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잊힌 꿈을 찾아서
김기홍 시집
잊힌 꿈을 찾아서 … 김기홍 / 4
꿈을 찾고 꿈을 팔아서 떠나는 시인의 여정 … 강소이 / 6
석강 김기홍 시인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이재은 / 19
제1부, 봄 소나타
고향의 꿈 / 28
꽃봉오리 진선미 경연 / 29
봄 소나타 / 30
봄비로 오시는 님 / 31
새, 봄노래 / 32
안개비 / 33
연기 / 34
오월의 수채화 / 35
이 층 창가의 사유 / 36
잔디에 누워 / 37
참꽃의 핏빛 연가 / 38
진달래꽃 / 39
토요일 아침의 다짐 / 40
편지 봉투 / 41
푸른 오월의 자화상 / 42
제2부, 여름 호숫가에서
목이 타는 가뭄 / 44
서러운 노을 / 45
노을이 질 때면 / 46
비 갠 후 / 47
인생길 / 48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 49
소나기의 일성 / 50
참혹한 수재민 수용소 / 51
순수의 화신 연화 / 55
지금 산 아래 세상은 / 56
초승달 / 58
탑塔 / 59
판잣집 마을 정경 / 60
여름 호숫가에서 / 63
흐린 달밤에 사유 / 64
제3부, 가을은 가고 추억은 내리고
가을 나무의 비련 / 66
순응하는 인생 / 67
가을 뜰에서 희망을 본다 / 68
조엽凋葉의 슬픔 / 69
가을녘 서정 / 70
가을비는 내리고 / 71
가을은 가고 추억은 내리고 / 72
낙엽 / 73
조락의 슬픔 / 74
가을빛 사위는 호반 / 75
사색의 뜰 / 76
마지막 잎새 / 77
시골길 / 78
추억을 소환하는 파도 / 79
그대여! 가을이다 / 80
제4부, 겨울 열차는 달리고
해풍에 걸린 그녀의 환상 / 82
겨울 안개비 오는 날 / 84
연민에 침묵하는 나목裸木 / 85
나목裸木의 비련 / 86
흰 부호가 소곡처럼 내리네 / 87
끝장 달력에 돋는 희망 / 88
뿌리 내린 샘 / 89
겨울 열차는 달리고 / 90
향수 / 91
팽이 / 92
하얀 그리움 / 93
첫정으로 오는 함박눈 / 94
함박눈 / 96
제5부, 석강 돌 가람
고목枯木 / 98
꿈 / 99
나무의 사계절 / 100
아, 자유 대한민국이여 / 102
먼 훗날 / 103
모두 다 같이 노래를 / 104
마법의 바위 / 105
밤마다 찾는 쪽빛 하늘 / 106
별 / 107
무상한 사랑 / 108
기다리는 사랑 / 109
석강石江 돌 가람 / 110
인생 시험기 / 111
입맞춤 / 112
제6부, 영원을 꿈꾸는 소년
곡마단 추억 / 114
고백 / 115
묘지 / 116
미련 / 118
별실의 슬픈 이별 / 119
별 헤이는 소녀 / 120
빗속으로 가버린 여인 / 122
비는 내리고 그대는 떠나고 / 124
흩어지는 세월 / 125
잎새 / 126
외로운 회고의 밤 / 127
차창 미로 속 소녀 / 128
추억 속에 인물화 / 129
영원을 꿈꾸는 소년 /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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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개>
프로필
김기홍 시집
아호 : 석강
충북 영동군 출생
서울시 강서구 거주
청주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기아자동차(주)
해외 구매본부 이사 역임
기아인터트레이드(주) 영업이사 역임
대명공업(주) 관리담당 상무 역임
유통판매업 KM 상사 대표 역임
(사)문학그룹샘문 운영위원
(사)샘문학(구.샘터문학) 운영위원
(사)한용운문학 회원
(주)한국문학 회원
샘문시선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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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잊힌 꿈을 찾아서
흔들리는 화물차에서 눈을 뜨니 신작로 한쪽 공터에서 인부 몇 명이 장독, 책장, 책상 등 이삿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곳 충북 영동군의 한 산골 마을이 내 유년 시절 및 초등학교(한 학년당 30여 명, 전교생이 약 200여 명) 2학년까지의 생활 터전이었다. 한 마을 건너에는 조부모님, 백모님이 계시는 큰댁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말, 부친의 직장 이동에 따라 청주의 한 학교로 전학을 했다. 전교생 2,500명 이상 되는 큰 학교였다. 낯선 환경에도 불구하고 친구들도 바로 사귀고 곧, 적응했다.
4, 5학년이 되면서 친하게 지내던 몇 친구들이 서울로 전학을 가서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으나 이사 간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울을 동경하게 되었고 계속 연락하니 일기에 쓸 내용이 많아졌으며, 그 일기는 중·고등학교, 대학 때까지 거의 매일 쓰게 됐다.
중학교 때부터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그 시절 학생 종합 잡지인 <학원>을 접하게 되고 글쓰기에 재미를 느껴 문필가,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평일은 물론 일요일 공휴일에도 도서관에 들러 틈 날 때마다 문학 전집 등을 탐독하여 홀로 글을 쓰고 <학원> 잡지에 그 작품을 투고도 하였다. 투고한 시 작품 중 뽑혀 발표되거나 입선 외 가작으로 뽑힌 작품이 꽤 있었다. 많은 독서량과 매일 쓰는 일기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교 졸업 후 법정 계통의 대학 진학에 연이어 실패하고 현실에 밀려 상경계로 진로를 변경, 졸업 후 무역 부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며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 시대 현실은 여가를 내고 취미 생활을 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 현실에 적극, 적응하여 직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에 적극, 적응하여 성실하게 삶을 사는 것만이 잘사는 것이 아님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 늦었지만 어린 시절의 꿈을 돌아보고 그 시절(1963~1968) 꿈의 실현을 위해 비록 서툴지만 수많은 시간을 노력한 습작품들을 모아 시집을 꾸며서 세상에 내놓습니다.
도움을 주시고 지도편달을 해주신 샘문그룹 시인 이정록 교수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저를 응원해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출간의 기쁨을 함께합니다. 친구, 지인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석강 김 기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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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꿈을 찾고 꿈을 팔아서 떠나는 시인의 여정
- 강소이(시인, 수필가, 문학평론가)
1. 머리말
김기홍 시인의 시집 「잊힌 꿈을 찾아서」의 평설을 쓰기 위해 원고를 읽는 내내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가 생각났다. 어렵지 않은 쉬운 시어를 구사하면서도 놀라운 표현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잔잔한 서정이 조용하게 흐르는 서정성을 발견하면서, “시를 잘 쓰는 시인이구나. 시가 참 좋다”라는 감탄이 느껴져서 시집을 읽는 내내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이 시집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네 계절이 바뀌는 순서에 따라 시집이 구성되어 있다. 꽃 피는 봄의 정서와 5월에 대한 서정과 사유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초여름과 여름, 가을비 – 비에 대한 서정도 남달랐다. 낙엽 지는 가을에 대한 사유에는 인생철학과 달관의 경지가 느껴졌다. 눈 덮인 겨울에 대한 시가 여러 편 실려있는데, 눈의 이미지와 겨울, 인생, 철학의 연결이 놀라웠다. 시 전편에 흐르는 서정과 이미지의 잔치를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집 전체에 절절한 그리움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김기홍 시인의 「잊힌 꿈을 찾아서」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봄에 대한 서정과 사유 – 소생과 재생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2) 여름에 대한 서정과 사유 – 비
3) 가을에 대한 서정과 사유 - 인생철학과 달관의 경지
4) 겨울에 대한 서정과 사유 - 눈 덮인 겨울에 대한 단상
(1) 진달래꽃과 두견새에 대한 남다른 통찰
봄을 노래한 시 중에서 특히 <참꽃의 핏빛 연가>, <진달래꽃>, <오월의 수채화>, <푸른 오월의 자화상>이 돋보인다. 겨울은 만물이 얼어있는 동결(凍結)과 동면(冬眠)의 계절이다. 그런 겨울을 이겨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온다. 김기홍 시인이 봄을 소재로 쓴 여러 편의 시에는 봄의 정서 - 소생과 재생 그리고 진달래꽃과 두견새에 대한 남다른 통찰이 들어있다. 우선 5월에 대한 시부터 살펴보자.
오월 어느 날 오후
푸르고 높은 하늘
태양 아래 그림도 그린다
- 중략 -
어느덧 하얀 도화지 위에
푸르게 번져가는
오월의 하늘
먼, 바다
겨울 면 같은
수면에 비친
푸른 잔디 위의
나,
<오월의 수채화> 일부
위의 시를 보면, “오월 수채화” 제목답게 오월의 이미지를 수채화로 그림 그리듯이 그려내고 있다. “푸르고 높은 하늘/…. 푸른 호수 위에 비친/ 푸른 잔디와/ 잔디 위의 나,/ … 푸른 들과 흐르는 물/ ... 하얀 도화지 위에/ 푸르게 번져가는/ 오월의 하늘/ 먼, 바다/ … 푸른 잔디 위의/ 나”의 표현에서 보면 푸른색 이미지와 하얀색 이미지가 자주 나온다.
시각적 이미지로 5월의 녹음을 묘사하고 있다. <푸른 오월의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푸르고 높은/ 파란 하늘/ 파아란 슬픔/ 하얀 도화지/ 파아란 하늘/ 파아란 호수/ 짙푸르게 덧칠해진/ 자화상 도화지”라고 했다. 김기홍 시인은 봄의 한 가운데 있는 5월의 녹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나 보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5월을 푸른색과 하얀색 이미지로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물이 오른 “푸른 들과 흐르는 물”이 이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얼어붙은 땅, 꽁꽁 얼어붙은 강물이 아니다. 만물이 소생하여 온 들판이 푸른색으로 채색을 했고, 냇물과 강물은 흐른다. 자연의 흐름과 소생 - 순환이다. 멈추어 있는 것은 죽음. 종말이다. 그러나 생명은 곧 흐름이다. 혈액 순환이 원활한 생물은 생생하고 건강하다. 온몸에 피가 잘 흐른다. 왕성한 생명력이다. 들판의 푸른 풀들과 흐르는 물 – 생생하게 자연의 맥박이 뛰고 있다. 이것을 김기홍 시인은 투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시인 랭보가 추구하던 시인의 모습은 투시자다. 진정한 현실성과 접촉할 수 있는 기능들을 머릿속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시인이다. 현실과의 모습 너머에 숨겨진 다른 모습을 투시하는 게 시인의 시선이다.
랭보가 말한 대로 김기홍 시인은 5월의 들판과 물의 흐름을 노래하면서 “흐름”을 투시하고 있다. 흐름은 곧 생명의 소생과 순환 곧 원활한 박동을 의미한다. 더불어 위의 시를 읽으면서 랭보의 Sensation 시가 연상된다. “여름날 푸른 저녁 나는 들길을 걸어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몽상가가 되어 발끝으로 신선함을 느끼며/ 바람에 내 맨머리를 감기 우리라// 아무 말도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지만, 끝없는 사람만이 내 영혼에서 솟아나리라/ 나는 멀리멀리 가리라 보헤미안처럼/ 여인과 함께 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랭보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김기홍 시인의 시는 <잔디에 누워>도 있다.
멀리, 하늘 아래 산 위에 걸친 흰 구름
하늘은 마냥 푸르르다!
푸른 잔디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
솔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흰 구름에 겹쳐 보이는
뽀얀 얼굴
<잔디에 누워> 일부
「잊힌 꿈을 찾아서」 시집에서 <진달래꽃>과 <참꽃의 핏빛 연가>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시다. 진달래꽃을 흔히 봄의 전령사라고 부른다. 만물이 얼어있던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온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진달래꽃 몽우리. 몽우리가 벌면 화사하게 진분홍 꽃이 온 산을 덮는다.
어여쁜 꽃 잔치가 흐드러지게 열린다. 그런데 김기홍 시인은 진달래꽃을 “참꽃”이라고 했고, 꽃이 만개한 것을 “핏빛 연가”라고 시제詩題를 정했다. 진분홍빛 꽃을 어째서 핏빛이라는 전투적인 낱말로 표현했을까?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겨우내 쌓였던 눈은 녹아내리고
스치던 바람도 멎었습니다
두견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모르는 사이 새싹은 구슬픈 소리를 듣고
두터운 피륙을 들쑤시고 봉오리가 터졌습니다
목청이 트인 두견은
밤을 지새우며 울어서
토하는 피, 진달래꽃을 피웠습니다
이제 밤을 지새우며 울던
두견도 가버리고
진달래의 핏빛 노래도 그쳤습니다
그 후로 두견의 혼을 부르며
외로이 외로이
유곡에 서럽게 피어 있습니다
<참꽃의 핏빛 연가> 全文
“목청이 트인 두견은/ 밤을 지새우며 울어서/ 토하는 피, 진달래꽃을 피웠습니다” 진달래꽃이 핏빛인 이유가 여기가 있다. 두견이 피를 토해 물들인 꽃이기 때문이다. 촉나라의 두우杜宇 왕은 나라를 빼앗기고 원통하여 울다가 죽어 두견새가 되었다는 민담民譚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두견새는 밤새도록 목에서 피가 나도록 울어댄다. 두견새의 피가 진달래꽃에 물들어 핏빛이 난다는 설화(說話)다.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니 민담은 민담으로 이해하면 그만인 것이다. 해서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산홍에 비해 참된 꽃이라는 뜻으로 참꽃이라고도 한다.
이 시의 서두는 “겨우내 쌓였던 눈은 녹아내리고/ 스치던 바람도 멎었습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후로 두견의 혼을 부르며/ 외로이 외로이/ 유곡에 서럽게 피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진달래꽃이 계곡에 외로이 외로이 서럽게 피어 있다고 본 화자는 무엇을 소환하고 싶었던 것일까? 재생의 봄에 온산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분홍빛 축제를 “기쁨”의 정서로 보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사계절 중에 봄을 인간의 일생으로 환치하여 본다면, 봄은 탄생과 시작의 상징이다. 그런데 탄생과 시작의 봄꽃인 진달래를 “외로이” “서럽게”라는 정서로 환치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역사에 있어서 잃어버렸던 것들의 재구 또는 기억의 재현, 혹은 분단 시대, 4월 혁명 등을 환치하여 “진달래꽃”으로 소환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연애를 연상시키는 분홍빛 진달래를 “핏빛”이라는 전투적인 이미지로 환기시킨 것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의 장치 내지 아픈 기억을 씻김굿 하는 심정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꼬가비”라는 말이 있다. “꽃 갚음”이라는 뜻이다. 총각으로 죽은 무덤이나 처녀로 죽은 이들의 무덤에 진달래꽃(참꽃)을 쌓아서 원혼을 달래준다는 설화다. 억울한 혼에게 진달래꽃으로 갚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꽃의 의미망이다. 두견새가 피를 토해 물들였던 진달래꽃의 원천이기 때문이며 외롭고 서러운 정서를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더 깊게 나아간다면, 김기홍 시인은 참꽃의 핏빛 이미지를 통해서 재생의 봄 – 융합의 시대, 비젼과 화해의 재생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범상하지 않은 소재와 화두를 던지는 시라고 하겠다.
(2) 이 시집에서 다룬 비의 이미지
「잊힌 꿈을 찾아서」 시집에는 비를 소재로 쓴 시들이 여러 편이다. <봄비로 오시는 님>, <비 갠 후>, <소나기의 일성>, <비는 내리고 그대는 떠나고>에는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일상생활이 좀 불편하고 성가시게 마련이다. 하지만,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비를 보면서 우수에 젖기도 하고, 떠난 이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비 갠 후>에서는 비가 갠 후에 “푸른 가지의 잎사귀는/ 더욱 싱싱해 보인다”라고 했다. <소나기의 일성>에서는 “보슬비도 그쳤다/ 먼 하늘부터 햇빛이 비치고/ 하늘이 맑아지고 거리가 산뜻해졌다”라고 했다. 비 온 후에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심상을 표현했다. 그러나 다음 표현은 일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김기홍 시인만의 독창적인 발상을 볼 수 있다.
외로움에 잠 못 이루는
깜깜한 새벽
창문 열고 보니 차가운 공기 속
조용히 찾아온 당신
손 내밀어 맞이해 보니
따뜻한 당신,
내 안의 차디찬 길고 긴 외로움에
따뜻한 모닥불 피워
외로움에 젖은 눈물 따뜻이 닦아주며
그리움을 찾아 방황하는 마음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 주셨지요
이제 환희 밝아오는 아침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뿌리 깊이 내린 나무가 되어
촉촉한 당신의 사랑
흠뻑 머금으렵니다
<봄비로 오시는 님>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외롭다고 했다. 외로워서 잠 못 이룬다고 했다. 그런 화자에게 당신이 조용히 봄비가 되어 찾아온다. “손 내밀어 맞이해 보니, 따뜻한 당신”이다. 외로움에 젖은 눈물을 봄비가 닦아주며, 그리움을 찾아 방황하는 마음을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 준다고 했다. 사무치게 외로운 화자에게 찾아와서 따뜻한 위로를 주며, 방황하는 마음을 보듬어 준 봄비는 분명 화자에게 구원자다. 봄비의 촉촉한 사랑을 흠뻑 머금겠다고 했다. 이 시는 일반인들이 비에 대해서 가진 일반적인 정서와 사뭇 다르다.
봄비가 따뜻한 위로가 되고, 방황하는 이의 방황하는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봄비의 놀라운 위력이다.
오늘도 그날처럼 지루하고 하염없이
비가 내립니다
빗줄기 속에 떠올라 어른거리는 얼굴
그리워도 볼 수 없는 얼굴입니다
비 오는 날 우연히
나를 바라보던 당신의 모습에서
순수하기만 한 꽃을 보았는데
지금 빗줄기에 그대 꽃잎이 지고 있습니다
- 중략 -
지금도 창밖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당신은 저 멀리 멀어져가고 있답니다
<비는 내리고 그대는 떠나고> 일부
이 시는, 비 오는 날 떠난 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절절하게 그려진 연가戀歌다. “비 오는 날 우연히/ 나를 바라보던 당신의 모습에서/ 순수하기만 한 꽃을 보았는데/ 지금 빗줄기에 그대 꽃잎이 지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꽃이라고 했다. 비가 오고 그대 꽃잎이 지고 있다고 했다. 빗줄기에 꽃잎이 지는 것을 보면서, “지금도 창밖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당신은 저 멀리 멀어져가고 있답니다”라고 했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꽃 즉 당신이 멀어져간다고 상상해 내는 상상력의 증폭을 보인다. 아련한 서정이 느껴지는 시다.
(3) 가을을 소재로 한 시도 여러 편이다.
시 쓰기의 기법을 “말하기”와 “이미지 보여주기”로 양분兩分한다면, 김기홍 시인의 시는 대부분 “이미지 보여주기 기법”으로 쓰였다. 시에 조예가 깊고, 오랫동안 시 공부를 해 온 게 역력히 보인다.
가을은 낙엽이 지는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지는 낙엽을 보며 시인들은 슬픔과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겨울 지나 다시 봄에 새싹으로 돋아날 자연의 순환을 본다. 시인의 시선은 일반인의 시선과 다르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순응하는 인생>, <가을 나무의 비련>, <가을 뜰에서 희망을 본다>, <조엽의 슬픔>, <가을녘 서정>, <가을비는 내리고>, <가을은 가고 추억은 내리고>, <낙엽>, <조락의 슬픔>, <가을빛 사위는 호반>, <사색의 뜰>, <마지막 잎새>는 모두 가을을 소재로 한 시들 중에 매우 돋보이는 시다. 한결같이 가을에 대한 사유와 철학이 있고, 달관과 순응의 경지를 보인다. 가을의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쓸쓸함은 쓸쓸함을 초극하고 있다.
나뭇잎은 소슬한 가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져 날려 나무와 이별하지만
서운해하지 않는다
잎새마다 새겨진 지난날의 애환을 보며
추억 속에 빠지거나 무엇을 남기기보다는
나무가 살아서 더 알찬 생을 잇기 위해
자연의 흐름인 세월에 맡기어
주어진 생을 살고 떠나는 나뭇잎의
진실한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순응하는 인생> 일부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나무가 살아서 더 알찬 생을 잇기 위해// 자연의 흐름인 세월에 맡기어/ 주어진 생을 살고 떠나는 나뭇잎의/ 진실한 뒷모습을 바라봅니다”라고 했다.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로 말하면, 나무에 수분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가을 찬 바람에 우수수 낙엽이 지는 것은 나뭇잎의 종말이 아니다. 낙엽되어 땅에 떨어졌다가 더 알찬 생을 잇기 위해” 다시 봄에 새순으로 돋아난다. 죽음과 재생 – 원형(Archetype), 자연의 순환을 통찰하는 매우 훌륭한 시다. 이런 희망과 소생을 노래한 구절은 다음 시에서도 맥을 잇고 있다.
그는 빈 나무에 줄기와 뿌리에서
추운 겨울 지내려 잎사귀 떨군 가지에서
새봄에 물 올려 새 움을 틔우고
새싹이 파릇하게 피어날 희망을 품는다
<가을 나무의 비련> 일부
엉성히 엉클어진 줄기식물의 색 바랜 덤불,
나팔꽃 메꽃 덩굴장미 아이비,
줄기를 꺾고 걷어내며 푸르게 뻗어나가
내일의 희망을 품는다
<가을 뜰에서 희망을 본다> 일부
이제 추운 겨울을 지내고
생명이 움트는 다음 봄을 기약하고
서로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조락의 슬픔> 일부
(4) 잎이 지고 나서 나목이 된 나무에 대한 시들이다.
<연민에 침묵하는 나목>, <나목의 비련>, <나무의 사계절>, <함박눈>은 겨울에 대한 사유를 그려낸 시편들이다. <연민에 침묵하는 나목>, <나목의 비련>, <나무의 사계절>은 잎이 지고 나서 나목이 된 나무에 대한 시들이다.
<연민에 침묵하는 나목>에서 나목(裸木)은 “정령 외로운 새 한 마리/ 두견의 울음도 그치고/ 이제는 창가에 하늘을 우러러/ 서 있는 침묵”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목의 비련>에서는 “그래도 발가벗은 알몸인 채/ 내일을 기다리는 저는 외롭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쌓이고 쌓인 슬픔이 풀리는 날/ 저는 미소 지으며 웃어 보일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목이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무의 사계절>에서 겨울을 지나고 나온 봄의 새순으로의 재생再生과 소생蘇生하는 초록의 꿈을 희망으로 제시한다.
여기 꿈을 찾는 앙상한 가지에
잊혀진 나날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물오르는 앙상한 가지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희망이 움트는 계절
- 중략 -
잃어가는 꿈
앙상한 가지에 잊힌 사지의 초록의 꿈을 삼키며
<나무의 사계절> 일부
겨울 나뭇가지를 “앙상한 가지에 잊힌 사지”라고 했다. 그러나 “잃어가는 꿈”과 “초록의 꿈을 삼키며”라는 표현으로 희망과 재생, 소생을 꿈꾼다. 가을에 나뭇가지에 낙엽이 지는 조락을 보면서 절망과 죽음 - 종말을 보지만, 겨울 나뭇가지의 앙상한 나목은 끝이 아니다. 다시 올봄에 새순으로 소생할 꿈을 지니고 있기에 초록의 꿈을 삼키며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얀 그리움>, <함박눈>, <첫정으로 오는 함박눈>에서는 눈 덮인 순백의 겨울을 보면서 그대를 그리워한다. 여름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사랑하는 님이 내리는 것을 연상했듯이 겨울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당신이 내립니다”라고 연상해 낸다. 온 세상이 사랑하는 당신으로 덮였으니 “온 세상이 하얗게 순결하고 아름답습니다”로 형상화해낸다. 시인의 마음은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벅차오를 것이다.
깃털처럼 솜털처럼
바람 타고 당신이 내립니다
참 고운 당신이 하얀 눈이 되어
온 세상에 내리면
당신으로 나무, 언덕, 바위, 산과 들
온 세상이 하얗게 순결하고 아름답습니다
<함박눈> 일부
3. 맺는말
이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시집은 계절에 따른 정서를 노랬다. 그런데 계절과 상관없이 삶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그린 시들도 여러 편이다.
봄에 대한 서정과 사유(소생과 재생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여름에 대한 서정과 사유(비를 중심으로), 가을에 대한 서정과 사유(인생철학과 달관의 경지), 겨울에 대한 서정과 사유(나목과 눈 덮인 겨울에 대한 단상)를 살펴보았다. 시인이 현실에 비관하거나 절망하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빗속에서 떠난 님을 그리워하며, 봄비로 내리는 님과 눈으로 내리는 당신(님)을 연상해내며 세상을 순결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을에 지는 낙엽과 겨울 나목을 보면서도 “푸른 꿈”을 희망한다. 재생과 소생을 꿈꾸며 나목을 보면서도 새봄에 돋을 새순을 투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그래서 위대하다. 훌륭한 시집의 평설을 쓰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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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강 김기홍 시인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이재은(경기대 명예교수, 경제학박사, 전 경기대 부총장)
석강 김기홍 형이 시집을 출간한다며 초고를 보내왔다.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지만, 그 시절 시를 즐겼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많은 시 편들을 공책에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가 이제 희수(77세)를 바라보며 한 권의 시집으로 정리할 생각을 했다니 놀라웠다.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어릴 적 가졌던 문필가 시인의 꿈을 놓고 싶지 않은 삶의 열정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축하할 일이다. 이젠 시인으로 부르겠소.
우리는 한국전쟁 직전에 태어나 굴곡진 현대사의 물줄기를 따라 꿈을 꾸기도 했고, 꿈을 포기하거나 미루어야 했던 세대였다. 가난으로 학업 대신 생업의 장으로 내몰리기도 했던, 온전히 하나의 꿈을 추구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던 세대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6남매 중 셋째였던 시인도 마음껏 꿈을 꾸기에는 여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청춘은 문학에 심취하여 한 번쯤 문필가나 시인을 꿈꾸는 시절이다. ‘학원’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던 잡지였다. 동시였을까 아니면 시였을까? 아무튼 석강 형은 ‘학원’에 투고하여 게재되거나 가작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것은 시인을 꿈꾸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1960년대는 한국경제가 역동적으로 성장 변모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고교 시절 교정의 나무 그늘에서 삼삼오오 모여 미래의 꿈을 나누던 청춘들도 시대의 조류를 거스를 수 없었다. 문학 소년이었던 석강 형도 시인의 꿈을 접고 행정가가 되고 싶었다. 그 시절 꿈을 실현하는 첫 관문은 대학 진학이었다. 1960년대는 대학 진학율은 낮았지만, 대학의 입학정원이 동결되어 명문대학에의 입시 관문은 좁았다. 석강 형은 두 차례의 전기 입시에 실패했다. 결국 후기명문 성균관대에 진학하며 다시 행정가의 꿈을 접고 무역학과를 선택했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시대적 여건에 적응하는 선택이었으리라.
시인은 대학 시절 전공수업 이외에 동아리 활동으로 서예에 열중했다. 성균서도회 회장도 역임하고, 졸업개인전도 열만큼 일정한 성취를 얻었다. 어쩌면 문필가의 꿈을 살릴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졸업은 경제적 자립을 강제했고, 대기업인 기아자동차에 입사하여 무역 일선에서 뛰었고, 성실한 성격으로 중역까지 올랐다. 1990년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경제가 출렁이던 시대였다. 기아차도 부도 위기에서 구조조정에 내몰렸고, 시인도 자회사와 관계회사로 전출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삶을 갈무리하는 노년 생활로 접어들며, 지난날 삶에 치여 접었던 꿈을 곱씹었으리라. 소년 시절의 공책 속에 은행잎처럼 박제되어 있던 나의 청춘, 시편들을 살리고 싶었으리라. 나를 위해서 청춘의 연가를 불러보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자식과 손주들에게 아버지 할아버지도 꿈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김기홍 시인의 시단 등단과 첫시집 상제를 축하하고 성원하오. 남은 삶에선 시인으로 맛나게 살다가, 마지막 잎새 떨어지듯 어느 날 훨훨 떠나는 멋진 삶을 기대하겠소. 이따금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시담이나 나누면 우리 우정도 더 깊어지겠지요. 내게도 그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편들에 감사하며 노시인의 건안을 기원하오.