었다면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간음 죄 빼고는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어겼다’가 되는 것입니다. 경영학의 한 분야에서는 ‘100-1=0’ 법칙이 있습니다. 백 번 잘하였어도 한 번 잘 못하면 모든 잘한 것이 없어진다는 법칙입니다. 기업과 고객과의 관계에서 이 법칙이 적용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는 심판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사람을 차별하고 선택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심판 받을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우리 눈으로 볼 때, 가장 가난하거나, 가장 인간조건이 부족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할 수도 있고 여의치 않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을 차별한 적이 없는지 잘 생각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단언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지극히 작은 한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 사람이 심판을 면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 만만해 보이는 주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총장님 대하듯 하는 것이 자기의 영혼을 위하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대통령 만날 때 하듯 하는 것이 심판을 면하는 길입니다. 모든 학생들을 대할 때, 서울대 학생, 하버드대 학생 대하듯 하는 것이 목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Ⅱ. 행함은 믿음을 온전하게(14-26).
14-16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가 기록된 시기를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부터 예루살렘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의 때로 봅니다.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참고로 기독교와 유대교는 예루살렘 멸망 후 얌네아 공회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완전히 분리 결별을 선언합니다. 오늘 말씀에 ‘회당’이 나옵니다. 아직 회당에 유대인 크리스천이 출입 가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당에 출입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회당을 함께 이용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율법준수 행위가 구원한다는 유대교인들과 믿음이 구원을 주신다는 기독교인들이 대립구도가 형성이 되는데, 이때 기독교인들은 모든 행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믿음이 최고다. 단정내리고 그 다음이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이 없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것은 마치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사람에게 ‘왜 밥을 안먹고 다니냐? 밥 좀 먹고 힘내라’ 말만 하고 아무것도 돕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배고프고 추운 사람에게 말만 딱하게 되었구나, 춥겠구나 하고 알아서 따뜻하게 해라 한다면 그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을 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믿을 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서 인증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증을 받아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 된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실천이 남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증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 하나님께 속한 자 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바로에게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입니까? 노예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예의 생각을 하고 노예가 하는 말을 하고 노예생활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광야 40년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해방의 은혜가 실체화가 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학부생들이 대학원에 들어가서 연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학원 소속이 되었으면 그때부터 석사로써 역량을 갖추기까지 박사로써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까지 연구자의 자세와 능력을 갖추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연구자로써의 실천적인 역량을 가져야 석사이고 박사인 것입니다. 양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대일 성경공부를 일주일에 한 시간 해주었다. 기도해주었다. 불러서 밥을 사주었다는 명분, 타이틀, 일대일 양과 목자라는 틀에 만족합니다. 일대일 성경공부가 감동력 있고 말씀이 역사하는 말씀 전달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여 체험과 확신 얻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일대일 말씀 전파가 이루어지면서 영적인 힘, 감동력, 설득력이 동반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보지도 않고 말씀에 대한 확신도 없이 꽹과리 소리를 내는 일대일을 하면, 그런 일대일은 양이 와서 참아주는 것이 됩니다. 양들이 목자를 인내해야 하는 일대일인 것입니다. 그런 일대일을 해놓고는 ‘내가 일대일 했다’ ‘나는 일대일 목자다’ 명분과 타이틀만 내세울 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이 없습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님이 한 분 있습니다. 이 목자님이 갈 곳 없는 대학 때 친구를 데려다가 방 얻어주고 아침 식사는 집으로 와서 하라고 해줍니다. 직장까지 잡아줍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직장까지 얻어주고 예배까지 초청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 한 것입니까? 문제는 거기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까지 구해주고 예배에 초청하기가지 한 것은 좋았는데, ‘저 사람이 원래는 대학졸업 때 차석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저모양이다)’ ‘저 사람이 전에 일본여자와 동거까지 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결혼도 못하고 나이만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다닌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반복적으로 이런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 사실을 그가 알았습니다. 이것을 안 그 사람은 악감정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직장까지 잡아준 사람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사라집니다. 고마운 마음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분노에 차서 공격을 시작합니다. 매우 강력하게 공격을 해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저 사람을 위해주었다. 내가 저 사람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직장까지 잡아주었다. 하였지만,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어렵게 되었지만 그를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고, 이제는 도움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의 자존심이 상할까 조심해주고, 조심해서 말하고 신중하게 대해주고 이런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행함이 뒤따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명분과 타이틀만 내세우다가 이런 행함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잘해주고 욕먹고’ 그렇게 되기 딱 좋은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무의미한 믿음, 무가치한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믿음에 걸맞는 행함, 실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것은 신명기 6: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아침저녁으로 고백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알고 믿고 있다는 것만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적인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은 신자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훨씬 더 잘 압니다. 귀신이 안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그래서 귀신 믿음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뭇별 환상을 보여주셨을 때 믿은 것을 꼽습니다(창15장).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쳤을 때, 산으로 끌고가서 불을 땔 나무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칼을 들어 내려치는 행함을 하였을 때, 하나님께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인정받았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는 실천을 통하여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행함를 통하여 믿음이 증명되었고,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을 통하여 그 믿음이 완성되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방민족의 기생으로 기록된 라합은 성경에 그 이름을 크게 남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합이 이렇게 인정받는 것은 그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에 살던 라합은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의 믿었고 그녀의 믿음은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그들을 무사히 탈출하게 돕는 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겨주는 실천을 보여준 라합과 그녀의 집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으며, 다윗왕의 조상이요 메시야의 조상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과 믿음은 영혼과 몸의 관계와 같습니다. 분리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사망을 선언하는 것은 ‘행함이 없어도 믿음을 잘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믿는 자들에게 많이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행하는 것은 수고가 따릅니다. 행하는 것에는 희생이 따르고 리스크가 동반됩니다.
우리가 누구와 밥을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식사는 교제입니다. 식사하면서 상대방의 배만 채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식사교제를 하면서 내가 그를 존중하고 있다는 뜻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식사하기 전과 식사한 후 관계가 좋아져야 합니다.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으면, 앉을 자리 좋은 자리로 내주고 함께 앉아서 집중해주어야 합니다. 내 집, 내 가족, 내 스타일, 내 생활을 자랑하려 하지 말고 나와 내 온 집이 당신을 환영하고 당신에게 집중하고 당신을 귀하게 여기며 내 온 집이 당신을 높이고 있다는 뜻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룬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앉았다하면 나는 이번에 이런 일을 했다, 나는 이랬다. 나는 이렇다. 나는 이것이 좋다. 나는, 나는, 나는... 이런 대화습관은 옛날 예수님 믿기 전 습관이 아닙니까?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 실체화되려면 이런 옛 습관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감을 쓰는 것도 목표가 있습니다. 소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이 주시는 방향을 찾고 그것을 영접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아닙니까? 소감 썼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감은 쓰는데, 성경말씀이 주는 메시지 찾는 것이 불분명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비추는 것이 나와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향을 영접하여 순종하는 프로세스가 없다면, 소감의 목표, 소감을 쓰는 유익은 없는 것입니다. 소감에 나 뭐했어요. 나 이랬어요, 자기 어필 신변잡기를 사람 들으라는 식의 감상문, 수필 쓰듯 하였다면 소감의 영적 유익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타이틀이 있다면 내용도 있어야 하고, 방향이 있으면 구체적인 진행이 있어야 합니다. 의도가 있다면 그것을 이루는 실행방안이 있어야 하고 희망사항이 있다면 실천하여 결과가 이어져야 합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믿음이 있다 하고 행함이 없는 것, 목자가 되었다 하고 옛 습관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 주님을 섬긴다 하고 자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 모두 가치를 상실하는 것들입니다. 믿음이 있으므로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목자가 되었으므로 예수님 제자가 되었으므로 제자다운 인내, 겸손의 생활이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영접하여 우리 모두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구체적인 실천과 행함으로 믿음을 완성하는 주의 종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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