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37강
말씀 / 누가복음 22:1-38절
요절 / 누가복음 22:20절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말씀의 배경은 ‘최후의 만찬’입니다.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입니다. 원근법, 비례, 감정의 표현, 합리성..., 미술사적 평가입니다. 배신할 제자가 있다는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을 배경으로 그렸습니다. 제자들 반응의 색깔이 저마다 다릅니다. 한가지 공통점은 예수님은 새 언약을 세우는 역사의 전환을 말씀하고 있는데, 제자들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은 누가 크냐의 문제에 갇혀 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의 가치가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더더욱 빛나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 빛으로 와 닿는 말씀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감사제목을 찾고 풍성한 마음을 갖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유월절이 다가오면 구원의 은혜를 붙들고 긍휼을 베풀기에 힘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2) 성령의 흐름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열두 사도중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3) 그로인해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겠다며 스스로 찾아온 것입니다.(4) ‘사탄이 들어갔다’라는 말씀은 굉장히 낯선, 흔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떠났습니다. 부자청년이 그리했고, 오병이어를 먹은 오천명이 밀물처럼 환호하며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비방하며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들어갔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과 복음역사에 치명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명인의 삶에 대한 깊은 상처와 회의를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든지 헌신과 수고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죽은 자처럼 무기력증에 빠지고 맙니다. 혹은 예수님 혹은 제자공동체의 가치를 흔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자의 배신을 막지 못한 스승, 동료 한 사람 지키지 못한 공동체는 과연 존재할 가치나 있기는 한건가?...’
사탄은 돈으로 유다를 유혹했습니다.(5) 다른 복음서를 보면, 액수가 은 삼십으로 노동자 반년치 월급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전의 유다였으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듣지 마자 화를 내었을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이 따위 돈에 스승을 팔라고 하는 거야!”, 그러나 지금은 받아들입니다. 어찌 그깟 돈에?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탄의 유혹이 그와 같습니다. 엄청난 대의명분으로 사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순간의 욕심 혹은 유혹을 통해 파고듭니다.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가정을 파괴해버리는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고, 한두 번 해외여행 갔다 오면 사라질 몇 푼의 뇌물에 선한 양심을 무너뜨리고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리스도의 길을 갑니다. 그것은 목자의 수고를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7-14절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유월절 만찬을 준비시킵니다. (7-9) 마치 스파이들이 비밀 접선하는 것처럼, 아주 은밀하게 장소를 준비하여 누구에게서도 방해받지 못하도록 준비합니다.(10-12)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보니, 예수님 말씀 그대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13) 예수님은 그렇게 은밀히 준비한 유월절 만찬에서 사도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14)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원하고 원하였노라’, 왜 이리 간절하게 원하신 것일까요?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반복하여 당신의 죽으심을 예고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만 6번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신적 능력과 인품을 가진 분이 왜 죽지?’,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탁월한 멘토 예수님, 불치병을 치료하는 명의 예수님, 인생의 전환을 가져오는 교육혁명가 예수님, 인권운동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대속을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들어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통해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십니다.
유월절 예식은 총 4잔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진행됩니다. 인도자는 ‘헌신의 잔’이라 불리는 첫째 잔을 들어 축사함으로 예식을 시작합니다. 잔을 돌린 후에 손을 씻고 쓴나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잔, ‘의문의 잔’을 들고 출애굽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 후 떡과 양고기를 찢어 나누고 침상에 기대에 먹습니다. 그 후 인도자는 셋째 잔, 곧 축복의 잔을 들고 시편 113,114편 찬양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잔, 기쁨의 잔을 들고 시편 115-118편을 찬송함으로써 예식을 끝맺습니다.
따라서 16-19절 말씀은 둘째 잔, 의문의 잔을 들어 축사하실 때의 말씀입니다.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완성하기까지’라는 의미입니다. 뒤집어 해석하면, 구약의 유월절은 아직 미완성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해마다 짐승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리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려는 교육의 의미도 있고 아울러 짐승양의 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사이든, 성전이든, 절기의 의식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절기마다 예식을 행하고 성전을 짓고 짐승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릴 때, 그것을 신앙의 완성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림자라는 표현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전도 그림자이며, 제사도 그림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실체들이 드러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구약시대 오랜 시간속에서 지켜왔던 유월절의 본래 의미도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고”,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당하실 고난이 제자들을 위한 고난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채찍에 맞고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예수님은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기념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향해 거짓말쟁이, 무능력자, 사기꾼이라고 비난할 때,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죽었다, 망했다. 끝났다’, 절망의 소리가 예루살렘을 가득 채울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몸을 찢은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의 희생을 기억할 때, 부모를 사랑하게 되고 좋은 부모가 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양들을 사랑합니다. 믿는 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지 않고 예수님의 축복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나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음으로 기억합니다. 어떤 이는 보혈 찬양을 통해 기억하고 어떤 이는 기도하는 손을 통해 기념합니다. 어떤 이는 극심한 고난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고난이 기억나고 빛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지 않으면 세상의 흐름과 유혹에 떠밀려 휩쓸려가고 맙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함으로써 하늘의 양식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죽음의 또다른 의미가 무엇입니까!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은 ‘새언약’을 말씀했습니다. ‘언약’이란 약속입니다. 인간의 삶은 수많은 약속위에 세워졌습니다. 도로 한가운데 중앙선을 그어놓고 우측 통행의 약속을 맺었기에 마주 오는 차들이 부딪히지 않습니다. 파란불에 건너가고 빨간불에 서자는 약속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과 차들이 혼란을 겪지 않고 질서가운데 오갑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신 것은 옛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식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데리고 오신 후에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으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지라”(출19:5,6) 계명을 주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명대로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뿌려 언약을 굳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계명을 준행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의 축복을 누리는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것을 상호언약 혹은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한쪽에서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 한 영원토록 유효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처럼 우상숭배하며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를 촉구했으나, 백성들은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성전을 무너뜨리셨고, 옛언약은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은 불완전한 인간, 죄성을 가진 인간을 대표합니다. 남산에 올라가면 한때 열쇠걸이 이벤트가 인기였습니다. 한때 사업이 될 정도로 인기였습니다. 연인들이 변하지 않는 사랑의 언약으로 열쇠를 걸어두는 것입니다. 요즘은 몸에 타투를 새긴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이니셜 혹은 특정 이미지를 새깁니다. 혹은 결혼식 패스하고 혼인신고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로만 하지 않고 확증하는 징표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새긴 타투를 지우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우려면 여러 번 반복시술이 필요하기에 새기는 것보다 비용도 많이 듭니다. 어느 동사무소 입구에는 ‘이혼 수속 때문에 오지 마십시오. 이혼 수속 업무 하지 않습니다.’, 안내문이 걸렸다고 합니다. 혼인 신고를 동사무소에서 했으니 이혼수속도 동사무소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였습니다. 인간의 언약가운데 연인들의 언약이 가장 뜨겁습니다. 그러한 언약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변질되고 깨집니다. 정치인들의 언약도 그러하고 수제자 베드로의 언약도 그러했습니다.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여종의 몇마디 말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은 그 점에서 옛 언약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쳤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인쳤습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이 체결한 언약이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체결한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요구를 100% 만족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 혹은 공로가 일체 필요 없습니다.
새 언약이 세워졌다는 것은 죄인들에게는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얼마 전 태국에서는 대마초 사고 파는 것이 합법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대마초 범법자가 그 나라에 가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의 언약과 거기의 언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효력이 그와 같습니다. 새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오직 그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의 살아남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느니라”, 새 언약은 죄인들에게 무한한 감동과 희망을 줍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믿기 전에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연약한 모습으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목자로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온전히 수고하고 헌신한 날들도 있지만, 하나님 보기에 부끄럽고 죄송스런 날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갔는데, 나는 작은 것 하나에 예민하고 인색합니다. 내 의로움의 근거가 선한 의지나 업적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동력은 결국 두려움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을 뒤돌아볼수록 정죄와 두려움의 소리에 갇혀버릴 것입니다.
새 언약은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둔 자리에 서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더더욱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나같은 자를 용서하여 주시고 나 같은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나같은 자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은혜와 긍휼을 찬송하게 합니다. 사가랴가 누가복음 처음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살리로다” 그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예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새 언약을 말씀하는 순간에도 유다는 배반의 손길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작정한 길을 가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불쌍히 여깁니다. 가룟 유다에게만 문제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23) 24절을 보면, 다른 제자들은 누가 크냐의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제자들 모두, 새 언약의 말씀이 다가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막연하고, 사람의 인정은 피부에 닿았습니다. “우리 중 누가 배신을 때리는 거지? 혹시 야고보, 너 아니야?... 아니, 날 뭘로 보고! 서열 1위인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 하니?... 아니, 누가 너더러 1위래? 넌 넘버3야... 야, 베드로, 너는 사탄이라고 책망을 들은 그때 이미 끝났어...”, ‘누가 크냐’, 이는 몇몇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세상의 문제입니다. ‘누가 더 대접받지? 누구 말이 더 힘이 있지?’, 힘을 가진 자에게 머리를 굽히고 은인 같지 않아도 은인이라며 아부합니다.(25) 그런 맛을 누리고 싶어 서열에 민감하고 자리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26)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위직 공무원이라고 해서 큰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젊은 자처럼 순종하고 배우는 사람,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인생들을 돕기 위해 경배 받을 자리에서 내려와서 섬기는 자리에 섰습니다.(27) 엉터리같은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가르치고 격려합니다. 시험중에 함께 한 자들이라 칭찬합니다.(28) 변함없는 지지, 변함없는 소망을 말씀하십니다.(29,30)
베드로 한 사람을 끝까지 돕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사탄은 밀 까부르듯 시몬과 제자들을 믿음에서 떨어뜨려 두려움과 불신의 세계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 두려움을 심어 세 번이나 부인하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베드로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32) 그의 처절한 실패를 뒤집는 소망을 심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는 앞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형장에도 가겠습니다’, 맹세까지 했으면서도(33) 닭이 세 번 울기도 전에 부인해 버립니다. 누가 봐도 수제자로서 자격 미달, 아니 악영향의 근원입니다.(34)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들을 돕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한 과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안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것만 기억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베드로의 실패는 연약한 자들을 돕는 은혜와 긍휼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변화에 대해 마음준비 시킵니다.(35) 지금까지 제자들은 전대와 배낭과 신발 없이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뒷 배경이 되었으며, 복음진리가 명쾌히 드러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전대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어렵고 배낭이나 검이 없으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박해의 시대가 오기 때문입니다.(36) 예수님은 흉악한 강도처럼 취급받아 처형당할 것이며, 제자들은 불순 세력으로 매도될 것입니다.(37) 38절을 보십시오. 그럴지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대로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빛과 어둠처럼 대조됩니다. 제자들은 반역과 두려움과 인간갈등에 빠져있는데,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새 언약을 세우시고 제자들을 돕고 격려하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하고 빛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각 사람가운데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